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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37화 (37/105)

037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떠오르는 건 공작부인 베넷이었다. 아름다운 백금발, 베넷보단 좀 더 옅은 색의 자줏빛 눈동자…. 물론 베넷은 차분하고 고고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고, 저 숙녀분은 정반대로 치기 어리고 똘똘해 보였지만 두 사람의 생김새만큼은 판박이였다.

채이는 확신했다.

랭커스터 가의 정확한 계보를 알진 못하나, 저 여자아이 또한 레오나드의 형제 중 한 명일 것임을. 이래서 핏줄은 못 속인다고 하는 걸까? 채이는 새삼 지문과 다름없는 공작과 공작부인의 강한 유전자에 경외심을 느꼈다.

“바, 바이올렛 누나….”

잔뜩 기죽은 할러드가 창백한 얼굴로 슬금슬금 의자에서 내려가 뒤로 도망가려고 했다. 바이올렛이라 불린 아이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달려와 할러드의 멱살을 덥석 잡았다. 그리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사포 같은 잔소리를 쏟아냈다.

“너 이 자식… 믿는 게 아니었어! 정보 가져오라 했더니 뭘 사이좋게 저 사람이랑 노닥거리고 있는 거냐고…!”

“흐이잉. 그치만….”

“귀여운 척하지 마…!”

채이에게 들리지 않게 하려는 듯했지만 워낙 감정 실린 목소리였기에 음량을 죽여도 다 들렸다. 하지만 채이는 못 들은 척을 해 주었다.

“정보 캐내기에 실패했으면 냉큼 나올 생각을 해야 할 거 아니니! 오스카 언니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우리 둘 다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얻어터진다는 거 모르니…?!”

“방금 전까지 캐고 있었거든….”

“몰래 해야지…! 몰래!”

할러드보다는 누나고 레오나드보다는 동생인가. 대충 그 나이를 가늠하고 있는데 돌연 채이와 바이올렛의 눈이 마주쳐버렸다. 바이올렛은 채이를 의식한 듯 할러드의 멱살을 놓더니 귀족 자제처럼 자세를 가지런히 했다.

“크흠. 죄송해요. 제 동생이 귀찮게 굴었을 텐데, 내쫓지도 않고. 상냥하시네요. 아무튼 반가워요. 저는 바이올렛 디 랭커스터입니다. 우성 오메가, 열여덟 살이고요.”

“반가워요. 저는 채이라고 해요.”

“채이 공. 당신이 레오나드 오라버니의 저택에서 지내고 있다는 베타 맞죠?”

채이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일부러 꾸민 게 뻔히 느껴지는 악독한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단도직입적으로 묻지요! 레오나드 오라버니와는 어떻게 해서 친해지신 거죠?! 당신, 레오나드 오라버니와 무슨 사이세요!”

채이는 그 질문에 무어라 답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어쩌다가 알게 된 사이라 해봤자 납득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사실대로 모든 걸 말하기에는 복잡한 상황이었으니까. 할러드도 아직 남아 있고 말이다.

“미안, 공녀님. 그건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네요.”

결국 채이는 솔직하게 대답을 거부했다. 바이올렛은 주춤하더니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났다.

“그런 거면 어쩔 수 없네요.”

이 아이도 할러드와 똑같은 것이다. 그저 제 형제에게 관심이 많은 것뿐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의도는 없었다. 그걸 알기에 채이는 마음이 포근해졌다. 착하고 상냥한 아이들이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이가 할러드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권유했다.

“그러지 말고 공녀님도 앉으시는 게 어때요? 궁금한 거 물어보면 가능한 한 대답해 줄게요.”

“그치만…. 여기 몰래 들어와 있는 거 오스카 언니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분명 호되게 혼날 텐데. 레오나드 오라버니도 크게 실망할 거예요.”

“그럼 혼나지 않게 제가 잘 말해줄게요. 공자님과 공녀님은 저한테 초대받고 놀러 온 겁니다. 그렇죠?”

“……!”

채이의 배려에 총기 넘치는 눈을 반짝인 바이올렛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식사하는 채이 앞에서 디저트를 각자 한 아름씩 독차지한 아이들의 진지한 고민 상담이 시작됐다.

“저는 레오나드 오라버니하고 좀 더 친해지고 싶어요. 채이 공이 생각하기에 어떤 식으로 다가가면 가장 좋을 것 같나요?”

바이올렛이 턱을 짚은 채 진지한 얼굴로 질문했다. 레오나드와 관련된 이야기면 마냥 좋은 듯, 귀를 열고 듣던 할러드와는 달랐다. 바이올렛은 목적이 분명한 듯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호감을 얻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똑 부러진 아가씨였다.

그즈음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식사를 거의 다 끝냈기에 포크를 내려놓은 채이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되물었다.

“레오가 그렇게 좋아요? 물론 레오를 좋아해 줘서 고맙기는 한데 상대도 잘 안 해주고 늘 쌀쌀맞다면서요.”

