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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4화 (4/105)

004화

아직은 날이 많이 추웠기 때문에 채이는 이른 아침부터 두꺼운 옷을 여러 개 껴입고 거실 벽난로를 피웠다.

‘어우. 추워라.’

그간 채이의 꾸준한 노력으로 비실거렸던 몸은 많이 바뀌었다. 겉으로 크게 티가 나지는 않으나 오밀조밀 들어찬 내장형 근육은 꽤 옹골찼고 늘씬하게 균형 잡힌 육체는 겉으로 보기에 썩 눈이 즐거웠다.

물론 비교 대상이 과거의 자기 자신인 채이는 아직 권채이였을 당시보단 부족함이 많다고 여겼다. 전생에서의 채이는 188cm의 장신에 지금보다 딱 벌어진 어깨, 지근뿐만 아니라 속근까지 발달해 철산처럼 느껴지는 다부진 상체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와 제법 친한 사이였던 선후배들은 그를 둔한 곰탱이라고 불렀지만 잘 모르는 이들은 항상 그의 첫인상에 압도되곤 했다. 그가 비밀 특수 부대 내에서도 천재라고 불릴 만큼 천부적인 실력자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반면 현재의 채이는 178cm에서 더 크지 않고 있고, 운동을 시작한 지도 이제 겨우 1년 남짓. 이따금 약초를 캐러 다니다가 숲에서 마물을 만나면 때려잡곤 있으나 그걸로는 실전 근육을 키우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머리론 전생의 전투 방식을 기억하고 있는데 몸이 아직 따라주지 않는 불상사도 간혹 일어나곤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불만이었다.

채이는 창밖을 슬쩍 내다보았다. 겨울이 오고부터 이 주변에는 눈도 자주 내렸는데 다행히도 오늘은 잠잠할 것 같았다.

난로의 열로 거실이 은은하게 따뜻해질 즈음 잠에서 깬 레오나드가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방에서 나왔다. 근 1년간 잘 먹고, 잘 자고, 잘 관리받은 덕에 꼬질이에서 귀공자 태가 물씬 나게 된 레오나드다. 그뿐이랴. 앙칼진 길고양이 같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무방비하게 풀어져선 순둥이가 다 되어 있었다.

“채이….”

“일어났니?”

채이의 물음에 레오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채이는 레오나드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앉아 있으렴. 차 끓여다 줄 테니.”

“응.”

잠시 후 채이는 소파에 앉아 발을 꼼지락대며 몸을 녹이는 레오나드에게 방금 막 따뜻하게 끓인 약초 차를 내어 주었다. 뜨뜻한 열기로 인한 김이 몽글몽글 올라와 그의 얼굴을 덥힌다. 약초 차를 천천히 홀짝대는 레오나드를 일별한 채이는 이내 외출할 채비를 했다. 그런 채이를 어느 순간부터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레오나드가 입을 달싹였다.

“…아직 해도 다 안 떴는데 벌써 나가려고?”

그리고는 컵을 쥔 손을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했다.

마치 떠나보내기 아쉬워하는 듯이.

그 모습이 못내 귀여웠던 채이가 레오나드의 머리를 부드럽게 도닥여 주었다.

“최근에 좀 바빠서 같이 있을 시간이 적네. 미안하다, 레오.”

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겨울 한 철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겨울 약초들이 있는데 이게 희귀한 만큼 비싸게 팔려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더 긴 시간을 바깥에서 보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 다녀올게.”

레오나드는 제 머리 위로 떨어진 묵직한 손의 무게에 안정감을 느끼면서 일렁이는 찻잔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돌연 떠나려는 채이를 말로 붙들었다.

“채이.”

그에 채이가 신발을 신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

레오나드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망설였다. 하나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끝내 하고 싶었던 말을 속에 숨기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잘 다녀와.”

하여 채이도 조용히 웃는 얼굴로 레오나드를 일별한 후에 집을 나섰다. 겨울 약초를 따기 위해 숲 안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요즘 들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굴다가도 말하지 않는 일이 잦단 말이지.’

채이는 레오나드가 보이는 수상한 행동의 원인이 뭔지 생각해 보았다.

‘마땅히 짚이는 구석은 없는데… 뭔가 내가 모르는 고민이라도 생긴 건가.’

차라리 먼저 왜 그러냐 물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스스로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이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아이를 상대하기란 참 어렵네.’

그렇게 숲을 쏘다니며 겨울 약초를 잔뜩 캐낸 채이는 저녁 즈음 시장에 내려가 당일분을 모두 팔아넘겼다. 저녁에 먹을 양식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니 어느덧 늦은 밤. 레오나드는 소파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채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을 탁 덮은 그가 총총 다가왔다.

