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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12화 (12/105)

012화

‘불법 길드….’

왠지 모르게 익숙한 울림이다. 채이가 그 익숙함의 이유를 떠올려 보고 있을 즈음 아저씨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오?”

“아! 그 소문, 나도 들었어. 가장 최근 박살 났던 게 오소리라는 이름의 길드였지?”

“맞아! 노예 취급하는 거기.”

오소리 길드. 그 단어까지 듣고서야 채이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그건 ‘소설 속 채이’와 관련된 기억이었다. 그는 이전에 불법으로 노예를 취급하는 비밀 길드 오소리에 소속되어 있었다.

물론 자신이 소속되어 있던 길드에 대한 애정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다. 애초에 불법을 자행하고 있던 길드다. 없어지는 것은 마땅했다.

“그런데 대체 누가 하는 거래?”

“아직 밝혀진 게 없어.”

“항상 후드를 쓰고 다녀서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지. 하지만 어딘가의 귀족인 건 분명해… 기사들을 대동해서 다닌다잖아.”

“그렇긴 하지.”

귀족이 익명으로 착한 일을 하고 다닌다니. 평민들이 듣기에는 놀라운 일이며 안줏거리로도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아저씨들은 채이에게도 잔을 내밀어 술을 따라주었다.

“정말 귀족이라면 과연 누굴까.”

“컴베스트의 가신 귀족이지 않을까. 타 영지 귀족이라면 그렇게 자유로이 기사를 대동해서 다니는 건 힘들 테니까.”

“아니면 혹시… 군주님?”

누군가가 넌지시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들이 말하는 컴베스트 대공국의 군주라고 하면 랭커스터 가문의 대공 말고는 없다. 대공에게 작위를 받아 작은 영지를 관리하는 가신 귀족들은 대개 ‘영주’ 혹은 성에 작위를 붙여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들어봐. 그렇다 쳐도 좀 이상하지. 만약 군주님이었다면 그런 좋은 일을 굳이 숨어서 하겠냐는 거야.”

“하긴… 불법 길드의 뿌리를 뽑겠다면서 대대적으로 알릴 만한 일이니까.”

그때 집중해서 듣고 있던 한 아저씨가 또 다른 가능성을 하나 제시했다.

“불법 길드를 이용하는 귀족들의 반발을 살까 봐 몰래 하고 있을 가능성은?”

그건 제법 감탄을 자아내는 추측이었다. 이들도 물론 자유민으로서 못 배운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귀족들 간의 알력 다툼까지 생각할 정도로 교육받은 사람들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도 일리가 있네… 음음.”

“궁금하구먼.”

“언젠가 기다리다 보면 나중에는 정체가 밝혀지겠지 뭐.”

결국 이렇다 할 증거가 없었기에 소문과 관련된 이야기는 그걸로 일단락이 되는 듯했다. 그들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동안 채이도 술을 들이켰다. 마침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기다렸다는 듯 속삭였다.

“그나저나 채이. 내가 저번에 말했던 거는 어찌 잘 생각해 봤나?”

“음?”

“아이, 참. 저번에 말했던 거. 우리 딸이랑 한번 만나 보라 했던 제안 말이야.”

그에 또 한 번 기억을 더듬다 채이는 일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 아저씨가 따님과 함께 주점을 찾았을 때였다. 채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나보다 10살이나 더 어린 꼬맹이한테는 관심 없어서.”

이 세계에서 처음 눈을 뜨기 전 채이의 나이는 38세였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 정신 나이만 따지면 50대다. 이 나이 먹고 딸이나 손주뻘인 사람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기는 좀 힘들지 않을까. 물론 젊어진 몸과 마음으로 젊게 살다 보니 50대라는 게 실감이 나지는 않았지만….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연히 본 바로 이 아저씨의 따님에게는 이미 숨겨둔 정인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아마 제 아비에게 말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상대가 같은 여성이라는 점도 있지만, 알파 귀족 신분이라는 게 클 것이다.

알파·오메가 발현자는 발현자끼리.

베타는 베타끼리.

알파와 오메가라는 인간종이 신분 사회의 상류 계층을 꽉 잡고 있는 이 세계에선 그게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간의 사건·사고는 자연스레 많아진다. 반대에도 자주 부닥쳐야 하고 구설수에도 올라야 하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고정 관념과 편견이 옅은 대신 그런 문제점들이 있었다.

“허어, 거참… 딴 놈들은 다 좋다고 난리인데 별난 놈이야… 기왕이면 좋은 남자와 만나게 해주고 싶었는데.”

아저씨가 아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채이는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따님은 알아서 잘할 테니까 너무 재촉하지 말고 차분하게 기다려 줘요.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서 데려오면 그냥 조용히 응원해주고.”

귀족 알파와 평민 베타의 사랑이라는 게 그리 쉽진 않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부모가 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고 보니 레오나드도 지금쯤이면… 아저씨네 따님 정도 나이가 됐겠구나.’

연락이 두절된 후로 5년….

