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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33화 (33/105)

033화

그렇게 채이를 메인 저택으로 안내한 베넷과 델리온은 기사들을 딸려서 할러드를 방으로 보내고 자신들은 치료실까지 함께했다.

“제이든.”

베넷이 입구에 쳐진 장막을 손으로 젖힌 후, 의료 장비를 정리하고 있는 사내 한 명을 불렀다. 무심한 얼굴로 돌아봤던 제이든은 피로 물든 채이의 손을 보자마자 동그랗게 눈을 뜨고 달려왔다. 무려 공작과 공작부인이 직접 발걸음을 한 상황이건만,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들이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이 사내의 관심은 오로지 누군가의 다친 손에만 있었다.

“상처가 꽤 깊군요…. 빈혈은.”

“아. 아직 괜찮은 거 같기도.”

“이쪽으로.”

그는 델리온과 베넷이 무어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제자들에게 준비를 시키고 채이를 의자에 앉혔다.

“따가워도 손을 바르게 펴세요.”

채이가 고분고분 손을 펴자 세면대 쪽으로 손목을 끌어당긴 제이든이 상처 위로 옅은 청잣빛 액체를 둘러 부었다. 세균 감염과 번식을 막기 위해서 소독하고 신체 컨디션을 올리는 용도로 사용하는 힐링 워터다.

잠시 후 제이든은 채이가 통에 담아 둔 자줏빛 액체 안으로 손을 넣도록 했다. 그 자주빛이 바로 재생력을 증가시켜 본격적인 치료에 쓰이는 힐링 워터였다.

이전 수도원에서도 이와 같은 방법을 썼지.

채이는 그때 일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최소 10분간은 얌전히 기다려야 할 겁니다. 그동안 손은 되도록 움직이지 않게끔 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수건에 손을 닦으며 채이를 힐끔 돌아본 제이든은 침착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안심하고 잠시 자리에서 벗어났다. 제이든이 제자들과 말을 주고받느라 다소 정신없던 상황이 일단락되자 그와 대비되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채이는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레오나드는 물론이고 페르난데와 벤냑스, 랭커스터 부부까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안 가고 있지.’

다른 애들은 그렇다 쳐도 베넷과 델리온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필요는 없을 텐데.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채이… 괜찮아?”

레오나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조심스러운 음성에서 초조한 감정을 느낀 채이가 습관적으로 레오나드의 머리 위에 툭 손을 얹었다.

“그래. 걱정하지 마.”

그러고 평소였다면 쓰다듬었겠지만, 채이는 금방 손을 떼어내야 했다. 델리온과 베넷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앞에서 레오나드의 자존심(?)을 추락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자네 이름이 ‘채이’라고 하나.”

그때 상념에 잠겨 있었던 델리온의 입에서 채이의 이름이 어색하게 흘러나왔다.

어색하다….

적어도 채이는 그렇게 느꼈다. 물론 그러한 감상은 델리온의 입에서 제 이름이 친근하게 불릴 일이 없으리라 여겼던 편견이 만들어낸 착각일 수도 있었다.

“예. 맞습니다.”

채이가 대답하자 델리온이 눈을 들어 그와 마주했다.

“채이. 자네는 사냥꾼인가?”

그 눈은 상당히 예리했으며 본론부터 꺼내 놓는 직설적인 목소리는 엄숙했다.

‘사냥꾼.’

신체를 극한까지 단련해, 마물을 때려잡거나 귀족의 의뢰를 받아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극소수의 베타들…. 그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채이는 살기를 죽이고 틈을 노렸던 암살자의 공격을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게끔 만들었으니.

세상에 어느 평범한 베타가 그런 짓을 가능케 한단 말인가.

하지만 채이가 베타인 건 확실해 보일 터이고….

그렇다면 생각하기에 베타이면서 평범하지 않은 ‘사냥꾼’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실제로 돈을 벌기 위해서 마물을 때려잡고 다녔던 때의 채이는 자의가 아닌 타의로 사냥꾼이라 불리기도 했었다. 그러니, 아주 틀린 추측은 아니었다.

“설마 채이를 의심하는 거면….”

“앞서지 마라. 호기심일 뿐이니.”

레오나드의 기세가 흉흉해지려고 하자 델리온이 그의 의심을 칼같이 부정했다. 레오나드도 정말 그리 의심을 해서 물어본 건 아닐 것이고, 델리온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떠본 것 같았다. 애초에 채이가 그 죽어버린 암살자와 연관이 있고 같은 편이었다면 굳이 다치면서까지 훼방을 놓진 않았을 테니까.

“한때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돈을 벌기에는 마물의 사체를 팔아넘기는 게 가장 빠르다 보니 본의 아니게요.”

“…그랬어?”

채이의 대답에 레오나드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채이는 레오나드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응. 너 보내고 난 뒤의 일이야.”

델리온과 베넷이 듣지 못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레오나드가 정식 후계자가 되고 한참 지난 데다 어차피 레오나드만큼 훌륭한 후계자도 없으니 알아도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지만 그건 발현자들의 뛰어난 감각을 과소평가한 일이었다. 베넷과 델리온은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알아들었다. 레오나드가 발현할 때까지 안전하게 키운 인물이 채이였다는 것도 단번에 알아차렸지만, 두 사람은 모르는 척 그 사실을 넘겼다.

