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1)
  • 6장. 설원

    금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황제와 비빈들이 오붓한 한때를 보낼 수 있는 노천탕이 있었다. 봄이면 꽃이 만개하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오색찬란한 낙엽이 절경을 만들고, 겨울이면 눈이 쌓여 신비로운 광경을 선사하니 그곳이야말로 현생에 존재하는 지상낙원이었다. 앞은 탁 트인 들판이었고, 뒤는 돌로 쌓아 만든 단단한 벽으로 타인의 시야를 차단해 둔 덕에 마음 놓고 바깥 공기를 마시며 목욕을 즐길 수 있었다. 본래 이곳의 용도는 황제가 정무 중에 가지는 근심과 피곤을 풀기 위해 만들어진 유희 공간이었다. 노천탕에 사냥터, 아래로 내려가면 저잣거리가 있어 백성들의 안위도 살필 수 있었고, 간혹은 위장으로 그 사이에 스며들어 평범한 백성처럼 굴 수 있었다.

    강은 친왕 시절에 이 노천탕에 황제와 함께 온 적이 있었다. 황제는 강을 끌어안고 탕에 들어가, 작은 손발을 주물러주며 피곤을 풀어주었다. 강이 괜찮다고 해도 황제는 기어코 강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가는 허리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면 황제의 길고 탐스러운 은발이 내려와 여린 살갗을 간지럽혔다. 간지러워요, 아바마마. 강이 살포시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바르작거리면 황제는 아무 말 없이 드러난 어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비도 간지럽구나.’

    한때는 정말 단란한 부자사이였다. 황제와 황자 사이가 아니라 정말 돈독한 부자로 느껴질 정도로, 좋았었는데.

    다시금 생각나는 과거에 강은 한숨을 토해내며 가마에서 이마를 짚었다. 소매로 얼굴을 반쯤 가린 상태로 심해보다 깊은 고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강은 눈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닿는 곳마다 꽃이 피었다. 잘 무르익은 봄에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강아.’

    ‘아가.’

    이토록 아름다운 봄에, 이것보다 아름다운 황제가 손을 내밀며 부르던 게 환상처럼 보였다. 황제의 우아한 말투와 잘 어울리는 고혹적인 목소리가 뒤섞여 마음을 흔들었다.

    ‘그대도 알잖아.’

    그가 얼굴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며 입술을 맞대는 것도, 그의 목소리처럼 입술에 달라붙었다. 환각이었는데도 방금 입을 맞춘 것처럼 생생했다. 최근에 너무 자주 입을 맞추어서 그럴까. 벌써부터 내벽이 벌름거렸다. 강은 초조하게 얼굴을 가리며 그를 지우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안 돼.

    겨우 허락받은 이 하루는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머니로부터, 황제로부터, 그리고 자신을 아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흔들리면 모두가 흔들린다. 난파선이 되고 말 것이다. 금궁에서 생존하기에 가장 적합한 황제의 애정을 받았으니 수용만 하면 되는데 그것이 가장 큰 암초였다.

    두 달. 적응하기엔 아직 적은 날이었다. 강은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서 헥헥거리는 설을 끌어안은 채, 눈을 내리깔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머리로는 거부하고, 마음으로는 그를 받아들이고 싶고, 몸은 이미 그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순탄하다고 느꼈던 모든 것이, 그것을 지배하던 자의 손에 다 어긋나고 있었다. 태후의 말처럼 그의 사랑을 이용하고 즐기면 좋을 텐데. 태후는 그것을 너무 당연하고, 쉽게 여겼지만 그녀 또한 자신의 입장이 아니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빼고, 그 누구도 자신의 입장이나 마음을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편해야 모두가 편해지니까. 다들 살기 위해 강이 금궁에서 천명을 통한 강제에 가까운 혼인을 당해도 입을 다문 것이다. 멱리를 쓴 채 고개를 숙이고 설을 매만지던 강은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늘 누군가를 위해 참아야 하는 건지. 황제, 태후, 어머니, 형제들, 그리고 왕부의 사람들. 더 나아가서 백성들까지. 거기에 내 행복은 없었다. 자신의 이타적인 감정을 돌려받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건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의 의사와 의지와 행복 따위는 없는 부부의 연이라니. 심지어 아이까지 낳아야 했다. 문제는 머리로는 분노하는데, 막상 황제가 어여쁘게 웃으며 다가와 입을 맞추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가 입을 맞추고, 침의를 벗기기 시작하면 아래가 뻐근해졌다. 근심과 마음의 짐 따위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대화를 나누고, 다리가 벌어지고, 그가 들어왔다.

    그러면 몸은 완전히 그에게 달라붙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황제의 말대로, 불가능한 일이 가능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황제와 자신이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버지인데, 폐하인데…. 그러나 그 끝에 달라붙는 건, 강한 쾌감과 머리가 녹아내릴 것 같은 진득하고 달콤한, 치명적인 애정이었다. 마음에 끈적거리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 애정에 강은 발이 묶여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러지 마세요, 제발.

    강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황제의 손목을 잡으며 우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아바마마, 이러면 안 되잖아요. 제발.

    몇 번이나 그에게 제발이라 말하고 빌었던가. 그러나 돌아오는 건 가차 없는 삽입이었다. 그때마다 아파서, 좋아서 울었다.

    황제의 밑에 깔려서 흔들리던 어지러운 시야를 기억하던 강은 눈을 감아버렸다. 몸과 마음이 이상하다. 일그러지고 있다. 그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가슴이 불안정하게 뛰고 있다. 그의 체향이 이곳에 감도는 것도 아닌데, 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살갗은 애가 탄다.

    왜 이럴까. 무서웠다. 요새 들어 황제가 너무 무서웠다. 차라리 이게 무슨 이유에서 떨리는 것인지, 자신이 이렇게 겁을 먹고 오들오들 떠는 것인지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마마, 도착하였습니다. 가마를 내리겠습니다.”

    고민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때, 내관이 다소곳하게 말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강이 턱에 고정된 두터운 끈을 풀어내며 가마에서 내렸다. 설이 먼저 강의 무릎에서 뛰어내려와 앞장섰다. 강이 “설아. 이리 온.” 하고 부르자, 설이 토끼처럼 뛰어와 옆에 섰다. 귀여운 설의 머리를 만져주며 별궁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별궁 안은 이미 황제가 보낸 궁인들로 북적거렸다. 이곳에 상주하며 관리를 도맡아 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비빈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고서 환영의 인사를 말했다. 형식적인 예법이라 대충 흘려 넘기며 강은 설과 함께 조휘전으로 들어섰다. 현재 귀비가 없으니, 이곳에서 품계가 가장 높은 강은 황제 다음으로 가장 좋은 곳을 배정 받았다. 침전, 어선방, 작은 화원, 알현하는 안실, 내관들이 당직을 서는 방까지. 강은 하루 동안 쓸 조휘전을 두런두런 둘러보다가, 침상에 드러누웠다. 입고 온 예복이 불편했다.

    최근 금궁에서 유행하는 방식대로 소매는 무릎까지 내려왔으며, 뒷단은 발목까지 치렁치렁하게 내려와 흔들거렸다. 장의 안에는 나삼같이 살갗이 묘하게 드러나는 야릇한 예복을 입었다. 전부 다 보여주는 건 윤리에 어긋나니, 팔 전체와 무릎 아래만 나삼으로 만들어 불투명한 상태에서 살을 보여주었다. 가슴골도 은밀하게 보여주었다. 긴 장의로 몸을 가리고 있다가, 벗었을 때 발생하는 그 야한 간극을 즐기는 듯 했다. 가슴은 가린 듯, 안 가린 듯 보여주고 허리는 비단 끈으로 조이고, 치마는 펑퍼짐하게 쭉 퍼져 음심을 자극했다. 특히 소매나 치마를 들어 올렸을 때, 비취나 호박, 산호로 장식한 장신구가 나온다면 금상첨화였다.

    강은 소매를 들어올렸다. 반짝거리는 호박이 박힌 팔찌는 황제가 걸어준 것이었다. 그걸 만지작거리던 강은 무거운 마음으로 팔찌를 빼내고, 예복도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황제는 강의 살이 비치는 게 싫다며 최신 유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황실 법도를 고수해 답답한 옷을 입혔다. 덕분에 비빈들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강은 살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의 예복을 입고 이곳에 와야 했다. 몸에 땀이 흥건했다.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후 서역의 비단으로 만든 평복을 입었다. 비단 자체가 워낙 화려한 쪽빛이라 단순한 평복인데도 분위기가 오릉의 공자처럼 변해버렸다.

    같이 온 빈들도 강과 씻기를 거부했기에, 강은 홀로 탕에 들어가기로 했다. 설렁설렁 걸어가면서 어머니라도 만날까, 하여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어머니의 옷자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지 않겠다고 버티던 어머니를 간신히 설득해 오게 했는데 정작 그 본인을 보지 못하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후궁이 되어 아비의 연인 노릇을 하는 아들이 보기 싫었던 걸까. 가슴이 죄책감으로 물들어가며 아파왔다. 나도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너무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하도록 교육 받아버렸구나. 멍하니 세뇌되어 버린 행동에 강은 자조적으로 웃고 탕에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탕이 한산해서 좋았다. 탕에 떠다니는 꽃잎들에서 좋은 향이 났다. 물을 손으로 떠 향을 맡아보던 강은 드러난 목에 닿는 스산함에 고개를 돌렸다. 뒤엔 시야를 차단하는 돌벽뿐이었다. 틈이 나오지 않게, 적당한 돌을 촘촘히 쌓아 만든 터라 그 누구도 볼 수 없었고, 여기서도 타인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듯한 시선에 뒷목이 따가웠다. 강은 목을 긁적거리며 탕으로 더 들어갔다. 턱까지 담근 후에,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뒷목에 남은 감각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국 생각을 포기한 강은 궁녀들이 가져다준 면으로 몸을 닦고,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직 시간은 남았다. 석반을 먹고 나면 휴식 시간이 주어지니 그 틈을 타 어머니와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이제 그냥 포기하겠다고? 아니면, 도망이라도 가서 내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어머니도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어머니는 도망을 언급했지만, 그녀 또한 십대부터 지금까지 금궁에 묶여 산 몸이었기에 저 너머의 세상을 모른다.

    그리고 자신도.

    이제 와서 생각하면 황제는 강을 수도에, 자신이 언제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곳에 두고 감금했다. 자유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단 한 번도 강은 자신만의 자유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친왕이 되기 전까진 천금궁에서 그와 살았고, 왕부에 나가서도 황제가 붙인 담영이나 다른 이에 의해 홍등가나 야시장도 가보지 못했다. 정무 때문에 나가는 일이 아니라면, 나가지 못하게 했다. 여자와 손을 잡아보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혼례도, 전쟁도…. 모두 그가 막아버렸다. 그리고 강은 하나둘 포기했고, 그게 편해지기 시작하자 합리화를 했다.

