040화
“아. 에녹.”
“채이 님! 다치신 건 아니죠?”
“그런 거 아니야.”
손을 설레설레 내저은 채이가 에녹에게 둥글고 하얀 물체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이거 때문에 분수대가 부서지면서 굉음이 난 것 같은데, 누가 이걸 떨어트렸는지는 모르겠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아.”
“…음?”
둥근 물체를 가까이서 살피던 에녹이 별안간 묘한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그러는 걸까? 지켜보던 채이가 넌지시 물었다.
“왜 그래? 에녹.”
“음. 뭔가 알 같기도 해서….”
“알? 이게?”
다소 놀라운 이야기에 채이는 둥근 물체를 새삼스럽게 내려다봤다. 다만 에녹도 확실하진 않은지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일단 가주님과 레오나드 공자님께 알리러 다녀와야겠어요.”
“응. 그럼 부탁할게.”
“네. 음,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 줄 분이 필요하니 벤냑스 공자님은 저와 함께 가주시겠어요?”
“…저요?”
갑작스레 지목당한 벤냑스가 펄쩍 놀란다. 생각해 보니 벤을 레오와 만나게 해줄 기회이지 않은가. 눈을 반짝 빛낸 채이는 에녹의 말에 냉큼 맞장구쳤다.
“그래. 벤이 함께 다녀와요.”
“하지만….”
“자자. 어서요.”
벤냑스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채이가 재촉하니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벤냑스와 에녹이 메인 저택으로 향했고 그들을 지켜보던 페르난데는 한숨을 내뱉으며 근처 벤치에 앉았다.
“생각보다 별일 아니었군.”
“그러게.”
“어디까지나 그게 위험하지 않은 물체…라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 말이야.”
벤치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길쭉한 다리를 꼰 페르난데가 흘겨보며 덧붙였다. 채이도 물론 그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표면을 만져도 큰 문제가 없었고 갑자기 터지려는 낌새도 보이지 않았기에 적어도 지금은 안전하다 본다.
그런 생각을 하던 것도 잠시….
쩌저적.
이질적인 소음이 들려 둥근 물체를 돌아본 채이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당황해버렸다.
‘어?’
돌처럼 단단하던 둥근 물체의 표면에 갑자기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따로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그것은 마치 난생 동물의 새끼가 스스로 알의 껍데기를 까고 태어나는 모습과 유사했다.
‘설마 진짜 알이라고?’
채이가 긴장한 채 지켜보고 있는 동안, 거미줄 같은 균열은 표면 전체로 번졌다.
툭. 투둑.
작은 조각들이 먼저 떨어져 나가고 마침내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거기서… 조그만 무언가가 빼꼼 고개를 들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하얀 도마뱀 새끼인가?’
그 낯설면서도 어딘가 친숙한 모습에 채이가 의문을 품고 보는데 알에서 태어난 새끼가 자기 머리보다도 작은 날개를 짜작 펼친다. 힘이 좋은 듯 딱딱한 알의 옆부분도 찢겨 떨어졌다.
이윽고….
완연히 모습을 드러낸 그 생명체는 전체적으로 하얗고 파충류인 양 오돌토돌한 표피를 가졌다.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날개와 머리에 솟아난 두 개의 뿔이 눈에 띄었다. 세로 동공의 황금색 눈동자는 오묘한 매력을 느끼게 했다.
“꾸앙.”
그때 주둥이를 크게 벌린 녀석이 가냘픈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재빠른 속도로 튀어나와 채이의 얼굴에 찰싹 들러붙었다.
“앗…!”
쭈그려 앉아 있던 채이는 깜짝 놀란 나머지 엉덩방아를 찧고야 말았다. 채이의 등에 가려진 탓에, 상황을 제대로 지켜보지 못했던 페르난데는 그의 갑작스러운 비명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채이! 무슨 일인….”
채이 뒤로 다가간 페르난데가 말을 하다 멈췄다. 채이는 얼굴에 들러붙은 녀석을 겨우 떼어내고 돌아보았다.
“페르?”
페르난데는 경악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러는가 싶을 즈음 삿대질한 페르난데가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외쳤다.
“그, 그거… 드래곤이잖아!”
“뭐?”
그걸 듣고 놀라기는 채이도 마찬가지였다. 고등 이종족이라고 불리는 엘프와 드워프 그리고 드래곤. 그중 하나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당황한 채이는 제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도마뱀처럼 생긴 생명체는 이제 채이의 가슴께에 찰싹 붙은 채 기분이 좋은 듯 고르릉거리고 있었다.
“얘가… 해츨링이라고?”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인간과 많이 교류하고 인간에게 우호적인 드워프와 달리 드래곤과 엘프는 은둔 생활을 하며 인간에게도 우호적이지 않다고 들었는데… 이 해츨링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도 않았고 공격할 의사도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기분 좋은 듯 고르릉대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탓에 채이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아직 어리기 때문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가….
“채이 님?”
