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화
무사히 발현을 끝내고 훌륭하게 커서 어른이 되면, 그땐 동등하게 생각해주지 뭐. 레오나드는 그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채이도 이만 손을 떼고 추욱 늘어졌다. 조금씩 몽롱해지던 정신을 이제는 더 잡고 있기가 힘들다. 그만 잠들어야 할 것 같았다.
“저쪽… 앞으로 네가 방 침대 계속 써도 되니까. 너도 자러 가.”
채이가 손가락을 대충 휘적여 방 위치를 가리켰다. 그 말에도 대답하지 않은 레오나드는 미적지근해진 물수건을 다시 가져가 새로운 물수건으로 교체해 주었다. 가물가물한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채이는 눈을 감았다.
다음 날. 해가 밝았을 땐 다행히 몸 상태가 좋았다.
‘열은… 다 내린 것 같군.’
짹짹대는 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고요한 아침이다. 옆을 돌아보았더니 레오나드가 소파에 기댄 채 자고 있었다. 침대 써도 된다고 말했는데 얘는 왜 방에 들어가서 자지 않고 여기 있는 걸까.
‘설마 밤새 간호한 건 아니겠지.’
그건 조금 미안해지는데. 이래서야,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보호해 준다던 말을 실천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지 않은가. 채이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는 체력부터 좀 키워야겠어. 그래야 뭘 하든 하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몸과의 괴리가 너무 커서 이 부분부터 해결해야 할 듯싶다. 다행히 ‘소설 속 채이’가 모아둔 돈이 제법 있었으니 당분간은 제대로 일을 못하더라도 괜찮을 것이었다. 채이는 레오나드가 깨지 않게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가볍게 이 근처를 한두 바퀴 정도 뛰고 올 생각이다. 가능하면 앞으로 꾸준히. 천천히 체력부터 붙이고, 그러고 나면 단련도 하자.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채이가 살금살금 바닥으로 발을 내렸다.
레오나드는 여전히 자고 있는 듯하다. 그 얼굴을 확인하고 살짝, 현관문 쪽으로 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행여나 놓칠세라 덥석 소매를 붙드는 힘에 놀란 채이가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눈을 감고 있던 녀석이 지금은 잠기운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또랑또랑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가려는 거지?”
뭐야. 깨어 있었던 건가.
채이는 순간 어이가 없어져서 말문이 막혔다.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걸 도망치려다 들킨 걸로 착각한 레오나드가 아주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피식자가 도망가면 더 흥분하는 포식자를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너….”
“나 몰래 나가려고 했잖아.”
아직 미성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낮게 울리자 고압적인 분위기가 짙어졌다. 나이는 이제 겨우 9살에 베타일 뿐인 평범한 꼬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에게는 없는 비범한 아우라가 레오나드에겐 있었다. 만일 채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저 짐승인 양 흉흉한 눈빛에 지레 겁을 먹고 말았을 터. 물론 그 정도로는 압박감을 받지 않는 채이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 레오나드는 생각 없이 뛰어다니는 저기 어딘가의 애들이랑 다를 게 없었다.
“이 녀석이 버르장머리 없이… 어딜 어른 앞에서 그렇게 눈을 치켜뜨니. 응?”
딱!
채이가 검지와 엄지를 말았다가 튕겨 약한 딱밤을 놓았다. 그러자 레오나드의 새하얀 이마가 볼그레하게 물들었다. 깜짝 놀란 것인지, 아니면 딱밤은 생각도 못 한 건지 사납던 눈초리를 단숨에 푼 레오나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채이는 그런 레오나드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굽히곤 게슴츠레 눈을 떴다.
“이 앞에 잠시 운동하러 간다, 이놈아.”
“…….”
“그런데 굳이 잘 자고 있는 너를 내가 깨워야 할 이유는 없잖아. 알겠니? 알고 보니 자는 척이었지만 아무튼.”
“…….”
넋 빠진 얼굴로 물끄러미 쳐다보던 레오나드가 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어딘가 고장 난 장난감처럼 꼼질거리는 조막만 한 손이 참 귀여웠다. 채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직 날 신뢰하지 못하고 있군.’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랭커스터 가문 쪽에서는 혹시 모를 후환을 없애기 위해 레오나드를 죽이려고까지 했었다니까. 채이가 어딘가에 밀고해서 행여나 위치가 발각되면, 레오나드는 또다시 쫓겨 다니게 된다. 혹은 죽거나.
그런 걸 생각하면 충분히 불안할 만했다.
어쩌면 레오나드는 채이를, ‘자신의 정체를 알고 일부러 잘해주는 사람’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알았으면 놔줄래? 아님 같이 갈까? 난 딱히 상관없는데.”
채이는 여전히 소매가 붙들린 채여서 팔을 흔들흔들 움직였다. 그랬더니 레오나드가 경계 어린 눈으로 살피다 슬쩍 소매를 놓아주었다. 함께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채이는 레오나드의 머리를 가볍게 도닥여 주었다.
“그럼 다녀오마. 오늘 일찍 들어올 거기는 한데 혹시라도 배고프면 어제 사둔 빵 있으니까, 그거 꺼내 먹고.”
레오나드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까닥였다. 그제야 채이도 후련한 마음으로 외출할 수 있었다.
“후아.”
숲의 상쾌한 공기가 폐부에 들어차니 정신이 한층 더 맑아지는 듯하다.
