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화
그 순간 레오나드는 알 수 없는 불안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뭐지.’
로렌스가 저토록 당황하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혹여나 안 좋은 소식이라면 제발 채이와 관련된 일은 아니길… 그리 바랐다. 하지만.
“채, 채이 님이 갑자기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셨다고…!”
그 바람은 무참히 짓밟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마지막으로 목격한 지 벌써 1시간도 더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으신답니다! 안에서는 보이지 않으셔서, 어쩌면 저택 부지 밖으로 나가신 게 아닌지….”
1시간 전.
그즈음이라면, 로렌스가 편지 전달과 함께 레오나드의 집무실을 찾았던 때였다. 레오나드는 순간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전신을 도는 피가 차갑게 식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레오나드는 잠시 숨을 참아야 했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 기분을 대변하듯 통제되지 않고 발산된 페로몬이 흉흉하게 요동쳤다.
“집사장은… 뭘 한 거지?”
저택의 안팎 출입자는 모두 집사장이 총괄한다. 평소 저택 대문은 닫혀 있으므로 사전에 어떠한 예고도 없이 나가거나 들어오려고 하는 자는 집사장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채이가 혹여나 저택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면 외출을 허락해주되, 감시를 붙이고 그에 대한 보고를 꼭 하라고 집사장에게 일러두었던 레오나드다.
그런데 왜 자신은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했단 말인가.
이런 일이 생길 때까지 대체 그자는 뭘 했단 말인가.
오갈 데 없는 분노가 커지자 페로몬이 더욱 거칠어졌다.
그 페로몬에 그대로 노출된 로렌스는 숨이 옥죄는 듯하여 공포감에 벌벌 떨면서도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사람의 본능적인 부분’을 열성 알파들보다 더욱 깊이 자극한다. 어지간한 정신력으론 바지에 오줌을 지리거나 끔뻑 기절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나마 로렌스가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열성 알파이기 때문에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오, 오늘 하필이면 가신 가문의 가주들께서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라… 이른 아침부터 열려 있었다고 합니다. 집사장도 그쪽에 신경 쓰느라고 아마….”
저도 모르게 참담함을 느낀 레오나드가 긴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채이가 의도한 게 아니라면 정말이지 타이밍 한번 개 같은 상황이었다. …아니. 정말 ‘의도’가 조금도 없었던 게 맞는 걸까? 설마 일부러 기회를 봐서 빠져나간 거라면. 그때처럼 또 연락을 끊고 도망가 버리려는 거면.
‘이번에는 영지 바깥까지 나가버리면 어쩌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불안과 초조가 육체를 좀먹었다.
마지막으로 편지 하나만 달랑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던 그때의 충격과 배신감이… 이럴 줄 알았으면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계속 제 옆에 두었을 거라고 실망하고 절망했던 날들이. 그럼에도 더욱 명확해지는 배덕한 애욕에 어찌할 바 몰라 마냥 쥐 잡듯 채이를 찾아다녔던 기억이 떠올라 고통스러웠다.
‘채이….’
레오나드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채이의 옅고 복슬복슬한 갈색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비쳐드는 금색 눈동자가 눈앞에서 아롱거리는 듯했다. 곧은 등과 어깨, 제법 다부진 몸 선… 따뜻한 홍차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 모든 것들이 심장을 옥죄었다.
‘어떻게 다시 찾았는데.’
채이가 제 되바라진 밑바닥을 보고 질려서 거리를 둘까 봐, 또 도망갈까 봐 겁을 먹어 너무 느슨하게 풀어준 탓일까. 언제나 태양처럼 밝았으면 해서 망가트리고 싶지 않아 꺾지 않았던, 원망스러울 만큼 자유로운 그의 두 다리를 차라리 분질러 둬야만 했던 걸까.
눈앞이 붉게 물드는 것 같다.
만약 채이가 어떤 이유에서든 제 곁에서 떠나려는 날이 온다면… 레오나드는 스스로도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돌이킬 수 없을까 봐. 그러니 부디… 이 행적이 자유에 대한 대답만은 아니어야 할 것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해.’
손바닥 속에 숨어 상념에 잠겼던 레오나드는 잠시 뒤 가라앉은 눈을 치떴다.
“기사단 기동시켜서 당장 채이가 어디로 간 건지 찾아내. 벌써 영지 밖으로까지 나갔을 가능성은 적지만… 혹시 모르니 영지 경계 문지기들한테도 연락 넣고.”
“예.”
피식자를 앞에 둔 포식자처럼 흉흉하게 눈을 뜬 그의 모습에 긴장해 있던 로렌스는 명령을 받자마자 급히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최근 채이가 저택에 들어온 이후 늘 한겨울처럼 냉랭하던 레오나드의 분위기도 많이 누그러진 느낌이었는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버린 듯했다.
