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화
물론 처음부터 순수한 목적만으로 그에게 접근했다곤 말할 수 없다. 그때는 불미스러운 일을 방지하고 혹시 모를 인맥을 생각했던 부분도 있었으니. 하지만 중요한 건 1년 남짓한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생겨난 현재의 감정이라 생각했다.
“…정말?”
레오나드가 넌지시 되묻는다.
채이는 고민할 것도 없이 대답해주었다.
“정말이지.”
“약속할 수 있어?”
“약속할 수 있어.”
확답을 여러 차례 받고서야 레오나드는 슬쩍 눈을 굴렸다. 조금 전보다 훨씬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숨기지 못한 감정이 입꼬리를 자극했는지 그만 씰룩 올라가 버리는 걸 멈추지 못했다.
-이것만은 알아주렴. 너는 그 자체로 내게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거.
레오나드는 이토록 깊이 벅차오르는 행복한 감정을 살면서 느껴본 적이 없었다. 태어나서 가문에 버림받을 때까지 그를 이만큼 다정하게 대해준 사람도 없었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이었다.
그건 레오나드를 어쩔 줄 모르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숨겨지지 않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던 채이는 어쩐지 가슴 안쪽이 꾹 조여드는 걸 느꼈다.
‘이렇게 작고 여린 녀석을.’
살기 위해 도망친 곳에서 학대를 당하지 않고 가문에 대한 복수심에도 매몰되지 않은 레오나드. 그는 친구에게서 들었던 소설 속 이야기와 다르게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더 짠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채이가 레오나드의 머리를 가볍게 도닥였다. 눈이 마주쳤을 땐 방긋 웃어주었다. 마치 이른 봄의 싱그러움을 담은 듯한 미소였다.
“…….”
레오나드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채이의 미소가 손에 잡히는 것이었다면, 이 한 손에 잡아둘 수 있었을까….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하던 레오나드였으나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채이는 갑작스러운 레오나드의 행동에도 그저 가만히 있어 주었다.
“…채이. 내일은 내가 대신 저녁 거까지 장 보고 올까. 일찍 가면 좋은 게 더 많잖아.”
“하지만 혼자서 괜찮겠어?”
“응. 요즘 채이 바쁘니까… 나도 뭔가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으음.”
채이는 잠시 고민했다. 레오나드에게 심부름을 부탁해도 괜찮을지. 하지만 레오나드는 혼자 돌아다닌 적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 자유로운 외출에 적응도 할 겸 경험 삼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심부름 교육은 아이로 하여금 성취감과 자신감 등을 얻게 해준다는 것도 같으니까.
“알겠어. 그럼 부탁 좀 해볼까?”
레오나드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스레 기특해져서 흐물흐물 웃은 채이는 한 번 더 레오나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일어났다. 이제 그만 밤이 늦었으니 자러 갈 시간이었다.
“내일 사 와야 하는 건 종이에 적어서 줄게. 용돈도 넉넉하게 줄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먹고 와도 돼. 알겠지?”
“응.”
“어이구. 우리 레오 다 컸네.”
그런 채이의 우스갯소리가 영 마음에 안 들었는지 레오나드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 삐딱함조차 마냥 귀여웠던 채이는 웃어넘겼다. 만약… 채이 자신이 허락한 일로 인해서 문제가 생길 줄 미리 알았더라면, 절대 레오나드를 혼자 마을로 보내지 않았을 거였다.
***
다음 날. 아침 해가 밝았다.
레오나드는 평소 채이처럼 이른 아침부터 눈을 떴다. 오늘은 그가 심부름을 위해 마을로 혼자 내려가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드는 어떤 비장한 사명감을 느끼는 동시에 조금 두렵고, 한편으론 들뜨기도 했다. 저택에 있을 적에도 항상 누군가의 시중만 받았지 직접 이렇게 소소한 잡일을 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실수 없이 잘하고 오자.’
그러면 채이는 또 어제처럼 예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칭찬해줄 것이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채이의 미소를 떠올리며, 잠시 앉아 있던 레오나드가 이내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거실로 향했다. 그보다 일찍 일어나 있던 채이가 밤새 불태운 난로에 새로운 장작을 넣고 있었다.
“잘 잤니?”
다가서는 기척을 느낀 듯 돌아본 채이가 언제나처럼 비슷한 안부 인사를 건넸다. 포근하게 머리 위로 올라와 온기를 전달하는 커다란 손바닥도 평소와 같다. 레오나드에게 있어 채이는 정말 꿈에나 그리던 자상한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나이대보다 훨씬 동안이라 굳이 따지자면 ‘형’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레오나드는 채이가 주는 정을 듬뿍 받으며 평온함을 만끽했다.
“웬일이야?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채이 나갈 때 같이 나가려고.”
“좋아. 그럼 씻고 와서 준비해.”
뭔가 재미있다는 듯 자잘하게 웃음을 터트린 채이가 등을 도닥여줬다. 레오나드는 저를 마냥 어린애 취급하는 채이의 태도에 왠지 모를 반항심이 불쑥 샘솟았지만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레오. 잘 다녀올 수 있지?”
