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화
그렇게 마을을 지나 시장터에 도착한 채이는 여전히 앞만 보고 걷는 레오나드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급한 거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하다. 채이는 레오나드가 갑자기 왜 저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레오… 뭐 사고 싶은 거라도 있는 거야? 시장은 천천히 가도 어디 도망 안 가.”
“채이는 아무것도 몰라.”
그야 네가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겠니… 독심술사도 아니고서야. 그 말은 속으로만 했다. 괜히 입 밖으로 냈다가 더 삐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어차피 저러다 혼자서 풀린다.
“길 잃겠다. 같이 가자.”
채이가 앞서가는 레오나드의 손을 잡자 잠시 주춤한 그는 아까보다 온화해진 표정을 지었다. 봐라. 역시나 레오나드는 벌써 기분이 풀려 있었다. 픽 웃은 채이는 레오나드와 함께 사람들로 북적대는 시장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레오나드가 떠돌이 음유시인의 공연에 시선을 뺏겨 한참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잡동사니 파는 곳에 있을 거 같은데.’
채이는 사려던 물건을 찾기 위해 근처를 돌아다니며 진열대를 살폈다. 그리고 잡동사니를 파는 한 점포 앞에 멈춰 섰다. 찾던 것은 진열대 구석 자리에서 발견되었다.
‘찾았다.’
바로 ‘향 종이’이다. 겉으로 보면 정사각형의 흰색 종이일 뿐이지만 사실 알파 오메가가 가진 페로몬을 감지하여 색깔이 바뀌는 특별한 종이였다.
알파라면 모노톤 계열의 색으로.
오메가라면 다채로운 색으로.
특히 우성 형질을 가지고 있는 알파는 칠흑 같은 검은색이 되고, 오메가는 화려하고 영롱한 색이 된다고 한다. 이렇듯 발현 인자뿐만 아니라 정확한 형질까지 색으로 구분할 수가 있어 유용했다. 알파 오메가를 자식으로 두는 귀족들이 아이의 형질을 파악하기 위한 용도로 자주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나리, 향 종이에 관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얼마 전에 수도에 가서 얻어온 거예요.”
채이가 관심을 가지는 듯하자 유심히 살피던 상인이 너스레를 떨며 말을 붙였다.
“사실 귀족 거리가 아니면 향 종이를 살펴보는 사람이 없다시피 하는데… 지인 중에 발현자가 있으신 모양이지요?”
그에 살포시 미소만 지은 채이는 상인의 노골적인 질문을 회피하며 답했다.
“따로 쓸 데가 있어서. 이거 하나 주세요.”
“예이! 여기 작은 박스 안에 2장이 들어 있고요. 가격은 3젠트인데, 조금 깎아서 2.5젠트에 드리겠습니다.”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향 종이의 가격은 상인의 말마따나 3젠트가 맞았다. 그리고 이 근방이 수도에 비해서 물가가 싼 것을 생각하면 깎아주는 것도 합당한 일이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작은 박스에 겨우 일회용 향 종이가 2장 들어 있는 걸로 3젠트는 솔직히 비싼 가격이었다.
일반적인 고급 종이가 1.2젠트라는 걸 생각해 보면 말이다. 하지만 향 종이를 사용하는 주요 고객층이 알파와 오메가, 즉 대다수 상류 계층에 속하는 귀족들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건 아니었다.
짤그랑.
지갑에서 나온 2.5젠트가 상인의 손 위로 떨어졌다. 그는 손을 삭삭 비비면서 거래가 끝날 때까지 알랑방귀를 뀌었다.
“채이. 뭐 산 거야?”
어느새 채이 곁으로 다가와 있던 레오나드가 불쑥 물었다. 그 물음에 채이가 답하기도 전에 레오나드는 이미 물건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향 종이잖아.”
레오나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한쪽 눈썹을 들썩이더니 채이를 올려다보았다. 알파 오메가들이나 쓰는 향 종이를 사서 어디다 쓰려는 거냐. 마치 그렇게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채이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미리 생각해두었던 변명을 꺼냈다.
“네가 언젠가 발현할지도 모르니까. 미리 사두는 거지 뭐.”
그러나 레오나드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통 ‘발현기’라고 부르는 시기는 5-7살 즈음이니까. 벌써 13살이나 됐는데, 뜬금없이 발현 이야기를 꺼내 봤자 와닿지 않았던 것이리라.
‘나도 미래 정보를 아는 게 아니었으면 믿지 않았을 테지.’
전혀 사례가 없는 일은 아니지만 확실히 레오나드의 뒤늦은 발현은 특이 케이스였다.
“채이는 내가 발현했으면 좋겠어?”
돌연 뚱해 있던 레오나드가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채이는 당황했다. 그걸 왜 자신에게 묻는 것인가에 대한 것도 그렇지만, 마치 저를 원망하듯 톡 쏘아붙이는 말투였던 까닭에. 자기가 먼저 발현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가문에 복수했으면 좋겠다고 했으면서….
채이의 입장에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레오나드가 그런 말을 한 이유는 다음에 나온 말로 알 수 있었다.
