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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10화 (10/105)
  • 010화

    그날 채이는 일어나자마자 평소와 묘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했다. 방 안에 옅게 퍼진 낯선 향을 맡은 것이다.

    언뜻 생각나는 건 입 안에 오랫동안 남을 것처럼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다크 초콜릿 향이다. 자연스럽게 은은한 그 향은 저도 모르게 계속 맡고 싶을 만큼 감미로워 남녀노소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듯했다. 잠시 뒤 견과류를 떠올리게 하는 묵직하고 진득한 향이 섞여 있음을 느꼈는데… 그 향은 상당히 검질겨서 강렬한 빛 뒤에 깔리는 그림자처럼 은밀히 달라붙고 있었다.

    채이는 은연중 깨달았다.

    이 냄새의 정체가 바로 페로몬이라는 것을.

    베타가 알파 오메가로 발현할 때 나타나는 징조였다. 이 세계에서는 베타도 발현자들의 페로몬을 느끼거나 맡을 수 있기 때문에 채이가 징후를 감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향의 근원지는 아직 채이 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레오나드였다.

    “…….”

    채이는 아직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레오나드의 얼굴을 잠시 지켜보았다. 키도 채이만큼이나 크고 체격도 커지면서 이젠 정말 따로 잘 때도 됐는데 레오나드는 여전히 채이와 함께 자길 고집했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고목 나무의 매미처럼 제게 딱 붙어 자고 있었다.

    ‘이 녀석은 안 불편한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5년이란 시간 동안 어리광은 늘고, 어른스러운 척을 해도 아직 철이 덜 들었다. 언제까지고 어린애로 남을 것 같은 녀석이었건만….

    ‘벌써 떠나보낼 시기가 오다니.’

    세월이 참 빨랐다. 채이는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레오나드의 팔을 떼어낸 뒤에 그를 흔들어 깨웠다. 그랬더니 푹 잘 자고 있었는지 레오나드가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을 껌벅였다.

    “……?”

    하지만 이내 스스로의 형질 변화를 느끼고 당황하는 게 겉으로 티가 났다.

    “자. 이거.”

    채이가 몇 달 전에 사둔 뒤 계속 보관해두고 있었던 향 종이를 건네주었다. 그걸 본 레오나드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진짜 채이의 말대로 뒤늦은 발현이 찾아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그가 이걸 예상했던 건지 아니면 단순 우연인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어쨌든 자신이 알파든 오메가든 어느 한쪽으로 발현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오랜 염원을 위해서 채이와 헤어질 것인가.

    채이 곁에 남는 대신 목표를 포기할 것인가.

    이 상황을 마냥 좋아할 수도, 마냥 슬퍼할 수도 없게 된 레오나드였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모르는 채이는 그저 레오나드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가 발현에 대한 설렘이라고 짐작하면서 숨죽였다. 어째서 자신도 함께 떨리는지 모를 일이다. 채이는 레오나드가 마음의 준비를 끝낼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려주기로 했다.

    한참 뒤… 레오나드가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향 종이 끝을 잡자, 하얀색이던 종이가 천천히 물들기 시작했다.

    역시나.

    완전히 물들어 완성된 색은 한 점의 빛도 통과하지 않을 듯 짙고 아득한 흑색이었다.

    “채이.”

    그걸 본 레오나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양가감정을 느끼고 있던 그도 자신의 형질이 우성임을 목도한 지금만큼은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우성 알파로 발현했으니까. 가문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았던 형질이건만, 하필이면 가문이 손수 내친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거기다 알음알음 소문을 통해 알게 된 정보에 따르면 랭커스터 가문에서는 우성 알파 발현자가 끝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에게 복수하고 잃었던 걸 되찾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마치 잘 짜인 시나리오와 같다.

    채이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레오나드로서는 알 수 없는 영역이기도 했다. 그리고 레오나드의 반짝이는 시선을 보고 그가 가문으로 떠나는 미래를 더욱 확신하게 된 채이다. 이제 레오나드와 헤어져야 할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득 섭섭하게 다가왔지만 함께 벅차오르는 이 뿌듯한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잘됐네, 레오. 발현 축하한다.”

    그날 채이는 레오나드와 긴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 소소한 축하 파티를 열기도 하고 고민하는 레오나드의 곁을 지켜주기도 했다.

    예상에서 빗나가는 법 없이 레오나드는 끝내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오히려 밤늦게까지 끙끙대며 자신과 헤어지기 싫다고 고민해준 게 고마웠다. 며칠 뒤 채이는 드디어 떠날 채비를 모두 끝낸 레오나드를 배웅해 주었다.

    “그럼 조심해서 가라.”

    가는 길이 춥지 않게 겉옷을 꼭꼭 입히고, 새로 짜준 목도리도 둘러 주었다. 레오나드는 그런 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채이… 나 언젠가 꼭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러니 도망가지 말고 있어.”

    “참나. 내가 도망을 왜 가.”

