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화
“레오 거는 이걸로 두 개 사고.”
곧 상념을 털어낸 채이가 레오나드에게 줄 선물로 머리핀 하나, 브로치 하나를 골랐다. 로렌스에게 줄 브로치도 하나 고른 다음은 에녹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에녹. 너는 다 골랐니?”
“아, 네!”
“그래? 그럼 이만 돌아가자.”
그렇게 채이는 모두의 선물을 챙기고서야 가게를 나섰다. 그 전만 해도 손님들이 다 도망가서 근심 가득해 보였던 주인장은 채이가 값비싼 물건들을 사 들고 나가자 금방 온화해져서 그들을 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채이 님. 주신 선물은 소중히 잘 간직할게요.”
에녹이 제 목에 걸어둔 목걸이를 보면서 기쁘게 웃었다. 레오나드도 채이의 손등에 입을 맞춰 고마움을 표했다.
“나도 잘 쓸게.”
두 사람의 기뻐해 주는 모습에 채이도 뿌듯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날 저녁 저택에 도착한 채이는 레오나드와 함께 저녁 식사를 끝마친 뒤,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낸 로렌스에게도 선물을 건넸다. 솔직히 로렌스의 것은 본인이 직접 보고 고른 게 아니었던 탓에 마음에 들지 몰라 걱정했는데….
“제 것도 챙겨주실 줄은 생각 못 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에이. 당연히 챙기죠. 누구보다 고생해주고 계신데.”
“채이 님… 으흑, 제 고생을 알아봐 주시다니….”
다행히 로렌스도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훌쩍이면서 기뻐해 주어 머쓱해질 정도였다.
아무튼, 이런저런 일들이 있긴 했지만 즐거운 하루였던 거 같다.
다음 날 아침, 어느 때보다 가뿐하게 잠들고 일어난 채이는 오늘도 아침 산책을 위해서 오닉스 저택을 나섰다.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일과였다.
‘응?’
그 얼굴과 저택에서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안녕.”
채이가 걸음을 멈췄다.
저택 뒤뜰, 티 타임을 즐길 수 있도록 배치된 테이블 의자에 낯익은 얼굴의 사내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채이는 그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황당해져서 입을 헤벌렸다.
‘얘가 왜 여기서 나와?’
채이 쪽을 향하여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 있는 사내. 그는 다름 아닌 페르난데였다.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채이를 보더니 코로 웃은 페르난데가 가까이 다가왔다.
“어제 보고 또 보네. 채이.”
“네가 왜 여기 있어?”
“난 여기 있으면 안 되나?”
그건 아니지만…. 생각해 보니 그가 랭커스터의 허락도 없이 이 저택에 들어올 수는 없는지라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구나 싶었다.
“그래. 그럼 볼일 봐.”
채이는 그리 말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오닉스 저택 뒤뜰에 있었던 게 우연은 아닌 듯, 페르난데는 채이의 뒤를 졸졸 쫓기 시작했다.
“네가 그 유명한 베타였다니.”
“……? 내가 유명한가?”
“몰랐어? ‘엄격하기로 유명한 랭커스터가 저택으로 들인 베타’. 웬만한 귀족들은 다 너를 알고 있을걸? 이름이나 얼굴까지 아는 건 극소수일 테지만.”
몰랐고, 그다지 관심도 없다. 채이는 남들 시선을 신경 쓰고 사는 일이 가장 귀찮은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민폐 끼치는 일만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채이에게서 별다른 반응을 얻어내지 못하자 그런 채이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페르난데가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근데 어디 가는 중이야?”
“산책.”
“나도 같이 갈래.”
“너 볼일 있어서 온 거 아냐?”
“그 볼일이 너한테 있는데?”
“나한테 무슨 볼일.”
“그냥. 너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날 보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유명하니 뭐니 했던 걸로 보아서는 어제 이후로 호기심이 생겨서 찾아온 것 같은데…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베타에게 뭐가 그리 궁금해서. 아무리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라 하지만 정말 이상한 녀석이었다.
“마음대로 해.”
채이의 허락 아닌 허락에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은 페르난데가 채이와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산뜻한 얼굴로 채이와 대화를 나누며 숲길로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페르난데는 즐거웠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같이, 헉헉…. 같이 좀 가!”
분명 가볍게 조깅할 뿐인데 점점 거리가 벌어지더니 이제 채이는 저만치 멀리서 뛰고 있고 페르난데는 뒤에서 헥헥대는 중이었다.
“하아.”
얼마 뛰지 못하고 멈춰 선 채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이 발현자치고 비실비실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헥헥댈 줄이야. 평소에 녀석이 얼마나 단련을 하지 않았는지 벌써 헥헥대는 체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겨우 따라잡아 채이의 옷자락을 붙든 페르난데는 원망 어린 눈초리로 채이를 흘겼다.
