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화
“…채이? 왜 그래?”
그때 너무 조용한 채이의 반응에 슬쩍 고개를 든 레오나드가 당혹감에 젖은 채이의 얼굴을 보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제야 다급히 정신을 차린 채이는 혹여 레오나드가 걱정할까 싶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러고는 더 의문을 가지기 전에 대화의 주제를 조금 전의 것으로 되돌려 답했다.
“전에도 내가 말했지. 넌 이미 나한테 있어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 네가 원한다면 나는 계속 네 옆에 있을게.”
답지 않게 빨빨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는 채이의 모습. 레오나드는 그런 채이의 속내를 꿰뚫어 보려는 듯 빤히 바라보았다. 그건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더 의식하게 되는 시선이었다.
결국 채이는 어색하게 눈을 굴려 레오나드의 시선을 먼저 피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토록 안절부절못하는 스스로가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저번에도 이랬던 거 같은데….’
심중이 차츰 진정될 즈음 고개를 들었다가 아직도 쳐다보고 있던 레오나드와 눈이 마주쳤다. 채이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그를 흘겼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안 쳐다봤는데.”
그제야 뻔뻔히 시선을 거둔 레오나드가 잠시 멈추었던 식사를 재개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채이도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식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레오나드는 식사가 끝난 후 평소처럼 채이와 수다를 떨다가 밤늦게 돌아갔다. 채이는 그날 밤, 일찍 침대에 누워서 곰곰이 상념에 잠겼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어느 순간 레오나드와 시선을 마주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오는데, 그럴 때면 심장이 갑자기 크게 뛰거나 열감이 느껴지거나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한 증상이 찾아온 게 지금까지 대략 세 번 정도 되던가.
분명한 건 최근 갑자기 시작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증상들이 찾아오는 상황의 공통점을 굳이 찾자면 레오나드의 존재였다. 주로 채이가 레오나드와 함께 있을 때 그러한 증상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혹시 페로몬의 영향인가?’
하지만 그렇게 가정하는 것도 사실 이상한 일이었다. 레오나드는 채이와 만날 때면 페로몬을 항시 잘 갈무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압적인 자신의 페로몬이 나쁜 영향을 미칠까 봐 늘 조심했고. 채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거기다 레오나드와 함께 있을 때마다 늘 그런 증상이 나타난 건 또 아니라서 콕 집어 레오나드가 원인이라고 정의하기엔 아직 애매한 상태였다.
‘…설마 싶지만.’
슬며시 짐작되는 구석이 생긴 채이의 미간이 좁아졌다. 도무지 믿기지 않지만 솔직히 이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부정맥이 생긴 건가?’
채이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했다.
‘흡연도 안 하고, 술도 거의 안 마시고, 스트레스 받는 거 없고. 과도한 운동도 하지 않았는데. 왜 내게 부정맥이….’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일이다.
물론 가벼운 부정맥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들 하지만 외상을 입어 생기는 문제 이외엔 몸에 아무 문제 없고 항상 건강했던 채이이기에 그 사실이 제법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정말 가벼운 부정맥일 뿐인지, 치료가 필요한 병이 있는 것인지도 아직은 확실하지 않은 상태였다.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순 없었다.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하여 다음 날.
푹 자고 일어난 채이가 아침마다 했던 산책도 포기하고 티 타임 테이블에 홀로 앉아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앗. 채이 님!”
“뭐야. 벌써 나와 있었어?”
마침 채이를 찾아온 벤냑스와 페르난데가 당연하다는 듯 티 타임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채이의 심각한 얼굴을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한 페르난데는 뻔뻔하게 자신을 따라온 벤냑스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넌 대체 언제 집에 돌아갈 거냐?”
그에 기가 죽은 벤냑스였지만 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우러난 용기로 꿋꿋하게 받아쳤다.
“그러는 페르난데 황자님은 저보다 더 오래 머물고 있잖아요? 달리 할 일은 없으세요?”
“어쭈. 이거 봐라….”
따박따박 받아치는 벤냑스의 작태에 페르난데가 눈썹을 휜 것도 잠시. 오늘따라 너무 조용한 채이가 이상해서 그 얼굴을 들여다본 페르난데는 당황한 듯이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왜 그래? 오늘 표정이 안 좋은데.”
“채이 님…? 어디 아프신가요?”
그제야 상념에서 빠져나온 채이가 너무 가까운 페르난데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냈다. 페르난데가 답지 않게 너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어 머쓱해진 탓도 있었다. 평소에 안 그럴 것 같은 녀석이 그러니까 낯간지럽지 않은가.
