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화
“갹, 채이 님! 너무 멋있어요.”
“어쩜 이렇게 잘생기셨을까.”
“채이 님. 실례되는 말인 줄은 알지만 귀여우세요…. 레오나드 공자님이 그토록 아끼시는 이유를 알겠다니까요.”
“맞아, 맞아.”
에녹이 데리고 온 시종들과 하인들은 자신들이 꾸며둔 채이를 거울 앞에 앉혀 둔 채 마구 호들갑 떨었다.
앞머리를 모두 뒤로 넘겨 정갈하고 예쁜 이마는 시원하게 드러내고 입술엔 점성이 약간 있는 보호제를 발라서 촉촉하게 만들고. 옷은 조끼, 목깃, 소매 부분에만 금색 자수가 놓인 흰색으로 맞추었으며 실크 천으로 만든 크라바트에는 옥구슬 브로치를 꽂아서 과하게 화려하지는 않으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고.
그렇게 공들여 꾸민 채이의 모습은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미경(美景)이었다.
레오나드가 진한 이목구비를 가지고도 차가운 미인이란 인상을 준다면 채이는 유려한 이목구비를 가지고도 귀여운 미남이란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물론 채이 본인은 칭찬이 과하다고 생각하여 멋쩍어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슬쩍 눈을 든 채이가 거울 속 모습을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이렇게 보니 잘생기기는 했네.’
이 몸뚱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만큼 그는 치장에 관심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잘생긴 얼굴이 보고 싶으면 레오나드의 얼굴을 보지, 제 얼굴을 볼 필요는 없었기에 지금껏 등한시해 왔었다.
‘뭐. 못생긴 것보단 잘생긴 게 낫긴 해. 전생의 나보다 키가 작아진 건 아쉽지만.’
채이가 거울 속 제 모습을 보고, 나름 객관적인 감상을 내놓으며 만족할 때였다.
“준비 끝났어?”
문이 딸깍 열리더니 레오나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마중 나와준 모양이었다.
“응. 다 끝났….”
채이가 대수롭잖게 고개를 돌리며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어.”
문 너머에서 빼꼼 드러난 레오나드의 모습을 보는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하나둘 문 쪽을 돌아본 시종들과 하인들도 입을 틀어막고 헛숨을 삼켰다. 저게 진짜 같은 인간이 맞나. 평소보다 화려한 옷을 걸치고 평소와 다른 모양새로 머리를 다듬었을 뿐인데… 이미 최고치를 찍고 있던 잘생김이 더욱 빛을 발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게 바로 ‘개안한다’는 거구나.
너무 놀란 탓인진 몰라도 심장이 마구 덜컥거려서 조금 정신이 없었다. 정작 모두의 이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레오나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그저 채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가자. 채이.”
“아, 어. 그래.”
괜히 얼굴을 보기가 버거워서 조금 시선을 비켜낸 채이가 레오나드를 따라 저택을 나섰다. 연회가 열리는 그레이트 홀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은 평소와 달리 조용하여 별다른 대화를 이어 나가지 못했다.
‘어색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낯선 느낌이 드는 걸까. 레오나드의 잘생김에 감탄하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도 이 정돈 아니었는데….
‘뭐가 달라진 거지.’
그때의 레오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아니. 하지만 지금도 레오가 나보다 훨씬 어린 놈인 건 자명한 사실 아닌가. 제대로 된 이유를 알 수 없어 상념에 잠겨 있는데 문득 레오나드의 손가락이 무심히 뻗어와 채이의 뺨을 툭 건드렸다.
그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 일렁이며 일어나는 듯했다.
동시에 정체 모를 두려움도 함께 일어났기에 슬쩍 고개를 옆으로 내뺀 채이가 토끼 눈을 뜨고 그를 돌아봤다. 채이를 힐끔 쳐다보고 있던 레오나드는 시선이 마주치니 다시 정면을 돌아보고 말했다.
“채이는 진짜 안 늙는 거 같아.”
“…그래?”
“응. 오늘 평소보다도 더 예쁘다, 채이. 계속 눈에 담아 두고 싶을 정도로.”
“너만 하겠냐마는… 고맙다.”
머쓱하게 웃던 채이는 대화에 물꼬도 트인 김에 한결 편한 얼굴로 장난스레 덧붙였다.
“지금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 나중에 더 늙으면 그런 소리 못 할 테니까.”
그러자 레오나드가 작게 웃었다.
“나는 채이가 늙어서 할아버지가 돼도 지금이랑 똑같이 말할 거라고 장담하는데.”
“왜?”
“나한테 있어 채이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사람이거든.”
“…….”
대화는 거기서 끊겨버렸다. 순간 고백을 받은 건가 착각해버릴 만큼 오묘한 말에 당황한 채이가 받아칠 타이밍을 놓친 탓이었다.
‘얘는 농담이 날로 느네.’
심장도 당황한 건지 어지럽게 뛰어댄다. 뭔가 열이 오르는 것 같아서 채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이 어색한 침묵을 어떻게 끝내야 하나, 생각할 때였다. 다행히 두 사람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채이. 다 왔어.”
“…아.”
레오나드가 먼저 걸음을 멈춰 서길래 채이도 멈춰서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벌써 대문이 보일 만큼 내려온 상태였고 바로 코앞에는 메인 하우스만큼이나 큰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이 연회장으로 쓰이는 그레이트 홀인 듯했다.
