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화
이후로도 페르난데는 레오나드가 수차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채이를 만나기 위해서 오닉스 저택을 찾았다. 더군다나 그는 현재 가주의 허락하에 비어 있는 셀레니티스 저택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 아침 얼굴을 비추었다. 이제부터 운동할 거라는 빌미로 채이와 산책도 함께 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그 이상의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가 저택 내부까지 들락날락하는 건 아니었고 아직 후계자일 뿐인 레오나드가 가문끼리 감정적으로 얽힐 수 있는 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취할 순 없었던 거다. 자칫하다가는 일이 귀찮아질 테니까. 가주를 찾아가서 긴밀히 부탁을 해 본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아무튼….
레오나드는 최근, 페르난데의 존재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 찾아오는 것 자체는 사실 상관없는데 문제는 페르난데가 딱 보아도 채이에게 남다른 관심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와중 채이도 페르난데를 귀찮게 여기지 않으니, 이 이상 두 사람의 관계가 친밀해질까 봐 레오나드는 항시 불안했다.
하여 그는 최근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다크서클도 거뭇거뭇이 내려앉아 굉장히 피곤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채이는 레오나드가 최근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 줄 알고 걱정했다.
“레오, 괜찮니. 잠은 푹 잤고? 일 너무 많은 날은 안 만나러 와도 되는데….”
그런 반응이 레오나드의 속을 더 태운다는 것을, 안타깝게도 채이만 몰랐다.
“들어가서 좀 쉴래?”
“그래. 넌 들어가서 좀 쉬어.”
그때 채이 맞은편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던 페르난데가 옳다구나 동조했다. 채이는 ‘그래도 친구라서 걱정해주는가 보다’ 생각했지만, 레오나드가 보기에는 분명 다른 의도가 있는 동조였다.
레오나드가 매서운 눈초리로 페르난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리 볼 테면 보란 듯 당당히 마주한 그는 눈썹 한 올 움찔하지 않았다.
돌연 레오나드가 옅게 숨을 내뱉더니 금세 차분해진 눈으로 페르난데를 흘겼다. 반면 이제 곧 터지겠구나 싶어 속으로 킥킥대던 페르난데는 슬쩍 올라가려던 입꼬리를 굳혔다. 채이와 가까이 앉아 있던 레오나드가 갑자기 어지러운 척을 하면서 채이의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대는 것이 아닌가.
“채이랑 있어야 마음이 편해. 근데 햇빛 때문에 머리가 더 아픈 거 같아서…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될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이는 수작질이다. 연약한 척하기는. 페르난데가 보기에 그보다 더 눈꼴사나운 짓거리도 없었다. 하나 채이의 둔감함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햇빛 때문에 머리 아프단 레오나드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채이는 잔뜩 걱정하며 레오나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겠어, 그럼. 도서관은 어때?”
오닉스 저택 내부 도서관은 상당히 넓어서 갑갑한 느낌이 없고 조용하며 햇빛도 창가 쪽 말곤 잘 들지 않는다. 그곳이라면 레오나드가 한숨 쉬기에 딱 좋으리라. 겸사겸사 채이는 가서 책을 읽으면 되니, 두 사람 모두에게 아주 적절한 공간이었다.
물론 채이가 그런 합리적인 추론을 내리는 동안 레오나드는 채이와 단둘이 남을 수만 있다면 그게 어디든 좋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지만.
“좋아.”
레오나드가 그리 답하고 먼저 일어났다. 그 뒤를 따라 채이도 일어났다. 그러다 뒤늦게 생각이 난 채이가 페르난데를 돌아보았다. 그는 뚱한 얼굴로 채이와 레오나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혼자 두고 가긴 미안한데.’
그렇게 생각한 채이가 함께 가지 않겠냐고 말하려던 것도 잠시… 눈치 빠른 레오나드가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너는 이만 돌아가.”
워낙 단호한 어조였기 때문에 채이도 그의 결정을 번복시킬 순 없었다. 어쨌든 이 집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레오나드에게 있고 그가 들여보내기 싫다고 하면 채이는 따를 뿐이었다.
“쯧.”
결국 혀를 찬 페르난데가 순순히 포기하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간 지켜본 바 채이에게도 레오나드는 우선순위가 높은 인물임을 알았기에 이렇게 되면 페르난데는 끼어들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채이에 대해 알아갈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아직 마음의 방향이 확실해진 것도 아니었기에 지금은 마음 터놓고 지내는 친구 정도로도 좋았다. 페르난데는 너무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내일 또 보자.”
“그래. 조심히 들어가.”
채이는 평소보다 빨리 떠나게 된 페르난데에게 손짓한 후 그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을 때 레오나드를 돌아보았다.
“레오. 너도 얼른 쉬러 가자.”
그렇게 두 사람은 오닉스 저택의 도서관으로 곧장 향했다. 도서관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이제 막 들어간 채이와 레오나드뿐이었기에 굉장히 아늑하고 조용했다. 레오나드에게 먼저 앉아 있으라 얘기한 채이는 책장에서 읽을 책을 골랐다. 다시 자리로 돌아갔더니 레오나드는 아까보다 훨씬 개운한 얼굴로 늘어져 앉아 있었다.