    아바마마가 원하시니까. 아바마마가 좋아하니까. 아바마마가 날 사랑해서 하신 일이니까. 다 아바마마가….

    강은 금세 도착한 침상에 드러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설이 다가와 옆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눕는다. 강은 설의 머리며, 등을 쓰다듬어주며 금궁에서 살다 죽은 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화려하게 피었고, 초라하게 져버렸다. 무엇을 위해 그리 살았던 걸까.

    “나는….”

    나는 무엇을 위해 여태까지 살아온 걸까. 정말 황제의 기쁨을 위해 살아온 걸까. 존재 가치는 정말 애첩 이상도 아니었는데, 난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강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가 몸을 태아처럼 말았다.

    “설아.”

    설이 눈을 떠서 강을 빤히 보았다. 맑은 눈에 마주 웃으며 강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살아도 돼?”

    설이 귀찮다는 듯 눈을 감았다. 강은 “대답해줘.”라고 칭얼거리며 설의 털에 이마를 비볐다.

    “내가 아바마마의 애첩으로 살아도 될까? 그러면, 모두가 행복해질까?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형님이 죽었을 때처럼, 다 무뎌질까?”

    설이 대답이 없다. 당연한 것이었다. 묵직한 숨을 내쉬며 설의 등에 머리를 기댄 강은 눈을 감았다. 배 속에 있다는 아이가 궁금해져 손을 대보려다가, 흠칫 놀라 손을 떼어냈다.

    아직, 아이는 무리였다. 아버지란 존재도 제대로 인정 못 했는데 아이를 인정할 수 있을 리가. 강은 쓰게 웃으며 설을 끌어안고 못다 잔 잠을 청했다.

    빨리 마음을 정해야 하는데.

    오늘도 고민뿐인 생각이 머리를 잠식한다.

    *

    강아, 강아. 일어나! 꿈에서 설이 자신의 어깨를 앞발로 흔들며 깨웠다. 어, 설이는 갠데. 개가 어떻게 말을 하지? 강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설은 이제 아예 서서 강의 손을 잡고 달렸다.

    도망 가! 가야 해! 여긴 위험해! 내가 길을 알려줄게, 빨리 와!

    설이 긴 주둥이로 유려하게 사람의 말을 했다. 강은 눈을 어리둥절하게 떴다. 설은 갠데. 어떻게 말을 하고 저렇게 사람처럼 뛰지?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라도 말이 되지 않아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다가 강은 배를 만졌다. 배가 움푹 꺼졌다. 아이가 없어졌다. 내가 언제 애를 낳았지? 의아한 와중에도 강은 달리면서 설에게 말했다.

    아이는? 아이도 데려가야 하는데.

    강이 말하자, 설이 강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애는 아버지의 아이잖아. 아우를 원한 거지, 네 자식을 원한 것도 아닌데 살리고 싶은 거야?

    “강아!”

    귓속을 파고드는 쨍한 목소리에 강은 눈을 부릅떴다. 얼굴 부근이 왜 이렇게 뜨겁지, 했더니 어머니가 초를 든 채 강을 보고 있었다. 어머니를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보던 강은 고개를 돌렸다. 사방이 어둡고, 조용하다. 정적을 길게 늘여 별궁에 드리운 것처럼, 너무 조용해서 숨소리도 소음처럼 들렸다.

    “어머니?”

    강이 졸음에 눈을 비비적거렸다.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어서 나와.”

    “네?”

    “조용히 하고, 어서. 지금이 기회야.”

    여 소의는 초를 강의 손에 들려주고, 목에 작은 주머니가 달린 목걸이를 달아주었다.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초라한 평복을 꺼내어 강에게 안겨준 그녀는 부산스럽게 보따리에서 보석을 꺼냈다. 장신구에 있던 보석들을 떼어왔거나, 그녀가 개인적으로 모은 보석들이었다. 그중엔 강이 선물로 준 것도 있었다.

    “어머니….”

    강의 목소리가 촛불처럼 떨렸다. 어머니는 이미 결단을 내린 것이다. 정작 강은 경계에서 어리숙하게 머뭇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떡하시려고요. 폐하께선 제가 가면 가만히 안 계실 겁니다. 가장 먼저 어머니가 위험해져요.”

    강이 떨리는 눈과 목소리로 그녀를 다독이려 애썼다. 그러나 여 소의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엔 결코 흔들리지 않을 잘 벼려진 창날이 있었다.

    “상관없다. 이렇게 사는 건 나로 충분해. 너까지 이곳에 갇혀 황제의 인형 신세나 하라고? 난 그러려고 널 낳은 게 아니야.”

    강은 입을 다물었다. 여 소의는 담담하게 초췌해진 아들의 뺨을 만지며 속삭였다.

    “널 낳아서 행복했는데, 넌 나 때문에 불행해지는 구나.”

    “어머니, 아닙니다. 저도 어머니 때문에….”

    강은 눈물을 글썽거리는 어머니를 보며 은은하게 웃었다. 여 소의는 끝내 눈물 한 방울을 떨구다가, 보따리와 평복을 아들의 팔에 안겨주고 손을 잡고 나왔다. 침전을 나오는데 궁녀들과 내관들이 모두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놀라서 잠시 서 있던 강은 얼른 황제의 도와 활을 챙겨서 나왔다. 이건 황제의 물건이었기에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이 와중에도 황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강을 보고 여 소의는 끙, 하고 앓다가 사람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나왔다.

    “어머니, 그런데 설이는요?”

    “설이 있으면 시끄러울까 봐….”

    “설마 내보내신 겁니까?”

    강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묻자 여 소의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불이 모조리 꺼진 별궁을 조심스럽게 누비며 속삭였다.

    “야산 입구에 묶어두었단다. 걱정 말거라. 거기서 설이를 봐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여 소의가 걱정 말라며 웃었지만 자꾸 가슴이 불안으로 떨렸다. 강의 시선이 잘게 흔들리며 별궁에 쓰러져 잠든 사람들을 보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미동도 하지 않고 잠든 게 불안했다. 이 정도 약이면…. 보통 약초가 아닌데. 도대체 무얼 먹인 거고, 누굴 고용한 걸까. 유약한 어머니 혼자 한 게 아니란 걸 알기에 강은 너무 불안했다. 어머니는 사람을 너무 잘 믿었다. 황제와 어머니, 진영왕 외에는 믿지 않던 강이었기에 이 계획도 어딘가 걸렸다.

    도대체 누가? 누가 어머니를 꼬드겨서? 남은 비빈들 중에 그럴싸한 인물을 찾던 강은 걸음을 멈췄다.

    “귀비입니까?”

    여 소의가 우뚝 서서, 천천히 강을 돌아보았다. 싸늘하게 변한 아들의 얼굴에 살짝 두려움을 느낀 여 소의였지만,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은 눈을 감고 침음했다. 이 정도 규모의 사람들을 잠재우고, 황제가 보낸 호위까지 조용할 정도면…. 그래, 귀비 정도의 권력이면 충분했다.

    강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신경을 쓰기 시작하자 배도 알싸하게 아파왔다. 인상을 찡그리던 강은 숨을 삼키며 여 소의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어깨를 안았다.

    “어머니. 의도는 고맙지만, 과연 귀비 마마를 믿어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겠느냐. 이 어미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날 원망해도 좋아. 하지만, 난 널 어떻게든 구하고 싶었다. 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거기까지 말하던 여 소의가 살의가 서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귀비도, 폐하도. 다 상관없다. 난 너만 잘 살면 돼.”

    처음 보는 여 소의의 강한 의지에 강은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가 정말 달라졌구나. 오로지 자신을 살리기 위해, 그렇게 겁이 많던 분이 부나방이 되어 날아가려고 했다. 강은 침착하게 앞을 보며 걸었다. 주변에 있는 음식물을 보니 아마도 석반 이후에 다들 잠든 듯했다. 산에 있는 노천탕이라 금방 어두워져, 초 하나에 의지해 살금살금 움직여야 했다.

    앞이 아니라 뒤로 도둑놈처럼 나가는데, 강은 유독 짙은 땅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 부근을 유심히 보던 강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 우선 안으로 들어가세요.”

    “왜 그러느냐?”

    “…폐하께서 보내신 호위가 죽었습니다. 안의 사람들은 약을 먹어서 잠들었는데, 왜 여기 사람들은….”

    강은 반사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대도를 빼들었다. 황제의 대도는 잘 다듬어져, 마치 달을 녹여 만든 듯 어둠 속에서 서슬 퍼렇게 빛이 났다. 여 소의가 강의 뒤에 숨어 고양이처럼 발을 옮겼다.

    조금 더 걸어가면서 또 죽어있는 호위를 발견했다. 거기서 걸음을 멈춘 강은 여 소의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어머니. 호위들이 죽은 게 수상합니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다고. 우선 도망 가, 강아. 더 이상 지체하면…!”

    멍!

    이 계획이 틀렸다고 판단한 강이 여 소의를 보내려하는 순간, 저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목소리에 강은 머뭇거림 없이 뛰쳐나갔다. 설이를 구해야 했다.

    “설아!”

    강은 소리를 높여 설을 부르며 산을 올랐다. 아직 햇빛이 남아 길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는데,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여 소의였다. 이를 악물고 어머니에게 가던 강은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날렵하게 어머니를 안고 등을 돌렸다.

    화살이 나무에 박혔다. 강은 엎드린 채로 움직여, 어머니를 돌 사이에 숨기고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자욱하게 깔린 어둠과 정적 위로 스미는 소음. 발소리였다. 하지만 많지 않다. 강은 긴장에 마른침을 삼키며 화살 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냈다. 여차하면 활을 쏠 작정이었다.

    깨앵, 깽!

    그런데 그때 설이가 구슬프게 울었다. 처음 듣는 울음소리에 강은 벌떡 일어나 설이 우는 방향으로 무작정 뛰었다. 제발, 제발! 배가 당기고 아리며, 숨이 떨렸지만 강은 계속 달렸다. 뒤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자식처럼 키운 강아지가 죽어가고 있었다.

    “설아!”

    끼잉, 낑…. 설이 낑낑거리는 소리가 점차 증폭되어 들릴 때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바람에 소매가 펄럭인다. 강의 눈이 커졌다.

    “왜 자꾸 숨어? 그래서 죽여 버렸잖아.”

    “…설아.”

