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그렇게 레오나드를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안내한 채이는 뒤따라오던 기사들에게도 집 안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대여섯 되는 인원이 전부 들어오면 조금 좁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바깥에 세워 두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채이의 권유를 듣고 지레 기겁하더니 레오나드의 허락이 없으면 안 된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집주인은 난데.’
워낙 겁에 질린 얼굴이라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기다가….
“저분들 밖에 계속 세워 두게?”
“괜찮으니 내버려 둬.”
레오나드가 그걸 허락하지 않고 있는 데다 싫다는 사람들을 억지로 데리고 들어오는 것도 난처한 짓이었기에 결국 채이는 그들을 내버려 두어야 했다.
채이는 조용히 집을 구경하고 있는 레오나드에게 앉아 있으라 하고 방금 막 끓인 커피를 건네주었다. 그러고 맞은편에 앉아 함께 커피를 즐기며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데에 시간을 보냈다.
“아니, 그랬더니만 그 주정뱅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해코지라도 했어?”
“해코지는 무슨… 갑자기 울면서 냅다 뛰쳐나가잖아. 참, 어이가 없어서. 자기가 먼저 이상한 데 만지려고 하니까 엎어치기 한번 먹여준 건데, 누가 보면 내가 나쁜 놈인 줄 알았을 거야.”
“잘했어. 손버릇 나쁜 놈들은 죽어도 싸지. 근데, 그놈 이름이 정확히 뭐라고 했지?”
“응? 로만 이세프.”
“…그래?”
“응. 그리고 일전에는….”
연락이 끊긴 이후 어떻게 살아 왔는지, 무슨 일화가 있었는지. 레오나드는 또 어떤 힘든 일이 있었고 어떻게 지내왔는지. 반가움에서 비롯된 대화는 길게 이어져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무르익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문득 벽시계를 확인하니 밤이 다 되었다. 이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어댄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슬슬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생각한 채이가 그를 돌아보고 말했다.
“레오.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 봐. 저 밖의 기사 분들도 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 같은데.”
순간 포크를 쥐고 있던 레오나드의 손이 움찔 굳었다.
“오늘 즐거웠다. 다음에 너 시간 될 때 또 식사나 같이 하자.”
주소를 알게 됐으니 언제든 보고 싶을 때 보고, 편지도 원하는 만큼 주고받을 수 있다. 정식 후계자가 된 현재, 레오나드는 본가에서 도맡은 일도 많이 있을 터였다. 그러므로 채이는 이쯤에서 레오나드와 헤어지는 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기사들을 대동해 왔으니 걸어 왔을 리는 없고 이 근처에 타고 왔던 마차를 세워 두었으리라.
그런데 힐끔 눈을 위로 들어 채이를 바라보는 레오나드의 시선은 아까보다 가라앉아 있다. 채이가 왜 그러냐는 의미로 고개를 기울이니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은 레오나드가 입가를 닦고서 말했다.
“나 혼자서는 안 가, 채이.”
“응?”
“채이도 같이 가야지.”
그에 채이는 자신이 제대로 듣고 이해했는지 다시 생각해봐야 했다.
“같이 가자니… 어디를?”
“우리 집. 랭커스터 가(家) 저택.”
조곤조곤 귓가로 떨어지는 목소리에 몇 초 정도 다시 머리를 굴린 채이가 뒤늦게 이해하곤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 내가 거길 왜 가니?”
정말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혹시 지금부터 집을 구경시켜 주겠다는 그런 의미인가?’
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것 말고는 그다지 이유가 없다. 그렇게 스스로 추론해낸 답에 납득한 채이가 “놀러 오라는 이야기면 오늘은 늦었으니 다음에…”까지 말했을 때였다.
“그게 아냐. 가서, 같이 살자고.”
레오나드의 심상한 대꾸에 다시 팽팽 돌아가던 채이의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채이는 고장 나서 띡띡거리는 기계처럼 현저히 느려진 반응을 보이다가 턱을 짚었다.
“음.”
그러니까 지금… 이 집은 내버려 두고 랭커스터 저택으로 가서 방이든 뭐든 빌려줄 테니까 함께 살자는… 그런 제안을 하고 있는 거지? 당황스러운 제안이긴 했으나 생각해 보면 자신을 5년 동안이나 찾아다녔다지 않은가. 예전처럼 같이 얼굴 보고 지내는 걸 바라고 있는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건 물론 고마웠다. 하지만 쉽게 결정을 내릴 문제도 분명 아니었다. 채이는 짧게 침음을 삼켰다.
“레오. 내가 아무리 너랑 인연이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외부인이잖아. 갑자기 같이 살자고 한들, 네 부모님의 허락은? 형제들도 몇 있다면서.”
아직 그는 ‘가주’가 아니다. 또한 현재 랭커스터 저택에는 아직까지 정정한 현 가주를 중심으로 한 직계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할진대 대뜸 집 안으로 굴러 들어온 외부인이 베타 평민이기까지 하면, 지체 높은 귀족분들께선 아주 불편하지 않을는지….
