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화
채이는 레오나드가 아직 잠에 빠져 있는 걸 확인한 뒤 거실로 나갔다. 춥지 않게 겉옷을 몇 겹 껴입고 현관문을 여니, 눈으로 잔뜩 뒤덮인 대지가 하얗게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이야. 절경이네.’
지나가는 산짐승이나 인적이 없었던 까닭에 깨끗한 도화지를 보는 듯하다. 저기에 발 도장을 찍어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새 잠이 깬 듯 레오나드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오고 있었다.
“채이… 뭐 해.”
“아, 깼어? 밖에 봐봐. 밤새 눈이 엄청 쌓였어.”
채이는 걸치고 있던 겉옷 하나를 벗어 레오나드에게 덮어 준 후 바깥을 가리켰다. 그러자 레오나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바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내 채이와 레오나드는 집에서 나와 새하얀 눈 위에 두 사람만의 족적을 남겼다.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을 때마다 일정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예쁘다. 그치?”
“…응.”
채이는 뿌옇게 엉기는 입김을 가볍게 불며 저 멀리 시선을 두고 구경했다. 그런 채이의 옆모습을 레오나드가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레오나드의 시선을 뒤늦게 눈치챈 채이가 왜 그러냐는 뜻으로 눈썹을 휘었다.
“왜 그래?”
그러자 순간 레오나드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당황한 듯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시선은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잠잠해졌다. 레오나드는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으로 답했다.
‘흐음.’
또 숨기는 게 있는 건 아니겠지. 채이는 슬쩍 레오나드를 살펴보았다. 그는 뭔가 상념에 잠긴 얼굴로 이 근처를 천천히 걸으며 정취를 느끼고 있었다. 문득 생각 난 게 있어 쭈그려 앉은 채이가 눈을 뭉쳤다.
“레오. 너 눈싸움 할 줄 아니?”
“……?”
레오나드가 멀뚱히 고개를 돌렸다. 방심하고 있는 그에게 눈 뭉치를 툭, 던지자 피하지 못하고 어깨에 맞고 말았다. 그에 채이가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에는 넋 놓고 있던 레오나드도 이내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툭!
그리고 채이가 했던 것처럼 눈 뭉치를 던져본다. 하지만 허무하게 빗나갔다. 다시 한번 채이를 맞춰 보려 시도했지만 채이는 이번에도 쉽게 맞아주지 않았다.
“눈싸움 경력만 5년인 나를 네가 과연 맞출 수 있을까?”
“또 이상한 소릴….”
오기가 생긴 레오나드가 눈을 뭉쳤다. 그 조막만 한 손으로 열심히 도닥인 눈 뭉치가 날아오면, 채이는 또 가뿐히 피해버리곤 낄낄 웃으며 약을 올렸다. 그러다 방심해서 뒤통수에 맞기도 하였다.
“아고. 뛰어다녔더니 힘들다.”
“채이. 그러다가 감기 걸려.”
채이가 눈밭에 눕자 옆자리에 쭈그려 앉은 레오나드가 잔소리를 했다. 이럴 때는 또 따박따박 옳은 소리만 하는 것이 어른스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채이가 악동처럼 씨익 웃었다.
“눈밭에서 뒹구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데. 그러지 말고 너도 누워 봐.”
그에 레오나드가 폭 한숨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틈을 타서 레오나드를 끌어안다시피 한 채이가 눈밭을 굴렀다. 데구루루 구르다 같이 발라당 누워버리자 채이가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당황해서 동그랗게 눈을 떴던 레오나드는 이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막상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던지라 가만히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때. 좋지?”
누운 채 레오나드를 돌아본 채이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
레오나드도 나직이 대답했다.
그날 두 사람은 눈밭을 뒹군 대가로 지독한 감기에 걸리고야 말았다. 채이는 이럴 줄 알았다며 레오나드에게 잔소리를 듣고, 약을 처방받기 위해 찾아갔던 수도원에서도 어제 그렇게 다쳐서 오더니 오늘은 또 감기냐며 잔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채이는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레오나드와의 추억이 하나 더 쌓인 것에 만족했다.
‘앞으로도 잔뜩 쌓아야지.’
헤어져야 하는 그때가 오기 전까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 레오나드와 만난 지도 4년이 다 되었다.
그 해에도 어김없이 추운 북풍과 함께 겨울이 찾아왔다.
***
4년.
벌써 레오나드와 만나 함께 지낸 지도 4년이 됐다. 거기다 5년 차까지도 이제 몇 개월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간 잘 먹이고 잘 재운 덕분인지 또래보다 작던 레오나드의 키도 어느새 훌쩍 자라 평균치가 되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큰다는 말이 있더니 정말이었다.
“눈 온다.”
일찍 일어나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바깥 구경을 하고 있던 레오나드가 중얼거렸다. 그 모습은 가히 그림이라고 부를 만했다. 올해로 드디어 13살이 된 레오나드의 외모는 점점 무르익으면서 더욱 물이 올랐다. 원래 예뻤는데 더 예뻐지는 정변의 아이콘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물론, 너무 자주 본 얼굴이라 익숙해진 채이에게는 큰 감흥으로 다가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난로에 불을 피우고 다가간 채이도 흘깃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문득 4년 전 이맘때쯤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마물한테 다쳐서 식겁했던 것도 이 시기쯤이었지.”