    경혜왕의 손에 들린 이상한 발톱 같은 게, 설의 목덜미를 물고 있었다. 아주 날카롭고, 깊은 발톱이 설의 살을 파고들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강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설의 눈과 마주쳤다. 고통스러워서 일그러진 눈. 그런데도 자신을 보고 반가워서 꼬리를 흔드는 설을 보고 강은 경혜왕도 미처 막지 못할 손놀림으로 살을 끼우고 시위를 당겼다. 경혜왕이 설의 목덜미를 잡은 이상한 도구를 잡아당기자 살이 뜯긴 설이 비참하게 울었다.

    그리고 강이 놓은 시위에서 화살이 빠르게 튕겨져 나가며, 설의 앞가슴에 꽂혔다. 설의 몸이 푸드득 떨리다가 축 늘어졌다.

    설이 죽은 걸 확인하기도 전에, 경혜왕이 도를 발도하고 뛰어들었다. 잠시 방심하던 강이 몸을 비틀어 피했다.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중심을 잡은 강은 집어넣었던 도를 꺼내들고, 그의 도를 막아섰다.

    까앙! 하고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가 야산에 울려 퍼졌다. 경혜에게는 한 손밖에 없는데도 얼마나 힘이 센지 맞물린 금속이 부들부들 떨렸다.

    강은 핏줄이 선 눈으로 경혜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널 살린 게 한이 되는 구나. 그때 죽게 내버려뒀어야 하는 것을!”

    강이 힘을 줘 그를 밀쳤다. 팔꿈치로 비틀거리는 경혜왕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팔이 하나가 없는 경혜왕은 중심을 잡지 못해 쓰러졌다. 강이 도를 높이 치켜들고 찌르려던 때 경혜왕이 몸을 굴려서 도망쳤다. 땅을 손으로 짚고 벌떡 일어선 경혜왕이 숨을 고르며 도를 다시 반듯하게 잡았다.

    “아비와 붙어먹고, 자식까지 임신한 더러운 자식 주제에. 너야말로 죽어야 하는 것 아니냐? 너 같은 놈이 연나라 왕조를 이어가게 내버려 둘 수 없다! 내가 너희 부자의 놀음에 넘어갈 것 같으냐? 천명이라는 이름으로, 둘이 작정하고 붙어먹었으면서!”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원해서 이런 건 줄 알아?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내가 널 위해서 폐하에게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한테 어떻게…!”

    강이 신음했다. 아랫배가 너무 아팠다. 강의 몸이 비틀거렸다. 경혜왕이 빈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왔으나 강이 이를 악물고 도로 맞섰다. 도끼리 다시 맞붙으며 파열음이 퍼졌다.

    “더러운 새끼. 네가 아비를 유혹한 것 아니냐? 하긴, 넌 어렸을 적부터 아비 앞에서 살랑살랑 교태나 떨며 애첩 노릇이나 했지!”

    “입 닥쳐!”

    “네가 그렇게 애첩 노릇이나 하면서 편하게 지낼 때! 나와 진영은 전쟁터에서 싸웠다! 연나라를 위해서! 그런데 너는, 연나라를 위해서 아비에게 다리나 벌린 것밖에 없지 않느냐?”

    그의 비난에 가슴에 멍이 드는 것 같다. 아니, 이미 있던 멍에 다시 주먹질을 해 가슴을 박살낼 작정이었다. 숨통을 조이는 통증에 헐떡이는데, 배가 뒤틀리듯 아파왔다. 통증에 손도 미끄러졌다. 너무 가까이 다가온 경혜왕의 도가 얼굴을 긁어낼 것 같았다. 경혜왕이 남은 한쪽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일그러진 그의 미소가 어둠을 등지고 있으니, 섬뜩하게 보였다.

    왜 그를 살려달라고 황제에게 부탁했을까. 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때 살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때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다. 황제에게 달려가 형님을 살려달라고 비는 게 아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설은 죽지 않았을 테니까.

    강은 차갑게 식은 얼굴로 더할 나위 없이 서늘하게 말했다.

    “죽어버려.”

    “죽는 건 너다!”

    경혜왕이 버럭 소리를 치며 도를 밀었다. 강은 그가 더 가까이 왔을 때, 발로 그의 옆구리를 강하게 후려쳤다. 갈비뼈에 발이 맞닿으며 무언가 맞는 타격 소리가 퍼졌다. 경혜왕이 비틀거리면서도 광기에 사로잡혀 소리쳤다.

    “네 아비가! 우리들의 아비가 너 때문에 나를 이리 만들고, 진영왕을 죽였다! 너도 알면서 모른 척한 거잖아! 이 개자식아! 소현은 무슨 죄로 자기 어미를 죽이고 쫓겨나야 했지? 다 너 때문이다! 너 때문이라고!”

    강은 정신을 놓은 그를 향해 도를 들고 달려갔다. 죽여 버리겠다는 일념으로 강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경혜는 도를 치켜들었다.

    “너도 네 아비가 한 짓을 다 알면서, 그냥 모른 척 넘어간 거잖아! 너도 똑같이 더러운 자식이야! 더럽게 아비와 붙어먹는 놈! 천명이란 이름으로 아비와 정사를 하니 좋더냐? 애까지 낳아 권력을 좌지우지…!”

    경혜왕의 말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혜왕이 소리치며 도를 강을 찌르려고 할 때, 강의 손칼이 빠르게 그의 손목을 내리치고 발로 무릎 뒤를 가격했다. 경혜왕의 몸이 반쯤 쓰러졌다.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강의 도가 더 빨리 그의 배를 뚫었다. 경혜왕의 몸이 고통과 충격으로 바들바들 떨렸지만 강은 눈을 무감하게 뜨고 경혜를 내려다보며 그를 강제로 일으키고 아래로 내려가게 했다. 설과 같은 곳에 그를 두고 싶지 않았다.

    “널 살리는 게 아니었어.”

    차갑고, 단호하게 말하며 강은 눈을 돌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여 소의를 보았다. 여 소의의 눈이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축축하다. 그녀가 왜 우는 걸까. 멍해진 머리로 상념을 이어가다, 강은 무심코 자신이 쏜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둔 설을 보았다. 아직 감기지 못한 눈동자에 강이 담겼다. 강은 침음하며 눈을 질끈 감고, 두 팔에 힘을 확실히 묵직하게 실어 비틀었다. 경혜왕의 근육과 살이 결대로 찢어졌다. 경혜왕의 몸이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처럼 덜덜 떨렸다. 강은 경혜왕의 숨이 멎어가는 걸 피부로 느끼며 손잡이를 잡은 손을 놓았다. 경혜왕의 무릎이 가장 먼저 수풀이 숨 쉬는 땅에 닿았고, 그다음 손바닥이, 그리고 긴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늘어져 흔들거렸다. 강은 발을 까닥거리며 경혜왕이 죽을 때까지 차분한 얼굴로 기다렸다. 그에게 없는 정까지 모조리 떨어진 터라, 지지부진하게 살아있는 것도 짜증나기만 했다.

    “나, 나는….”

    경혜왕이 자잘한 돌멩이가 박힌 흙을 긁어내며 가래 끓는 소리를 내었다. 강의 눈은 느리게 움직여 그의 꿈틀거리는 등에 닿았다. 한쪽 팔 없이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날개가 찢긴 나비 같았다. 그의 의미와 가치, 생이 부질없이 땅으로 흩어졌다. 그는 고통에서 천천히 몸부림치며 죽어가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그의 입술에선 듣기 싫은 오열이 넘쳐났다. 얼굴은 진흙 반죽처럼 잔뜩 일그러져, 흉측스럽게 변했다.

    “나, 나, 나는….”

    그의 숨이 가파르게 달리다가, 점차 흔들리고, 땅으로 고꾸라졌다. 죽음다운 순차적인 진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여기까진 오기로 버텼다 해도 그 후는 무리였다. 그의 숨이 시든 꽃잎처럼 바래진다. 남은 숨들은 잘려서 공중에 잔재되었지만, 바람이 불며 흩어졌다. 그의 죽음은 주인답게 초라했다. 슬퍼해주는 이는 없는 죽음에 강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둠에 서리는 추위가 섬뜩하다. 살며시 정신을 차린 강은 고개를 돌려 야구자(짐승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가진 괴물. 사람의 골을 먹고 산다.)가 나올 것 같은 야산을 훑어보았다. 너무 조용했다. 귀를 건드리고 지나가는 바람의 한 결조차 예민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강은 얼굴에 묻은 피를 더러워진 소매로 건성으로 닦아냈다.

    어둠은 막을 수 없이 쏟아졌다. 홍수 같았다. 열감이 사라진 눈으로 어둠이 자욱하게 깔린 어둠을 보다 강은 눈을 감았다. 고통이 시작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는 통증에 배를 감싸고 엎드렸다. 입에선 우는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고통을 억누르느라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 턱에 맺혔다. 분노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고통은 마구 분출되고 있었다.

    배가 이상하다.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아픈 감각에 강은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아랫배를 움켜잡은 손은 힘을 너무 줘서 핏줄이 곤두섰으며, 왼쪽 손은 흙과 자갈, 수풀 따위를 움켜잡아 살이 쓸려 피가 나고 있었다. 아랫배를 감싸며 신음을 터트린 강은 다가오는 소리에 고개를 느리게 들었다. 어머니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파리하게 질린 강의 얼굴을 더듬다가 힘을 줘서 일으키려 했다.

    “가야 해.”

    여 소의가 강에게 말했다. 가야 한다고. 어디로? 강은 홀로 생각했다. 여태껏 이 나이 먹도록,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해본 적이 없는 강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여기서 아버지의 아이를 낳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일어나야 해. 강아.”

    그러자 배의 고통이 다시 거세졌다. 마치 아이가 안에서 살고 싶다고 요동치는 듯했다. 강은 고통에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땅을 짚고 자신의 힘으로 일어섰다. 두 발로 땅을 짚고 선 강은 숨을 고르며, 눈을 떠서 하늘을 보았다. 별이 우수수 박힌 하늘. 강은 그 하늘보다 검은 눈으로 세상을 담았다. 청명한 어둠에 눈이 편해진다. 강은 자신을 막으려는 어머니를 조심스럽게 밀었다. 여 소의의 몸이 나뭇잎처럼 흔들거렸다.

    “만백산….”

    강이 중얼거렸다. 아픈 배를 붙잡고, 강은 걸어 내려갔다. 여 소의가 놀라서 강의 옆으로 따라갔다. 강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여 소의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만백산으로 가야겠습니다. 천명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그냥 여기서 떠나는 게 너에게….”

