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화
아닌 밤중에 이게 무슨 생쇼인지 모르겠다.
문득 옅게 퍼진 체향에, 진득한 견과류와 달콤쌉쌀한 다크 초콜릿 향을 떠올리게 하는 레오나드의 페로몬이 슬쩍 섞여들었다. 하필이면 그 순간 방금 전에 읽은 부끄러운 책 내용 속의 야한 체위가 떠올라서 속으로 질겁해 버렸다. 채이는 배덕한 자신의 못된 생각을 책망하려는 듯 미간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야. 너 뭐 해.”
“어릴 때의 내가 이렇게 널 품에 가둘 수 있었어?”
물론 그때에 비하면 지금 레오나드는 키도 정말 많이 컸고 연약하던 체격도 단단해졌다. 하지만 채이가 말한 ‘변하지 않았다’의 뜻은 그것과 달랐다.
“변한 게 없다는 건 네 알맹이를 두고 말했던 거지.”
채이가 눈앞에 놓여 있는 레오나드의 가슴께를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문득 레오나드의 눈이 내리감기는 속눈썹에 살포시 숨었다.
“…그건. 그럴지도.”
중얼거린 레오나드가 잠시 그 상태 그대로 침묵에 빠졌다. 그는 두 사람의 오래된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 듯 보였다. 이내 상념에서 돌아온 레오나드가 채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채이는 아무것도 안 변했어.”
“뭐 이 얼굴이 좀 동안이긴 하지.”
“…….”
“왜.”
“…정말 아무것도 안 변해서.”
흐려지며 들러붙는 말꼬리는 가늘어진 눈매와 함께 어딘가 미묘한 뉘앙스를 풍겼지만 채이는 마냥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다 현재 놓인 자신의 상황을 재차 인지한 채이가 다시금 미간을 좁혔다.
“이제 그만 저리 가. 가깝잖아.”
“싫어.”
마치 그리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오는 거부였다.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단호히 받아치는 레오나드의 치기에 채이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그럼 뭐 이러고 자라고?
잠자코 비키라는 뜻으로 눈을 부라려 보았지만 레오나드는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엉뚱한 오기가 생긴 채이가 냅다 눈을 감았다.
“네 마음대로 하든가.”
하지만 제아무리 쇠줄 같은 정신줄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 상황에서 제대로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채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스스로를 과소평가한 일이다. 채이는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둔한 사람이었다.
“…채이?”
절대 잠들 수 없을 거라고, 속으로 툴툴거리며 확신했던 채이는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다. 규칙적으로 잦아든 숨소리는 채이가 여느 때처럼 평온하게 잠들었음을 뜻하고 있었다. 그걸 보는 레오나드도 기가 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채이가 어떻게 된 정신줄을 가지고 있는 건지 레오나드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
결국 레오나드는 자기 꼴이 처량하여 풀썩 누워버렸다. 언제까지고 열리지 않는 돌문을 홀로 두드리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럼에도 채이를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
색색, 숨소리와 함께 오르락내리락하는 채이의 흉곽을 바라보던 레오나드가 살포시 손바닥을 그곳에 올렸다. 채이의 온기와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그 느낌을 자장가 삼아 그도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레오나드가 업무를 보기 위해 일찍 자리를 비웠을 즈음, 채이도 잠에서 깼다. 눈가를 간지럽히는 빛에 눈을 뜨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뭐야. 자버렸던 건가.’
눈을 감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없다. 당연했다. 그대로 잠들었으니까. 머쓱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킨 채이는 비어 있는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레오나드는 이미 없었다. 대신 협탁 위에는 정갈한 글씨로 ‘저녁에 또 올게. 아침 든든히 챙겨 먹어.’라고 적힌 쪽지가 하나 남아 있었다.
기지개를 한 번 켜고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채이가 침대에서 훌쩍 내려갔다. 간단히 씻은 후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는 외출할 준비를 끝냈다.
‘오늘은 아침 산책 다녀와야지.’
이틀 동안 저택살이에 적응도 제법 했으니까 슬슬 몸을 움직일 생각이었다. 원래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마다 운동을 해 왔는데 요 며칠은 하지 않았다. 마침 몸이 찌뿌둥하던 참이었다.
‘참. 주점에 보낼 서신도…. 서신 먼저 보내고 나가면 되겠군.’
간략한 안부와 갑자기 일을 그만두게 된 사정을 적어 둔 서신은 로렌스를 통해 전달했다. 로렌스가 그 서신을 레오나드에게 전달하기 위해 가지고 간 사이, 채이는 저택 밖에서 이른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들이켰다.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 기왕 나온 김에 광장도 잠시 구경하러 갔다 올까.’
랭커스터 가문의 메인 저택을 품은 블렌츠는 컴베스트 대공국에서 수도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블렌츠 광장은 어느 곳보다도 번화한 곳일 것이며 저잣거리에는 생소한 볼거리도 많이 존재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채이는 랭커스터 공작 저까지 마차를 타고 이동해 왔던 탓에 구경은커녕 광장 꽁무니도 보지 못했다.
‘그건 아까운 짓이지.’
