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22화 (22/105)

022화

그 꼴을 지켜보던 레오나드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레오나드는 두 잔도 채 다 마시지 않았는데 채이는 벌써 네 잔을 넘기고 있었다.

“뭐 불만이라도 있어?”

“그런 거 아니야.”

“너도 마셔.”

“마시고 있는걸.”

채이가 줄어들지 않는 레오나드의 잔을 불만스레 노려보다가 잔을 탈탈 털어 입 안으로 술을 밀어 넣었다. 머리가 무거워 자꾸만 아래로 향하는 것 같다.

문득 시선을 느낀 채이가 테이블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딘가 몽롱하고 뿌연 시야 앞에 청록색 보석이 두 개 놓여 있다. 뭐가 저리도 예쁘게 반짝거리나 싶어 유심히 살펴보니, 레오나드의 눈동자였다.

“예뻐라….”

어쩜 사람 눈이 저렇게까지 예쁠 수가 있을까. 한참 바라본 채이는 그만 기분이 좋아져서 히죽 웃었다. 레오나드가 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어 준 덕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레오와 이어진다던 미래의 오메가 짝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네.’

친구의 이야기에 나오던 레오나드의 오메가 짝은 잠시 언급된 정도였기 때문에 정확히 어떻게 생겼고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바가 전무했다. 유일하게 알고 있는 건 랭커스터가 주관하는 연회장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다는 점이었다.

레오나드의 눈망울에 푹 빠져 느긋하게 감상하던 채이가 별안간 그의 양쪽 뺨을 그러쥐었다. 보들보들한 느낌이 좋다. 여전히 레오나드는 아기 피부였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레오나드가 참 귀엽게 느껴졌다. 채이는 술 먹고 집에 들어가서 자식 귀여워하는 아비처럼 뺨을 마구 비비적거렸다.

“오구구, 예뻐. 우리 레오.”

“채이… 술주정 좀.”

“아이. 그냥 귀여워서 그러지.”

안 취했다니까 정말로….

억울하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그 말을 전혀 믿어 주지 않는 눈치였다. 갑자기 우울해진 채이였다. 입을 앙다물고 있으려니 급기야 레오나드는 어딘가 불편한 듯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다가 채이를 저만치 밀어내고 말았다.

“안 돼. 많이 취했어.”

“너 나 취한 거 본 적 없잖아.”

“…오늘 보게 됐네.”

진짜 아닌데. 정말 아닌데.

채이가 구시렁거리자 미간을 찡그린 레오나드가 한차례 한숨을 삼켰다. 그는 채이 옆으로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채이도 마주보기 위해 몸을 옆으로 옮겨서 제 무릎 사이에 앉아 있는 레오나드를 내려다보았다.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레오나드의 눈은 보석처럼 반짝이던 아까와 달리 꼭 깊고 짙은 호수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채이. 이만 씻고 자자.”

그게 신기하여 채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엄지로 눈두덩이를 부드러이 쓰다듬자, 레오나드의 눈이 깜박이다 뜨였다. 채이는 다시 마주하게 된 레오나드가 마냥 좋아 헤실 웃었다. 스스로는 잘 못 느끼는 부분이었지만 그는 술에 취하면 실없는 웃음이 많아지는 타입이었다.

“왜 웃어.”

“그냥… 좋아서.”

순간 레오나드의 눈에 담긴 어떤 감정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매혹적이고 달달한 페로몬이 금방이라도 방 안을 가득 메울 것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쩐지 숨이 갑갑해진 채이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실 때였다.

“채이.”

레오나드가 제 뺨에 놓인 채이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서 끌어 내렸다. 그에 채이가 레오나드와 눈을 맞추려 했지만 그는 먼저 시선을 회피했다. 레오나드의 도톰한 입술은 무언가 망설이는 듯 옴죽대고 있었다. 묘하게 육욕적인 모습이었다. 분명 채이 자신이 알고 있던 그 레오나드가 맞는데도 낯선 사람을 보는 기분이었다.

‘…정말 내가 취했나.’

다른 사람도 아닌 레오나드를 보고 그런 느낌을 받다니. 사실 그건, 우성 알파들만 가지는 흥분향의 영향이었지만…. 베타도 알파와 오메가만큼은 아니나 페로몬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채이는 몰랐다. 더군다나 술기운 때문에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하여 그저 몽롱하고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꿈이라고 생각해.”

레오나드가 조용히 듣기 좋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문득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이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내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따듯한 숨결이 와 닿고, 채이의 입술 위로 말랑한 감촉이 내려와 포개지는 것이 더 빨랐다. 생소한 감촉에 놀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입술을 감쳐문 채이는 눈앞에 있는 어깨를 밀어내고자 손을 올렸다. 문제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그 위에 툭, 올려둔 꼴밖에는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읏….”

앞으로 기울어 있던 채이의 고개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레오나드의 움직임에 맞춰 들렸다. 조금 벌어진 입술이 채이의 아랫입술을 약하게 깨물었다. 그 사이로 엷붉은 살덩이가 들어와 입 안을 훑자 머릿속이 저릿하게 울렸다. 어깨에서 가슴께로 야금야금 내려가는 손길이 느껴질 때마다 누구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지 모를 단숨이 허공에서 엉겼다.