    강은 여 소의의 둥글고 가녀린 어깨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입을 꾹 닫은 강은 어머니를 놓고 별궁으로 갔다. 걸어가는 내내, 배에서 진동하는 통증 때문에 주저앉고 싶었다. 다리를 타고 축축한 액체가 흘러내렸지만 강은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누군가 툭, 건드리면 무너질 것 같았다. 별궁에 마련된 마구간까지 걸어간 강은 벽을 짚고 허리를 숙였다.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조금씩 흘렀다.

    설이 죽었다. 그리고 경혜왕도. 이제 남은 혈육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가야 했다. 그들의 죽음의 이유를. 정말 혈육들이 자연의 법칙에 의해 죽은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의도로 죽어야만 했던 것인지. 황제, 그것도 아버지의 아이를 강제로 낳아야 하는데 그 정도의 사실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강은 벽을 짚었던 손을 떼어내고 녹진한 어둠을 파헤치며 걸었다.

    이렇게 아픈 와중에도 자신을 이리 만든 황제를 생각하는 마음에 강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강아.”

    허겁지겁 따라온 여 소의가 강의 손을 잡았다. 강은 멍하니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초를 들고 와서, 강의 얼굴을 빛에 비추어보았다. 그녀는 전과 달라진 강의 눈빛에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좋아하던 당과를 닮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강의 얼굴이 없었다. 강은 묵묵하게 건조한 뺨을 매만지는 여 소의의 손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이런 잔정에 매달릴 여유가 없었다. 황제가 오기 전에 만백산으로 가야 했다. 강은 그녀를 두 팔을 벌려 안아주었다. 어릴 적에는 그녀에게 폭 안겼던 강이 어느새 완연한 사내가 되어 그녀의 몸을 다 가릴 정도가 되었다.

    “어머니부터 피하세요. 폐하께선 그리 너그러우신 분이 아닙니다. 외가도 위험해져요.”

    그녀는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괜찮아. 내 걱정은 하지 말거라. 네 생각만 해.”

    강은 그녀를 떼어놓고, 가장 근처에 있는 아무 말이나 잡았다. 고삐를 잡고 당기니 훈련을 잘 받은 말이 유연하게 강을 따라왔다. 등자를 밟고 말에 올라타자, 여 소의가 준비했던 초라한 무명옷과 주머니를 넘겼다. 그것들을 받아든 강은 여 소의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단도가 있으십니까?”

    “단도는 왜?”

    그녀의 상상의 나래가 극단적인 불행까지 도달했다. 강은 그녀의 걱정을 알고서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정말 가야 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강은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머리가 길면 잡히니까요. 머리가 길다는 건 귀족이라는 뜻이고, 그만큼 잘 잡힐 겁니다.”

    강의 눈은 더 이상 미룰 기색이 없었다. 여 소의는 종아리에 소중하게 묶어두었던 단도를 꺼내서 강에게 건넸다. 여 소의의 본명인 여정인이라는 이름이 적혀있는 단도는 그녀의 가족들이 준 것이었다. 단도를 가볍게 쥐고 돌려보던 강은 긴 머리채를 잡고, 자를 수 있는 만큼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투둑, 투둑 소리를 내며 끊겼다. 황제가 만지길 좋아했던 머리카락은 다 사라졌고 남은 것은 삐죽삐죽 잘린 머리카락이었다. 처음으로 평민들처럼 짧은 머리가 된 강은 잘라낸 머리카락을 여 소의에게 주었다.

    “아바마마께서 오실 수도 있으니, 이건 제가 가는 곳과 방향이 다른 길에 버려주십시오. 저의 체취를 없애야 합니다. 이 목걸이도 제 체취를 없애는 단향이 든 것이겠지요?”

    강은 어머니가 준 투박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나가실 순 없겠지만….”

    여 소의는 눈을 내리깔며 약간의 상황이라도 추측했다. 황제는 나라를 버릴 수 없다. 그는 개인의 감정이 없는 완벽한 군주여야 했다.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으니, 강이 도망갔다고 해서 쉽사리 궁 밖으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여 소의는 그것을 노리고 어떻게든 궁 밖으로 강을 도피시키려 했다. 황제는 황제라는 권력에 갇혀 가장 쉬운 것을 하지 못했다.

    그는 강이 이 나라를 떠나게 된다면, 강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 자신이 잡으러 갈 수 없었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냄새를 맡는 황제와 지홍왕만 따돌린다면. 자신이 시간만 벌어준다면 강은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생각을 빠르게 정리한 여 소의는 강의 잘린 머리카락을 꼭 잡고 말했다.

    “만약에 위험하다 싶으면 무조건 이 나라를 떠나. 알겠지? 폐하는 궁을 벗어날 수 없다. 폐하는 권력과 명예에 취하신 분. 하늘의 아들이니, 그 자리를 떠나 널 찾진 않으실 거다. 그러니 폐하의 친군들과 지홍왕만 피해. 단향에 몸을 숨기고, 최대한 멀리, 떠나.”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나오지 못해도 친왕인 지홍왕이 있다. 황제의 하나뿐인 아우, 친왕, 그의 충성스러운 심복. 궁에서 몇 안 되는 늑대로 변할 수 있는 자. 그가 가장 위험했다. 강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어머니를 보았다. 배의 통증을 억지로 참고 있었지만 이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은밀한 부위에서 흐르는 피가 심상치 않았다. 옷의 색이 어두워서 망정이었지, 아니면 어머니가 도망은커녕 자신을 잡아 민간에 있는 어의를 부르려 했을 것이다.

    강은 치밀어 오르는 통증을 누르며 어머니를 보았다.

    “정말, 저와 같이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폐하는 나를 해치지 못한다.”

    그녀는 곧 쓰러질 것 같은 강의 뺨을 만졌다. 뺨이 축축하다. 강은 그녀의 손바닥에 마지막으로 뺨을 비비며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니는 괜찮겠지만, 가족들은….”

    “괜찮아. 우선 가거라. 내 가족들은 내가 지키도록 하마. 어서 가!”

    도망칠 직전까지 와서 강은 고통에 시달리는 얼굴로 고민했다. 정말 내가 가는 게 맞는 것인가. 자신 하나로 인해 망가질 사람들을 생각하니 암담한 듯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숨이 바닥에 앙금처럼 남았다.

    강이 불안한 눈으로 여 소의를 보자, 그녀가 말의 옆구리를 세게 때렸다. 강의 눈이 커졌다. 여 소의는 유일하게 남은 아들의 머리카락을 소중한 것처럼 꼭 쥐었다. 여 소의의 결연한 눈을 마지막으로 본 강은 고개를 돌려 어둠이 완전히 스민 세상을 보았다.

    어머니의 외가가 마음에 무척 걸렸지만 강은 처음으로, 이기적으로 살아보고 싶어졌다. 황제가 원하는 대로, 황제가 짊어지게 했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신의 눈에 진영왕의 시체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강은 단숨에 고삐를 틀어 야산으로 뛰어들었다. 달이 떴다. 맞물린 이파리 사이마다 달빛이 빗물처럼 들어와 땅에 고였다. 그걸 디딤돌 삼아 밟고 뛰며 강은 앞만 보았다.

    고통스럽게 죽은 진영왕의 시신 위로 살이 뜯겨 죽은 설이 보였다. 모두 자기 때문이었다. 가슴을 둔탁하게 짓누르는 압박감은 죄책감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강은 여명에 씻겨나가는 어둠을 보고 눈을 멍하니 떴다. 말이 히힝, 하고 울며 발을 굴렀다.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마을이 보였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닭이 울며 아침을 알리는 마을.

    강은 숨을 헐떡이며 아랫배를 감쌌다. 통증이 머리끝까지 닿았다. 생살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입술을 얼마나 악물고 도망 왔는지 입술에서 피가 흘러 턱을 적시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고통을 엄수하면서 도망을 가야 하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강은 말의 갈기에 얼굴을 묻었다. 안심이 되어서일까. 드디어 긴장이 풀어지며 허리를 숙일 수 있었다. 강은 말에게 몸을 기댄 채, 조금씩 둔덕을 내려갔다.

    진짜 이게 천명이라면 수긍하려고 노력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황제의 뜻이라면.

    강은 다 죽어가는 얼굴로 빛이 점령한 세상을 보며 탄식했다.

    “너무 잔인하셨습니다, 아바마마.”

    황제의 사랑의 결정체, 그리고 자신을 붙잡는 생명체가 배 속에 있었건만, 강은 두려움에 몸을 잘게 떨었다. 마지막 의식은 거기가 끝이었다. 강은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말에게 기대어 완전히 늘어졌다.

    *

    강이 도망갔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황제는 아침을 알리는 화사한 빛이 서리는 대전에 친군과 지홍왕과 들어서며 눈을 내리깔았다. 우두커니 서서 대전을 장식한 붉은 비단, 그리고 당장 뛰쳐나올 것 같은 늑대 조각상을 보던 황제가 한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화가 머리를 누르고 있다. 이래선 안 된다.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겁게. 화를 내는 건 강을 찾고 나서 해도 되었다. 지금은 강을 잡아오는 게 급선무였다.

    “희비의 흔적은 찾았나?”

    “야산을 통해 내려가신 걸로 파악됩니다. 지금 위병들을 풀었습니다. 곧 소식이 올 것입니다, 폐하.”

    지홍왕이 바짝 다가와 대답했다. 황제는 지홍왕을 무감한 눈으로 힐긋 보았다. 입고 있던 장의를 벗자, 내관이 다가와 장의를 받아갔다. 연단을 성큼성큼 오를 때마다 길게 늘어진 평복 자락에서 흙먼지가 흩날렸다. 황금 어좌에 나른하게 앉은 황제는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실수를 할 때마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야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했을까.

    답은 금세 나왔다. 강의 애정을 너무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아이는 날 사랑하니까, 절대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장담에서 비롯한 실수였다. 자신의 과오였다.

    아이는 어른이 되고, 자신만의 의식을 찾기 마련이었다. 강은 잘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에서부터 의심을 가졌는지…. 형제들이 죽기 시작한 순간이었을까, 천명이 내려온 순간이었을까. 여러 가지의 상황을 돌이켜보던 황제는 피식 웃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도망은 도망이었다. 신뢰는 이미 무너졌다. 무너진 탑을 고치느니, 아예 부서트리고 새로 쌓아야 했다. 아예 도망갈 수 없게. 영원히.

    “원래 아이들은 성장기 때 반항을 하는 법이지. 그렇지 않은가?”

    황제가 웃음을 터트리며 유려하게 말했다. 지홍왕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황제는 턱을 괸 채,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리고 있다가 미묘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은 미소에 친군들은 초조함에 몸을 굳혔다. 처음엔 화를 내고 흐트러졌다가 이성을 다잡고 있는 황제가 무서웠다.

