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화
-권채이. 네 이름 독특하니까 소설에 써도 돼? 나름 중요한 역할인데, 아직 이름을 못 정한 캐릭터가 하나 있거든.
깊이 잠겨 있던 채이의 정신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몽롱하게 이어지는 꿈속에서 ‘친구’는 자기가 쓴 소설 내용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뒤늦게 생각해 보니 그건 바로 어제, 휴가를 내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레오나드라는 애가 메인공인데 14살이 될 때까지 발현을 못 해. 그래서 9살에 가문에서 쫓겨나 도망 다니다가 이름 없는 숲으로 가게 돼. 거기서 바로 그 악당을 만나게 되는 거지.
어찌나 말을 잘하는 친구인지 자기가 직접 옆에서 본 일들인 양 자세하게 늘어놓는데 그게 귀에 쏙쏙 들어오더랬다. 그래서인진 몰라도 그 내용은 말씨 하나 잊지 않은 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몇 시간 내도록 지치지 않고 떠들어댔던 그 친구의 얼굴과 이름은 아무리 떠올려보려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았다.
-행운을… …게.
채이는 불현듯 묘한 이질감이 느껴져 눈을 떴다.
오래 사용한 까닭에 한쪽이 기울어져서 한 몸 같아야 할 침대의 감촉이 전혀 안 느껴졌다. 분명 어제 그리 떠들고는 얌전히 집으로 들어가 씻고 바로 누웠던 그다. 그러고 이제 막 일어난 참이니 침대에서 벗어났을 리도 만무한데. 몽롱하던 머리가 순식간에 번쩍이며 정신이 들었다. 여느 때보다 길었던 이번 휴가 기간. 너무 놀고먹느라 긴장이 다 풀려 해이해진 탓일까.
‘방심하고 있었어.’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리 단잠을 잤는지. 스스로를 책망한 채이는 가늘게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소음을 최소화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여긴….’
별다른 위협이 느껴지지 않아 전체적인 상황 파악에 나섰던 채이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이곳은 그가 원래 살던 아파트가 아닌, 웬 오두막 같은 집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장소다. 한데 참 기묘하게도 이 장소는 낯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오랫동안 살았던 곳인 양….
별안간 소파를 짚고 있는 자신의 손이 눈에 띄었다.
‘어?’
원래는 잦은 바깥 활동으로 인해 구릿빛에 가까운 색을 띠어야 하는 손이건만 거기에 있는 건 핏줄이 비쳐 보일 정도로 하얗고 마르고 가느다란 손이었다.
“……??”
채이는 직면한 상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눈만 껌벅거렸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자신의 손이 달라졌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아니, 손뿐만이 아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현재 채이의 몸뚱이 자체가 전혀 다른 사람의 것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뭐, 뭐야.’
당황해서 한참 몸을 더듬어보다가 근처에 있던 거울을 통해 보고서야 깨달은 일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자신은 분명 친구랑 술 좀 먹고 떠들다가 집에 돌아가서 얌전히 잠든 기억밖에 없는데. 왜 그사이에 몸이 달라져 있단 말인가. 이해는 했으나 납득하기 어려웠다. 납득하기 위해서는 이 상황이 꿈이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힘껏 제 뺨을 때리고 꼬집어 본 채이는 눈물 나게 아프다는 것만 자각했다. 자각몽도 이렇게 선명하진 않으리라. 그렇다면 이 몸뚱이는 정말 채이 본인의 것이다. 꿈이 아닌 것이다. 고장 난 기계처럼 한참이나 정지 상태에 놓여 있던 채이의 머릿속으로 돌연 무언가가 스며들었다.
그건 누군가의 기억이었다. 채이는 그 기억이 바로 이 육체에 깃든 몸뚱이의 기억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컴베스트 대공국 끝자락… 이름 없는 숲에 숨어 살고 있는 노예상….’
그리고 기억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정보들이 낯설지 않았다. 어제 술자리에서 친구가 이야기한 소설 속 인물 중 하나와 관련된 정보였기 때문에.
-그 악당 녀석은 레오나드를 노예로 길들여 팔아먹기 위해서 거두어들이게 돼. 마침 비가 내리고 해가 다 떨어져 어둑어둑한 저녁때였지.
그때였다. 투두둑, 무언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에 채이가 고개를 들었다. 해가 다 떨어지고 어둑어둑해진 저녁 시간… 공교롭게도 때마침 창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등줄기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타이밍도 그렇지만 친구에게 들었던 상황과 정확히 일치했다.
‘…확인해 봐야겠군.’
이대로는 안 된다. 채이는 당장 현관문 옆 기다란 쇠 통에 꽂혀 있는 우산을 들고 ‘소설 속 채이’의 집을 나섰다.
투두둑, 툭, 투둑.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로 인해 흙으로 덮인 땅은 상당히 질펀했다. 발목 위로 올라오는 가죽 워커를 신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무른 진흙이 다 튀었으리라.