“악! 씨, 갑자기 뭐야!”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하지 마.”
“그럼 말로 하든가….”
페르난데는 “걱정해서 오히려 손해 봤다.”며 구시렁댔다. 채이는 그 모습이 우스워서 피식 웃고 말았다. 심각하던 기분도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일단 조금만 더 지켜보자.’
괜히 별거 아닌데 주치의까지 불러서 레오나드의 걱정을 사게 될까 봐 걱정이기도 했고. 만약 심각한 문제였을 경우… 이 세계의 의료 기술로 치료가 가능한 병인지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두렵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또 한 번 그런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진 지켜보자’고 스스로 합의했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받아들이려고 하는, 채이 나름의 준비 기간이었다. 곧 상념을 털어낸 채이가 페르난데와 벤냑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 아침은 먹고 온 거야?”
“난 조금.”
“아. 전 아직이에요.”
“그래? 그럼….”
채이가 에녹에게 부탁해 식사 대신으로도 먹을 수 있는 디저트 같은 걸 챙겨 먹자고 말하려 했다. 그 순간.
콰앙!
별안간 섬뜩한 굉음이 들려왔다.
“……!”
깜짝 놀란 세 사람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소리가 울려 퍼진 탓에 굉음이 정확히 어디서 들린 건진 알 수 없었으나… 저택 앞마당 중심에 조성되어 있는 작은 분수 공원. 그곳에서 들려온 걸로 추측된다.
입을 다문 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세 사람이 한차례 서로를 눈짓했다. 이내 채이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금한 것도 궁금한 거지만 암살자의 습격이 얼마 전에 있었다 보니 모르는 척 넘어가기에는 어려웠다.
“가보려고?”
“위험해요, 채이 님. 차라리 컴베스트 공작님을 불러서….”
채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는 늦는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는 것도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메인 저택은 오닉스 저택보다 뒤쪽에 있기도 하고 기사를 동원하는 등 준비를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대처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여기서 태평하게 수다나 떨면서 기다린단 말인가. 적어도 그건 채이의 적성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채이는 다행히 몸을 쓰는 일에 자신이 있었으며 본인 스스로 생각하기에 무모한 짓은 아닐 거라 판단하기도 했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아니. 같이 가자.”
“그, 그럼 저도 갈래요!”
채이가 뭐라 하든 따라갈 생각인지 페르난데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벤냑스까지 나섰다. 난감했지만 차라리 같이 있는 편이 더 안전할 수도 있겠다 싶어, 채이는 결국 두 사람과 함께 가기로 했다.
저벅….
세 사람은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원에 도착하니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있는 분수대가 보였다. 이게 만약 사람의 짓이라면 범인은 최소 알파일 게 분명했다.
페르난데와 벤냑스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경계하며 돌아보았다. 근처에서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기척을 잘 숨기는 존재가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주의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채이는 분수대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다가, 문득 물이 질질 새고 있는 분수대 안쪽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음?’
그건 알처럼 둥근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며 크기가 크고 표면은 하얀색이었다.
‘…저게 뭐지?’
채이는 조금 더 고개를 내밀어서 그것을 관찰했다. 이제 보니 ‘그것’이 놓여 있는 바닥에서부터 균열이 일어나 있었다. 그럼 분수대가 부서진 원인과 아까 전 굉음은 저 둥근 물체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 판단한 채이는 둥근 물체를 분수대 밖으로 끄집어냈다. 생각보다 훨씬 무겁다. 그리고 둥근 물체의 표면은 엠보싱 처리를 한 것처럼 일정한 돋을무늬가 있었다.
“응? 뭐야? 그거.”
“계란처럼 생긴 돌…일까요?”
채이 등 뒤로 다가간 페르난데와 벤냑스가 둥근 물체를 보고 한마디씩 의문을 꺼냈다. 채이는 잠시 침음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어디서… 누가 이걸?’
누군가가 얌전히 가져다 놓은 것만으로 그런 굉음과 파괴가 일어났을 리는 없으니 분수대 안쪽으로 일부러 던졌거나 위에서부터 떨어진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슨 목적으로 이걸 분수대에 떨군 건지. 어디서 이런 걸 가져온 건지. 의문점투성이다. 그야말로 미스터리였다. 그래도….
‘별일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인가.’
누군가가 어떤 이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라기에는 다소 뜬금없으니.
“무슨 일이세요!”
그때 마침 에녹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굉음을 듣고 근처를 살피다가 여기까지 내려온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