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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29화 (29/105)

029화

그 일이 있고부터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레오나드는 이번에도 금방 평소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일이 일찍 끝난 날은 언제나 채이를 찾아오고, 페르난데와 말다툼하고, 채이와 식사를 함께 하고, 밤늦게 돌아가고…. 결국 최근 들어 레오나드와 삐거덕대는 일이 많았던 이유는 또다시 알 수 없게 되었다. 레오나드가 의도적으로 그와 관련된 언급을 회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 굳이 나서서 물어보는 것도 애매했다.

하여 채이는 불안한 감정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 잠시 묻어 두기로 했다.

“채이 님? 혹시 지루하신가요?”

일전의 일을 떠올린 채이가 스스로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어버린 것 같다. 오랜만에 레오나드가 바빠서 오지 않고 페르난데도 찾아오지 않아서, 채이와 단둘이 여가 시간을 보내는 중이던 에녹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냐. 잠시 딴생각한 거야.”

미안해진 채이가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에녹은 변명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딘가 영 시원찮은 얼굴로 차를 홀짝이고 있던 에녹이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손뼉을 쳤다.

“아, 참! 채이 님은 그거 아세요? 닷새 뒤에 랭커스터의 그레이트 홀에서 연회가 열린다는 거요.”

“연회?”

“네! 랭커스터 가가 주관하는 연회요. 제법 크게 여는 연회라 랭커스터와 연이 있는 귀족들은 대부분 찾아올 거예요.”

아. 혹시 그 연회가 그건가. 채이는 적당히 맞장구치면서 다른 생각에 잠겼다. 레오나드와 그의 오메가 짝이 첫만남을 가지는 연회…. 이번 연회도 랭커스터 가에서 주관하는 거라고 하니까 아마 친구가 말했던 그 연회와 동일한 게 맞을 터였다.

‘닷새 뒤.’

드디어 만나게 되는 거구나.

그 두 사람이.

이 세계에 처음 빙의하고 숲속에서 레오나드와 만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결혼을 생각할 나이가 됐다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레오나드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그 오메가 짝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었기에 어떤 사람일지도 무척 궁금해졌다.

‘분명 좋은 아이겠지?’

하지만 채이는 랭커스터 가의 일원이 아니었고 연회에 초대를 받을 만한 귀족도 아니었다. 연회가 열리는 당일에 채이가 그곳에 접근할 일은 없을 것이니 레오나드의 짝을 만나게 될 일 또한 없었다. 아쉽지만, 그래도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레오나드와 이어지게 된다면 언젠가 한 번쯤은 만나게 될 아이니까.

‘잘 됐으면 좋겠네.’

그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 연회가 열리기까지 이틀만을 남겨 둔 날이다. 채이는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씻고 페르난데와 함께 산책을 다녀온 뒤, 이제 막 오닉스 저택에 도착한 참이었다.

“채이 님!”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로 마중 나온 에녹이 다급히 외쳤다. 그에 체력 부족으로 헐떡이며 엄살떨던 페르난데가 고개를 들었다. 그 옆을 나란히 걷고 있던 채이도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이거… 이거 보세요!”

에녹은 채이 앞까지 달려와 가쁜 숨부터 가다듬은 후 한 장의 봉투를 겨우 내밀었다. 그 봉투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종이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뒤로 돌려보니 빨간 실링 왁스로 봉인까지 되어 있었다.

문제는 실링 왁스에 찍힌 인장의 문양이 ‘랭커스터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라는 점이었다. 거기다, 받는 이에는 채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으니 잘못 도착한 것도 아니었다.

‘누가 보낸 거지?’

랭커스터 가의 문장이긴 하나 보낸 이가 레오나드일 것 같지는 않았다. 레오나드라면 직접 전달해주거나 말로 하면 됐을 테니까. 특히 바쁜 날 말곤 거의 매일 만나는데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할 이유는 없었으리라.

그리고 이렇게 봉인하는 건 중요한 편지이거나 누군가를 정중히 초대할 때 정도다…. 채이가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즈음 에녹이 숨을 가다듬느라 미처 하지 못했던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연회 초대장이에요, 채이 님! 랭커스터 가주님께서 채이 님 앞으로 초대장을 보내신 거니까 얼른 열어 보세요!”

그걸 들은 채이의 머릿속에는 그저 ‘나는 갑자기 왜?’라는 의문만이 동동 떠다녔다. 당황스럽고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기쁘다기보다는 떨떠름했다. 어쨌든 열어 보라고 하니 실링 왁스를 깨트려 봉인을 풀고 안에 있던 연회 초대장을 꺼냈다.

보내는 이의 이름은 델리온 디 컴베스트 랭커스터.

역시나 받는 이는 채이로 되어 있었다. 또한 이 초대장만 따로 만든 듯 신분에 연연해 두려워하지 말고 꼭 얼굴을 비춰 달라는 지극히 사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것도 제 손으로 직접 쓴….

형식적이지 않은 초대.

편지에서 드러나는 정중한 어투.

채이는 더더욱 기분이 묘해졌다.

‘무슨 의도로 보낸 걸까.’