‘근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
왼쪽으로 올라가는 길엔 어두운 숲 안쪽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좀 더 내려가는 길에는 왼쪽보다 덜 어두워 보이는 숲의 길목이 보인다. 무작정 나오기는 했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소설 속 채이’의 기억에 의하면 오른쪽으로 가야 마을이 나온다. 물론 레오나드가 도망쳐 오는 경로에 대해선 친구에게 자세히 들은 바가 없어 그쪽을 지나온다는 보장도 없지만.
‘일단 오른쪽으로 가보자.’
채이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 직감은 옳았던 모양이다. 초롱불을 품은 농가가 희미하게 보이는 길목… 그곳까지 내려간 채이는 미동 없이 쓰러져 있는 꼬질꼬질한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
채이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이 모든 정황이 소설 속 이야기와 맞아떨어졌다. 이곳은 친구가 쓴 BL 소설 속 세계였던 것이다. 하필 자신은 그 소설 속 인물 중에서도 이름만 같은 악역이 되어버린 거고.
이게 정녕 말이 되는 일인가?
채이는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몸소 겪고 있는 처지니 말이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침착하게 다시 정리해보자.’
현재 자신이 ‘빙의’한 인물의 이름은 채이. 친구가 이 캐릭터의 이름을 지을 때 채이의 이름을 가져다 썼기 때문에 둘은 같은 이름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설 속 채이’는 컴베스트 대공국의 끝자락에 있는 이름 없는 숲에 숨어 살고 있으며 어린 메인공, 레오나드를 주워다 노예처럼 길들이고 부려먹게 될 악역이다.
이후 알파로 발현하는 데에 성공한 레오나드는 ‘소설 속 채이’를 죽인 후 감옥 같던 오두막집에서 탈출해 자신을 버린 가문을 뒤집으러 간다. 그러던 도중 병약하고 어여쁜 오메가와 눈이 맞아 행복해진다는 내용이었다.
-레오나드는 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야. 미인과 미남의 경계선에 있는 그야말로 완벽한 피조물이지.
그때까지만 해도 ‘레오나드’가 친구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라서 과하게 주접을 떠는 거라 생각해 우스갯소리처럼 넘겼는데…. 실제로 보니 이해가 되었다.
“…….”
채이는 복잡한 심경이 드러난 얼굴로 제 눈앞에 ‘실존’하는 어린 레오나드를 내려다보았다. 서늘한 공기 탓에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고 색색 뱉어내는 조그만 숨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냘팠으며 고생한 탓에 꼬질꼬질해서는, 어떻게 봐도 예쁠 수가 없는데. 이 꼬마는 그런 것들마저도 처연미를 강조하기 위함인 듯 아름답게 느껴지는 생명체였다. 오히려 만화 속 이간이 실존한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지금 나이가 아홉 살이라고 했었지.’
그럼 이제 이 꼬맹이를 어쩐다.
채이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소설 내용이 진행되어 보기도 전에 여기서 죽을 판이다. 하물며 비까지 오고 있으니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이 꼬맹이가 하루를 채 버텨내기란 쉽지 않을 터.
‘그냥 못 본 척 내버려 둘까.’
본래 ‘소설 속 채이’는 레오나드의 손에 죽는다. 물론 자신은 소설 내용과 달리 이 꼬맹이를 괴롭힐 생각이 없지만. 혹시 모를 위험을 감수할 필요까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채이는 추위에 파르르 떨리는 레오나드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보며 생각했다.
‘잘 키워놓으면 나중에 효도해 줄지도 모르지.’
레오나드는 제국 안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공 가문 랭커스터의 유일한 우성 알파 후계자다. 9살이 다 되도록 발현하지 않은 탓에, 멀리 보지 못한 가문이 그를 한번 버렸지만…. 결국 나중에는 훌륭하게 우성 알파로 발현해 그 가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한마디로 엄청난 인맥.
이런 인맥은 쉬이 보지 못한다.
솔직히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지만. 만약 앞으로,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 거라면….
‘하나쯤 만들어놔도 좋을 거야.’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될, 미래의 금수저 인맥을 말이다.
이렇게나 작고 어린 꼬맹이를 죽게끔 방치하는 것도 역시 몹쓸 짓이고.
그리 판단을 내렸다면 더 지체할 것은 없었다.
채이는 쓰러져 있는 어린 레오나드를 곧장 둘러업었다. 그 과정에서 몸이 흔들린 탓인지 작게 신음하는 소리가 채이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흘깃 곁눈질로 상태를 확인한 채이는 ‘소설 속 채이’의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레오나드를 난로 앞 소파에 눕혔다.
난로를 피우고 축축해진 옷을 벗긴 후 몸의 물기를 닦아주었다. 이렇게 작은 아이에게 딱 알맞은 사이즈의 옷은 없어서 품이 넉넉한 셔츠를 입히고 담요를 둘러주자 레오나드의 얼굴이 차츰 편해졌다. 난로의 불빛이 어룽거리는 하얀 뺨에 발그스름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