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화
채이가 그 얼굴을 알아보자 할러드는 경악한 얼굴로 주변을 바쁘게 돌아보았다. 딱 봐도 몰래 들어왔다가 들켜서 혼쭐난 사람 같은 태도였다.
‘서로의 영역은 함부로 침범하면 안 된다고 했었지….’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들어온 건진 모르겠으나 반응으로 보아 허락받고 들어온 건 확실히 아닌 듯하다. 아마 이 꼬마는 여기 있는 걸 들키는 순간, 아주 크게 혼나고 말 것이었다.
“채이 님… 어찌할까요?”
에녹이 난처한 얼굴로 속삭였다. 그 물음은 지금 당장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러 갈지 말지 결정해달라는 뜻이기도 했다. 현재 이 저택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건 레오나드와 그가 유일하게 허락한 채이였으니까.
“음….”
고민이 된 채이는 할러드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그즈음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할러드가 벽에 등을 바짝 붙이고 서서 채이를 노려보았다. 경계심 가득한 눈이었다.
“무례한 녀석 같으니라고… 누가 내게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해도 된다고 허락했지?”
“아. 실례했습니다. 공자님.”
채이가 풋 터져 나올 뻔한 웃음을, 슬쩍 입꼬리를 올리는 것으로 갈무리하여 겨우 참았다. 조그만 게 제 딴에도 귀족이라고 눈을 거만하게 뜨고 있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얘 레오랑 정말 많이 닮았네. 이렇게 보니까…. 어릴 때 레오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야.’
그래서 순간 마음이 약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채이는 이 건방진 꼬마를 바로 쫓아내는 대신, 몰래 들어온 이유가 뭔지라도 한번 들어봐 주기로 했다.
“그래서 할러드 공자님은 오닉스 저택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찾아오신 걸까요?”
하지만 할러드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부루퉁한 얼굴을 홱 옆으로 돌리며 말하기 싫다는 의사를 드러낼 뿐이었다. 물론 그리 반항해봤자 손해를 보는 건 할러드다. 아쉬울 게 없는 건 채이 쪽이었다.
“흠. 그럼 어쩔 수 없이 로렌스를 불러 드려야겠군요.”
“뭐…!”
“로렌스라면 할러드 공자님을 저택 바깥까지 안전하게 바래다 드릴 겁니다.”
채이가 보란 듯 어깨를 으쓱이고 돌아섰다. 그러자 당황한 할러드가 채이의 옷자락을 다급히 붙들고 외쳤다.
“널 만나러 온 거야!”
예상 밖의 이야기에 채이는 당황했다.
“저요?”
“그, 그래!”
채이의 가슴께에 겨우 닿는 조그만 녀석이 저 밑에서 분한 듯 씩씩거렸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러드가 갑자기 저를 찾아온 이유로, 짐작 가는 구석이 전혀 없던 까닭이었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뿐이다.
“저는 왜 만나러 오신 건지요?”
채이의 직설적인 물음에 흠칫 떨며 머뭇거리던 할러드는 곧 결심한 듯 비장한 얼굴로 채이를 삿대질하며 외쳤다.
“이 악마 같은 베타 녀석! 형님을 어떻게 꼬드긴 건지 밝혀라!”
꼭 미리 준비해 온 대사 같다. 적당히 흘려들은 채이가 재차 물었다.
“형님? 레오를 말하는 건가요?”
그 태연한 모습에 도리어 주눅 든 할러드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끄덕였다.
“레오나드 형님은 너를 아끼시잖아. 친근하게 말도 걸어 주고… 어, 어떻게 해야 너처럼 형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채이는 할러드의 말을 듣는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이제 보니 이 녀석은 그냥 레오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 방법을 알아내려고 왔나 보다.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에녹이 채이에게 작은 목소리로 슬쩍 귀띔했다.
“레오나드 공자님은 평소에 가족분들을 가까이하지 않으시거든요. 이유는 채이 님이 제일 잘 아시겠지만….”
말꼬리를 흐리며 그리 말한 에녹이 할러드를 힐끔 쳐다볼 즈음. 다 듣고 있었던 게 분명한 할러드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그 이유라는 게 대체 뭔데?! 이 녀석도 아는 그 이유, 나한텐 왜 설명하지 않는 거야? 아무도 알려 주지를 않아.”
자기가 말하면서도 속상하고 답답한 듯 할러드의 입이 댓 발 튀어나왔다. 그럼에도 에녹은 일말의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할러드에게는 레오나드가 과거에 어떤 짓을 당했는지 말하지 않는 게 가문 내부에서의 암묵적인 룰인 모양이었다.
“공자님이 지금 몇 살이시죠?”
“…아홉 살. 갑자기 왜?”
“그렇구나. 아무것도 아니에요.”
채이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시간상 할러드는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겠네…. 그렇다면 할러드가 레오의 과거를 모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그리고 그 일과 무관한 아이에게 괜히 어두운 과거를 말해 충격과 죄책감을 안길 필요도 없다. 분명 가문 사람들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잠시 상념에 잠겼던 채이가 이내 할러드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물었다.
“공자님은 레오 형아가 좋아요?”
