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화
비밀 작전이 잦았던 시절 살기를 죽인 은밀한 소음을 얼마나 예민하게 잡아내느냐는 곧 사느냐 죽느냐로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지금까지도 정신에 박혀 있었다.
“…어?”
돌연 벤냑스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어깨를 움츠리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흘깃 눈을 내리뜬 채이는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제 손에 잡혀 있는 건 살점을 뚫기 쉽게끔 만들어진 얇은 단검이었다.
‘…암살 시도?’
워낙 날카로운 날붙이라 잡는 순간 깊이 베였다. 상처에서 옅은 선홍색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투둑. 툭. 핏방울이 떨어지자, 불안하게 허공을 훑던 벤냑스의 시선이 불현듯 아래로 향했다.
다음 순간.
“힉!”
그는 피로 뒤범벅된 채이의 손과 서늘한 날붙이를 보고 펄쩍 놀라 아연실색하며 외쳤다.
“채, 채이 공! 손…! 피, 피가…!”
그 외침을 가까이서 들은 일행들이 가장 먼저 반응해 채이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웃고 떠들던 사람들도 무심코 눈을 돌렸다가 후두둑 떨어지는 피를 보곤 기겁하여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아아악!”
“으아악! 뭐야!”
누군가의 암살 시도가 있었고 그 모든 혼란이 찾아오기까지, 단 몇 초.
“채이!”
직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다급한 레오나드의 부름이 들려왔지만…. 채이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태였다.
‘어디지?’
채이의 예리한 눈이 연회장을 재빠르게 훑었다. 이 연회장 어딘가에 벤냑스를 노리는 자가 숨어 있다. 정확히 벤냑스의 급소를 노리고 흉기가 날아왔으니 틀림없었다.
거기다 상당히 단련된 자다. 그 정체가 발현자든, 사냥꾼이든 상대하기 쉽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감각이 비교적 예민한 편인 발현자들조차 공격해 오는 그 순간까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살기를 잘 숨기는 자였으니까.
채이도 벤냑스의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고, 대처가 가능했던 거다. 아니었더라면 그도 소란이 일어날 때까지 몰랐을 터였다.
‘언제 다시 공격해 올지 몰라.’
이미 그자는 암살에 실패했다. 한 번의 실수는 곧 죽음. 그렇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움직일 가능성이 컸다. 다음번에는 조금 더 거칠고 노골적인 방법으로 공격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채이의 예상은 적중했다.
‘살기…!’
혼란을 틈타 사람들 사이로 움직이는 그림자를 포착했다. 팅! 단검을 빙글 돌려 멀쩡한 오른손으로 옮겨 잡은 채이가 왼팔로는 벤냑스의 허리를 끌어와 품 안으로 감추었다. 뒤이어 이쪽을 노리고 쏘아진 날붙이를 단검으로 쳐냈다.
캉! 카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독이 묻은 듯 끈적한 날붙이들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인지 당황한 듯 암살자가 빈틈을 보였다. 그 모든 일이 벌어지기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으아아아! 저놈이야!”
“꺄아악!”
“익, 비켜! 비키라고!”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미 위치가 발각된 암살자를 피해서 공황에 빠진 사람들이 물살처럼 갈라졌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 채이는 우선 지혈하기 위해 쭈그려 앉아 상처를 감쌌다. 페르난데와 레오나드가 재빠르게 벤냑스와 채이를 보호할 즈음 델리온이 앞으로 나섰다.
“조용.”
그 장엄한 일갈에 섞인 위압적인 페로몬이 일순 퍼지며 장내를 가득 뒤덮었다.
“……!”
포식자가 제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공포감을 느낀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어서 하나둘 다리에서 힘이 풀리며 주저앉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와 레오나드의 페로몬에 보호받고 있던 채이도 순간, 심장이 서늘해졌을 만큼 농밀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었다.
그리고….
델리온의 흉흉한 눈이 기에 눌려 주춤거리고 있는 암살자에게 정확히 닿았다.
얼음장처럼 고요한 침묵 가운데.
“……! 컥…! 커헉!”
돌연 암살자가 고통스러운 듯 제 목을 움켜쥐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연신 켁켁대는 것이 숨쉬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채이가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자 페르난데가 작은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컴베스트 공의 이레귤러 이능향 때문에 저러는 거야.”
“이능향….”
“컴베스트 공은 향으로 물리적인 힘을 행사할 수가 있거든. 예를 들면.”
그때 새하얗게 질려 게거품을 물던 암살자가 기어이 눈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밀도 높게 응축시킨 향으로 상대 목구멍을 틀어막아 질식시켜 죽인다든가.”
이내 쓰러진 암살자의 몸은 풍선처럼 부풀다가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응축시킨 향을 체내로 집어넣은 다음 순식간에 부풀려서 터트려 죽인다든가.”