“내가 발현하게 되면… 헤어져야 할지도 모르는데.”
요 귀여운 녀석은 지금 가문에 복수하는 일보다 저와 헤어지는 일이 더 아쉽다는 양 이야기하고 있는 거였다. 그건 사실 엄청난 일이다. ‘소설 속 레오나드’가 본래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기에 더욱 그 말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간 생각 많이 했었나 보네.’
레오나드가 이렇게 표현한 건 이번이 처음인지라 채이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다만….
“그걸 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떠나고자 한다면 떠나보낼 것이며, 남고자 한다면 기꺼이 함께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해 주긴 했어도 레오나드의 성격상 떠나지 않을 확률은 낮을 거다. 그리고 가문으로 돌아가 가문의 유일한 우성 알파 후계자로서 자리 잡게 된다면… 평범한 베타 평민 신분인 자신과는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본래라면 얼굴을 마주할 일도 거의 없는 관계. 자신이 대부를 자처한들 발현에 성공한 이후부터 관계 유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레오나드다. 한때는 비상시의 인맥으로, 정을 이용해서 빌붙은 다음 귀찮게 할 의향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채이와 레오나드의 관계는 사실상 거기서 끝이었다.
그래도 그것이 레오나드가 원하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응원할 생각이었다. 채이는 레오나드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걸 자신의 의지로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
레오나드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침묵했다.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채이로서는 알 턱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돈은 얼마나 모였으려나.’
레오나드를 보낸 뒤의 일을 생각하니 문득 떠올랐다. 도시에 있는 집을 구매해서 이사 가려면, 적어도 2,000젠트쯤은 있어야 할 텐데.
결국 채이가 먼저 돌아가자며 발걸음을 떼자 그제야 레오나드도 뒤를 묵묵히 따랐다. 집에 도착한 레오나드는 겉옷과 목도리를 벽에 걸어두고 먼저 씻으러 들어갔다. 레오나드가 씻을 동안 채이는 오랜만에 금고를 확인했다.
‘음. 꽤 많이 모았군.’
은행에 돈을 넣어두는 게 더 안전하지만 은행은 다른 도시까지 건너가야 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이 빙의하고부터 모은 돈은 금고에 저금 중이었다. 그리고 그 금액은 제법 되었다. 숲속 마물들을 어렵지 않게 때려잡을 수 있는 수준이 되고서는 마물의 부산물도 팔아서 모았기 때문이었다.
“이사 간다는 것도 결국 혼자 갈 생각이었던 거군. 왜 나한테 말 안 해주나 했더니.”
마침 금고 문을 닫는데 등 뒤에서 레오나드의 목소리가 들려 채이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입 밖으로 생각이 나온 것도 아닌데 어찌 알았담. 그런 생각이 겉으로 드러난 탓인지 레오나드가 낮아진 목소리로 퉁명스레 덧붙였다.
“일전에 혼자서 중얼거리던 소리 들었어. 어떤 도시로 이사 가는 게 좋겠다느니 기왕이면 너무 작지 않은 집이 좋겠다느니.”
정확히 언제인진 모르겠으나, 최근 도시 물가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중얼대곤 했는데 그때인 듯했다.
“이미 내가 떠난다는 걸 가정하고 있었던 거야. 아직 발현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건데… 거짓말쟁이.”
레오나드의 얼굴이 어둡다. 그는 채이가 자신을 떠나보내고 싶어 한다고 느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향 종이를 사고, 이사 갈 계획을 자신에게는 이야기하지도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채이는 레오나드가 발현하면 떠날 거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산다는 가정 자체를 안 했을 뿐이라는 걸 레오나드는 몰랐다.
“레오, 그게 아니라… 나는 네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만약 네가 남게 되면, 그땐 둘이 살아도 괜찮을 집으로 가자.”
채이가 레오나드를 달래며 말했다. 문제는 그 말조차 일단 떠날 테지만 ‘만약 그러지 않는 상황’을 전제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레오나드는 그게 조금 섭섭했다. 사실은, 채이가 좀 더 자신을 적극적으로 붙잡아주길 바랐는데. 그러지도 않고….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휘둘리며 상처만 받던 예전의 꼬마가 아니었다.
“몰래 도망가기만 해. 지옥 끝까지 쫓아갈 거야.”
그는 정말 언젠가 발현해서 떠나는 때가 오더라도 채이를 영영 떠날 생각이 없었다. 행여나 채이가 그랬다간 제국 전체를 뒤져서라도 찾아내고 말 거였다. 레오나드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 살벌한 소리를 토라져서 나온 농담이라고 생각한 채이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답했다.
“그래그래.”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그의 조그만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만히 쓰다듬을 받고 있던 레오나드가 홱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언젠간 채이보다 키도 더 커질 거야.”
기어이 웃음을 참지 못한 채이가 풋 웃어버렸다. 그 엉큼한 속내를 모르는 채이의 눈에 레오나드는 그저 귀여운 꼬맹이에 불과했다.
“그러든가.”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흘러 초봄. 드디어 레오나드가 발현하는 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