여기까지 왔는데 수도 구경은 제대로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여행조차 전투적으로 하는 한국인의 마인드가 이 세계에서도 발휘되려 했다.
‘레오가 저녁에 온다고 했으니까 그전까지만 구경하고 돌아오면 되겠다.’
채이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서 길을 쭉 따라 내려가 저택 대문으로 향했다. 하필 공교롭게도 그 타이밍에 저택 대문을 지키는 병사도 없었고, 집사장은 달리 중한 업무를 보고 있어 이 상황을 알지 못했다. 거기다 오늘은 귀빈의 마차가 쉬이 드나들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는 상태였으므로 채이가 저택을 쏙 빠져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
한편 아침부터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 집무실로 돌아간 레오나드는 산더미 같은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채이와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하는 중이었다. 한데 별안간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레오나드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렸다.
“공자님. 로렌스입니다.”
“…들어와.”
레오나드가 피로한 눈가를 문지르는 동안 로렌스가 들어왔다. 그는 기사로서의 형식적인 인사를 갖춘 뒤 레오나드가 부탁했던 서류를 건넸다. 그 서류의 내용은 로만 이세프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의 신상 정보였다.
“로만 이세프. 가정 폭력으로 전 부인에게는 이미 이혼당한 상태더군요… 하루 종일 술에 찌들어 아무나 건드리고 다니는 인간 말종이라 합니다.”
“…….”
“친인척들과는 돈 문제로 싸우고 연이 끊겼다고 하니 아마 비명횡사한다 한들, 알아주는 이는 없을 겁니다.”
로렌스는 건조한 목소리로 냉정한 평가를 읊었다. 채이를 상대할 때마다 어쩔 줄 몰라 땀을 뻘뻘 흘리며 허둥대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하지만 로렌스를 잘 아는 누군가가 그에 대해 말한다면 ‘이쪽이 좀 더 익숙하다’고 할 것이었다. 그는 랭커스터 가문의 정식 후계자인 레오나드의 최측근이자, 아스타리우스 제국 내에서도 알아주는 랭커스터 가문 전속 제1 기사단 페헤라를 이끄는 아주 믿음직스러운 기사단장이었으므로.
열성 알파치고도 굉장히 강한 페로몬의 소유자였기에 평소 그가 밖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상당했다. 그런 걸 알 리 없는 채이는 로렌스를 덩치만 크고 알맹이는 햄스터 같은 사람… 쯤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로렌스가 레오나드에게 로만 이세프의 처분 결정권을 넘겼다. 서류를 무심한 눈으로 슥 훑어본 레오나드는 이내 서류 더미를 책상 위에 던져두었다. 쏟아진 종이들이 널브러졌다.
‘감히 이런 버러지 같은 놈이 채이를 건드렸단 말이지.’
건드린 죄로 팔이 꺾이고 엎어치기 당하고 비웃음당하는 등 온갖 수모를 이미 겪었지만…. 레오나드에게 있어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시야가 닿지 않았던 시간 속에서 채이가 그런 일을 당해버렸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흘깃 서류를 일별한 레오나드의 안광에 냉혹한 빛이 돌았다.
“적당히 부풀려서 감옥에다 집어넣고 처리해. 변사로 기록하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로렌스가 돌연 품에서 조심히 편지 한 통을 꺼냈다.
혹시 봉투에 상처라도 날까 봐 조마조마해하는 모양새였다.
“채이 님께서 전달 부탁하신 서신인데… 이건 어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그 이름이 나오자 마치 반사작용처럼 레오나드의 눈매가 슬쩍 누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일했던 곳에 서신을 보낼 거라고 했었지. 레오나드는 로렌스의 손에 다소곳이 들려 있는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앞으로는 묻지 말고 서기관에게 바로 보내도록 해.”
편지를 강제로 뜯어 안의 내용을 확인해 보거나 보낸 척하고 뒤로 빼돌려 태워버릴 수도 있었으나 레오나드는 그렇게까지 채이의 모든 걸 통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채이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자신의 시야가 닿는 범위 안에 있어 주기만 하면….
“그럼 가보겠습니다.”
문득 로렌스의 목소리가 레오나드를 상념에서 끌어 올렸다. 레오나드가 이만 가보라고 눈짓하니 로렌스는 마지막으로 묵례한 뒤 집무실을 나갔다. 레오나드는 아무도 남지 않은 빈자리를 응시하다가 한차례 얼굴을 쓸었다.
‘…신분패 신규 발급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거지.’
어제 채이와 늦게까지 대화했을 때 대리 발급 허락을 받아 두었다. 그래서 출근하자마자 발급 서류 신청을 해두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
‘농땡이 부리지. 이놈들이.’
애당초 반나절 만에 발급될 수 있는 것이 아니건만 레오나드는 애꿎은 사람들을 탓했다.
‘어쨌든, 일부터 빨리 끝내자. 오늘도 같이 저녁 먹기로 했으니….’
그러고 펜을 집어 들 때였다.
타탓!
집무실을 나갔던 로렌스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급히 되돌아왔다. 노크도 하지 않고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로렌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공자님! 큰일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