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화
“랭커스터의 위대한 주인이자 컴베스트 대공국의 거대한 지주이신, 델리온 디 컴베스트 랭커스터 공작 전하가 단상 위로 나오십니다.”
대화 나누고 떠드는 소리로 웅성웅성 시끄럽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단상 쪽을 돌아본 귀족들은 델리온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가슴에 한 손을 얹은 채 묵례를 했다. 에녹에게 가르침 받았던 채이도 따라서 묵례했다. 물론 페르난데도, 레오나드도. 이 자리에서만큼은 예외가 아니었다.
‘델리온….’
일찍 발현하지 못했단 이유로 아직 어렸던 레오나드를 사지로 몰아 죽이려 한… 잔인하고도 매몰찬 사람. 채이는 델리온에 대해 줄곧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의외였다.
베타 한 명을 불러내기 위해 정중히, 그것도 제 손으로 직접 쓴 초대장의 존재가. 물론 느낌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걸 판단할 순 없다. 없지만, 적어도 채이가 생각했던 델리온은 그런 섬세한 사람이 아니었다.
대체 그는 어떤 사람일까.
곧 상념에서 빠져나온 채이가 호기심에 힐끔 눈을 들어 단상으로 향하고 있는 델리온을 바라보았다. 멀기도 하고 고개를 빳빳하게 든 것이 아니기에 아마 시선을 눈치채긴 어려우리라. 그리 생각했는데….
‘아.’
아니었나 보다.
좌중으로 슬쩍 고개를 돌린 델리온의 푸른 눈동자가 정확히 채이에게 닿았다. 그 탓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
하지만 채이는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조금 더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시선이 끌린 탓이었다. 분명, 흑단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선명한 감청색 눈이 레오나드와 판박이였기 때문이리라. 나이를 짐작게 하는 깊고 중후한 눈매가 아니었더라면 레오나드라고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이내 멈춘 델리온이 정면을 돌아보고 서면서 자연스럽게 눈을 돌렸다.
“랭커스터 가의 또 다른 주인이자 컴베스트 대공국의 어머니이신, 베넷 디 컴베스트 랭커스터 공작부인 그리고 막내 아드님이신 할러드 디 랭커스터 공자님이 단상 위로 나오십니다.”
뒤이어 공작부인 베넷, 랭커스터 가의 막내 아들 할러드가 델리온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모두 모습을 드러내고 나니 귀족들은 그제야 편안하게 자세를 풀고 바라보았다. 곧 조용한 장내에 델리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 이 자리에 모두를 부른 것은 올해로 9살이 된 막내의 얼굴도 비추고 정식 후계로 정해진 랭커스터의 셋째 아들 레오나드도 소개하고 싶어서입니다.”
채이가 힐끔 레오나드 쪽을 돌아보았다. 레오나드는 정이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그저 냉담하게 단상 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자유롭게 대화들 나누고 마음껏 즐기다가 가십시오. 이상입니다.”
기다리고 있던 악단의 연주가 재개되었다.
귀족들도 본격적으로 사람들과의 사교를 즐기고 음악에 취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불렸다. 레오나드와 말 한번 섞고 싶어서 눈치를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다가오면 죽일 것처럼 흉흉한 눈을 하고 있으니 좀처럼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놈아. 눈매 좀 죽여.”
채이가 레오나드의 눈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콕 짚었다. 그 덕에 눈빛은 사르륵 풀렸지만 그는 여전히 보로통한 얼굴이었다.
‘나 참.’
얘가 이렇게 사람을 싫어했던가. 아니, 뭐. 원래도 사교성 좋은 애는 아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던 것도 잠시….
“안녕하세요, 레오나드 공자님.”
채이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유하고 참하게 생긴 예쁜 청년이 수줍게 다가와서 레오나드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레오나드. 인사 받아 주려무나.”
청년의 등 뒤쪽. 은빛에 가까운 화이트 블론드 색 머리카락과 오묘한 자주색 눈동자, 고상한 기품을 가진 여인이 점잖게 그를 다독여 왔다. 그녀는 아까 단상에서도 봤던 베넷 랭커스터였다. 그리고 그녀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델리온, 베넷의 다리 뒤에 숨어서 쳐다보는 할러드도 있었다.
델리온과 베넷은 페르난데에게도 짧은 눈짓으로 인사를 남기고 있었다.
‘그럼….’
또르르 아래로 떨어진 채이의 시선이 수줍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에게 닿았다. 채이보다 조금 작은 키에 가느다랗고 곱슬거리는 블론드 색 머리카락. 맑은 호수를 담아둔 듯 청량한 에메랄드 눈동자. 우유처럼 뽀얗고 맑은 피부와 오밀조밀하여 귀여운 생김새. 거기다 툭 치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여리여리한 것이 살아서 움직이는 인형을 보는 듯한 청년이었다.
‘귀여워라. 병아리 같네.’