단순한 호기심인지 뭔지. 더군다나 일개 베타 평민인 자신은 귀족들의 사교 모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무했다. 괜히 갔다가 실수라도 하면 어떡하는가. 스스로 비웃음을 사는 건 상관이 없다. 걱정인 건, 그런 자신의 실수 하나하나가 레오나드에게 해악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그래서 갈 건가?”

어느새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페르난데가 덤덤하게 물었다.

걱정하는 채이와 달리 그는 랭커스터의 가주가 채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제 아들인 레오나드는 물론 페르난데까지 찰싹 붙어서 유일하게 관심을 쏟는 자였으니까. 알음알음 소문을 들어 온 자들은 아마 누구라도 채이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을 터였다.

레오나드가 채이를 꼭꼭 숨기려 하는 것 때문에라도 더더욱.

물론 다른 이도 아닌 ‘그’ 대공이 베타 평민을 귀족들의 사교장에 직접 초대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놀라웠지만 말이다.

“음. 고민되네.”

손바닥으로 뺨을 받친 채이가 흐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침 기다렸다는 듯 끼어든 에녹이 눈을 반짝였다.

“드레스 코드와 규칙을 숙지하는 게 어려울까 봐 그러시는 거면, 제가 성심껏 도와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에녹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냥 가는 게 낫다는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운다. 솔직히 채이 자신을 특정하여 보낸 편지 내용 때문에 무시해버리거나 초대를 거부하기에도 신경이 쓰이는 상황이던 까닭에.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자.’

안 그래도 레오나드의 배필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지 않았나. 가서 귀족들의 사교 모임은 어떤 느낌인지 체험하고 레오나드의 배필도 미리 만나 볼 수 있다면 일석이조이리라. 그렇게 결정 내린 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부탁할게, 에녹.”

“좋아요!”

채이의 답을 얻어낸 에녹이 유독 신이 난 얼굴로 활짝 웃었다. 채이는 모르고 있겠으나 그는 벌써부터 채이에게 어떤 옷을 입히고 머리는 어찌 손질하면 좋을지 상상하며 행복하게 즐기고 있었다. 타고나길 원체 훈훈한 미남상인 데다 신체 밸런스가 좋은 채이였기에 조금만 꾸며도 훤칠하여 눈이 즐거울 테니까.

한 번쯤은 꾸며 주고 싶은 욕망이 있던 에녹이었다. 어쩌면 그로 인해 레오나드의 심기는 조금 불편해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때 상황을 잠시 지켜보던 페르난데가 지나가듯 심상한 투로 중얼거렸다.

“나는 딱히 갈 생각 없었지만, 네가 간다면 나도 가야 할 이유가 생겼네.”

“무슨 이유?”

“같이 가서 네 옆에 있으려고.”

채이랑 시간을 보내는 건 재미있다. 그리고 베타 평민이란 이유로 혹시 모를 ‘배척’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불쾌했다. 페르난데는 자신이 신분적으로는 그를 지켜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든가.”

물론 그런 마음을 알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긴 채이가 초대장을 대충 구겨 주머니에 넣을 즈음이었다.

“채이.”

등 뒤에서 레오나드의 부름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바삐 온 건지 레오나드의 머리카락이 살짝 헝클어져 있었다.

“가주가 너한테도 연회 초대장을 보냈다고 하던데. 그거 사실이야?”

소식 듣고 한걸음에 온 건가.

“응. 안 그래도 방금 받았어.”

채이가 주머니에 넣다 만 봉투를 설렁설렁 흔들며 보여 주었다. 그러자 레오나드가 설핏 미간을 구겼다. 어딘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자연스레 다가와 페르난데와 채이 사이를 갈라놓고 말했다.

“초대에 응할 거야?”

“꼭 오라니까, 한번 가 보려고.”

채이는 자신도 모르게 이끌린 듯 손을 뻗어서 레오나드의 뽀얀 뺨을 감싸 쥐었다. 왜일까. 스스로도 알 수 없다. 다만 추측하자면, 그가 위태롭고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꼭 아기 고양이처럼 손바닥에 뺨을 비빈 레오나드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내리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실수 안 하게 조심할게.”

“그런 게 아냐. 음해 세력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어. 이런 때 경비가 허술해지니까.”

“그럼 네가 더 조심해야지. 날 노리는 사람보다 너를 노리는 사람이 더 많을 텐데.”

그리고 그런 위험이 있다면 더더욱 가서 지켜볼 필요가 생긴다. 행여나 레오나드가 다치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채이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레오나드가 다치는 모습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너무 걱정하지 마.”

“…알겠어.”

결국 레오나드가 먼저 뜻을 꺾었다. 채이가 이런 식으로 완강해지면 레오나드는 이길 수 없었다.

“내가 채이 옆에 있을 건데 괜한 걱정이군. 너는 그날 네 할 일이나 열심히 하고 다니도록.”

“죽고 싶으면 계속 지껄여.”

“와. 무서워, 무서워. 아야!”

깐족거린 페르난데가 히죽대기에 채이가 그만 싸우라고 등짝을 때려 주었다.

그렇게….

연회 당일 아침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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