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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35화 (35/105)

035화

그렇게 채이와 벤냑스, 페르난데가 티 타임 테이블에 둘러앉고 에녹이 그들 앞에 찻잔과 디저트를 놓아줄 동안 채이는 벤냑스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혹시 벤냑스는 취미가 있어요?”

“네! 특별한 건 아니지만….”

“궁금한데 알려줄 수 있어요?”

“책… 읽는 거 좋아해요.”

“어. 읽는 거 저도 좋아하는데.”

“정말요?! 평소에 뭐 읽으세요?”

채이와 겹치는 취미가 나오자 벤냑스는 채이와의 대화에 푹 빠져버렸다. 채이도 벤냑스와 관심 가지는 분야가 많이 겹치다 보니까 생각보다 대화 자체가 재미있어 몰두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에 끼지 못한 페르난데만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교양 지식 측면에 있어서는 페르난데도 뒤처지지 않았으나, 채이와 벤냑스가 나누고 있는 주제는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던 탓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무르익었고 용기를 얻은 벤냑스가 먼저 채이에게 제안했다.

“채이 님. 저… 저를 벤이라고 불러 주시겠어요? 애칭 같은 건데, 다른 사람들도 편하게 벤이라 부르거든요.”

“흠. 좋아요. 대신에 벤냑스도 저 부를 때 ‘님’ 자 빼고 불러 준다면요.”

채이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벤냑스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발갛게 타올랐다. 귀까지 달아올라 버린 벤냑스는 고개를 푹 떨군 채 목소리를 떨었다.

“그, 그럼… 채, 채이….”

“네. 좋아요, 벤.”

“웃… 역시 저는 못 하겠어요! 채이 님, 그래도 벤이라 불러 주실 거죠?”

벤냑스가 얼굴을 감싸 쥔 채 손가락 틈 사이로 쳐다보는 모습이 귀여워서 채이가 그만 웃어버릴 때였다.

타앙!

페르난데가 쭉 들이켜 비운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벤냑스를 흘겨보았다.

“꼴값을 떨어라. 아주.”

순식간에 창백한 낯빛이 된 벤냑스가 힉, 숨을 삼키며 몸을 움찔 떨었다. 대화 흐름은 거기서 끊어졌다. 한숨을 내쉰 채이가 예민하게 날 선 기세로 노려보는 페르난데를 돌아보았다.

“페르난데. 너보다 약한 애 괴롭히지 마.”

“약하긴 개뿔! 저 녀석도 나랑 같은 우성 오메가거든? 그리고 저 녀석 이능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너 모르잖아. 넌 지금 저놈의 겉모습에 속고 있는 거라고.”

“그래? 그럼 너보다 강한 애 괴롭히지 마.”

“내가 저딴 놈보다 약해 보여?!”

“나 참. 대체 어디에 장단을 맞추라는 거니? 알겠다. 너 질투 나서 이러는 거지? 어휴, 너도 애칭으로 불러 줄게.”

“그런 거 아니…!”

페르난데가 오만상을 찡그린 채 벌떡 일어났을 때였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채이가 페르난데의 앞 글자를 딴 애칭을 중얼거렸다.

“페르? 이걸로 괜찮을까? 일반적으로 네 이름의 애칭은 이런 식으로 부르는 거 맞지?”

“……!”

그러자 페르난데가 그답지 않게 상기된 얼굴로 주춤 물러섰다. 속내를 들켜서 부끄러워하는 건지 낯간지러운 애칭으로 갑자기 불려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 상태로 한참 침묵하던 페르난데가 다시 조용히 착석했다. 이 녀석과 알고 지낸 지도 제법 되는 채이였기에, 페르난데의 기분이 좋아졌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은근 단순하다니까.’

속으로 웃음을 삼킨 채이는 조금 전의 주제를 다시 가져왔다. 페르난데도 벤냑스와의 대화에 슬쩍 넣어주기 위해서였다.

“넌 소설 같은 거 안 읽어?”

“…흥. 그런 서민들이나 읽는 거짓말 이야기 따위, 누가 읽지? 교양 떨어지는 일이야.”

“교양 떨어진다니. 망나니짓하고 다니는 네가 할 소린 아닌 거 같은데.”

“뭐! 요즘은 얌전히 지내잖아!”

언제 고분고분해졌냐는 듯, 테이블을 내리친 페르난데가 다시 버럭 화를 내자 또 한 번 놀란 벤냑스가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버럭버럭하는 페르난데의 행동에 이미 익숙해져 있던 채이는 그러든 말든 태연해 보였다.

“흠. 그러고 보면 그렇네. 요즘에 왜 조용해? 그사이 철이 든 건 아닌 거 같고.”

“…너 점점 나한테 막말한다?”

“착각이야.”

결국 말싸움에서 먼저 물러난 페르난데가 한숨을 뱉으면서 턱을 괬다. 그는 채이를 곁눈질로 흘겼다.

“생각을 해 봐. 뭐 때문이겠어?”

“아. 남의 저택에서 멋대로 날뛰면 크게 혼나고 쫓겨날 테니까? 쫓겨나기 싫어서?”

“…….”

“그래도 때하고 장소는 가리면서 행패 부리는 망나니였구나. 대견하다, 페르.”