    “강의 성장을 나름대로 잘 멈췄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닌가 보군. 어쩔 수 없지. 그것은 천자의 잘못이었으니.”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황제가 조각된 늑대의 이빨을 어루만졌다. 그의 눈이 봄날의 햇살처럼 다정하고 포근했다. 그의 눈빛이 텅 빈 늑대의 눈을 더듬었다.

    “아이의 잘못을 다잡는 건 부모의 도리지.”

    말을 멈춘 황제가 눈을 돌려 지홍왕과 엎드린 친군들을 보았다. 황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이를 잡아와. 순순히 잡혀 오지 않는다면, 다리를 부러뜨려라. 안 되면 손목이라도.”

    담백하게 명령을 내린 황제는 지홍왕이 멍청하게 “예?”라고 대답하자 인상을 찡그렸다.

    “지아비를 두고 도주한 것은 엄연히 궁법으로 능지처참이다. 하지만 천자가 희비를 너무 사랑하여, 능지처참은 할 수 없으니…. 팔다리 하나쯤은 부러뜨려도 되겠지. 그래야 대신들도 잠잠해질 테고. 아무리 아이를 사랑해도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하는 법.”

    “하지만 희비는 폐하의 씨앗을 품고 있사옵니다.”

    황제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는 또 가져도 된다. 희비는 그러한 몸이니까. 우선 희비를 무조건 생포하라. 희비가 바다를 건너는 순간, 흔적을 추적할 수 없으니. 그 아이는 마술에 능하다. 활도 제법 잘 쏘았지.”

    희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황제의 얼굴에 어쩔 수 없는 뿌듯함, 자랑스러움이 넘쳐났다. 강이 말에 올라타 활을 쏘던 모습을 멍하니 보았던 때를 떠올리던 황제가 명령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말했다.

    “딱 나흘을 주겠다. 희비를 천자 앞에 잡아와.”

    황제의 웃음이 싹 사라졌다. 아름다운 얼굴에 자리 잡은 건 갈무리 되지 않은, 황제의 인간적인 노기였다.

    “당장.”

    “천명을 받듭니다, 폐하!”

    지홍왕이 먼저 바닥에 엎드려 호기롭게 대답했다. 친군들이 순서대로 대답하자, 정상에 올라 소리치는 것처럼 대전에 충성스러운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황제는 그들을 텅 빈 눈으로 지켜보며 몸을 일으켰다. 황제의 심복인 총관 태감과 소수의 친군, 지홍왕이 황제의 등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황제의 옆얼굴은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화를 내지 않아 더 이질적인 얼굴에 지홍왕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홍왕은 황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지금은 참고 있어도, 아마 강을 찾지 못한다면…. 그는 가차 없이 모든 것을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황제를 어떻게든 이곳 궁에 묶어두고 정무를 보게 해야 했다. 심지어 지금은 음관들의 건시(2차 시험)와 과거 시험 홍시(3차 시험)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지막 채점은 황제가 하고 등수를 매겨 패를 나눠줘야 했다. 3년에 한 번 있는 성대한 일에 황제가 빠져서는 안 되기에 지홍왕은 각별히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현아.”

    오랜만에 이름으로 불린 지홍왕이 고개를 돌렸다. 황제는 여 소의가 있는 냉궁으로 가기 위해 가마에 오르려다가, 지홍왕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보다 근소하게 작은 지홍왕도 황제가 가까워짐에 따라 고개를 내렸다.

    “천자를 이곳에 묶어두고 싶다면, 반드시 강을 잡아오렴.”

    지홍왕의 어깨가 굳었다. 황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황제는 두 팔을 벌려 동생의 넓은 등을 토닥였다. 언뜻 보면 애틋해 보이지만, 지홍왕은 황제의 짙은 향과 억센 힘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황제는 척추를 따라 지홍왕의 등을 만지며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분노가 이런 기분이구나.”

    “폐하.”

    “아주 불쾌해.”

    눈을 지그시 감고 조용히 중얼거리던 황제가 눈을 떴다. 그의 금안에 서리가 내렸다. 계절에 맞지 않는 서리가 바람이 불며 이곳저곳 휘날렸다. 황제는 답답한 듯 턱에 고정된 끈을 풀고, 쓰고 있는 관을 벗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서서히 눈살을 찌푸리던 황제가 피곤한 듯 얼굴을 쓸었다.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머리를 누른 황제가 자신을 염려하는 지홍왕을 보고 입을 열었다.

    “태후를 불러.”

    “예.”

    “같은 여자이고 어미이니 그녀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어쩌면, 죽이지 않고 살려둔 보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태후에게 여 소의를 설득하라고 해라.”

    “강 서인의 화형은 언제 시행할까요?”

    귀비는 하룻밤만에 서인으로 떨어졌다. 황제는 자신을 원망스럽게 보는 귀비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 끝을 미묘하게 비틀었다. 제 아비 때문에 여태까지 봐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었다.

    황제는 담담한 눈으로 총관 태감을 보며 말했다.

    “지금 죽여라. 강 서인과 연관된 모든 이들은 다 죽여. 천자를 모독하고, 천자의 아이마저 뺏어가려 한 죄는 마땅히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

    황제는 관을 쓰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가마에 앉아 정면을 집요하게 보던 황제는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의 손이 연신 가마의 팔걸이를 만졌다. 여 소의는 죽일 수 없다. 여 소의의 외가도 죽일 수 없다.

    그랬다간 강이 자신을 미워할 테니까.

    “…감히.”

    이를 갈며 차분하게 화를 내던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마를 짚는 그의 유려한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여 소의를 찾아가도 마땅한 답이 없으리란 걸 알자, 황제는 가마를 멈췄다.

    “예월궁으로 가자. 여 소의는 태후에게 맡긴다.”

    “예, 폐하.”

    여 소의가 갇힌 냉궁에서 방향을 돌린 가마는 느리게 움직여 예월궁에 도착했다. 황제는 침전으로 들어가며 입고 있던 갑갑한 옷을 벗었다. 원래는 침전에 강이 누워 있다가, 자신이 오면 옷을 하나하나 벗겨주고 오늘도 고생하셨다고 교태를 부렸는데. 그렇게 사랑해주고, 예뻐해 주면서 키웠는데. 돌아온 건 자신을 두고 도주한 아이였다.

    괘씸했다.

    그때,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옆에 있던 강이 아끼던 도자기를 집어던졌다. 도자기가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침전에 있던 궁녀들과 내관들이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황제는 깨진 도자기 조각을 피해 걸으며 침상에 누워 천장을 빤히 보았다.

    아이가 자신의 발로 도망갔다라…. 그러면 그 전까지 천자를 속인 것이다. 그 예쁜 얼굴과 예쁜 입술로 거짓말을 속삭이고, 천자를 현혹했다.

    그러나 왠지 알아도 당해줄 것 같았다. 아이는 너무 예뻤다. 사랑스러웠다. 아이를 보면 뭐든 해주고 싶어서 마음이 안달이었다. 그게 더 억울했다. 아이가 예뻐서, 다시 자신을 현혹하면 속아 넘어갈 것 같아서. 그러니 이제 속아 넘어가지 않게…. 아니, 강이 아예 담을 넘을 수 없게…. 냉궁은 너무 춥고 외로우니까, 이곳을 완벽하고 아름다운 옥으로 만들어 가둬야겠다. 아기를 낳으면 또 아기에게 너무 많이 의지할 테니, 아기는 유모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강의 모든 것은 자신이었고, 자신의 모든 것은 강이었으므로.

    혈연이든, 인연이든.

    그러니 찾아내면 다시 어렸을 때처럼 품에 가둘 것이다. 오로지 자신만 알도록. 자신만 보고, 의지하도록.

    아예 땅에 발을 못 디디게 하면 그만이었다. 강이 발을 쓰는 건…. 자신의 배에 올라탈 때만.

    *

    “으….”

    난생처음 겪어보는 배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강은 눈을 감은 채 시름시름 앓았다. 기억도 뚝, 뚝 끊겼다. 도통 이어지지 않는 기억에 신음하던 강은 눈에 힘을 줬다. 눈꺼풀이 따가웠다. 쪼르르르, 얇은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이었다. 자신은 허름한 평복을 입은 채 흙투성이로 땅에 누워있었고, 그런 자신을 지켜보는 늙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함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여자일까.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보던 강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나오는 건 마른기침이었다. 쿨럭거리던 강은 그녀의 접근에 몸을 움찔거렸다.

    “일어났소?”

    “아, 예.”

    몸을 일으키려 하던 강은 배에서 찌르르하고 울리는 통증에 고개를 푹 숙였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머리도 어지럽고, 속도 울렁거리며 영 좋지 않았다. 강이 고통에 신음하며 몸을 비트는 모습을 보던 여자가 혀를 찼다.

    “자네 몸에 태가 있던데. 혹시 자네도 신수의 피를 받은 사람인가?”

    간혹 이 나라에 섞여 들어온 이방인 중에 신수의 피를 받아 임신이 가능한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희귀해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이제는 전설이나 다름없는 신수의 피를 받았냐는 말에 강은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뺨에 맺힌 식은땀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태가 있던데….”

    여자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면 혹시 약을 먹어서 인위적으로 태를 만든 건가? 그렇다면 배가 몹시 아프고 힘들 걸세. 아이를 가질 순 있지만 억지로 자궁을 만든 것이라, 다른 여자들보다 고통이 심하지.”

    “…모릅니다. 저도.”

    지금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강은 이해가 안 되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계곡 물에 젖은 땅을 짚고 겨우 비틀거리며 일어난 강은 쉬고 있는 말의 고삐를 잡았다. 이곳은 어딜까. 만백산은 어디로 가야하지. 평복을 입은 상태로 애써 생각을 이어가려 하던 강은 후들후들 떨리는 몸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를 잃은 몸으로 그리 뛰었으니 몸이 힘들지.”

    “…예?”

    강이 아랫배를 감싼 채 뒤를 돌아보았다. 짹, 짹 새가 우는 소리가 여자와 강 사이의 정적을 채웠다. 늙은 여자는 자신의 함을 열어 귀퉁이 다 닳아버린 종이를 보여주었다. 눈을 찌푸리며 커다란 한자를 읽었다. 여자는 의술을 배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몸에 대해 그리 잘 알았구나, 하고 넌지시 알게 된 강은 배를 만지작거렸다.

    순간 약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싹 스치고 갔다. 약 15살인가, 16살에 황제가 몸이 건강해지는 것이라며 탕약을 먹였다.

    “…아래가 찌르르하고 칼로 긁는 듯한 통증을 오 년 전부터 겪었습니다.”

    “그 약은 서역에서 들여온 것으로, 약 사오 년 복용하면 남자도 태가 생겨 아이를 낳을 수 있지. 그리고 자네가 말한 대로 칼로 긁는 듯한 통증이 심하고, 구역질이 치밀고….”