채이는 레오나드와 함께 아치 형태로 입구가 뚫려 있는 그레이트 홀 안으로 들어갔다. 짙은 색 대리석을 입혀 톤 다운시킨 깔끔하고 화려한 바닥. 그 위에 미리 세팅된 테이블에는 벌써 각종 음식들과 와인이 오르고 있어서 고소하고 향긋한 내가 가득 느껴졌다. 천장은 소리를 잘 전달하기 위함인 듯 아주 높고, 우물 정자 형태의 격자가 연속된 구조로 디자인이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홀로 진입하기 전부터 들려온 악기의 아름다운 선율이 웅장하게 울리며 귀를 즐겁게 했다. 그리고 장식으로 쓰기 위해 천장에 매단 수많은 샹들리에들은 어두운 건물 안을 화사하게 밝히고 있었다.
“오….”
채이는 감탄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상당수의 사람들이 홀에 모여 있었지만 워낙 거대한 건물이라 갑갑함도 없었다.
“어, 채이!”
그때 저만치서 두 사람을 발견한 페르난데가 채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이목을 끈 걸까. 군데군데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귀족들이 하나둘 채이와 레오나드 쪽을 힐끔거렸다. 두 사람 사이에 페르난데까지 끼어들자 지켜보는 시선은 더욱 많아졌다. 소문에 밝은 귀족들은 레오나드와 페르난데 사이에 낀 의문의 사내가 바로 ‘그 베타’라는 걸 이미 눈치챈 상태였다.
“저 남자가 그 베타인가.”
“무슨 수로 저런 총애를….”
“반반한 외모로 꼬셨을지도.”
일부는 채이의 존재를 시기해 수군거렸고 일부는 궁금한 눈치로 세 사람을 은밀하게 관찰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달갑지 않은 관심에 심기가 불편해진 레오나드가 페로몬을 옅게 내리깔았다.
그러자 금세 겁먹은 귀족들이 입을 다물고 눈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앙칼스러운 레오나드의 페로몬을 느낀 페르난데는 그를 한 번 쳐다본 후 피식 웃음을 뱉어버리곤 다시 채이를 돌아보았다. 페로몬에 민감한 알파, 오메가들만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양이라 베타인 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누구 홀리려고 이렇게 멋들어지게 꾸미고 왔어? 그러다 진짜 큰일 난다, 너.”
“또 헛소리하네.”
“헛소리라니. 걱정해주는 건데.”
실실 웃던 페르난데가 채이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손등을 탁 내리치는 레오나드에 의해 금방 저지되었지만.
“아, 씨! 아프잖아.”
페르난데가 발개진 손등을 문지르며 눈을 세모꼴로 뜨고 노려보았다. 그렇다고 레오나드가 주눅 드는 법은 없었다.
“함부로 손대지 마.”
“야. 됐고 너 빨리 사람들한테 인사나 하러 가지 그래? 기껏 불러 놓고 얼굴 안 비추면 쟤네 체면 구기는 거 몰라?”
물론 페르난데는 정말 체면 구길 귀족들이 불쌍해서 그런 이유를 들먹인 게 아니었다. 그냥 어떤 이유라도 좋으니 ‘이 녀석이 좀 어디론가 사라져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레오. 가서 인사하고 와.”
반면 채이는 페르난데와 다른 생각을 하고 맞장구쳤다.
확실히 랭커스터 가의 정식 후계자로서 저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일 필요는 있으리라고. 우성 알파로서의 힘과 권력이 워낙 막강해 솔직히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 한들 공포와 억압만으로는 많은 인심을 얻기 힘든 법이니까.
채이는 레오나드가 미움받는 사람보다는 만인에게 호감을 사는 사람으로 남길 바랐다.
“그런 건 가주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가 안 해도 괜찮아. 난 채이랑 있고 싶어.”
“너도 그 뒤를 이을 사람이니 언젠가는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니야? 지금부터 경험하고 배워 두는 것도 중요해.”
“하지만….”
레오나드가 불만인 듯 입술을 감쳐물었다.
아마 이 모습을 레오나드의 가족이 본다면 경악하여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델리온도 채이와 같은 생각이었지만… 채이처럼 잔소리를 하진 못하기 때문에. 레오나드에게 지은 죄가 많은 친혈육들은 감히 그를 향해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했다.
“다음에 할게. 지금은 싫어.”
“레오….”
“야. 채이도 가라잖아. 빨리 가.”
대화 중 페르난데가 불쑥 끼어들자 시무룩하게 채이를 바라보던 레오나드가 금방 매서워진 눈으로 페르난데를 노려보았다. 채이는 또 레오나드에게 시비 걸기 시작하는 페르난데의 등짝을 찰싹 때려 주었다.
“넌 가만히 있어, 요 녀석아.”
애들은 싸우며 정든다지만 그것도 정도껏 해야 하는 법이었다.
“아야! 왜 때려.”
“네가 매를 벌잖니.”
페르난데의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채이 등 뒤에 서 있는 레오나드의 표정이 의기양양해서 더 짜증이 났다.
‘으으. 저 여우 같은 놈.’
채이가 돌아보자 금방 아기 사슴처럼 가련한 표정을 짓는 레오나드를 본 페르난데가 아주 질색을 했다. 채이는 그런 것도 모르는 채, 자신과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하는 레오나드를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였다.
돌연 악기 연주가 멈추더니 집사장으로 보이는 노년의 사내가 델리온의 행차를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