분명한 건 이 청년이 대체로 뚜렷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레오나드의 가족들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핏줄은 아닐 것이고….
‘혹시?’
연회장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골인하게 된다던… 바로 그 레오나드의 짝인가!
음. 아무래도 맞는 듯하다.
‘어쩜 천상배필이구나.’
이토록 비주얼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니. 채이는 감동했다.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아기 새처럼 순박한 느낌에, 성격도 좋아 보이는 아이니까 분명 레오나드와 잘 지낼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끄응.’
레오나드의 고요한 침묵에서 왠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눈을 내리뜰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청년이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말을 이었다.
“아. 이름은, 벤냑스 디 코네러라고 해요. 제 아버지는 클랭커스 공작님이시고 나이는 이제 스물세 살입니다. 참, 그리고 우성 오메가이고요. 잘 부탁드려요.”
그런데도 여전히 침묵.
델리온이 피곤한 듯 눈가를 매만지고, 베넷은 어느 정도 예상한 상황인 듯 작은 한숨과 함께 눈을 내리떴다.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있는 게 빤히 보이는데도 레오나드는 끝까지 그의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벤냑스는 혹시 자신이 잘못한 점이 있나 싶었는지 안절부절못했다.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아이였다.
‘웬만하면 랭커스터 가족 일에 끼어들고 싶진 않았지만….’
안쓰러워서 슬쩍 눈을 흘긴 채이가 결국 가만있지 못하고 레오나드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러자 레오나드의 눈이 채이에게로 흘깃 향했다. 그 순간만큼은 순둥순둥하게 눈빛이 풀리는 레오나드였다.
“뭐 해. 얼른 인사 안 받아 주고.”
가자미눈을 한 채이가 마치 속사포를 던지듯 빠르고 작고 낮은 목소리로 질책하니 레오나드가 불만스레 입매를 비틀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페르난데는 심각한 상황임을 잊고 웃음이 터질까 봐 입을 막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신경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레오나드는 점점 날 서는 채이의 화난 눈빛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레오나드 랭커스터입니다.”
끝내, 신경전에서 패배한 레오나드가 먼저 벤냑스에게 손을 내밀고 말했다. 그러자 조금 놀랐는지 둥글게 눈을 뜬 벤냑스가 봄에 핀 꽃처럼 화사한 얼굴로 레오나드의 손을 맞잡았다.
“네! 잘 부탁드려요!”
아주 보기에 흐뭇한 장면이었다.
“잘했어.”
만족스럽게 미소 지은 채이가 작게 속삭이며 레오나드의 등을 도닥였다. 그제야 레오나드도 떨떠름해 보이던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채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유심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델리온과 베넷은 겉으로 크게 드러내진 않았지만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레오나드의 의지를 굽힐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레오나드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아이였다는 사실에.
“레오랑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앗, 혹시 그 베타 님….”
“아. 절 아세요?”
“말했잖아. 너 유명하다니… 악!”
“채이한테 손대지 말라고.”
채이가 벤냑스에게 먼저 말을 붙이자 페르난데와 레오나드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대화를 방해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잠시 침묵하고 있던 델리온이 말을 꺼냈다.
“식사도 할 겸 앉도록 할까.”
그러고는 덧붙였다.
“자네도 괜찮다면 함께 하지.”
정확히 채이를 돌아보고서.
“…불편하지 않으시면 그러죠.”
“그래. 따라오거라.”
델리온이 먼저 움직이자 그 뒤를 따라 베넷과 할러드가 걸음을 옮겼다. 이후 벤냑스와 페르난데가 따라가고 한차례 채이와 시선을 교환한 레오나드도 천천히 걸음을 뗐다.
솔직히 채이는 당황스러웠다.
설마 식사 자리까지 제안할 줄은 몰랐기에. 생각보다 훨씬 정상적이고, 배려가 무엇인지도 아는 자였다. 줄곧 가지고 있었던 편견이 조금씩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 한구석은 불편해졌다. 일면식도 없는 베타 평민과 포크는 들 수 있으면서, 어린 핏줄은 그리 내쳤던 거냐고. 레오에게 꼭 그리 매몰찼어야만 하냐고. 델리온에게 묻고 싶어졌다.
‘여기서 그래선 안 되겠지만.’
조용히 한숨 지은 채이가 레오나드의 뒤를 따라 걸을 때였다. 마침 그 모습을 보고 만 건지 벤냑스가 슬쩍 걸음을 늦추더니 우물쭈물 채이 옆으로 다가왔다.
“채이… 공? 어디 불편하세요?”
아무래도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정말 마음씨 고운 사람이었다. 채이가 피식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 주었다. 아니, 그러려던 찰나였다.
핑!
1초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등 뒤에서부터 날카로운 소음이 들려왔다. 정체 모를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면서 날아오는 것을 감지한 채이는.
텁.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뻗어 벤냑스의 등에 꽂힐 뻔한 그 ‘무언가’를 날렵하게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