하지만 대공의 후계라는 건 숨만 쉬어도 그 소식이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가는 존재인지라 레오나드의 소식은 지금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제 형제들을 모두 내리누르고 정식 후계자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했다는 것도. 대공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우성 형질을 이어받은 알파이기 때문에 지금은 도리어 그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도. 그 친아비가 후사를 생각해 벌써부터 능력 있는 오메가를 찾고 있다는 것도….

모두 알음알음 소문으로 전해 듣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을 때하고도 큰 차이가 없었다.

채이는 이 상황에 꽤나 만족하고 있었다.

이따금 잘 지내고 있을지, 다 큰 레오나드는 어떤지 궁금할 때도 있었지만… 정식 후계자 자리에 오르자마자 친한 척 접근해 온 사람으로 오해받고 싶진 않았기에. 언젠가 레오나드가 저를 보고 싶어 하는 날이 오면 어련히 찾아오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채이는 이때까지도 자신의 신분패가 잘못되었으며 그로 인해 문제가 생길 거라는 걸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위조 신분패로도 일상생활은 전혀 문제가 없는 데다 집구석에 처박아둔 신분패를 꺼내어 보는 일 자체도 적었던 까닭에 생긴 문제였다. 그만큼 ‘소설 속 채이’가 만들어둔 위조 신분패는 교묘했으며 관리 시스템은 허술한 편이었다.

“으응?”

“뭐지?”

별안간 웃고 떠들던 아저씨들이 입구를 슬쩍 돌아보았다. 레오나드를 떠올리느라 상념에 잠겨 있었던 채이도 묘하게 술렁이는 분위기에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이유인진…, …해야죠!”

“찾으러 온 것뿐….”

“해를 끼치려는 건…, …시오.”

주점 입구 밖에서 경직된 목소리와 여럿의 발소리가 뒤섞이는 게 심상치 않았다. 그 소리가 제법 컸기에 주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뭐지.’

대체 누가 남의 가게 앞에서 저런 큰 소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그런 생각으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도 잠시. 입구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얼굴이 먼저 들어왔다. 그 얼굴은 요렌테가 그토록 찾고 있었던 주인장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주인장은 상당히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불온하게 술렁거리던 주점은 점점 조용해졌다. 마치 주인장의 긴장이 모든 이들에게 옮고 있는 것처럼. 불현듯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주인장과 채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채이가 이상한 기분을 느낄 즈음 주인장 뒤로, 절그럭대는 이질적인 소음과 함께 은빛 갑옷을 차려입은 대여섯 명의 기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헙….”

잘 절제되어 있지만 알파 오메가임을 알 수 있는 향이 낮게 깔리자 위압감을 느낀 손님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들 가까이에 서 있던 주인장은 이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채이가 가늘게 눈을 내리떴다.

‘일부러 흘리고 있군.’

본디 페로몬이라는 건 본인 의지로 온전히 갈무리할 수도 있는 것인데…. 하물며 자신들의 강인한 페로몬이 사람들의 본능적인 부분을 자극해, 자신들을 두려워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저들의 행동은 명백히 의도된 것이라 보아야 했다.

주점 안은 완전히 고요해졌다.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은 고요함이다. 잔이 서로 부딪치는 투박한 소리도 없어졌으며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자잘한 소음도 없었다.

그리고….

쥐 죽은 듯 조용하게 가라앉은 침묵 속에서 유일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점 안을 점거한 기사들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저벅, 저벅.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고 묵직한 발소리. 들어 보면 신체 밸런스가 좋은 성인 남성으로 추정되는 발소리다. 채이가 직업 군인 시절의 습관으로 상대를 분석하고 있을 즈음… 기사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터주었다. 그 사이로 발소리의 주인이 나타났다. 그는 마치 불법 길드를 박살 내고 다닌다는 그 소문의 사내처럼 후드를 깊이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

하지만 그렇게 뒤집어쓴 것으로는 겉으로 은연히 드러나는 모든 부분을 감출 수 없다. 채이의 예상대로 그 사내는 체격이 좋았으며, 키가 크고 신체 균형도 좋아 딱 보기에 시선을 끄는 인물이었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는 가운데….

펄럭.

돌연 사내가 후드를 벗고 완전히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의미에서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채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헛숨은 눈앞에 놓인 경이로운 외모를 보고서 절로 탄복하여 나온 것이라고.

흔들리는 흑발은 마치 흑요석을 뿌려 놓은 듯했으며 뚜렷한 이목구비, 모양새 잘 잡힌 짙은 눈썹은 미남을 연상케 했으나… 기다랗고 풍성한 속눈썹과 일자로 다물린 붉은 입술, 도자기인 양 뽀얗고 깨끗한 피부는 미인을 연상케 했다.

사람이 잘생기기도 했고 예쁘기도 하다.

세상에 어찌 저런 완벽한 얼굴이….

채이는 조용히 감탄했다. 저토록 신이 정성 들여 빚은 듯한 외모를 가진 사람은 레오나드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잠깐만.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다.

“…드디어 찾았다.”

직후 사내가 눈을 치켜떴다.

“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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