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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38화 (38/105)

038화

“대화요?”

“예. 언젠가 한 번쯤 당신하곤 대화해보고 싶었거든요. 하고 싶었던 말도 있고.”

“…알겠습니다.”

남아도는 게 시간인 채이는 여기서 좀 더 시간을 보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도 궁금했고 말이다. 채이의 승낙에 고개를 끄덕인 오스카가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럼 좀 걸으면서 대화하지요.”

채이는 잠자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내 저택 밖으로 나간 오스카가 조금씩 채이와 보폭을 맞췄다. 키가 굉장히 큰 여인이라 178cm로 그리 작지 않은 채이도 살짝 올려다보아야 했다.

‘페르하고 키가 비슷한 거 같네.’

아마 180cm쯤은 될 것이다. 델리온과 베넷도 키가 크더니만. 이 집안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키가 큰 모양이었다. 레오도 어릴 때는 작았지만 결국 폭풍 성장했었지…. 두 사람은 말없이 걸어 분수대가 보이는 위치까지 내려갔다. 한없이 길어지는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질 즈음, 채이가 넌지시 눈을 돌렸다.

오스카는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듯 보였다. 하여 채이가 먼저 운을 떼려던 찰나. 마침 고개를 돌렸던 오스카와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다.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군요.”

서두를 들은 채이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시 생각에 빠진 오스카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발현이 늦은 레오나드가 실패자로 낙인찍혀서 가문으로부터 방출당했던 당시. 바이올렛은 아무것도 모르는 네 살이었고 할러드는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

“그래서 그 둘은 레오나드가 왜 그리 가족들을 냉대하는지 몰라요. 그냥 무관심한 형제한테 관심받고 싶은 어린애들일 뿐이죠.”

“…….”

“그래서 더 순수하게, 적극적인 태도로 레오나드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더군요. 관심받을 방법을 찾기 위해 당신을 찾아갈 정도로.”

오스카는 자조하듯 슬쩍 웃었다. 어쩐지 후회하고 있는 듯하다.

적어도 채이가 느끼기는 그랬다.

“이렇든 저렇든 동생들이 당신에게 민폐를 끼친 것 같아서요. 그 점에 대해서는 우선 제가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뇨. 그건 괜찮습니다. 저도 그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재미있었고요.”

그에 채이를 돌아본 오스카가 한 번 더 짧은 웃음을 짓는다. 그러고는 언뜻 무심해 보이는 눈으로 허공을 짚었다. 그 눈은, 과거의 어느 한때를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습니다.”

“…저는 딱히 한 게 없는걸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오스카는 고개를 내저었다.

“레오나드가 다시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은 아직도 선명하게 생각납니다. 그때는 지금과 다르게 분위기가 정말로 좋지 않았거든요.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흉흉해서.”

채이는 가만히 경청했다.

“당시 아버지는 레오나드에게 내 목을 자르러 온 거냐고 물었죠. 그에 레오나드가 답한 말은 그러려고 ‘했었다’였습니다.”

“…….”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이 가문에서 쫓겨나 있던 동안 복수심에 매몰되지 않게끔 잡아준 이가 있다더군요. ‘당신들 목이 아직 붙어 있을 수 있는 것도 다 그 사람 덕분이니까 고마워해라’라고.”

…아.

채이는 그 이야기 속 인물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레오나드의 어린 시절 동안 줄곧 함께 있었던 건, 채이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레오나드와의 승계 싸움에서 진 에일런 오라버니도, 레오나드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가문에서 쫓아내기만 했죠. 가문의 규칙대로라면 패배자의 목이 잘려 나가도 할 말이 없었는데.”

“에일런….”

“아. 랭커스터 가의 장남인 제 오라버니입니다. 승계 싸움 당시 레오나드의 후계자 자격에 대해 물고 늘어졌지만… 결국 밀려나고 가문에서 쫓겨나서 지금은 여기에 없어요.”

레오나드의 승계 자격에 대해 따지고 드는 형제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이 그럼….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죽지 않고 쫓겨났다니. 원래대로라면 그 에일런이란 자는 친동생인 레오나드의 손에 직접 참수당했어야 한다. 그가 살아 있는 것은 채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전개였다.

‘…레오의 과거와 심경이 달라지면서 이야기의 전개도 조금씩 바뀐 거구나.’

그제야 채이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랭커스터 가 가족들 간의 분위기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던 이유… 그리고 바이올렛이 레오나드를 자비롭다고 표현했던 것 또한 말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이 가문에서 쫓겨나 있던 동안 복수심에 매몰되지 않게끔 잡아준 이가 있다더군요.

레오가… 그렇게 말해주었다니.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레오나드는 가문에서 여러모로 돌연변이 같은 존재였어요… 하지만 그 덕분에 아버지와 어머니도 많이 바뀌셨습니다. 예전과 다르게 유해지셨거든요.”

