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화
‘어쩐지… 몰래 준비한 이벤트였던 거야.’
어차피 오닉스는 메인 하우스랑도 거리가 멀어서 레오나드의 가족들과 마주칠 일이 없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다. 며칠을 묵어도 눈치 보이는 일은 그다지 없으리라. 어쩌면 레오나드는 처음 자신에게 그런 제안을 했을 때부터 이런 부분들을 신경 써 주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가 미리 해줬던 언질에 따르면 별채는 각자의 영역이라, 평소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게 규칙이라고 했었으니까.
한편으로는 엄격하고 삭막한 집안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게 자식들의 사생활을 철저히 보장해주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보았다.
어쨌든.
레오나드가 오랜만에 만났다고 이런 이벤트까지 준비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그의 어른스럽고 깊은 마음씨에 대견함을 느끼면서도 새삼 레오나드가 많이 컸고, 그만큼 세월도 많이 흘렀다는 걸 깨달았다.
‘흠. 어쩔까.’
채이는 데구루루 몸을 굴려 침대 끄트머리에서 일어나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같이 살자곤 했지만 아마 그건 내가 원하는 만큼 머물러도 좋다는 정도의 뜻이었겠지.’
채이는 진지했다.
‘만일 욕심을 부려도 된다면, 솔직히 여기서 쭉 살아도 좋을 것 같긴 해.’
하루아침에 버려진 집과 주점 주인장에게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나온 점이 좀 신경 쓰이지만… 뭐. 집은 나중에 생각하고 조만간 주점에는 서신을 보내 두어 걱정을 덜도록 하자.
‘레오한테 보내는 방법을 물어봐야겠네. 업무 때문에 오후쯤 돼야 올 수 있다고 했었지?’
그렇게 한차례 생각을 정리한 채이는 다시 발라당 침대 위에 누워 이번에는 ‘오늘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흠. 이제 뭘 할까… 갑자기 백수가 되니 마땅히 할 일이 떠오르지 않는군.’
일 안 해도 먹고 자고 놀 수 있는 백수라니. 아주 훌륭했으나 늘 바쁘게 살았던 채이로서는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괜스레 불안했다.
‘어제는 방에만 있어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 계속 들어와서 인사하는 둥,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는데.’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아침 산책을 나가볼까 싶기도 했지만 아직 이곳 생활에 완전히 익숙해진 것이 아니라서 뽈뽈 돌아다니기도 좀 뭣했다.
결국 채이는 어제 미처 하지 못한 도서관 구경을 하러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목적지가 정해졌으니 지체할 이유도 없다.
채이는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손목 부분과 가슴 부분에 프릴이 달려 있는 블라우스. 주로 귀족들이나 입는 비싼 옷이었다. 이것도 전부 레오나드가 어제 채이의 사이즈에 맞는 걸로 준비해서 옷장에 채워 준 거였다. 덕분에 아무것도 없이 덜렁 몸만 왔던 채이지만 불편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준비성 하난 좋다니까.’
따뜻하게 씻고 머리를 대충 정리한 채이가 방문을 열고 나갔다. 도서관은 복도 끝 계단을 오르면 나온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는 것도 잠시….
“……?”
복도로 나가자마자 근처에 서 있던 기사 한 명이 불쑥 옆으로 따라붙었다. 채이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있을 텐데도 사내는 우직하게 정면만 보고 있었다.
‘설마 호위인가.’
녹음을 담은 듯한 담녹색 눈동자에 레오나드만큼이나 건장한 체구, 190에 가까워 보이는 키.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제대로 기억은 안 나는데 어딘가 낯이 익었다. 엊그제 레오나드를 따라 저를 찾아왔던 여러 기사들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흠.’
가만히 두면 죽어도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사내라, 채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냥 도서관 가는 거라서 혼자 가도 됩니다.”
나름 정중한 거절이었다. 그뿐인데, 갑자기 우직해 보이던 사내가 식은땀을 뻘뻘 흘려대며 목소리를 떨었다.
“안 될 일입니다. 결코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동행을 허락해주십시오. 안 그러면 저 공자님께 맞아 죽습니다.”
마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궁지에 몰린 사람 같았다. 누가 들으면 자신이 그를 사지로 몰고 간 줄 알 터였다.
“에헤이. 농담이 과하시네.”
“농담 아닙니다. 살려주십시오.”
파르르 떨리는 그의 처연한 속눈썹을 보니 괜히 괴롭힌 거 같고 죄책감이 든다. 여기서 더 나무랐다간 진짜로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았다.
‘어… 음.’
결국 떨떠름하게 눈을 흘긴 채이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계속 고집부릴 거 같으니까 원하는 대로 하게끔 내버려 두려는 생각이었다. 채이는 그와 나란히 복도를 걸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쪽 이름은 뭡니까? 이건 물어봐도 되는 거죠?”