채이가 열기로 눅눅해진 눈을 가늘게 떴다.

난생처음으로 겪어 보는 자극에 정신이 아찔하고 좋아서 반항할 생각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데 정작 현실감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눈앞으로 떨어진 짙고 기다란 속눈썹이 정말 레오나드의 것이 맞는지조차 믿을 수 없었다.

애초에 레오나드가 왜 이런 짓을?

채이가 생각하기에 이건 아주 이상하고 현실적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

서로의 입술이 잠시 떨어지며 내려앉는 숨결이 달았다. 그 숨결을 한 입 더 품고 싶었던 채이가 자신도 모르게 레오나드의 입술을 쫓자 숨결이 기껍게 다가와 다시금 입 속을 적셨다. 크게 뛰는 심박음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어느새 허벅지까지 내려간 손의 열기도 엄청나서 그 열기에 그만 몸이 타버릴 것 같았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뺨과 귓불에 입맞춤을 남기고 있던 레오나드가 문득 “채이….” 하고 이름을 중얼거렸다. 나른하게 낮아진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꿈이라 생각하라던 속삭임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성적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현실에서 동떨어진 행위. 거기서부터 오는 괴리감은… 채이로 하여금 그 속삭임에 좀 더 강한 확신을 가지게 했다.

‘역시. 꿈인가 보다.’

그래. 레오가 날 그리 탐하는 눈으로 볼 리가 없지. 내가 아들자식 같은 놈을 상대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

채이는 내리감기는 속눈썹이 무거워 그 무게를 억지로 버티지 않았다. 레오나드의 어깨에 이마를 대자 옷에 달린 끈을 만지작거리다가 흠칫 떠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걸 끝으로 채이의 정신은 까무룩 꺼지고 말았다.

***

문득 귀 옆에서 살랑살랑 지저귀는 듯 맑은 새소리에, 채이가 눈을 떴다. 숙취 없이 개운한 정신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채이는 잠시간 평온함을 만끽했으나….

“헉.”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미친.”

평소 잘 쓰지도 않는 욕과 함께, 퍼드득 날갯짓하는 비둘기인 양 몸을 일으킨 채이가 자신의 머리채를 잡았다. 기억을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채이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갔다.

‘내… 내가.’

그런 미친 망할 꿈을 꾸다니! 그것도 아주 생생하고, 야시시한 꿈을 말이다.

‘나 뭐야? 욕구불만이냐고.’

하필이면 또 그 상대가 레오나드였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란 말인가. 접시 물에 빠져 죽고 싶다. 채이가 퍼더덕 몸부림쳤다. 그나마 지금 레오나드가 옆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어제 같이 술을 마셔서 그런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레오나드에게도 미안하여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데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몽정은 아닌 거 같은데….’

바지로 아침 텐트를 치고 있기는 하나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남성의 생리 현상일 뿐이고 내보낸 흔적은 따로 없었다. 거기다 어제 레오나드와 술을 같이 마시고 나서 언제 잠이 들었는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꿈이었는지… 현실과 꿈의 경계선이 너무 불분명했다.

‘설마.’

아니겠지만. 절대 아니어야 하겠지만. 사실 모든 게 현실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가능성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아냐! 그건 더 말이 안 돼.’

그때였다.

달깍, 하더니 욕실 문이 열렸다. 채이가 놀라서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서 있는 건 예상한 대로 레오나드였다.

“아… 레오.”

채이는 아주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너무 난감한 상황이다. 하여 슬쩍 시선을 회피했는데 돌연 레오나드가 입을 열었다.

“잘 잤어?”

평소와도 전혀 다르지 않은 태연한 목소리였다.

“…….”

순간 말문이 막힌 채이가 입을 헤벌렸다. 정말 어제의 그 모든 게 꿈일 뿐이었던 걸까? 그에 채이는 용기를 얻은 것 같았다. 결국 물어보고 싶었던 걸 입 밖으로 꺼냈다.

“혹시 우리 어제 술 마신 거….”

“…….”

“그거 말곤 아무 일… 없었지?”

“…….”

레오나드가 팔짱을 낀 채로 벽에 비스듬히 어깨를 기대었다. 상념에 잠긴 것도 같았다. 하지만 워낙 아무렇지 않은 무표정이었기에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채이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니 심장이 마구 떨려서 채이는 어색한 웃음을 덧붙였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건진 몰라도 레오나드가 슬쩍 입매를 휘면서 작게 웃었다.

“응. 아무 일도 없었어.”

그제야 채이는 근심과 걱정을 모두 내려놓았다.

‘다행이다.’

물론 그런 꿈을 꿔버렸다는 사실 자체에도 충분히 기겁했지만, 일단 한시름 덜어낸 기분이었다.

‘꿈꿔 버린 건 어쩔 수 없잖아.’

음음. 그냥 빨리 잊어버리는 게 낫지.

“채이. 점심 같이 먹을래?”

“아, 그래. 일단 나 씻고 올게.”

그날 하루 종일 어딘가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였던 레오나드는 채이와 점심 식사를 함께 끝내고 그와 붙어 있다가 이른 오후가 되어서야 집무실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