“응.”
“그땐 지금보다 훨씬 작고 여렸는데. 우리 레오, 언제 이렇게 커버렸담?”
채이가 오구구 소리를 내며 레오나드의 양 뺨을 손바닥으로 문질거렸다. 어린아이 대하듯하는 채이의 장난에 레오나드는 질색하며 눈을 흘겼다.
“…채이는 가끔 할아버지 같아.”
“그런가.”
장난스럽게 웃은 채이는 이내 레오나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쑥쑥 크렴.”
그 온기를 오롯이 느끼며 볼그레 뺨을 덥히고 있던 레오나드가 문득 채이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시장 언제 내려가?”
“아. 안 그래도 이제 가려고.”
슬슬 사야 하는 것도 있고.
“나도 따라갈래.”
“그래? 그럼 나갈 준비해.”
채이가 등을 도닥여 주니 레오나드가 냉큼 찻잔을 내려두고 일어나서 겉옷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오늘도 마지막에는 으레 그랬듯 채이가 짜준 목도리를 목에 둘렀다. 사용한 지 오래돼서 많이 해어졌는데도 여전히 소중한 보물처럼 잘 쓰고 다니는 레오나드였다. 하지만 보는 입장에서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실력도 형편없어서 삐뚤삐뚤하고 못난 목도리이지 않은가.
“목도리도 새로 하나 살까?”
하여 목도리 상태를 넌지시 살펴보던 채이가 이전에도 했던 말을 재차 꺼내 보았지만….
“싫어.”
역시나 쉽지 않았다.
“난 이게 좋다고 했어.”
경고하듯 목소리를 내리깔곤 부리부리하게 눈까지 흘겼다. 자신이 뭐, 목도리를 버리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마치 그런 소리를 들은 아이처럼 목도리를 꾹 움켜잡고 있었다. 채이가 게슴츠레 눈을 흘겼다.
“그래도….”
“싫어. 채이가 짜준 게 좋아.”
어휴.
요놈의 억센 집착과 고집은 도대체 누구를 닮은 건지 모를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런 부분들이 느껴졌다. 음, 어쩌면 사춘기가 다가오는 중인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다 해어지고 삐뚤삐뚤 못난 목도리를 저리 아껴주니 고맙긴 하다만….
‘뜨개질 연습을 좀 해야겠군.’
그래도 좋은 것만 먹이고 입혀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채이는 조만간 새로운 걸 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집을 나와 마을로 내려가고 있던 것도 잠시…. 조용히 채이의 등 뒤를 따라 걷고 있던 레오나드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채이. 있잖아.”
“으응?”
“손잡아도 돼?”
채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회피하고 있는 레오나드의 볼이 평소보다 발그스름하다. 아무래도 추워서 그런 듯싶었다. 채이는 자신이 먼저 레오나드의 손을 잡아 주고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뭘 새삼 허락까지야.”
그 미소를 지그시 바라보던 레오나드가 은근한 힘으로 맞잡고서 속눈썹을 떨궜다. 뿌옇게 엉기는 입김 사이로 어떤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감정의 정체를 채이가 알아보는 일은 없었다.
“아가들. 시장 내려가니?”
그때였다. 숲에서 내려가 시장으로 가기 위해 농가를 가로질러 걷고 있을 무렵, 일하다 말고 채이와 레오나드를 알아본 할멈이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일전에 레오나드에게 채이의 정체를 일러주었던 그 할멈이었다.
이후에도 저 할멈과는 한차례 다툼이 있었는데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감시의 눈초리가 옅어졌고 지금은 안부 인사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몇 년 동안 레오나드와 무탈하게 잘 붙어 다니고 건강하게 지내는 채이의 모습에, 점차 생각이 바뀌게 된 모양이었다.
실제로 할멈은 이제 채이를 좋게 보았다.
나쁜 일에서 손을 떼고 회개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싹싹하지, 몸 좋지, 훤칠하니 잘생겼지.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면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라치니. 그간 잘 지내셨어요?”
“아휴. 그럼그럼.”
채이가 꾸벅 인사하자 라치니 할멈이 손을 내저으며 자연스레 대화를 이었다.
“어째 채이 아가는 가면 갈수록 잘생겨지는구먼… 몸 관리는 또 어떻고.”
“라치니도 아직 젊고 건강해 보이세요. 그리고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어마나, 얘도 참!”
채이의 입바른 소리에 라치니 할멈이 뿌듯하게 웃었다. 젊을 적 풋풋하게 가졌던 감정을 다시 찾은 사람처럼 수줍은 미소였다. 그게 거슬린 듯 레오나드가 눈을 흘겼지만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채이, 너도 이제 장가갈 나이가 됐을 텐데, 너 좋다는 사람은 어디 없다니?”
“음.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혹시 괜찮으면 우리 손녀….”
채이가 머리를 긁적이는 동안 할멈은 제 손녀와의 만남을 주선해 보려 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레오나드가 더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가자며 채이를 재촉했다.
“채이! 빨리!”
“잠깐… 아, 알겠다니까!”
“에구….”
결국 이번에도 실패한 라치니 할멈은 아쉽게 손을 흔들어 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