    여자는 창백하게 질린 강의 표정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강의 몸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강이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그럴 리가….”

    도대체 언제부터 황제가 자신에게 이런 계획을 짠 거지. 그의 애정이 어디서부터 변한 것인지, 그가 언제부터 자신에게… 그런 음심을 품고 있었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아들에게. 강은 배신감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눈앞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우연히 만난 이 의원이 아니라면, 지금도 황제를 믿으며 미안해했을 텐데.

    이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은 터져 나왔다. 강을 살피기 위해 다가온 의원이 강의 맥을 짚었다. 그리고 이마나 목의 열도 쟀다. 그녀의 손길은 궁에 있는 어의들만큼 능수능란했다. 손이 거칠었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안온함에 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강이 지독한 혼란에 허우적거리며 아무런 말도 못하자 여자가 걱정스러운 듯 강의 얼굴을 매만졌다.

    “왜 그런가, 자네. 안 그래도 자네가 이곳 산 입구에 쓰러져 있어서 내가….”

    “말도 안 됩니다.”

    “무엇이?”

    강의 목소리가 금세 거칠어졌다. 숨도 가파르게 변했다. 고통이 남은 배보다 정신적 충격이 커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려고 노력했으나, 나온 것은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이었다.

    여자가 놀라서 강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끝내 강은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아비가 아들에게 욕정을 느끼고 오래 전부터 계획한 일이었으므로. 그리고 그건 황제였기에 가능했다.

    자신이 왜 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강은 아이가 사라진 아랫배를 움켜쥔 채, 헐떡거리며 울다가 여자를 보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호, 혹시 그 약이… 흔한 것입니까?”

    “아닐세. 그 약은 금보다 비싸서 귀하신 분들이 아니면 먹을 수 없지. 딱 보아하니 자네도 귀족가의 애첩 같던데, 혹시 강제로 임신당해서 도망쳐 나온 것인가? 그렇다면 돌아가는 편이 좋을 걸세.”

    애첩이란 말에 강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그것으로 강의 정체를 어림짐작한 의원이 쯧쯧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자네에게 약을 먹이고, 임신을 시킬 정도면 몹시 귀애한다는 것이니… 도망갔다는 걸 알면 얼마나 화를 내겠는가? 더군다나 그 아이까지 잃어버렸으니…. 그리고 자네도 몸이 너무 약해졌어. 살고 싶다면, 내 말대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걸세. 그 몸으로 도망가면, 태가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어.”

    강은 실성한 듯 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번져가던 웃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으로 바뀌었다. 아이가 사라진 배를, 바늘이 곤두선 듯한 통증만이 선명하게 남은 배를 감싸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경혜왕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아버지의 애첩이었다. 친왕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에게 기쁨이나 주기 위한 애첩이었다. 그걸 자신만 모르고, 정말 아들인 줄 알고…. 인정받으려고 그리 노력했다니.

    “이봐, 자네.”

    “…가야겠습니다.”

    “뭐?”

    여자가 깜짝 놀라 강을 잡았지만, 강은 그녀를 뿌리치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계곡 물로 얼굴을 닦아내고, 손을 씻었다. 강은 여자가 벗겨준 활과 화살을 다시 착용하고, 장의까지 둘렀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걸려있던 의원들이 쓰는 얼굴 가리개를 빤히 보았다.

    자신이 황제라면 가장 먼저 백성들이 쓰는 멱리를 못 쓰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의원들은 일반 백성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특별한 얼굴 가리개를 썼다. 뾰족한 산 같은 모자를 썼고, 코와 입을 가렸다. 코를 통해 불운이 빨아들여진다는 미신 때문에 병든 사람을 진료하는 의원들은 불운을 막기 위해 코를 가린 것이었다. 기녀들은 얼굴 전체를 다 가렸지만, 자신은 기녀가 아니니 아예 쓸 수가 없었다.

    강은 불행 속에서 찾아낸 일말의 희망에 돈을 건넸다. 의원에게 자신을 구해준 보답과 더불어 얼굴 가리개를 사는 값으로 보석 여러 개를 주자 그녀는 곧바로 얼굴 가리개를 넘겼다. 멱리와 다르게 불투명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강은 꼼꼼하게 얼굴 가리개를 착용하고, 말에 올라탔다.

    “혹시 여기서 만백산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십니까?”

    “만백산? 그곳은 섬에 있어서…. 동남부로 계속 내려가야 하네.”

    “동남부로 가려면, 저 방향이 맞는지요?”

    강이 얼굴 가리개를 슬쩍 내려 한 방향을 가리켰다. 눅눅한 이파리들이 우거진 숲이었다. 아래로 갈수록 물이 많았다. 이곳도 그런 특징이 있었다.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은 마지막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말의 옆구리를 발로 후려갈겼다.

    “이랴!”

    말을 타고 잽싸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의원은 재차 고개를 갸웃했다.

    “애첩이 아닌가?”

    처음부터 이상했던 건, 애첩이라 하기엔 남자는 체격이 매우 좋았고 얼굴도 단정하고 서늘하게 잘생겼다는 점이었다. 얼굴이 그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우직한 소나무같이 잘생겼던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보던 의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사람도 살렸고, 돈도 받았으니 그녀의 일은 끝난 것이다. 미련 없이 거액의 보석을 챙겨 산을 내려갔다.

    강은 계속 동남부를 향해 달렸다. 쉴 틈은 없었다. 배를 강타하는 고통에 무너지고 싶었다.

    그러나 강은 창백하게 질려 푸르게 변한 입술을 물며 말에서 버텼다. 자신이 임신한 연유, 그리고 그토록 아팠던 과거에 대해서 알았으니 이제 남은 건 천명과 형제들의 죽음이었다.

    제발, 그것만은 황제의 뜻이 아니기를. 강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삐를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잡았다.

    형제들의 얼굴이 싹 스치고 지나가며, 자신이 죽인 경혜왕과 경혜왕이 죽인 설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눈이 뜨끈해졌다.

    장례조차 치러주지 못하고 도망쳤다. 적어도 땅에는 묻어주고 올 것을. 황제가 자신을 잡고, 영원히 궁에 유폐시켜 버릴까 봐 설의 시체도 제대로 수습해주지 못했다. 어머니의 앞날도 걱정이었다. 발목을 잡는 과거와 현재의 환영에 시달리던 강은 어설프게 욕을 내뱉으면서도 말을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모든 것을 거기에 두고 왔으면서. 돌아봤자 무엇이 달라진다고, 이리도 후회하는 것일까. 너무 오랜 시간 달리는 터라, 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뺨에도 습윤한 열이 차올랐다. 얼마나 달렸을까. 허벅지와 배가 당겨오고, 목도 쓰라릴 때쯤 강은 높은 정상에 올라섰다.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광활하게 펼쳐진 논밭과 그 중심에 있는 낮고 긴 마을이 보였다. 처음으로 보는 외곽 지역에 강은 눈을 크게 뜨고 깜박였다.

    이곳에서 그나마 여유를 가지고 보지 않는다면, 평생 보지 못할 광경이었다. 언제든 황제에게 잡힐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며 강은 숨을 고르고, 말의 옆구리를 찼다.

    *

    희비가 도망을 갔다. 지홍왕은 소수의 친군들과 강의 흔적을 쫓아 달리며 혀를 찼다. 부는 바람의 역방향으로 달리는데도 그들의 움직임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황제가 준 시간은 나흘. 잡기에 충분해 보인 듯하지만, 강이 쉬지 않고 달리고 목적지가 어딘지 모른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황제는 강의 가출을 백성들이 아는 걸 원하지 않았다. 대신들에게도 입을 벙긋했다간 목을 잘라버릴 거라고, 웃는 낯으로 서슴없이 경고했다.

    후궁이 황제를 두고 도망을 가거나, 자살을 하는 행위는 집안 자체가 멸문하는 대역죄였다. 잡혀오면 적어도 능지처참이었다. 간혹 있던 후궁들의 도망에 대한 대가를 춘추나 율법에서 찾아보면 그들은 대게 능지처참, 더 심하면 끓는 기름에 튀겨져 죽었다.

    다리나 팔이 부러지는 정도로 끝내겠다는 건, 강에 대한 황제의 극진한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지홍왕은 스산하게 웃으며 강에 대해 생각했다. 스물을 먹도록 강은 황제에게 반항한 적이 없었거늘, 도대체 무엇이 강을 자극해서 이 지경까지 오게 한 것일까. 자신의 외가가 위험해지는 걸 알면서도, 도망을 결정해야 했던 이유.

    ‘설마 모든 걸 알고 있는 건가?’

    그러나 이 일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신관조차 그들의 편이었다. 지홍왕은 허리를 숙이고 매섭게 달리면서 하늘을 힐끔 보았다. 황제의 마음을 알았는지 밤중에 내렸던 비가 그쳐 하늘은 누군가 먼지와 구름을 의도적으로 걷어낸 것처럼 말갛다. 지상으로 가까워질수록 옅은 쪽빛이었다. 가파른 산을 오르던 지홍왕과 친군들은 한 지점에 멈췄다. 둔덕에서 내려다보자 아래에 불어난 물가가 있었다. 이제 저곳을 넘으면 동남부였다. 빽빽한 산림으로 우거져, 가는 길이 험해서 드나드는 사람이 별로 없는 길이라 지홍왕은 고민했다. 이대로 직진할 것인가, 돌아서 다른 곳을 누벼볼 것인가. 강이 단향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늑대가 되었는데도 향을 맡을 수가 없었을 리가.

    더불어 지금 비가 내려 족적이 거의 지워져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했다.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갔다. 아주 오랫동안 계획한 듯, 철저하게 맞물리고 있는 강의 도망에 지홍왕은 입술 끝을 비틀었다.

    얌전하고 순한 줄 알았더니…. 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강의 도망에 다들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도망가고 싶었다면, 혼례 때 도망갔어야 했다. 강은 천명을 받은 날부터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는데. 아바마마, 아바마마 하며 흐느껴 울고, 싫다고 거부하면서 결국엔 다리를 벌려 그를 받았으면서. 임신까지 했으면서.

    팔짱을 끼고 불쾌감을 있는 대로 드러내던 지홍왕은 햇빛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그곳엔 수풀이 있었다. 밤새 내린 비가 버거워,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수풀. 지홍왕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늘 그렇지만,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다. 비가 내렸다고 해도, 처마가 있는 곳은 빗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지홍왕은 말에서 내려와 혹여나 있을 족적이 지워질까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로 수풀을 거두었다. 거기에 반쯤 지워진 말발굽이 있었다.