마침 에녹이 돌아왔는지 그의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에녹과 벤냑스, 로렌스와 레오나드가 함께 있었다. 우선 상황부터 빨리 확인하기 위해서 소수의 인원으로만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네 사람은 채이의 가슴께에 매달린 무언가를 발견하더니 금방 경악하고 말았다.
“헉… 그거 드래곤 아니에요?!”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겁니까?”
“아니에요, 로렌스 경! 저거 보세요. 아까 제가 말했던 그게 진짜 알이었나 봐요!”
깨져서 널브러져 있는 하얀 알껍데기를 발견한 에녹이 다급하게 외칠 때였다. 성큼 채이 쪽으로 다가간 레오나드가 해츨링을 직접 떼어내려고 했다. 그 순간 고르릉대고 있던 해츨링이 갑자기 이를 드러내더니 그르르거리는 낮고 공격적인 울음소리를 냈다. 레오나드의 손길이 닿기 전, 해츨링은 당장이라도 깨물 것처럼 입질했다.
“카악!”
깜짝 놀란 채이가 해츨링을 안은 채 뒤로 물러섰다. 레오나드에게 상처라도 낼까 봐 걱정이 되어, 본능적으로 나온 회피였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듯 레오나드의 뒤에서 지켜보던 세 사람도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페르난데가 손을 내젓고 말했다.
“괜히 자극하지 마. 채이가 더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그에 비명을 질렀던 세 사람이 바로 입을 다문다. 레오나드도 불만스러워 보였으나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단 걸 아는지 손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정체 모를 물체에 대해 알리려고 갔다가 돌아온 에녹과 벤냑스, 이야기를 듣고 함께 찾아왔던 로렌스와 레오나드, 채이와 페르난데까지 합친 총 여섯 명의 시선이 단 하나의 생명체에게 향했다. 정확히 말하면 채이 품에 안겨서 옷자락을 마구 물어뜯고 있는 그것에게 말이다.
“걱정했는데… 그래도 채이 님에게는 특별히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 것 같군요.”
“음.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잘 따르는 것처럼도 보이는데… 저의 착각인 걸까요?”
로렌스와 에녹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가만히 해츨링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던 레오나드가 입을 열었다.
“채이. 혹시, 이 해츨링이 태어나자마자 처음으로 본 사람이 채이였어?”
그 질문에 당시의 상황을 되새겨 본 채이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긍정했다.
“그랬을 거야. 페르는 내 등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을 거고… 알껍데기를 깨고 나올 때, 내가 제일 가까이에 있었거든.”
“역시. 그랬던 거구나.”
레오나드가 납득한 듯 답했다. 뒤이어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이 녀석은 지금 채이를 자기 부모라고 생각하는 듯해. 드래곤들은 똑똑해서 인식의 변화도 금방 오겠지만… 적어도 당장은 채이에게 위험이 되진 않을 거야.”
당장 채이에게 위험하지는 않다. 그 말을 듣고서야 일행들도 하나둘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이 해츨링 녀석이 채이에게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기에 다들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게 채이를 ‘부모’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부모인가….’
채이는 제 품에 안겨서 옷자락을 우물거리며 장난치는 해츨링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는 동안 일행들은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드래곤의 알이 나타난 걸까요? 드래곤들의 주요 서식지는 이 근처에 없을 텐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음… 아. 혹시 타크라가 알을 들고 가다가 떨군 건 아닐까요? 분수대가 부서질 정도의 충격이 있었다는 거는 위에서 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거잖아요.”
벤냑스의 추측은 나름 일리 있는 말이었는지 듣고 있던 로렌스와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겠네요. 타크라가 주로 활동할 시기이긴 하죠. 몇백 년에 한 번쯤 나올 대단한 우연이 겹쳤다고 생각한다면….”
“음. 누군가가 저택 내로 침범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면 그리 생각해야만 앞뒤가 맞겠어요.”
그리고 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타크라?”
그런 채이를 위해 로렌스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아. 타크라라고 하는, 조류 형태의 마물이 있습니다. 이 근처 숲에서도 서식하는 마물인데 그 녀석이 다른 종족의 알을 주식으로 먹거든요. 특히 드래곤의 알은 크기도 크고 영양가가 높기 때문에 자주 훔치죠.”
한마디로 드래곤의 천적 아닌 천적이란 소리다. 드래곤에게도 그런 게 있다니. 신기했다.
“물론 훔치려다가 들켜서 어미에게 살해당하거나 알에서 태어나버린 해츨링에게 역으로 당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요.”
“어쨌든. 타크라가 알을 들고 날아가다가 실수로 떨궜는데 그게 하필이면 랭커스터 저택의 분수대 위였고 드래곤의 알이었다… 라고 생각해 본 거예요.”
에녹이 로렌스의 말을 보충했다. 확실히 그게 사실이라면 엄청난 우연이기는 하리라. 물론 저택으로 침범한 이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가장 현실적인 가정이 되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꾸아앙!”
그때였다.
얌전하게 잘 안겨 있던 해츨링이 돌연 소리를 지르며 채이의 가슴께를 툭툭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