채이야 물론 그와 특별한 인연이 있기도 하고 사이가 좋아서 그렇다 치지만…. 그렇지 않은 이 아이들은 돌아봐 주지 않는 레오나드를 어떻게 그리 좋아할 수 있는 걸까. 하물며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레오나드는 후계 경쟁 도중 자신의 ‘방해물’이었던 형제의 목을 직접 자르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 형제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른다. 이미 죽어서 없을 것이고. 어쨌든 할러드는 너무 어린 나이였을 테니까 기억나지 않는다고 쳐도, 바이올렛까지 이토록 레오나드를 따르는 게 신기했다.

“레오가 무섭진 않은 건가요?”

어쩌면 조심스러울 수도 있는 질문이었기에 채이는 두 아이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대답은 바이올렛의 입을 통해 생각 외로 금방, 그리고 가볍게 나왔다.

“무섭죠. 다들 무섭다고 해요. 하지만, 전 아는걸요! 오라버니가 그렇게 보여도 생각보다 자비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멋있잖아요! 저는 레오나드 오라버니를 정말 존경하고 있어요.”

바이올렛은 이내 쑥스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나중에 크면 랭커스터 가의 기사단장이 되고 싶거든요. 레오나드 오라버니가 다스리는 랭커스터를 지키는 든든한 기사단장이요.”

“그래요? 멋진 꿈이네요.”

“후후훗. 감사해요. 최근엔 현 기사단장인 로렌스의 특별 수업도 받고 있답니다.”

오. 로렌스에게… 그랬구나. 새삼스럽지만 그는 정말 랭커스터 가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 참 많은 것 같았다.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아진 바이올렛이 헤벌쭉 웃다가,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레오나드 오라버니는 제가 미래에 섬길 주인이에요. 제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친해지고 싶은 건 당연하지요.”

“그렇네요.”

경청하고 있던 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레오나드를 자비롭다고 표현하는 부분이 조금 묘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바이올렛의 진심은 전해졌다. 이내 채이는 조금 전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했다.

“레오와 친해지는 방법인가….”

“당신은 어떻게 친해지셨죠?”

“음? 저는… 어쩌다 보니까?”

대답이 영 시원찮다고 느낀 건지 바이올렛이 단번에 실망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너무해요! 제 이야기도 다 들어놓고. 그냥 저한테 가르쳐 주기 싫어서 이러시는 거죠?!”

그런 건 아닌데. 하지만 채이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와 레오나드는 복합적인 상황과 이유로 조금씩 친해졌던 거니까. 그걸 몇 문장으로 압축해서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 과거의 일을 빼고 말해야 한다면 더더욱. 하여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면 좋을지, 채이가 고민하던 것도 잠시….

“괴롭히는 건 그쯤 하렴.”

어느새 할러드와 바이올렛의 등 뒤에 서 있던 한 여성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기척을 전혀 못 느꼈는데.’

채이가 놀라서 고개를 들 때였다. 안경을 쓰고 있어서인지, 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여성이 할러드와 바이올렛의 귀를 한쪽씩 잡아당겼다.

“아야야! 잘못했어, 누나!”

“악! 언니! 아니야! 난 그냥 할러드가 멋대로 저택에 들어갔다길래 잡으려고 온 것뿐이야!”

“다 보이는 거짓말은 그만. 그런 녀석이 지금 여기서 즐겁게 수다나 떨고 있니? 그것도 잡으러 왔다는 할러드랑 같이?”

“아니이! 그건…!”

“채이 공의 배려를 생각해서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겠다만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가만있지 않을 테니 명심해둬.”

조곤조곤하면서도 점잖은 목소리다.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옅은 푸른색 눈동자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은 레오나드를 많이 떠올리게 했다. 정확히 말하면, 델리온을 닮았다.

‘이 사람이 오스카인가 보다.’

그 여성은 곧 뒤따라서 들어오는 기사들에게 두 사람을 넘겼다. 일부러 소란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인지 그녀가 대동한 기사는 단 둘뿐이었다.

“둘을 데리고 가거라.”

“예.”

채이는 힐끔 그녀를 지켜보았다. 아까 전 대화를 모두 들은 걸로 보아 아무래도 바이올렛이 저택으로 들어올 때부터 뒤를 밟은 거 같은데…. 지금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기척을 숨기는 것에 꽤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두 아이가 기사들과 함께 저택에서 쫓겨 나가고 나니, 순식간에 고요가 찾아왔다. 그제야 옅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채이를 돌아보더니 손을 먼저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채이 공. 저는 랭커스터 가문의 장녀인 오스카 디 랭커스터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장녀인가. 이걸로 벌써 레오나드의 형제를 세 명째 만난다. 손을 맞잡은 채이는 오늘따라 랭커스터 가의 형제들을 많이 만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모두 레오나드가 바쁜 탓에 저택을 하루 종일 비워서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리고 채이는 이런 깜짝 이벤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레오나드의 친가족에 대한 건 잘 알지 못했는데 이로써 많이 알게 되었고….

그때였다.

채이가 상념에 잠겨 있는데 오스카의 목소리가 그 상념을 비집고서 들어왔다.

“채이 공. 혹시 괜찮다면 잠시 대화할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당신과는 이렇게 따로 만날 일이 잘 없으니.”

그건 또 의외의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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