    자신이 데리고 온 말의 족적과 일치했다. 지홍왕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화살처럼 저 먼 곳까지 찍혔다. 동남부의 끝에는 만년설이 있는 만백산이 있었다. 눈이 너무 많아 오르긴 힘들지만, 제대로 오르기만 한다면 신의 목소리를 바로 들을 수 있는 신성한 산이었다.

    “만백산이다.”

    “예?”

    “만백산으로 갔다, 희비가. 이 말발굽을 보거라.”

    친군이 반쯤 남은 말발굽을 확인했다. 지홍왕은 스산하게 웃으며 등자를 밟고 말에 올라탔다.

    “동남부로 간다! 그리고 폐하께 전서구를 날려라. 희비께서 만백산으로 가신 게 분명하다.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러 가셨다!”

    어둠에 녹아있던 친군들은 달리는 지홍왕을 따라 바람처럼 움직였다. 불어난 물을 넘어 그들은 쉬지 않고 달렸다. 근처에 있는 세 군데 마역에 들러 혹시나 돈을 주고 말을 빌린 사람이 있는지 알아봤으나, 그곳에서 강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산과 산마다 있는 작은 마을을 다 둘러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강이라면 여기서 어떻게 했을까. 멱리도 쓰지 못한다. 얼굴이 하얗고 곱상하니 금방 들통났을 텐데 그런 말이 없는 걸 보니, 얼굴은 제대로 가린 것 같았다.

    그러면, 나라면? 지홍왕은 몇 가지 가설을 내리다가 개인별로 말을 소유한 집을 찾아다녔다. 기록을 무서워한다. 얼굴도 보여주기 꺼려한다. 그러나 이쯤에서 말이 지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특히 동물을 아끼는 강이니, 말이 죽게 내버려 뒀을 리가 없다.

    “전하, 찾았습니다.”

    지홍왕은 친군들에게 명령을 내린 후, 지도를 펼쳐 경로를 확인하던 때 조사를 나간 친군이 돌아왔다. 그는 지홍왕의 옆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자신이 알아본 바를 속삭였다.

    “불과 몇 시진 전, 희비 마마께서 거액의 돈을 주고 말을 사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단향을 거래하시지 않은 걸로 보아 단향은 이미 넉넉하신 걸로 생각됩니다.”

    “어디로 갔다고 했든?”

    친군이 말했다.

    “그런 말은 없었지만, 여기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물어보셨다고 합니다. 동남부로 가는 길이 맞고, 그 길은 저곳입니다.”

    지홍왕의 눈이 빛이 잘 들지 않는 숲길에 닿았다. 지홍왕은 지도를 한 번 보고, 다시 그 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동남부로 이어지는 이 길 종착지엔 다리가 있었다. 줄로 얼기설기 묶은 다리는 끊으려면 언제든지 끊을 수 있는 것이었다. 가장 빠르지만 위험했다.

    “…너희들은 나를 쫓아라. 먼저 폐하께 전서구를 보내라.”

    “뭐라 보낼까요?”

    지홍왕이 친군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희비를 거의 다 찾았다고.”

    그래 봤자 황제의 손바닥 안이었다. 지홍왕은 친군들과 무리를 지어 좁고 축축한 산길을 올랐다. 희비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으니 남은 건 속력을 내는 것이었다. 타고난 체력과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으로, 그들은 희비가 밤새 달려온 거리를 점차 좁혔다. 그들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젖은 흙길은 푹 파이고 막 자라나 꽃을 피우려던 새싹들은 짓밟혀서 죽어 나갔다. 짐승들은 산을 울리는 발소리에 몸을 숨겼다. 워낙 이 길이 험해 오르는 사람이 없어서, 그들은 생각보다 더 빨리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들의 몸이 한참동안 그림자로 만들어진, 하나의 긴 동굴 같은 음습한 길을 드디어 벗어났다.

    빛이 내려오는 그 지점에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검은 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의 짧은 상의에 먼지가 낀 듯한 탁한 남색 바지를 입은 남자를 유심히 보았다. 누가 보아도 쫓기는 사람처럼 달리는 자세가 심상치 않았다. 공기의 방해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 허리를 숙이고 있다. 옷으로 가려져 있어도 숨길 수 없는 자태에 강이라고 짐작한 지홍왕이 빠르게 달렸다. 지홍왕은 등자를 꽉 밟은 채 달리며 활을 집어 들었다. 앞에서 달리고 있던 남자 또한 대도를 빼 들었다. 친군들이 앞으로 쏘아 달리며 강을 잡기 위해 움직였다. 그때, 강이 다리로 올라갔다. 지홍왕은 역시, 라는 생각을 하며 입을 벌렸다. 쓸모 있는 인력을 여기서 잃을 수 없었다.

    “멈춰!”

    지홍왕이 소리쳤다. 친군들이 막 다리에 오르려다 멈추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가 대도를 시원하게 빼 들어 다리의 끈을 끊어버렸다. 다리가 우수수 무너지는데 강은 가볍게 뛰어 저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지홍왕의 손이 시위를 당기고, 놓았다. 지홍왕이 노린 건 강이 매고 있는 봇짐이었다. 그의 화살은 정확하게 강의 봇짐에 꽂혀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강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현재 단향의 거래, 멱리 착용, 배의 출항, 모든 것이 임시적으로 막혔다. 도망갈 경로는 모두 차단했다. 지홍왕은 줄로 엮었던 다리가 있었던 곳에 서서 강을 보았지만, 강은 두 번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달려갔다. 절대 돌아보지 않으리라는 의지까지 엿보이는 뒷모습에 지홍왕은 혀를 찼다.

    그는 옆에 있는 친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길을 우회해서라도 추적을 하라고 말을 남긴 그는 곧장 몸을 돌려 환궁했다.

    일이 뭔가 쉽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빨리 돌아가서, 황제를 봐야 할 것 같았다.

    황제가 자신을 쫓아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제의 심복들이 강을 쫓아온 것이었다. 어떻게든 인명 피해를 보지 않고 그들을 빼돌리긴 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그들의 추적은 꿀을 쫓는 벌보다 더 집요했으니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 돌아가면, 평생을 황제의 품에 갇혀 지내야 한다. 그가 원하는 대로 애첩이 되어 다리를 벌려야 하고, 아들인데도 그가 원하니까 아이를 낳아줘야 한다. 과거에도 그와 잠만 자지 않았을 뿐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그의 품에서 이루어졌다. 걸음마를 제외한 모든 걸 그와 했다.

    ‘차라리 아비와 평생 살까?’

    ‘도망갈까?’

    그가 넌지시 몇 번 말했던 본심이 생각나자 등이 서늘해졌다. 그의 사랑은 이제 두려움이었다. 그를 사랑하는데. 너무 사랑하는데. 이 상황이 와서도 자신을 혼내지 못하고 용서할 그가 안쓰럽고 사랑스러웠다. 단 한 번도 밉지 않았다. 그냥,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피부와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러니 자신이라도 그를 아버지라고 인정할 때 도망가야 했다. 그가 자신을 아들로 보지 못하니 이런 방법밖에 없었다. 자신이 진실을 알더라도, 그가 자신을 놔주지 않을 테니.

    내가 아버지라고 인정하고 놔줘야 한다. 그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봇짐에 있던 단향과 여분의 옷가지를 잃었다. 그래도 세 개의 화살과 황제가 주었던 활은 남았다. 활을 쥐고 달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강은 허리를 펴고 뒤를 힐끔 보았다. 달라붙은 친군은 셋. 봇짐에 가려졌던 터라, 지홍왕은 가장 중요한 걸 없애지 못했다.

    강은 화살을 빠르게 꺼내 뒤에서 달려오는 친군들을 향해 시위를 당겼다. 강의 활 실력을 아는 친군 한 명이 눈치채고 뒤로 물러났다.

    “크윽!”

    단 한 번의 눈대중으로 확인하고, 화살을 쏘아 친군을 죽였다. 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말에서 굴러내려 떨어졌고, 마침 뒤에서 달려오는 친군이 그를 뛰어넘었으나 날아오는 두 번째 화살은 피하지 못했다.

    어둠에 숨어있던 친군 한 명은 수풀더미에 숨었다. 강은 추적 의지를 잃은 자를 굳이 죽이지 않았다.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강은 그를 두고 다시 앞을 보며 달렸다.

    “젠장!”

    흠뻑 젖은 얼굴을 닦을 새도 없이 나무에 기대어 주저앉은 담영은 숨을 몰아쉬며 고민하다가, 몸을 일으켜 말에 올라탔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집안의 명예까지 추락한다. 아들에게 추한 자리를 물려줄 수 없다는 일념으로 담영은 강을 쫓아 달렸다.

    *

    냉궁에 가느니, 처형대에서 목이 잘리는 게 낫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서늘하고 잔혹한 그 말은 비빈들 사이에서 자주 돌던 것이었다. 황제는 냉궁에 보낸 비빈들을 죽을 때까지 꺼내주지 않았다. 비빈들은 그곳에서 백골이 되어야 나올 수 있었다. 냉궁에 갇힌 비빈들은 시체와 같이 살아야 했다. 썩어가는 시체에 꼬인 벌레와 함께 숨을 쉬어야 했고, 썩어가는 냄새도 맡아야 했다. 빛이 한 톨도 들어오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는, 오로지 하루에 세 번 오는 내관이 아니라면 늘 혼자인 냉궁은 정말 미치기 좋은 공간이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어둠 속에서 죽을 때까지 혼자라는 그 사실이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그리고 그건 아무리 정신이 강한 사람이라도 이길 수 없었다. 황제는 그런 곳에 아이를 가둘 수 없었다. 대신들은 황제를 기만하고, 아이까지 밴 채 도망간 강을 냉궁에 가두고, 그의 어머니인 여 소의는 거열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황제는 묵묵부답이었다.

    강이 도망간 지 사흘째. 불과 내일이면 과거시험에서 합격한 태학관 관생들에게 패를 나눠줘야 하는데, 아직도 강이 돌아오지 않았다.

    강은 도망을 간 것이다. 자신을 이 넓은 궁에 두고. 자신의 아이를 품고서.

    몇 번이고 부정했던 사실이 다시금 머리에 새겨지자, 화가 치밀었다. 모호전에서 정무를 보던 황제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벼루를 집어 던졌다. 얼마나 세게 던졌는지 그 단단하던 벼루가 산산조각이 났다. 먹을 갈던 내관은 깜짝 놀라 바닥에 엎드려 오들오들 떨었다.

    “왜 도망간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해줬는데. 강도 자신을 ‘아바마마.’라고 부르며 살갑게 안겨오고, 입을 맞추었는데. 군주로 살아오면서 처음 겪어보는 상실감, 참담함, 그리고 모멸감과 배신감에 황제는 얼굴을 감싸고 더운 숨을 내쉬었다. 항상 강이 황제의 감정을 다스려주었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내관들과 궁녀들은 겁에 질려 떨었다.