“예. 전 랭커스터 가문 전속 제1 기사단, 페헤라 기사단장 로렌스라고 합니다.”
“오, 그렇구나. 말 편하게 해요.”
“아닙니다. 절대 안 될 일입니다. 그런 난처한 말씀은 부디 삼가 주십시오. 공자님이 아셨다간 저 목매달려 죽습니다.”
“…….”
정말 융통성 없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아까부터 레오나드를 무슨 사람 잡아먹는 마귀처럼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저번에 본 기사들의 반응도 그렇고… 다들 너무 과민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레오가 그렇게 무섭나요?”
그래서 채이는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레오 되게 착하고 마음 여린 녀석인데… 눈물도 은근 많고요.”
레오나드가 사실은 그 정도로 무서운 애가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었기에.
하지만 로렌스는….
‘착하고… 마음이 여려…? 눈물이 많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레오나드 공자님이?’
마치 거대한 시련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복잡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레오나드와 채이가 말하고 있는 레오나드와의 간극에 말문이 막힌 상태였다.
“자기보다 작은 동물들이 다칠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만지는 건 또 얼마나 귀엽던지… 심성이 고운 애입니다.”
하지만 제 눈에 거슬리거나 방해되는 자의 모가지는 가차 없이 분질러 버린다.
“그리고 말도 잘 듣고….”
그건 모르겠고, 고문으로 상대방이 말을 잘 듣게 만드는 건 누구보다 잘한다.
로렌스는 따박따박 받아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꼭 자식 자랑하듯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채이를 보고 있자니 그만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듯했다. 레오나드가 어릴 적 가문에서 쫓겨나 숨어 살았던 공백기 동안 평민의 손에 자랐다는 풍문이 돌기는 했었는데….
‘설마 이분이?’
그렇다 할지라도 착하고 마음 여리고 눈물 많고 심성 곱고 말도 잘 듣는 레오나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레오나드의 최측근으로서, 근 몇 년 동안 그의 곁을 지켜온 로렌스지만 주군에게서 그런 부분은 조금도 보지 못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채이는 로렌스가 레오나드의 새로운 이면을 알게 되어 깊이 탄복하는 중이라고 생각해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이해해주셨나 보다.’
그렇게 서로가 다른 생각을 하며 복도 끝 계단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응? 저게 뭐지?’
채이는 문득 건물 외벽과 맞닿은 창문 밖을 내다보다가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어 멈춰 섰다. 사방이 개방되어 있고 굵은 대리석 기둥 위에 지붕이 올려진 형태의… 비교적 작은 건조물. 안쪽에는 다양한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여 지켜보고 있으니 로렌스가 옆으로 다가왔다.
“오닉스의 개방 연무장입니다.”
“연무장….”
“별채마다 저런 연무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보통은 공자님들이 쓰시는데 기사들도 비어 있으면 가끔 씁니다.”
“좋네요. 구경해봐도 됩니까?”
“예. 공자님이 채이 님이라면 저택에서 뭘 해도 상관없다고 미리 말씀하셨거든요.”
그렇다고 하니까 사양할 것도 없다. 흥미가 동해 개방 연무장으로 목적지를 바꾼 채이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 뒤를 쭐레쭐레 따르던 로렌스는….
“헉. 채이 님!”
채이가 무기 진열대에서 단검을 덥석 뽑아 드는 걸 보자마자 기겁했다.
“그거 조…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 태도가 마치 날카로운 물건을 아무렇게 만지작대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해 채이는 영 기분이 이상해졌다. 살상 무술과 무기술을 익혔던 전생 기억이 아직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어, 채이가 다루지 못하는 무기는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더 그랬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벌벌 떨고 있는 로렌스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채이가 보란 듯 단검을 빙글 돌려 위로 던졌다.
순간 숨이 멎은 사람처럼 로렌스의 눈이 둥그레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채이가 검 자루를 정확하게 낚아채 잡고는 뒤이어 간단한 손 묘기를 이어서 보여 주자 반쯤 영혼이 나가 있던 로렌스의 눈에 총기가 다시 돌아왔다. 채이가 픽 웃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반응이 재미있어서 놀리기에 딱 좋은 사람이었다.
“로렌스.”
단검을 진열대에 도로 꽂아둔 채이가 목검 두 개를 꺼내, 하나를 그에게 던져주었다. 그러자 날렵한 동작으로 목검을 받아든 로렌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 한 수 가르쳐 주실래요? 이런 거 한 번쯤 배워 보고 싶었거든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계에서 쓰이는 기사들의 검술이란 걸 배워 보고 싶었다. 언젠가 써먹을 곳도 있지 않을까 싶고. 하지만 로렌스는 아까보다 더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안 됩니다! 그런 위험한 일을… 제가 어떻게… 말씀을 철회해주십시오. 잘못했다간 저 공자님께 갈기갈기 찢겨 죽습니다!”
죽니 뭐니 하는 건 여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