채이를 바라보는 오스카의 시선이 부드럽다.

“레오나드가 저택으로 들인 베타가 있다고 들었을 때 바로 알았습니다. 당신이 바로 어린 시절 레오나드를 보호해준 베타라는 것을요.”

채이는 모르는 일이었으나, 그리 부드러운 오스카의 얼굴이란 썩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당신이 해 주었던 일들은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에게 큰 의미를 남긴 셈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 천만에요.”

“그리고… 채이 공. 앞으로도 레오나드를 잘 부탁드립니다. 당신에게는 이래저래 신세를 많이 지는군요.”

“아뇨, 아닙니다. 신세는 제가 오히려 지고 있는 거죠. 레오가 꼼꼼하게 신경 써 줘서 불편한 거 없이 잘 지내고 있거든요.”

오스카가 고개 숙여 감사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채이도 연신 고개를 숙였다. 짧게 웃은 오스카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저도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죠.”

“예. 참, 그리고 할러드랑 바이올렛한테 전해주세요. 놀러 오고 싶으면 언제든 놀러 와도 된다고요.”

“알겠습니다.”

채이는 메인 하우스로 돌아가는 오스카를 배웅했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무렵 채이도 오닉스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오스카가 떠나고… 저녁. 채이와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해서 찾아온 레오나드가 식사 도중 오늘 있었던 일을 꺼냈다.

“오늘 낮에 할러드랑 바이올렛이 멋대로 저택 안까지 들어왔었다 들었는데.”

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오늘 일에 대해서는 누군가에게 대신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 없었기에, 채이는 슬쩍 웃고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먼저 닦고서 말했다.

“너무 애들 혼내지 마. 나는 걔네랑 대화할 수 있어서 재미있었으니까. 참, 그거 알아? 할러드는 네 어릴 적 모습이랑 정말 많이 닮았더라.”

“…….”

“그 두 사람은 네가 많이 좋은가 봐. 너한테 관심받고 싶어서 그 방법을 물어보려고 찾아온 거래. 또 놀러 와도 된다고 말해두었는데, 괜찮을까?”

레오나드는 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상념에 잠긴 듯 보이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이내 그는 포크를 재차 집어 들며 말했다.

“채이가 원하는 대로 해.”

사실 그의 입장에선 그리 달가운 소리가 아니었을 텐데도 선뜻 허락해주는 게 고마웠다. 오스카가 제게 해준 이야기를 떠올린 채이는 눈앞의 레오나드를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보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랬더니 왜 웃나 싶었는지 레오나드의 잔잔한 눈이 채이를 응시했다.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 채이가 턱을 괴었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지.”

“…….”

“잘 커 줘서 고맙다. 레오.”

그 말의 속뜻은 알아듣지 못해도 좋고, 알아들어도 상관없었다. 갑작스러운 말이라 치부해도 괜찮았다. 채이도 그저 레오나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일방적으로 전했을 뿐이니까.

레오나드는 그런 채이와 한참 마주 보고 있다가 슬쩍 눈꺼풀을 내리떴다.

채이가 오스카에게 오늘 과거 이야기를 듣게 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레오나드다. 하여, 채이가 돌연 그런 말을 꺼낸 의도를 알 수는 없었으나….

“채이 덕분이야. 전부.”

‘잘 커 줘서 고맙다’는 그 말에는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내가 살아서 숨 쉬고,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거 전부. 나한테는 채이가 전부야.”

“…….”

“그러니까 욕심인 줄 알지만….”

“……?”

레오나드가 말꼬리를 흐린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어 대화에 집중하는 채이와 달리, 레오나드는 포크로 음식을 괜히 깨작거리며 반쯤 자신의 신경을 일부러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었으나 레오나드의 심중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상태였기에. 이 말을 해도 될지. 또다시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게 아닌지. 그럼에도 채이에게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서….

레오나드는 도서관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흘러가듯 자신의 마음을 입에 담았다.

“채이한테도 내가 전부였으면 좋겠어. 내가, 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채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였으면 해.”

그리고 그 지나가듯 중얼거린 말을 들은 채이는 매우 요상하고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무언가가 심장을 조이는 듯한 낯선 감각이었다.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전.

…둥. 둥.

어째선지 레오나드를 바라보기 버겁다는 생각이 들면서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동시에 들이쉬고 내뱉는 숨 또한 조금씩 가빠졌으며, 그 탓인지는 몰라도 목이 옥죄듯이 갑갑한 느낌도 들었다.

‘어?’

갑작스러운 생체 반응에 당황한 채이는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얹어 봤다. 착각인 줄 알았지만, 아니다. 그의 심장은 정말 평소보다 빨리 뛰고 있었다.

‘뭐야. 나 왜 이래.’

원인을 알 수 없는 박동음.

어딘가 섬뜩해지는 것이었기에, 채이는 표정에 드러난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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