“산책… 헉. 산책이라며! 헉헉…. 이게 무슨 산책이야, 운동이지!”
“그래. 몸풀기도 운동이긴 하지.”
하지만 가볍게 조깅하며 뛰는 것 정도로 그리 말하면 어쩌는가….
페르난데의 저질 체력이 안타까워 채이는 한숨이 나왔다.
“안 되겠네. 여기서부턴 걷자.”
결국 채이는 숨을 가다듬은 페르난데와 보폭을 맞춰 슬슬 산책로를 걸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페르난데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너 체력이 그리 안 좋아서 어떡하니.”
“…이제부터 운동할 거야.”
“응? 지금까지 안 하다가?”
“한다면 해.”
페르난데가 부루퉁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렇다니까 잘된 일이기는 하다만. 잠시 하늘을 바라본 채이가 말했다.
“꽤 걸었으니 이만 내려갈까.”
“나야 좋지.”
“이제부터 운동할 거라며?”
“…지금 당장은 아니고.”
채이가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시 입구 쪽으로 내려가는데…. 마침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오나드와 맞닥뜨렸다. 레오나드는 채이의 옆에 있는 페르난데를 보자마자 미간을 설핏 구겼다. 에녹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혹시나 싶어 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페르난데가 채이 옆에 꼭 붙어 있는 게 아닌가.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이 집 가주인 네 부친이 허락해서 들어와 있는 건데? 얼마든지 묵었다 가도 된다면서 별채도 빌려줬어.”
“꺼져.”
“싫어.”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친 페르난데는 내리뜬 눈으로 노려보는 레오나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노려보았다. 스산하게 흘러나오는 페로몬 때문에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공기마저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두 사람은 말다툼만 할 뿐이지, 큰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레오나드는 채이 앞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흉한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페르난데는 오히려 그걸 알고 있어 평소보다 더 긁어댔다. 레오나드가 채이에게 흉한 모습을 보여서 스스로 호감도를 깎아 먹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신경전을 눈치채지 못한 채이는 매번 말로만 싸우는 둘 사이를, 단단히 착각했다.
‘얘네 티격태격해도 생각보다 친한가 보다. 진짜 사이 나쁘면 한 번쯤 드잡이할 법도 한데 그러진 않는 걸 보니.’
그러던 중 문득 채이의 배꼽시계가 꼬르륵 울렸다. 아직 식사를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제법 움직여서 그런지 출출했다.
‘간식이랑 차 좀 마실까.’
이럴 때면 항상 간단한 티 타임을 가지곤 했던 채이였다.
‘아.’
그때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오른 채이는 아직도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제안했다.
“우리 같이 티 타임 하러 가자.”
서로 대화도 좀 하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면 사이가 누그러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건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꽤나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하여 레오나드도 페르난데도 조금 당혹스러운 눈치로 채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채이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상태였기에 먼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번에 먹은 작은 꽃 모양 빵이 맛있던데 그게 뭐였더라. 에녹한테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즐거이 앞장서는 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오나드와 페르난데가 서로를 향해 어색하게 눈짓하더니… 이내 두 사람 다 채이 뒤를 졸졸 쫓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둥근 티 타임 테이블을 두고서 채이와 함께 삼각형 모양으로 앉게 되었다. 서로가 불편해 죽겠는데도 둘 모두 채이와의 시간을 포기하지 못해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맛있게 드세요. 채이 님.”
“응. 고마워, 에녹.”
에녹이 채이와 마주하며 방긋 미소 지은 후 레오나드와 페르난데의 앞에도 디저트와 홍차를 내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착각을 하고 있는 거 같으니 컴베스트 공작에게 다시 물어보고 오길 권하지. ‘저택에 머물러도 된다’는 게 내 소유지인 오닉스 저택 앞까지 드나들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었을 테니까.”
“글쎄. 네가 이 집을 채이한테 거의 주다시피 했다며. 그럼 현재 집주인은 채이 아냐? 드나들든 말든 채이한테 허락받을 일이지 너한테 참견받아야 할 문젠 아닌 거 같은데.”
“그런 말도 안 되는 걸로 채이한테 억지를 부릴 생각이면 그만두는 게 좋아. 참아 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웃기고 있네. 참아 주고 있는 게 누군지 알고 그러시나? 아, 폭력으로 해결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보시든가.”
유치하면서도 치열한 기 싸움이었다. 물론 채이는….
‘오늘 날씨가 참 좋네.’
두 사람이 그러고 있든 말든, 향긋한 차의 내음과 맛있는 디저트와 청량한 날씨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치 백과 흑을 보는 듯하다. 채이 옆에서 시중을 들며 그 모든 상황을 제삼자의 눈으로 지켜보던 에녹은 속으로 한숨을 지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