퍽!
터지고 말았다.
“…….”
사방으로 흩어진 살점만이, 생전에 그가 존재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무서운 힘이군.’
숨 막히는 침묵. 사람들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꼼짝없이 굳어서 바닥만 쳐다보았다. 그들이 지금 델리온에게 얼마나 큰 동요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채이는 그들과 달랐다. 훼손된 시체라면 질릴 정도로 봐 왔으니까. 그런 걸로 새삼스럽게 동요할 사람이 아니었다.
“처리해.”
델리온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채이의 시야가 누군가에 의해 가려졌다.
“채이.”
레오나드다. 그는 채이의 앞으로 자리를 옮겨 채이가 잔인한 장면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끔 했다.
“손은 괜찮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레오나드의 시선이 잔잔하게 채이를 응시했다. 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오나드가 눈을 내리떴다.
“상처 보여줘.”
그는 곧 비싼 옷을 찢어서 붕대 대신 상처에 감아 지혈을 도왔다. 제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쥔 레오나드의 손이 가냘프게 떨리고 있음을 느낀 채이가 한번 더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레오.”
그리고 지금은 긴장한 상태라 아픔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채이는 제 품에 안긴 채 말도 못 하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벤냑스가 더 걱정이었다. 레오나드가 제 상처를 봐주는 동안 채이는 벤냑스의 쪼그라든 등을 쓸어 주었다.
“이제 다 끝났어요. 괜찮아요?”
푹 수그린 벤냑스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채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슬쩍 고개를 든 벤냑스의 얼굴이 곧 발갛게 달아오르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읏,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날아오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손으로 냅다 잡은 제가 미련했던 거니까. 물론 가장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이 그거라 어쩔 수 없던 것도 있지만.
“죄송, 흑… 죄송해요….”
그런데 벤냑스는 아까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아무래도 죄책감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잘못하면 이 일이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으리라.
‘흠.’
잠시 벤냑스를 바라보고 있던 채이는 이내 무례한 행동임을 충분히 인지하고서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제야 벤냑스가 눈을 마주했다. 채이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죄송하다는 말보단 고맙다는 말이 더 좋은데요.”
그게 조금은 효과가 있었던 건지 벤냑스의 울음이 뚝 멎었다.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이던 벤냑스는 아까보다 더 얼굴이 빨개지더니 손을 수줍게 꼼지락거렸다.
“가… 감사합니다. 채이 님.”
응? 채이 님?
갑작스러운 경어에 어리둥절해 있던 채이가 편히 낮추라 말하려는데 갑자기 페르난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채이. 너 진짜 마성의 남자라도 될 셈이야? 도대체 몇 명을 꼬셔야 만족할 건데?”
그 말을 ‘대꾸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로 치부한 채이는 페르난데의 이마에 조용하고 강력한 딱밤을 놓았다.
“아야! 너 내가 만만하지!”
“먼저 맞을 짓을 했잖아.”
“난 사실만을 말한 거거든?”
귀족들은 여전히 숨죽인 채 눈치만 보고 있는데, 그들만 다른 세상이었다. 장내를 슥 훑어본 델리온이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조용한 귀족들을 향해 정중히 묵례했다.
“제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러고는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연회를 이어 갈 수 없을 듯하니 귀빈분들을 안전한 곳까지 모셔다드려라.”
가만 보면, 정말 사과하는 게 맞긴 한 건지 긴가민가할 정도로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무심하고 점잖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더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초대받은 이들은 이 지옥 같은 장소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으면 무엇이든 좋았던 모양이었다. 하나같이 도망치듯 우르르 나가버리니, 그레이트 홀이 금방 텅텅 비어버렸다.
“로렌스.”
“예.”
“넌 출입 명부 뒤져서 저기 죽어 있는 놈이 어디서 보낸 쥐새끼인지 조사해라. 클랭커스 공작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알겠습니다.”
델리온의 명을 받은 로렌스가 먼저 모습을 감췄다. 남아 있던 기사들이 피와 살덩이들을 치우자 뒤이어 하인들이 들어와 깨끗하게 정리를 시작했다. 이런 일에 제법 익숙해 보였다.
“윽….”
그즈음 채이가 따갑고 아픈 통증이 강해지기 시작하자 미간을 찡그렸다. 그뿐인데 아주 난리가 났다.
“채, 채이 님…!”
“괜찮아?!”
“채이! 많이 아파?”
호들갑도 그런 호들갑이 없었다. 그 호들갑을 가만히 지켜보던 베넷이 차분하고 기품 있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의료실로 안내하겠습니다. 힐링 워터가 구비되어 있으니 그걸 사용하지요. 레오나드, 곁에서 도와드려라. 벤냑스 공자도 함께 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