“그렇군. 대답해줘서 고맙다.”

“용건 끝났으면 이만 가시죠.”

델리온이 채이의 말에 답하기 무섭게 레오나드가 그를 보내려고 했다.

사실상 꺼지라는 뜻이었다.

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오나드에게 은근히 까칠한 구석이 있음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델리온을 대하는 그를 보니 페르난데를 대하는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좀 더 공격적이고 무심한 감정이 어려 있는… 그런 레오나드의 모습을 보니 썩 낯설었다.

한데, 그들에게는 일상인가 보다. 보낸다고 정말 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델리온과 베넷이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몸조리 잘 하고. 다음에 또 보지.”

델리온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베넷과 함께 의료실을 빠져나갔다.

‘다음에 또….’

다음에 또 볼 생각이 있단 건가.

지금까지의 태도로 보아 나쁜 생각이 있어 보이진 않고, 정말 단순한 호기심인 듯한데. 그렇다 쳐도 생각보다 과한 관심을 주고 있는 것 같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랭커스터 부부가 자신에게 관심 가질 이유로 딱히 짚이는 구석도 없었기에.

‘무슨 생각인지 전혀 모르겠군.’

그러다 문득 한마디도 없이 앉아 있던 벤냑스가 떠올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눈치가 보이는지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런 반면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은 의외로 아직까지 없어 보였다.

“벤냑스. 괜찮으세요?”

“아! 네네.”

채이와 눈이 마주쳤다가 화다닥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인 벤냑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곤 수줍은 목소리로 물었다.

“채이 님은… 좀 어떠신가요?”

“아 음. 이제 거의 다 아문 거 같아요. 살짝 가렵긴 한데 그 외에 통증은 없네요.”

“다! 다행이에요…!”

벤냑스가 채이의 말에 눈을 반짝이면서 기뻐해 주었다. 왜 그리 긴장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뚝딱거리는 모습이 썩 귀여웠기에 채이가 짧게 웃었다. 돌연 페르난데가 제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레오나드를 돌아보았다.

“경쟁자 많아서 좋겠다, 너.”

“…조용히 해.”

페르난데의 비아냥거림에 레오나드가 눈을 흘겼다. 채이는 그 두 사람의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어쨌든. 제 걱정은 이제 안 하셔도 되니까 이만 가 보도록 해요. 페르난데, 너도.”

“뭐야. 나도 같이 보내는 거야?”

페르난데가 투덜거렸지만 레오나드는 옳다구나 하고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을 냉큼 불러들였다.

“아직 첩자가 저택 내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저 두 사람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호위해 드려라.”

그러자 열성 알파 기사들이 두 사람 앞으로 엉거주춤 다가와서 함께 가자며 무언의 재촉을 했다. 채이는 두 사람의 안전을 생각하는 레오나드의 다정함에 흐뭇이 웃었지만… 페르난데는 알고 있었다.

‘조용히 꺼지라 이거냐.’

레오나드가 눈에 거슬리는 두 사람을 확실히 내쫓기 위해 기사들까지 동원한 것임을. ‘안전’ 운운하면 레오나드에 한해 곧잘 판단이 흐려지는 채이가 금세 납득하리라는 점까지 이용하는 무서운 놈이었다.

여기서 괜히 몇 마디 말을 얹어 봤자 레오나드에게만 좋은 일을 만들어 주거나 호의를 거절하는 나쁜 놈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일 터다. 그때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기사들과 채이를 번갈아 쳐다보던 벤냑스가 눈치 없이 자기 의견을 표명하려고 했다.

“어, 저는 좀 더 있고 싶은….”

“야. 잔말 말고 그냥 따라와라.”

그 의견을 싹둑 잘라먹은 페르난데가 벤냑스의 멱살을 잡고 나가버렸다. 기사들도 허둥지둥거리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그러고 또 한 번 찾아온 정적. 채이가 레오나드를 돌아보았다.

“레오나드. 너도 이만….”

“난 채이 저택까지 데려다주고.”

단호하게 말을 자르며 눈을 마주한 레오나드가 채이의 멀쩡한 오른쪽 손을 잡아 끌고 그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뿐인데 뭔가 기분이 묘해진다. 놀라서 심장이 덜컹거렸다. 어째선지 안절부절못하게 된 채이가 시선을 마주하기 거북하여 슬쩍 눈을 돌릴 때였다.

“다 나았으면 이만 돌아가세요.”

잠시 자리를 비웠던 제이든이 어느새 돌아와 고개를 빼꼼하게 내밀었다.

“아…! 예.”

꼭 나쁜 짓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저도 모르게 펄쩍 놀라버린 채이는 힐링 워터 통에서 왼손을 냉큼 빼냈다. 그사이 왼손의 상처는 흔적도 없이 말끔해져 있었다.

‘나 오늘따라 왜 이러지.’

채이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미리 준비되어 있던 수건에 손을 닦았다. 그런 채이를 지켜보던 제이든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다음에 또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부르시고요.”

“…예. 감사합니다.”

그날 레오나드는 채이를 저택까지 데려다주고 그걸로도 모자라 함께 밤을 보냈다. ‘채이의 안전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그건 암살자의 존재로 인해 며칠 한정으로 써먹을 수 있는 훌륭한 변명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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