‘확실히 이런 곳이 조용히 여생을 보내기엔 좋지.’
하지만 채이는 이곳에서 계속 살 생각이 없었다. 제아무리 한평생을 직업 군인으로서, 개별 인격체가 아닌 비밀 특수 부대라는 이름의 구성 요소로서 희로애락을 대부분 내려놓고 일해온 사람이라지만….
지루함이 뭔지, 외로움이 뭔지 안다. 일단 사람은 사람과 가까운 장소에서 살아야 했다. 당장은 돈도 그렇고 레오나드 때문에라도 불가능하겠지만 나중에는 도시에 있는 집을 구해 이사할 생각이었다.
‘레오나드가 발현하는 게… 지금으로부터 5년 뒤였지.’
성실하게 돈을 저축한다면 10년까진 걸리지 않으리라.
채이는 새로이 주어진 삶을 알차게 보내 보고자 마음먹었다. 권채이였을 때는 해보지 못했던 것들도 마음껏 해볼 거다. 그도 그럴 게 무려 10살도 더 넘게 회춘하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들을 하면 썩 즐거웠다. 어차피 가족도, 의지할 친인척도 마땅히 없었던 자신은 저쪽 세계에 큰 미련이 없으므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기는 하나 딱히 그러지 못해도 아쉬운 건 없었다.
이 소설 세계를 만들어낸 친구가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뭐, 나 하나 없다고 문제 될 녀석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니까.’
그렇게 숲 주변을 가볍게 뛰어다니며 땀을 쭉 빼고 귀가한 채이는 양식거리도 사야 했기에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자기가 알아서 빵과 우유를 꺼내 먹고 있던 레오나드는 그런 채이를 흘깃 쳐다보기만 했다.
“이번엔 나 몰래 어디 가냐고 안 할 건가 보네?”
“놀리지 마.”
레오나드의 표정이 뾰로통하다. 바닥에 제대로 닿지도 않는 짜리몽땅한 다리를 흔들며 입술을 씰룩이는 꼴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다시 다녀올게.”
“…응.”
이번에는 한 박자 늦게나마 배웅해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속으로 웃음을 삼킨 채이는 시장으로 내려가 어린애가 입을 만한 작은 옷과 저녁에 먹을 두 덩이의 고기 그리고 동화책을 한 권 사서 돌아갔다. 동화책을 보고는 3살짜리 애들이나 읽는 거라며 레오나드가 눈살을 구겼지만 다행히 고기는 잘 먹었다.
“레오나드. 이거 내가 자기 전에 자장가용으로 읽어줄 테니 이리 올라와 봐.”
비싼 돈 주고 산 게 아까워서 포기하지 않은 채이가 침대 옆자리를 팡팡 두들겼다. 그랬더니 레오나드가 싫은 표정을 잔뜩 지으면서도 순순히 옆자리로 올라왔다. 채이는 심드렁한 얼굴로 누워 있는 레오나드에게 열심히 책을 읽어줬다. 다만, 9살짜리 애한테 읽어주기에는 확실히 유치한 내용인 것 같았다.
“그때 지나가던 토끼가….”
문득 돌아보니 레오나드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따뜻하게 미소 지은 채이가 아이의 몸 위에 두꺼운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렇게 책 읽어주기는 그날로 끝인 줄 알았는데….
“읽어줘.”
며칠 뒤 레오나드가 먼저 채이에게 책을 가져와 요구했다. 레오나드가 먼저 뭔가를 요구한 것은 처음이라 놀란 채이가 멀뚱히 바라봤더니.
“그냥… 채이 목소리가 조곤조곤해서 잠이 잘 와. 책 내용이 재밌어서가 아니고.”
우물쭈물하며 변명했다.
왠지 모르게 감동이었다.
“그래, 침대 가자. 읽어줄게.”
그 뒤로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책을 읽어주다가 같이 잠드는 일이 늘었다. 잠자리가 불편할까 봐 도중에 나가려고 해도, 조금만 침대에서 벗어나면 그걸 기가 막히게 눈치채곤 자다 깨서 눈을 부라리기 일쑤라 그렇게 됐다.
어쨌든 레오나드와 지내는 생활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언제든 대화할 상대가 옆에 있다는 사실은 안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어느새 제법 가까워졌다. 채이를 향한 레오나드의 경계심이 차츰 줄어든 덕분에 이제 그는 채이를 썩 잘 따르게 되었다. 채이가 짜 준 목도리를 잘 두르고 다니고, 같이 장을 보러 마을로 내려가기도 하고. 자신을 버린 가문에 복수하고 싶다는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하고…. 몇 달 전부터는 채이가 레오나드를 ‘레오’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호칭을 어색해하던 레오나드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이제는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하나둘 추억이 쌓일수록 채이는 부성애를 닮은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이제는 레오나드를 잘 키워 어떤 이득을 보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그가 훌륭하게 자라 주길 바라는 마음만 가득해지게 되었다. 레오나드가 언젠가 발현에 성공해 가문의 어른들을 찍소리도 못 하게 만든 뒤 무탈히 정식 후계자가 될 수 있기를 바라게 됐다. 그리고 미래의 짝을 만나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그게 레오의 인생에 있어 가장 좋은 길일 테니까.’
그렇게 레오나드와 함께 지낸 지 1년이 다 되어가던 해.
새해를 여는 초봄이 오기 전, 늦겨울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