    채이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 녀석은 이따금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튄다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애초에 레오나드는 이 대공국 주인의 아드님이다. 이제 곧 정식 후계자가 될 녀석이고. 그리고 대공국 영지 내에 거주하길 희망하는 자유민은 출생부에 자기 신분을 기록해야 하며 영지 안에서만 이사가 가능하다. 채이가 타 영지로 떠나려고 하는 게 아닌 이상 랭커스터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그렇기에 채이도 웃어버린 거였다. 하지만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레오나드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편지 자주 부칠 거니까 꼭 답장하고. 만약 답장하지 못할 일이 생기면 그것도 미리 말해줘야 해.”

    “그래그래.”

    “이사 가게 되면 그것도 나한테 꼭 말해줘. 말도 없이 그냥 가면 안 돼.”

    “알았어.”

    채이는 그 모든 요구에 순순히 답해주었다. 그런데도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레오나드는 한참을 현관문 앞에 서서 망설였다. 결국 채이가 먼저 레오나드의 등을 밀어주었다.

    “가문으로 돌아가면 준비해야 하는 게 많을 텐데, 게으름 그만 피우고 얼른 가기나 하시죠?”

    그제야 체념한 사람처럼 작게 한숨을 내쉰 레오나드가 돌아섰다. 뾰로통해져서 눈을 흘기기는 했지만 그도 이제는 떠나야 할 때란 걸 알고 있었다. 채이는 현관문을 여는 레오나드의 뒷머리를 가벼이 헝클어트렸다. 떠나기 전 레오나드가 채이를 돌아보았다.

    “가서도 잘 지내.”

    “…….”

    그때 레오나드의 손이 허공에 들린 채이의 손을 붙들었다가 조심히 떨어졌다. 아래로 늘어진 기다란 속눈썹이 위로 들리며 드러난 푸른 눈동자가 채이를 담았다.

    “‘다녀올게’.”

    다녀온다. 그 4개의 음절로 이루어진 문장에는 어쩐지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레오나드를 보내고 났더니 후련하면서도 헛헛한 마음이 느껴졌다. 어째서 눈물이 날 것 같은지 모르겠다. 장성한 자식을 멀리 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걸까?

    ‘나도 참 주책이라니까.’

    아직 14살밖에 안 된 어린 녀석이라 걱정도 되지만… 채이는 믿고 있었다. 레오나드라면 원하는 바를 제 손으로 이룰 수 있을 거라고. 행복하게 잘 지내리라고.

    그리고 그날 이후….

    레오나드는 정말 약속한 대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첫 편지 내용을 보니, 무사히 가문에 도착해 담판까지 지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활발하게 편지를 주고받았다. 채이가 가끔 빠르게 답장을 하지 못하는 날이 생겨도 며칠 뒤면 새로운 편지가 도착했다. 집배원이 편지를 받은 다음 여기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답장을 하든 안 하든 거의 매일 쓴다는 소리였다. 가끔은 생활비로 쓰라는 명목하에 엄청난 액수의 돈도 함께 부쳐 왔다.

    시간이 흘러 레오나드를 보낸 이후로 4년이란 세월이 더 지났을 때였다. 드디어 채이는 대도시에 있는 주택을 살 수 있는 수준까지 돈을 모았다. 이제는 정말 정든 오두막집을 떠날 시간이었다.

    “…….”

    채이는 책상에 앉아 펜을 든 채 한참 동안 상념에 잠겼다. 이게 레오나드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일 것이었기에.

    ‘나랑 더 알고 지내는 건 레오나드에게 불리해질 수 있어.’

    건너 듣기로 지금 그는 형제들과 정식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중인 듯했는데….

    우성 형질을 가진 알파로서 누구보다 확실한 자격을 갖추었지만 무려 5년의 시간을 평민 마을에서 허비했던 레오나드다. 거기다 베타 평민과 아직도 엮여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후계자 자격에 대해 따지고 드는 형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흉흉할진대 만약 ‘소설 속 채이’의 과거 행적까지 드러나면 큰일이었다. 이런 중요한 때에 자신의 존재가 레오나드에게 걸림돌이 되는 건 바라지 않았다. 약점이 되는 건 더더욱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이만 끊어내야 한다. 결단을 내릴 때였다.

    『레오에게.

    안녕, 레오. 거기서 잘 지내니?

    네 소식은 항상 잘 듣고 있어.

    나는 이만 정든 집을 떠나 대도시로 이사 갈 생각이야. 가려는 곳은 아직 정확히 정하지는 못했는데, 다른 영지로 가려는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중략)…

    그리고 편지 교환은 이제 마지막인 걸로 하자. 지금까지 정말 고마웠다. 너와 만나 함께 쌓은 순간들 모두 행복하고 즐거웠어.

    평생 추억으로 간직할게. 앞으로도 잘 지내렴. -채이가』

    어디로 이사를 가는지도 왜 마지막을 고한 건지도 편지에는 적어두지 않았다. 혹시 모르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다만 채이는 레오나드가 저를 찾고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찾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편지로 굳이 정확한 위치를 알려, 일부러 덜미 잡힐 짓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채이의 신분패는 ‘소설 속 채이’가 만든 위조품이라서 추적이 안 된다는 점은 이후에나 알게 되는 사실이었다.

    채이는 오두막집을 떠나 한참 떨어진 위치에 있는 도시 ‘랑가’로 이사했다.

    새로운 도시에서의 생활은 빠르게 익숙해졌다.

    그렇게 연락이 끊긴 후… 5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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