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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하라 키워놨더니 집착광공 됐는데-2화 (2/105)

002화

툭….

편안해지는 얼굴을 지켜보던 채이가 저도 모르게 녀석의 뺨을 건드렸다. 아직 어린애라 그런지 피부가 보드랍다. 아기는 좋아하지만 오랜 군 생활로 결혼은커녕 여자도 한번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던 채이는 이렇게나 조그만 존재가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때 파르르 떨리던 짙은 속눈썹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 담겨 있던 커다랗고 푸른 눈동자는 마치 한 폭의 그림같이 영롱했다. 채이는 순간 넋을 놓고 그 눈동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홀린 것처럼 레오나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채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레오나드가 볼그레하게 생기 도는 입술을 달싹였다. 말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목… 말라.”

채이는 그 목소리를 듣곤 안심했다. 사실 말이 안 통하면 어쩌나 내심 긴장했는데…. ‘소설 속 채이’에게 완전히 동화되었기 때문인지 어렵지 않게 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고 말할 수도 있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부엌 쪽으로 간 채이는 ‘소설 속 채이’가 매일 아침 준비해 두는 깨끗한 물을 컵에 담아 가져다주었다. 이 또한 친구에게서 들은 정보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고 있는 기억의 일부였다.

채이가 비척대며 일어나는 레오나드를 한 팔로 지탱해주자, 레오나드는 좀 더 수월하게 물을 마셨다. 다 마신 컵을 도로 받아 협탁 위에 올려놓으니 그런 채이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오나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지?”

“나?”

채이의 반문에 레오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린 녀석이 그래도 자라난 환경이 있어서인지, 고압적인 말투를 쓰는 게 썩 우스웠다.

“이제부터 널 먹여주고 재워주고 보호해줄 사람.”

그러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눈을 느리게 깜박거린 레오나드가 다시 말했다.

“이름은.”

“권채… 채이라고 부르면 돼.”

“…채이. 채이.”

당장 외우려는 듯 반복해서 이름을 중얼거리기에 잠시 지켜보던 채이가 그를 다시 눕혔다. 몸 상태가 아직 좋지 않은 듯 표정이 몽롱해 보여서 일단 지금은 재워야 할 것 같았다.

소파에 얌전히 누운 레오나드가 힐끔 채이를 돌아본다. 채이가 더 자라는 의미로 이불을 꼭꼭 덮어 주고 가슴께를 도닥이니, 레오나드가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가 천천히 감았다.

이제 내일 아침까지는 잘 자겠지.

그런 생각으로 조용히 일어나려고 하는데….

덥석.

불쑥 뻗어온 레오나드의 손이 채이의 팔목을 붙들었다. 아직 어린 데다 발현하지 않아서 베타인 레오나드의 악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붙든 것이었기에 채이의 몸은 기우뚱하고 말았다.

“가지 마. 여기 있어.”

언제 노곤노곤하게 풀려 있었냐는 듯 부릅 뜨인 눈이 형형하게 번쩍이는 것 같다. 맑은 바다와 같은 색의 눈이 스스로 빛을 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혼자 있기 무서워서 그러나?’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으나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을 듯하다. 단지 발현이 좀 늦었다는 이유만으로 혈족들에게는 버려지고 마물들에게는 물어뜯겨 죽을 수도 있었던 걸, 겨우 도망쳐 여기까지 흘러온 거니까. 또 언제 그런 위험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을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지.’

샐쭉 웃은 채이가 다시 소파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여전히 레오나드는 팔목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기에, 채이는 그대로 잡혀준 채 적당히 자리를 잡아야 했다.

“됐지? 피곤할 텐데 얼른 자.”

“…….”

그렇게 서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마주보기도 잠시. 결국 먼저 눈이 감긴 레오나드의 숨이 규칙적으로 잦아들었다. 이제는 정말 잠든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면, 손목을 비틀어 빼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채이는 자리를 뜨는 대신 그 옆에 머리를 기대고 엎드렸다. 채이의 머리맡에 안정적인 숨소리가 닿았다.

‘내일부터는….’

먹고 살기 위해 ‘소설 속 채이’가 하던 일을 이어가야 한다. 숲에서 약초를 캐내 마을 시장까지 내려가 팔아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일이었다. 알파 오메가로 발현할 수 있었다면 기사단에 지원해봤을 테지만… ‘소설 속 채이’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베타. 평범하디평범한 일반인이었다.

사실 ‘소설 속 채이’에겐 그것 말고도 주 수입원이라 부를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었다. 등급이 낮아 길들이기 비교적 쉬운 마물들이나 사람 등을 암암리에 거래하고 다니는 일. 쉽게 말하면 불법 노예상이었다. 하지만 채이는 소설 속 캐릭터가 하던 나쁜 짓을 따라 하고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 그 일은 접어두고….

일단 내일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서 최대한 많은 약초를 캐내 팔아보자. 직업 군인으로 일하며 단련한 체력과 생활력을 여기가 아니면 이제 어디다 써보겠는가.

‘그래도 이 몸에 깃들어 있는 기억들이 있어서 다행이군.’

일부러 끄집어내려고 하지 않는 이상에야 모든 기억이 다 떠오르는 건 아닌 듯하지만.