“됐어. 씨, 말을 말아야지.”

페르난데가 토라진 얼굴로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여간 망나니짓만 안 하지 성질머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 새침한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데 돌연 페르난데가 자리에서 슥 일어났다. 놀란 채이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자, 페르난데는 슬쩍 눈을 피하면서 말했다.

“난 먼저 갈란다.”

“뭐야. 아직 삐진 거 덜 풀렸어?”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

대답과 달리 삐진 것처럼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 퉁명스럽게 답한 페르난데가 돌아섰다. 결국 그가 떠나버리고 잠시 후에 에녹이 테이블 위를 정리하며 채이를 돌아보았다.

“채이 님. 이건 치우고 올게요.”

“아, 응. 고마워.”

그렇게 페르난데 앞에 놓였던 디저트와 차는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버려지고 말았다.

‘나 참….’

에녹까지 자리를 비우니 잠시 채이와 벤냑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채이가 먼저 대화에 물꼬를 트면서 어색하던 분위기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또한 자신과 페르난데가 본능적으로 맞지 않음을 느꼈던 벤냑스는 오히려 아까보다 편안해진 상태였다.

“벤, 이건 예민할 수도 있는 질문이긴 한데 궁금해서. 혹시 호감 둔 사람 있어요?”

“앗… 네에.”

수줍게 답하는 벤냑스의 하얀 뺨이 선홍빛으로 옅게 물들었다. 그러면서 채이를 힐끔 바라본 벤냑스였으나 그 시선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한 채이가 짓궂게 웃어 보였다.

“혹시 내가 아는 사람?”

“그, 그건 아직 말할 수 없어요.”

채이의 은근한 시선을 못 견딘 벤냑스는 결국 부끄러워하면서 자신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벤이 레오한테 관심 있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흠, 레오는 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려나.’

채이는 그가 호감을 두었다는 대상이 레오나드라고 확신했다. 물론 대단한 착각이었지만 설마 그 대상이 본인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잘 될 거예요. 응원할게요, 벤.”

채이가 살포시 웃고 적당히 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잠깐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벤냑스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채이 님은… 정말 베타인 거죠?”

“네.”

자주 발현자 아니냐고 오해를 사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허허 웃음을 지은 채이가 가뿐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그 확언을 들은 벤냑스의 얼굴에 어째선지 모를 비장함이 서렸다.

“저… 꼭 극복해 보일 거예요.”

“……?”

그 말의 뜻을 전혀 이해 못 한 채이였지만, 혼잣말이라 생각하고 그러려니 넘겼다.

그렇게 한참 떠들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오후가 되었다. 점심때를 한참 넘긴 상태였기에 에녹이 식사를 하러 가셔야 한다고 재촉했다. 아쉽지만 채이는 벤냑스와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재미있었어요. 들어가세요.”

“저… 내, 내일 또 와도 될까요?”

헤어지기 싫은 듯 머뭇거리던 벤냑스가 용기 내서 채이에게 허락을 구했다. 레오나드와 페르난데가 있었더라면 한사코 방해했을 일이었으나 채이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가벼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럼 얼마든지요.”

그 흔쾌한 대답에 벤냑스도 밝은 표정을 지으며 떠났다. 채이는 “내일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간 벤냑스의 등 뒤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때까지의 모든 상황을 채이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에녹이 채이 쪽을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채이 님.”

“응?”

“혹시… 벤냑스 공자님을 총애하시게 된 건가요? 남다른 애정을 주시는 것 같아서요.”

“뭐?”

그에 놀라버린 채이가 단호한 투로 부정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니니 오해하지 마.”

미래에 레오나드의 짝이 돼야 하는 며늘아기를 좋아한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채이의 말이 진실인지, 가늠하듯 미심쩍게 바라보던 에녹이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정말 아니신 거죠?”

“그래. 아니라니까.”

채이가 한숨처럼 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제야 에녹도 몰래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혹여 채이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간 레오나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에….

‘벤냑스 공자님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채이 님과 단둘이 남거나 너무 가깝게 지내진 못하시도록 신경 써야겠어.’

그런 속내를 숨긴 에녹이 평소처럼 다시 웃어 보였다.

“식사하러 가요, 채이 님.”

“응. 안 그래도 배 엄청 고프다.”

그렇게 채이와 에녹이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곧장 식당 쪽으로 내려가던 것도 잠시….

‘응?’

반대쪽 계단 근처에서 자꾸만 서성거리고 있는 조그만 인영 하나를 발견했다. 그 인영은 웬 꼬마 아이의 것이었다. 아이는 모자를 꾹 눌러쓴 채 귀족 도련님임을 숨길 수 없는, 아주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누구지?’

에녹과 한차례 시선을 교환한 채이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 보았다.

“길 잃었니?”

“으악!”

소스라치게 놀란 꼬마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 반동으로 모자가 툭 떨어지는 바람에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앗….”

얼굴을 알아본 에녹이 놀라서 입가를 가렸다. 그 얼굴은 채이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이 녀석은….’

델리온을 닮은 검은 머리카락. 베넷을 닮은 자주색 눈동자. 어쩔 줄 몰라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이 어린애는 랭커스터 부부와 처음 인사할 적, 베넷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던 랭커스터 가의 막내였다.

“너… 할러드.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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