“머리 아픈 건 좀 어때.”
“이제 괜찮아졌어.”
“그러니? 다행이다.”
물론 레오나드는 얄미운 페르난데를 오늘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후련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나…. 그 엉큼한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이는 그저 안도하고 있었다.
“채이. 옆자리에 앉아도 돼?”
“마음대로 해.”
채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고, 옆자리로 건너온 레오나드는 단정한 채이의 옆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락… 사락.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는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채이가 책 속 글자에 집중하고 있을 무렵 불현듯 부드러운 손길이 목덜미에 와 닿았다.
“……?”
한참 조용히 있던 레오나드가 목덜미에 닿는 채이의 뒷머리를 슬쩍 건드린 탓이었다.
‘심심한 건가.’
책을 읽는 도중이라 흘러가듯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스락대는 기척이 들렸다. 그러고 잠시 후, 채이의 목덜미로 따뜻한 숨결이 떨어졌다.
뭐지?
채이가 자신도 모르게 신경이 쏠려 있는 사이 무언가 말캉한 감촉이 맞닿았다. 순간 단전에서 꿈틀대는 야릇한 기분에 퍼드득 놀란 채이가 목덜미를 붙잡고 뒤로 크게 물러났다.
“뭐, 뭔데.”
레오나드는 기겁하며 도망가버린 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테이블 위로 몸을 엎드렸다.
“난 신경 안 써줘?”
“심심하면 너도 책 읽어.”
“채이랑 대화하고 싶어.”
나 참, 그럼 말로 하면 되지. 이해할 수 없는 투정에 채이가 작게 한숨 지을 때였다.
“채이가 나한테만 신경 쓰고 나만 봐줬으면 좋겠어. 채이에게 있어서 가장 크고 중요한 존재가 나였으면 좋겠어.”
기다란 속눈썹을 너풀 내리뜬 레오나드가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빼앗길까 봐 무서워.”
그걸 들으니 왠지 모르게 말문이 막히는 것 같다. 평소의 레오나드인 건 분명한데 갑자기 그의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쨌든 채이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으나, 뭔가 마음 상한 일이 있었던 것이리라. 어린 시절 의지할 곳이라곤 채이뿐이었던 기억 탓에 조금 더 관심을 갈구하는 걸지도 모르고.
그리 짐작한 채이는 정갈한 이마를 드러내고 있는 레오나드의 앞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런 걱정 안 해도, 넌 이미 나한테 있어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야. 앞으로도 그럴 거고. 예를 들면 친자식처럼 말이지.”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채이는 레오나드를 혈족인 양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감정에 거짓은 없다.
그리고 채이는 레오나드 또한 자신과 같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 안심할 거라고도. 하지만, 반대였다.
“…그뿐이야?”
“응?”
“정말 그뿐이냐고.”
레오나드는 좀처럼 바꿀 수 없는 인식의 평행선에 절망했다.
“나는 언제쯤이면, 그 이상이 될 수 있는데?”
하늘을 나는 듯 좋은 기분이었다가도 이렇게 한순간 곤두박질쳤다.
“언제쯤이면….”
흔히 노력하고 인내하면 그 결실을 언젠가 이룬다고들 하는데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닌 게 분명하다.
레오나드는 괴로운 얼굴을 팔 안쪽에 숨겼다. 답답하면서도 무서웠다. 자칫 선을 넘었다가 지금의 관계조차 어그러질까 봐. 물론 죽을 때까지 채이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한들, 제 곁에서 놓아줄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레오나드는 두 사람 다 행복할 수 있는 미래를 최대한 바라고 있었다.
“레오?”
걱정스러운 채이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린 레오나드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채이의 뺨을 한 번 쓸고 떨어졌다. 주춤한 채이가 입술을 오므렸다.
‘…그 이상이 뭘 말하는 거지.’
채이는 레오나드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 말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어쩌면… 채이 본인이 스스로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나, 아는 게 두려워서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채이가 침묵하자 레오나드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가려는 거다. 그에 당황한 채이가 고개를 들었다.
“벌써 가는 거야?”
“응. 내일 올게.”
그 통보가 갑작스러웠던 탓일까. 채이는 조금 섭섭해졌다. 그렇다면 붙잡으면 될 문제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몰라도 머뭇거리게 돼서 그를 냉큼 붙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레오나드는 이른 시간 도서관을 떠났다.
입구 쪽을 한참 바라보았던 채이가 다시 책을 펼쳤다.
하지만 더 이상 책 속 글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요즘 레오랑 자주 삐거덕거리는 느낌이야….’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만 있다면, 해결할 방법이라도 찾아볼 텐데 말이다.
“하아.”
채이는 본인이 레오나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점점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가끔은 그 아이의 존재가 한없이 낯설게 다가오기도 하였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런 걱정에 좀처럼 읽히지 않는 책을 기어이 덮어버린 채이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가슴 부근이 꽉 막혀버린 것처럼 갑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