어쨌든.

약초를 구분하는 방법은 잘 기억하고 있다. 거지꼴은 면할 수 있으리라.

‘앞으로 천천히 적응해 가면 돼.’

낯선 환경에 던져지는 일에는 익숙했다. 레오나드를 학대했단 오해와 함께 처단당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책임지고 먹여 살려야 할 군식구도 생겼으니….

앞으로 바빠질 것이었다.

이래저래 생존을 위해서.

***

그런데 한 가지… 채이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건 바로 채이의 현재 몸뚱이와 전생의 몸뚱이는 차원이 다르단 점이었다.

권채이였을 당시의 그는 38세의 나이로 몇십 년간 갖은 훈련과 고역을 이겨내고 완성된 체력과 육체를 갖고 있었지만, 현재 채이는 ‘소설 속 채이’의 몸뚱이… 그러니까 21세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약초나 조금 캐내러 다니고 야비한 짓이나 일삼던 비실비실한 몸뚱이 안에 들어와 있었다.

결국 그날 채이는 열과 근육통으로 드러눕고 말았다.

여러 번 숲을 오르락내리락하고 마을 시장까지 걸어서 내려갔다 오는 엄청난 운동량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거다. 졸지에 채이는 체력도 없으면서 의지와 끈기만 남은 미련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심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레오나드의 시선은 덤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시든 꽃처럼 흐물거리더니… 푹 잘 자고 일어나서 씻고 탄수화물도 충분히 섭취한 그의 눈엔 총기가 돌았으며, 아직 젖살이 남아 말랑하고 조그만 얼굴은 건강해 보였다.

채이가 뚱하니 눈을 흘겼다.

“꼬맹이. 눈 그렇게 뜨지 마라.”

“눈 그렇게 뜨는 애한테 간호받는 주제에 말이 많아. 얌전히 있기나 해.”

따박따박 받아치는 얄미움을 이길 수 없었던 채이는 꾹 입을 다물었다. 레오나드가 물기를 짜낸 차가운 물수건을 채이의 이마 위에 올려주었다. 체온이 내려간 탓인지 머리가 몽롱했다.

‘어제랑 반대가 되어버렸네.’

그래도 선뜻 자기가 먼저 나서서 간호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고맙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조막만 한 손으로 열심히 다음 물수건을 짜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특하여, 채이의 입꼬리가 들썩였다. 소파 밑에 앉아 그런 채이를 은근히 바라보고 있던 레오나드가 잠시 생각에 골몰했다. 무슨 이유로 그러는가 싶어서 채이가 물어보니 레오나드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왜 날 구해준 거지?”

“…….”

어째서 구해줬냐라. 그걸 돌직구로 물어보는 건가. 비단 인맥으로 삼기 위해서만 그를 구해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정의로운 사명감 때문에 구해준 것도 아니었기에 채이가 잠시 대답에 뜸을 들일 때였다.

“생활력 바닥이라 홑몸 감당하기도 힘들면서.”

레오나드가 채이에게 엿을 먹였다. 아무래도 자신은 이 9살 난 꼬맹이에게 그런 이미지로 박힌 모양이었다. 채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이 몸뚱이의 기억에 따르면 ‘소설 속 채이’도 베타 평민치고 나름 잘사는 거였는데… 그 대부분의 수입이 노예상으로 번 돈이라서 문제지.

“꼬맹이는 어른이 구해줬으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을 거 다 받으면서 어리광 부리면 돼. 무슨 생각을 그렇게까지 해.”

채이가 손을 뻗어 눈앞에 놓인 동그랗고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흑요석인 양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닿아 부드럽게 사락거렸다.

그 느낌이 좋아서 한참을 쓰다듬은 것 같다. 가만히 쓰다듬을 받으며 눈을 떨구고 있던 레오나드가 별안간 채이의 손을 낚아채더니 은근한 힘으로 떼어냈다. 그 사이로 삼백안을 뜨고 응시하는 푸른색 눈동자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 눈에 빠져 있던 것도 잠시.

“레오나드.”

“…뭐?”

갑작스러운 이름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채이가 반문하고 말았다. 뜬금없는 상황이었던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더니 슬쩍 시선을 회피해 버린 레오나드가 말을 이었다.

“내 이름. 레오나드야.”

“아….”

“꼬맹이가 아니라. 그리고 나 그렇게 안 어려. 올해로 벌써 아홉 살이라고.”

생각해 보니, 아직 녀석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던가. 자신은 이미 이름을 알고 있었던지라 물어봐야겠단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걸 계속 신경을 쓰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왜 자기 이름은 물어보지 않는 거지, 하고 말이다.

‘앞으로 좀 더 신경 써야겠군.’

히죽 웃은 채이가 붙들린 손에 다시 힘을 넣어 움직이자 레오나드도 그 손을 떼어내길 포기하고 얌전히 쓰다듬을 받았다. 채이는 레오나드의 머리를 마음껏 흐트러트리며 또박또박 읊어주었다.

“‘레오나드’. 됐어?”

“…….”

“근데 꼬맹아.”

“……?”

“아홉 살이면 아직 애기 맞거든? 애기 취급받기 싫으면 잘 먹고 잘 자서 얼른 크기나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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