그 질문에 쑥스러운지 주춤 뒤로 물러선 할러드가 고개를 까닥까닥 움직였다. 채이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처음의 경계심이 많이 사그라든 할러드는 조금씩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도 레오나드 형님하고 이야기 많이 하고 싶어. 하지만 형님은 가문을 이을 후계자니까 매일 바쁘지… 그건 나도 알아. 알지만.”
“…….”
“바쁘지 않을 때도 금방 널 보러 떠나버리잖아. 요즘은 얼굴도 거의 못 봤어. 나도, 형님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
“저번 연회장에서 잠깐 봤던 것도 엄청 오랜만에 만난 거야. 그런데 형님은 너만 좋아하고… 나는 신경도 안 써 줬어. 네가 형님을 뺏어 간 거야!”
제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지 할러드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탓하는 건 잘못된 행동이다. 하물며 그 상대가 채이라면 더더욱. 하여 에녹이 “그리 탓해선 안 되는 분”이라고 한마디 붙이려던 때였다. 손을 저어 에녹을 저지한 채이가 할러드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랬구나. 공자님, 레오 뺏어 가서 내가 미안해. 사과의 의미로 맛있는 거 줄까요? 혹시 디저트 좋아해요?”
“흥. 내가 디저트 따위로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나는 그런 어린애가 아니야.”
발개진 눈을 손등으로 벅벅 닦은 할러드가 까칠하게 대꾸했다. 채이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늘어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아쉬워라. 맛있는 거 같이 먹으면서 레오 형아의 이야기를 좀 해 줄까 했는데.”
“…어떤 이야기를 해 줄 건데?”
힐끔 눈을 굴린 할러드가 관심 없는 척 물었다. 앞 구르기하면서 보고 뒤 구르기하면서 봐도 관심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흠. 예를 들면 레오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든가. 레오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그런 것들? 저는 할러드 공자님이 모르는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답니다.”
“…흥, 좋아. 어울려 주도록 하지.”
마지 못해 어울려 준다는 말본새치고는 눈이 초롱초롱하다. 채이는 깜찍한 꼬맹이의 등을 도닥이며 식당 쪽으로 자연스레 발걸음을 돌렸다.
“디저트 뭐 좋아해요?”
“케이크라면 전부 다.”
“그럼 주방장한테 케이크 종류별로 전부 다 준비해 달라고 할게요.”
“……!”
그런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지켜보던 에녹도 미소 지으며 천천히 뒤따랐다. 그는 새삼 얼음성 같던 랭커스터 가문에 봄기운이 스며들게끔 해준 채이의 존재에 감사했다.
***
다행히 매일 아침 준비해 두는 케이크가 꽤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고도, 식탁 위에는 다양한 맛의 케이크가 올려졌고 채이와 할러드는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주된 내용은 당연히 레오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물론 가문이 레오나드를 죽일 생각으로 내쫓았던 사실과 관련된 것들은 교묘하게 피하면서. 그러는 동안 채이의 식사도 함께 준비되어 식탁 위로 올라왔다.
“레오가 할러드 공자님이랑 같은 나이일 적에는 키가 굉장히 작았어요. 아마 지금 공자님보다 좀 더 작았을걸요.”
“정말? 말도 안 돼! 지금 형님은 엄청나게 크잖아.”
“진짜예요. 그게 전부 다 잘 먹고 잘 잔 덕분이죠. 할러드 공자님도, 레오 형아처럼 크고 싶으면 편식하지 않고 늦게 자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고 있어요?”
“윽. 잔소리 싫어….”
할러드가 케이크를 막 입에 밀어 넣으려다 말고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채이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할러드는 화제를 돌리며 채이를 재촉했다.
“형님이 뭘 좋아하는지도 알아?”
“대충은? 생긴 거랑 다르게 귀여운 거, 작은 동물을 은근 좋아하고. 먹는 건 특별히 가리지 않고 잘 먹는데… 그래도 확실히 양념한 닭고기는 언제 줘도 잘 먹었던 거 같아요.”
“엇…. 나랑 비슷하다.”
레오나드와의 공통점을 발견해서 수줍어진 할러드가 괜히 케이크를 으깨며 접시만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네가 어린 시절의 형님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저택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던 거야?”
그건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으음. 그건 비밀인 걸로.”
“치이…. 비밀 한번 많네.”
부루퉁하게 툭 입을 내밀고 툴툴거린 할러드는 다시 케이크를 포크로 찍었다. 입가에 생크림을 잔뜩 묻힌 것도 모르고서 먹는 꼴이 영락없는 어린애였기에 그런 툴툴거림도 마냥 귀여울 따름이었다.
“잘 먹네. 맛있어요?”
볼에 케이크를 한가득 집어넣고 우물거리던 할러드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나저나. 아무리 조각 케이크라지만, 벌써 다섯 개째인 것 같은데.
어찌나 잘 먹는지 보고만 있는데도 물리는 것 같다. 당분간 케이크는 못 먹을 거 같았다. 작게 웃은 채이도 뒤이어 포크를 집어 들었다. 이제 대화하느라 늦어진 식사를 슬슬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우렁찬 호통 소리가 식당을 가로지르며 들려왔기에, 깜짝 놀란 채이는 그쪽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할러드!”
제 이름이 불린 할러드도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입을 가리며 고개를 들었다.
식당 입구 쪽.
허리에 손을 얹고서 할러드를 노려보고 있는 건, 아직 앳되어 보이는 숙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