“어서 와. 그거 고기야?”

“어. 시장 내려가니까 웬일로 신선한 고기가 아직 한 덩이 남아 있더라고.”

고기를 보는 레오나드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다른 이가 보았다면 무뚝뚝한 표정이라고만 생각했을 테지만, 오랫동안 레오나드와 함께 지내 온 채이는 섬세한 감정들을 빨리 알아차리게 되었다.

“씻고 올 테니까 이거 좀 부엌에다 가져다 놔주라.”

“응.”

채이에게서 고기를 넘겨받은 레오나드가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발걸음으로 돌아섰다. 그날 저녁 식사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원래부터 요리 솜씨가 좋았던 채이는 최근 그 솜씨가 더욱 빛을 발했다. 처음에는 채이를 못 미더운 사람으로 오해했던 레오나드도 이제는 채이의 생활력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후엔 레오나드의 키를 쟀다. 몇 달 전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검사를 하고 있었는데 또래 평균 키보다 작았던 레오나드는 아직 한참 더 커야 했다.

‘그래도 쑥쑥 자라는 중이니까.’

언젠가는 친구가 이야기했던 ‘소설 속의 레오나드’처럼 늠름해지리라. 기둥에 그어진 흔적들을 보며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채이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던 레오나드가 문득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채이.”

“어, 왜?”

상념에서 빠져나온 채이가 고개를 떨구었다. 눈이 마주치자 먼저 시선을 회피한 레오나드가 또다시 침묵을 지켰다. 답답하기도 할 텐데 채이는 재촉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다.

그 덕분일까.

레오나드가 드디어 말하기로 결심한 듯, 앙 다물려 있던 입을 뻐끔 열었다.

“사실… 지금까지 채이한테 말하지 않았던 게 있어.”

긴장으로 인해 경직된 어깨와 마주하지 못하고 바닥을 응시하는 불안한 시선. 채이는 평소보다 주눅이 들어 있는 레오나드를 잔잔히 내려다보았다.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나 보다.’

그게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지만. 조용히 쭈그려 앉은 채이가 레오나드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뭔데?”

깊은 호수 같은 눈동자가 채이를 한가득 담았다. 레오나드는 말없이 그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내 이름… 내 원래 이름은 레오나드 디 랭커스터야.”

그걸 듣는 순간.

‘아.’

채이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게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랭커스터는 이곳, 아스타리우스 제국 안에서도 큰 권력을 갖는… 즉, 컴베스트 대공국을 다스리는 대공 가문의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지금 그걸 몰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기절초풍하고도 남았으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믿지 않거나 믿더라도 태도가 돌변할 것이고, 그러지 않은들 어쨌든 놀란 반응을 보이겠지….

자칫 잘못하면 지금까지의 관계가 어그러질 수도 있다.

분명 레오나드는 채이를 신뢰하게 되었기에, ‘이 사람이라면 자신을 해치거나 이용하지 않을 거고 그러니 믿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이렇듯 용기를 내어서 정체를 말해준 거였다.

한데, 정작 듣는 사람은 그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다니.

배신감을 느껴도 할 말이 없었기에 채이는 난감해졌다.

“…왜?”

침묵이 길어지자 레오나드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레오나드가 보기에 채이는 지금 상당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윽고 레오나드의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스스로 솔직해지리라 결심한 채이가 그와 눈을 맞췄다.

“나도 말할 게 있는데, 레오.”

“응.”

“사실은 네 정체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널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

역시 충격에 말문이 막힌 건지 레오나드가 말을 잇지 못하고 수차례 입만 달싹였다. 그걸 보는 채이의 마음도 위태로웠다. 그가 제게 실망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에. 이내 아래로 떨군 레오나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왜… 나한테 잘해줬던 거지?”

그 물음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에 했던 질문과도 비슷했다.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때는 채이를 경계해서 나온 질문이었지만 지금은 채이를 한 번 더 믿고 싶기에 나온 질문이라는 점이었다. 그만큼 레오나드도 복잡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채이에게 정체를 밝힌 이유는 ‘채이라면 정체를 알아도 똑같이 대해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미 정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가 불순한 의도로 접근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건 당연한 흐름이었다.

“레오.”

그리고 채이는 그 부분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레오나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이것만은 알아주렴. 너는 그 자체로 내게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라는 거.”

최대한 진심을 담아.

“그리고 나는 네가 만약 랭커스터가 아니었더라도 지금과 같은 말을 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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