“그런 건 상관없어.”
레오나드가 이번에도 심상한 투로 답했다. 그리고 채이는 이 제안이 레오나드와 그의 가족 사이에서 사전 합의된 게 아님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어릴 때도 한 똥고집 하더니만….
다 커서도 레오나드는 여전했다.
“네가 가문에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고, 가족과 친하지 않은 관계라 해도 이런 결정은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
“이대로 영영 헤어지자고 말하는 것도 아니잖아. 또 약속 잡아서 보면 되지. 무엇보다 난 내 존재가 너한테 독이 될까 걱정….”
“채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꼬리를 잘라내고 있었다. 채이가 생각에 잠겨 있느라고 떨구었던 시선을 다시금 위로 들어 레오나드를 바라보았다. 감았다 뜨인 레오나드의 두 눈은 부드럽던 목소리와 달리 흉흉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난 애초에, 거절의 말을 들으려고 저 바깥에 있는 녀석들까지 끌고 온 게 아니야.”
그건 일종의 협박이다.
제 발로 함께 가지 않겠다면, 기사들을 동원해서 강제로 채이를 데려가겠다는.
“허….”
채이도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황당무계하여 헛웃음이 났다.
머리가 컸다고 이렇게 반항을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얘가 이러던 애가 아닌데.’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으나 다음에는 그 저의가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그리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채이를 바라보던 레오나드의 눈매가 살포시 가늘어졌다.
“그리고.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채이. 너라는 존재가 내게 독이 될 일은 없으니까. 널 가장 필요로 하는 건 나거든.”
그 속에서 설핏 올라오며 드러난 감정의 종류가 무엇인지 채이는 안타깝게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뭐… 이러는 이유가 있겠지.’
어련히 따라가 보면 알게 되지 않겠나. 깊이 고민해봤자 지금으로서는 한계가 있다.
“알겠어.”
대수롭지 않은 일로 태평하게 받아들인 채이는 우선 레오나드의 요구에 맞장구를 쳐주기로 했다.
***
그렇게 마차를 타고 랭커스터 저택까지 반강제로 이동하게 된 채이는….
“와. 이게 집 앞마당이야?”
작은 자연의 일부를 옮겨다 놓은 듯 광활한 부지가 저를 반기자마자 끌려온 상황이라는 점도 잊고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엄청 크네.”
앞마당이 너무 넓기 때문인지 대문에서부터 저택 앞까지 마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길까지 다듬어져 있다. 중앙에는 가주와 그의 부인이 주로 머물며 업무를 보는 메인 저택이 존재했고 그 양옆과 뒤쪽으론 모양도 색도 제각각인 별채들이 있었다. 듣자 하니 랭커스터 가주가 자식들에게 하나씩 지어준 건물이라 하였다.
“각 별채에는 모두 고유한 이름이 있는데 저기부터 순서대로 페리도트, 아메지스트, 스피넬, 셀레니티스, 오닉스야.”
메인 하우스까지 합치면 부지 안에 총 6개의 하우스가 존재하는 셈이었다.
“그렇구나. 오닉스가 네 거지?”
“응.”
“멋있는 집이네.”
“그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앞으로 채이가 머물러야 하는 곳이니까 걱정했는데.”
머물러야 하는 곳….
아무래도 채이가 지내게 될 곳이 바로 저 검푸른 색을 가진 레오나드의 전용 별채, 오닉스 저택인 듯했다. 그렇게 약간의 걱정과 기대를 안고서 오닉스 저택을 구경하게 된 채이는 그저 감탄 또 감탄했다.
‘대공국 군주의 집이니까 스케일이 클 거라곤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크네….’
대리석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로비부터 전문 주방이 딸린 식당에 소가 뛰놀아도 될 만큼 넓은 방. 오래된 고서는 물론이고 최근 발행된 책까지 모조리 품은 도서관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만들어둔 서재, 저택 내에 꾸며져 있는 넓은 정원까지…. 이게 메인 하우스가 아니라 별채라는 점이 더욱 놀랍다.
거기다 앞으론 채이가 오닉스 저택에서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상시 거주하는 주방장에 관리인, 수많은 시종들, 기사들까지 차출되어 부담스러울 만큼 고급스러운 복지를 받게 된 상태였다.
‘과할 정도야.’
어디 가서도 베타 평민이 이만한 복지를 공짜로 누릴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렇게까진 챙겨주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해봤지만, 레오나드는 강경했다. 저택 안에서만 지내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끔 해주고 싶다나.
솔직히 말하면….
채이 자신이 오랫동안 돈을 모아 산 집보다 이제 막 살기 시작한 이곳 오닉스 저택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오닉스에서 살게 된 지도 오늘로 딱 이틀째. 처음에는 자신을 꼭 집으로 데리고 가려는 레오나드의 고집에 의문을 가졌었는데… 이제는 그 고집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이거, 효도 관광이네.’
채이는 폭신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빨려들 것 같은 침대에 누운 채로 긍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