“걱정하지 마.”
“그래그래. 조심하고.”
채이가 레오나드의 목에 손수 짠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손에는 돈과 메모가 들어 있는 지갑을 쥐여 주었다.
“중간에 이상한 데로 길 새면 안 된다. 알겠지? 이 숲에는 마물들이 사니까 위험해.”
“알았다니까.”
“아직 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마물이 나타난 적은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발소리 너무 크게 내지 말고….”
“채이나 조심해서 다녀와.”
그렇게 겨울 약초를 캐기 위해서 숲으로 향하는 채이를 배웅한 레오나드는 마을로 내려가는 반대편 길을 돌아보았다. 혼자서 모험을 떠나는 것도 같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잃어버리지 않게 잘 챙기고….’
지갑은 두툼한 겉옷 주머니에 쏙 넣었다. 주머니 밑에 구멍이 뚫려 있지는 않은지도 꼼꼼히 확인한 후에야 만족한 레오나드는 총총 길을 내려갔다. 채이의 걱정과 달리 마을로 가는 길목에서 마물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아가. 오늘은 혼자니?”
시장으로 내려가기 전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마을의 흙길을 걸어가고 있으려니 평민 한 명이 알은척을 했다. 최근 레오나드가 채이와 함께 마을로 내려오는 일이 많아져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눈에도 얼굴이 익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오나드는 다른 누군가와 살갑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고개만 까닥여 인사한 후 지나가려는데 뒤에서 중얼거리는 그 평민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것이 딱하기도 하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거슬리는 구석이 있는 말이다. 아마 영문도 모르고 불쌍한 애 취급을 받아서 그런 것 같았다. 레오나드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찡그리고 말았다.
‘뭐야.’
하지만 무슨 소리냐고 따지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척했다. 어쩌면 잘못 들은 걸 수도 있고. 그렇게 마을 시장까지 무사히 도착한 레오나드는 메모에 적힌 것부터 착착 구매했다. 조금 긴장한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생각보다 심부름은 쉬웠다.
‘별거 아니네.’
괜히 의기양양해져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레오나드가 마지막 남은 식재료 목록을 확인하고 돌아설 때였다.
“얘야. 오늘은 혼자 내려왔니?”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에서 들려온 가냘픈 목소리가 레오나드를 불러 세웠다. 레오나드가 주춤하며 멈춰 돌아보았더니 그곳에 나이가 지긋하여 앙상한 몸에 흰머리가 잔뜩 난 할멈 한 명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
아까 전과 비슷한 상황에 레오나드는 살짝 경계심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할멈은 주변을 한차례 살피더니 성큼 다가와 레오나드의 팔을 붙들었다. 당황한 레오나드가 몸을 뒤로 빼려는 찰나 할멈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아가, 잘됐구나. 그 녀석이 방심을 한 모양이다. 신이 널 도왔어.”
역시 아까 전과 상황이 비슷하다 했더니.
그 평민 아저씨처럼 이상한 소리를 하는 할멈이었다.
“놔요.”
레오나드가 불편한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 손을 잡아 빼려고 했다. 무시하고 지나가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할멈은 끈덕지게 레오나드를 붙잡은 채 다급히 말을 이었다.
“지금이 도망갈 기회야, 어서.”
“대체 무슨 소리를….”
“그 녀석이 네게 잘해주던? 그렇다면 넌 지금 그놈에게 속고 있는 게야! 널 노예로 길들여서 다른 영지에다 팔아넘기기 위해 네게 잘해주는 거라고.”
순간 레오나드는 귀를 의심했다.
“…노예?”
“에구구, 역시 모르고 그 녀석을 따랐던 거구나. 용의주도하기도 하지….”
할멈은 정말 딱하여 불쌍해 죽겠다는 얼굴로 레오나드를 바라보았다.
“그래, 아가… 저 오두막집에 사는 젊은 청년은 불법적으로 노예를 팔아 돈을 챙기는 노예상이란다.”
몽롱해지는 레오나드의 정신 속에서 할멈의 목소리와 주변의 소음들이 점차 옅어졌다.
“기회가 왔을 때 도망가렴. 너는 다른 불쌍한 아가들처럼 되지 말아야지 않겠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불법 노예상… 채이가?’
순간 시장으로 내려오기 전 마을의 평민 아저씨가 중얼거렸던 말이 떠올랐다.
-어린 것이 딱하기도 하지.
그뿐이면 분명 좋았을 것이다. 헛소리라며 그냥 넘겼을 거였다.
하지만….
평소 채이와 함께 시장으로 내려오면 이따금 뒤통수에 꽂히던 곱지 않은 시선들. 요즘엔 왜 ‘좋은 물건’을 팔지 않냐면서 접선해 오던 정체 모를 무리들.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이제껏 그냥 지나쳤던 사소한 것들이 하나둘 증거가 되었다.
“…….”
의심은 곧 충격으로… 충격은 다시 채이에게 배신당했다는 분노로 바뀌었다.
-이것만은 알아주렴. 너는 그 자체로 내게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거.
레오나드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는 떨리기 시작한 주먹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