‘원래 가주님의 최종 허락 없이 기사단을 움직이는 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지만….’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 더 큰 일이 일어나고 말 것 같았다. 그리고 레오나드는 실제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얼마 존재하지 않는 우성 발현자들 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힐 만큼 강력한 이능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페로몬과 달리 우성 형질을 가진 알파와 오메가에게만 존재하며 초자연적인 힘에 가깝다 하여 붙여진 ‘이능향’. 이러한 이능향은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가 신분 사회 최상층에 앉아, 그들의 권력을 견고히 유지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레오나드의 냉혹한 성정과 그 힘을 잘 아는 로렌스의 손에 땀이 맺혔다. 그는 당장 기동이 가능한 페헤라 기사단을 직접 움직여 영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
‘음! 재미있었다.’
로렌스가 곧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난리를 부리고 있을 무렵….
수도 구경에 신나서 하네스 풀린 강아지처럼 뽈뽈 돌아다니기에 마냥 바빴던 채이는 노을이 지기 시작할 즈음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역시 블렌츠의 번화가인 블렌츠 광장은 익히 들은 명성만큼이나 활기차고 시끌벅적했다.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너무 열심히 구경하느라 눈이 쉬지를 못했다. 내려온 김에 은행에서 돈도 좀 인출하고, 레오나드에게 줄 선물도 하나 샀다.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늦어지고 말았지만 어쨌든 아주 보람찬 하루였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
선물은 안주머니에 챙기고, 건물 사이의 골목을 지나 광장 바깥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가게를 수색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등 왠지 모르게 어수선하고 긴장된 분위기이긴 했으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던가.
긴급 수색 명령까지 떨어진 상황에, 그 수색의 대상이 된 사람이 바로 코앞에서 놀고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경계가 느슨한 편이었다. 덕분에 기사들의 감시망에서 속속 벗어나 광장을 빠져나간 채이는 가볍게 조깅하여 랭커스터 저택 쪽으로 올라갔다. 광장 외곽에서부터 이어지는 이 길 끝에 있는 것은 랭커스터 저택으로 올라가는 입구뿐이기 때문에 인적이 드물어 한적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해 저택과 가까워졌을 즈음이었다. 노을이 짙어지는 시간, 여전히 활짝 열려 있는 저택 대문 앞에 길쭉한 인영이 하나 서 있었다.
‘음?’
자세히 보니 그건 레오나드였다.
왜 바깥에 나와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며 채이가 자연스레 가까이 다가갈 때였다. 어딘가 불안한 듯 서성이다 말고 다가오는 기척을 알아차린 레오나드가 홱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레오….”
그리고 마침 레오나드에게 줄 것도 있어 반가웠던 채이가 인사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성큼 채이 쪽으로 다가선 레오나드는 낚아채듯 채이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금방이라도 비틀어버릴 듯한 힘이었다.
“아! 야, 아프잖아.”
채이가 진심으로 아파하며 미간을 찡그린 탓일까. 손목을 그러쥔 손에서 순식간에 힘이 쏙 빠졌다. 하지만 여전히 채이가 떨쳐낼 수 있을 만한 힘은 아니었다. 새삼 우성 알파라는 자들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느껴졌다.
거기다 완벽히 타고나는 페로몬과 다르게 어느 정도 ‘노력의 영역’에 걸쳐 있는 발현자들의 신체 능력은 얼마나 단련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가문으로 돌아간 뒤 꾸준히 단련해온 레오나드는 분명 육체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최정상급일 터였다. 제아무리 채이라 할지언정 레오나드가 작정하고 힘을 쓰면 반항할 수 없었다.
“채이.”
당황하던 채이가 순간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들었다.
낮게 깔린 우성 알파의 강한 페로몬이 본능의 깊은 부분을 자극하자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듯한 두려움이 채이를 덮쳤다. 거기다 미미하게 찡그린 레오나드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으니 살벌하여 채이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레오나드에게서는 일전, 주점에서 드러냈던 분노보다 훨씬 깊고 강한 감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디 갔었던 거야.”
분명 다른 누군가였다면 그 물음에 몸이 무너지며 사과를 내뱉거나 무작정 살려 달라고 호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채이는 목숨을 위협받는 일에는 무척이나 익숙했다.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던 채이는 레오나드가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란 믿음도 갖고 있었기에, 본능적인 두려움은 상쇄되었다.
하여 오히려 침착해질 수 있었던 채이는 지금 상황이 어딘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 원인을 지레짐작한 채이가 미간을 팍 구기며 꾸짖었다.
“알겠다, 알겠어! 놀러 가는데 같이 안 데려갔다고 삐진 거지?”
“뭐?”
“하여간…. 네 선물 사 왔으니까 그만 화 풀어.”
“…….”
한심스레 고개를 내저은 채이가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선물을 꺼냈다. 봉투 안에서 나온 건 레오나드의 눈동자 색을 닮은 푸른색 브로치였다. 금세 좁혔던 미간을 풀고 방긋이 웃어 보인 채이가 브로치를 눈앞에 대고 보여주었다.
“예쁘지? 네 눈동자 색이랑 닮아서 산 건데. 너무 튀지 않는 모양이라 제복에도 어울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