    “왜.”

    얌전히 있었으면서. 자기를 버리지 않겠다고,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으면서.

    거짓말을 하고 도망간 강이 괘씸했고, 미웠고…. 또 그러나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황제는 결국 속에서 용암처럼 끓는 화를 참지 못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다 여 소의가 잘못한 것이었다. 여 소의가 유혹했겠지. 여 소의나 귀비, 경혜왕은 자신에게 한이 많으니, 강을 이용해서 생채기를 내려 했던 것이다.

    그래도 말이 되지 않았다. 강이 고작 그런 이유로 도망갈 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감싸줄 아이였지. 자신의 품에서 큰 아이는 누구 한 명에게도 상처 주지 못하는 아이였다. 겁이 많고, 착하고…. 사람도 못 죽여서 전쟁터에 보내지 못했는데. 그런 아이가 자신에게 이렇게 배신감을 안겨주다니.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이젠 웃음이 나왔다.

    긴 회랑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온 황제는 천금궁 앞에 서서 총관 태감에게 말했다.

    “말을 가져와.”

    “예?”

    총관 태감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황제는 그를 스산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말을 가져와.”

    “예, 폐하.”

    태감이 죽을죄를 지었다고 거듭 말하고서 도망가듯 뛰었다. 가마를 타고 냉궁까지 가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총관 태감이 헐레벌떡 뛰어와 말의 고삐를 건넸다. 장의를 그에게 집어던지고, 간편한 평복 차림으로 말에 올라탄 황제가 홀로 냉궁까지 말을 달렸다.

    냉궁을 지키는 호위들이 황제가 당도하자, 서둘러 땅에 엎드려 예의를 표했다. 고귀한 천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귀에 닳도록 들은 말을 산뜻하게 무시한 황제는 냉궁을 관리하는 내관의 손목을 잡아당겨, 문을 열도록 종용했다. 내관은 황제의 주변에 감도는 노기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희비가 있을 때와 너무 달랐다. 희비가 있을 때는 늘 사근사근 웃고, 부드럽게 말해주던 황제였는데, 지금의 황제는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빨리 열어라.”

    황제가 시정잡배처럼 협박하는 어조를 썼다. 덜컥 겁을 집어먹고 놀란 내관의 손에서 열쇠가 자꾸만 자물쇠 위로 미끄러졌다. 결국 보다 못한 황제가 내관을 밀치고, 땅에 떨어진 열쇠를 집어 들어 문을 열었다. 세 번의 자물쇠를 열고, 사슬을 거두었다. 황제는 자신의 힘에 무력하게 쓰러져 허우적거리는 내관의 멱살을 잡아 안으로 집어던졌다.

    “당장 그년을 끌고 와.”

    “예, 예, 폐, 폐하!”

    먼지가 자욱한 냉궁에 쓰러졌던 내관이 서둘러 일어나 달려갔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냉궁은 저승의 입구보다 어두웠다. 황제는 팔짱을 끼고 화를 삭이며 여 소의와 내관을 기다렸다. 그사이, 황제를 쫓아온 친군들이 황제의 곁에 섰다.

    황제는 친군들 사이에 같이 온 익숙한 낯의 형제를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홍왕의 근처에 자신의 아이가 없었다. 황제는 지홍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떻게 됐느냐.”

    지홍왕이 무릎을 굽히려 했지만 황제가 막았다. 그럴 시간이 없다는 듯, 초조하게 지홍왕의 상체를 자신 쪽으로 당겨 친근하게 얼굴을 갖다 대었다. 지홍왕은 냉궁에서 서서히 몸을 드러내는 여 소의를 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우선 단향이 든 것으로 추측이 되는 봇짐은 없앴습니다. 단향의 지속시간을 추정하면 슬슬 효력이 떨어질 때가 되어서 오는 길에 늑대들을 불러 희비 마마를 추적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들이 거절했습니다.”

    황제의 동공이 길어졌다. 늑대의 눈으로 그가 웃었다.

    “그들의 군주는 천자다.”

    “…예, 그리 말하더군요. 진짜 군주가 오지 않는 이상, 천명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인가?”

    “폐하.”

    지홍왕이 무릎을 꿇는 여 소의는 보지도 않고,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의 금안은 구슬처럼 굴러가 머리가 산발이 되고, 엉망으로 변한 여 소의에게 닿았다. 황제가 여 소의에게 다가가는 동안, 지홍왕과 친군들은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고 땅에 머리를 박고 간절하게 바랐다.

    “폐하, 폐하는 소신들의 주군이십니다! 폐하께서 소신들과 저곳에 사는 무지한 백성들을 두고 가신다면 이 나라는 망국이 되고 말 것입니다. 폐하, 제발, 소신들을, 불쌍한 백성들을 버리지 말아주시옵소서.”

    “누가 너희들을 버린다고 했더냐?”

    황제가 매달리는 지홍왕과 친군, 그리고 거기에 합세한 내관들에게까지 버럭 짜증을 냈다. 그는 죄인처럼 묶여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 소의의 턱을 검지로 들어올렸다. 강을 낳아준 어미답게 눈이 컸으나, 광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답게 광기가 번들거려 보는 것도 짜증이 났다. 자해를 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이마에 피멍이 들어있었고 손톱도 빠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황제는 거침없이 여 소의의 턱을 억세게 잡으며 억지로 입을 벌리도록 했다.

    “네년이 꼬드긴 것이지?”

    “…무엇을 말입니까?”

    여 소의가 며칠 동안 말하지 않아, 푹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황제는 그녀의 가느다란 턱을 세게 잡고 자신 쪽으로 당겼다. 억센 힘이 턱을 조이는 통증에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는 고통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갛게 웃었다.

    “네년이 강을 꼬드긴 거지. 그 착한 아이가, 천자를 두고 갔을 리가 없으니까.”

    “아닙니다. 강은 폐하의 아이를 임신하고, 괴로워하고, 힘들어했습니다. 원하지도 않는 아이였습니다. 원하지 않은 혼례였고요.”

    “천명이면 받아들여야지.”

    황제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그의 얼굴과 전신에 분노가 서렸다. 자신의 아이를 도주시킨 어미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천명이란 말이다. 그 누가 천명을 거부한단 말인가? 그대도 천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천명이라서 보낸 겁니다. 제 아이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 못하게 했으니까요. 폐하께서 예뻐한다는 이유로, 모든 걸 포기하고 산 아이입니다. 그런데 이젠 천명이라고 폐하의 아이까지 낳으라고요?”

    여 소의가 당당하게 그를 쏘아보았다. 황제가 하, 하고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갈기갈기 살을 찢어 뼈와 분리하고 싶었다. 가둬 둔 여 소의의 외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여 소의는 황제가 필사적으로 감정을 누르고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여 소의도 많이 놀란 상태였다. 황제가 이 정도까지 흐트러지다니.

    잘못하다간, 황제 자리에서 폐위되고 새로운 황제가 천명을 받고 저 자리에 앉는 게 아닐까 싶었으나 여전히 하늘은 조용했다.

    바람 한 점 없는 세상에서 여 소의는 그의 손을 보았다. 하얗고 큰 손이 살의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여 소의는 차디찬 눈으로 아름다운 자신의 지아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죽이세요.”

    황제의 얼굴에서 미소가 굳었다. 황제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화를 내본 적이 없는 탓에 화를 내보내는 것도 굉장히 어색했다.

    이제야 조금 그가 사람답게 보였다. 여 소의는 황제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자각하며 쓰게 웃고 말했다.

    “죽이세요. 전 말하지 않을 겁니다. 저의 외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죽이세요. 그게 폐하가 하시는 일 아닙니까?”

    “…죽이지 않는다.”

    황제는 천천히 눈을 감고, 숨을 내쉬며 쓰라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죽이지 않는다.”

    “강이 미워할까 봐, 두려우십니까?”

    황제는 무감한 얼굴로 여 소의를 물끄러미 본 후, 등을 돌렸다. 미련 없이 옷자락을 흩날리며 사라졌다. 내관들은 여 소의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여 소의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내관의 손에 끌려 다시 냉궁에 갇혔다.

    *

    희비가 사라진 지 나흘, 오늘도 하늘이 무척 고고하다. 높고 푸른 하늘은 쪽빛 염료를 푼 것처럼 선명했다. 구름은 없었다. 걸린 것은 오롯한 태양이다. 태양은 하늘의 눈이었다. 태학관 관생들의 과거 시험 합격을 축하하는 예식을 보기 위해서인지, 태양이 둥그렇게 떠서 지상을 따사롭게 내리쬐었다. 바람은 선선했고, 그에 따라 음악처럼 꽃향기가 타고 흘렀다.

    모두가 평화로운 낮, 천금궁의 문이 열리며 황제가 가마를 타고 나왔다. 오늘 황제는 12류 황금 곤관을 쓰고 황금색 비단으로 만든 곤관을 입고 있었다. 총 여섯 겹의 곤복은 땅, 하늘, 태양, 달, 늑대, 용을 상징했다. 가장 위는 역시나 하늘로 올라가는 늑대였다. 황금색 비단에 은랑이 네 발을 치켜세우고 용맹스럽게 하늘에 뜬 태양으로 향해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황금 곤관, 곤복보다 더 노랗고 아름다운 황제의 눈이 무심하게 정면을 보고 있었다. 태양보다 빛나고, 달보다 차가운 그의 눈이 자신을 향해 엎드리는 대신들의 등을 훑었다. 그의 시선엔 그 누구도 담기지 못했다. 천금궁을 시작으로 진행된 행렬은 과거 시험 백시까지 합격한 관생들이 엎드려 있는 화비전까지 이어졌다. 황제는 연단 앞에 가마가 멈추자, 천천히 무녀들의 손을 잡고 내려왔다. 그의 곤복이 바람에 우아하게 흔들거렸다.

    제례악이 흘렀다. 살결보다 부드러운 비단이 귀를 스치는 느낌이었다. 아주 부드럽고, 포근한 제례악이 끊임없이 흐르다가, 황제가 황금색 황좌에 앉은 순간 멈추었다. 황제가 몸을 돌리자, 그의 곤관에서 12류가 서로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고귀한 천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대신들, 관생들, 내관들, 무녀들까지. 한마음, 한뜻으로 연국을 태평성대로 이끈 황제를 향해 예의를 표했다. 황제는 팔걸이에 두 팔을 올린 채, 말없이 그들을 보았다. 모두 자신의 신하들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진짜 자신의 아이가 없었다. 내가 바란 것은 오로지 그 아이 하나였는데. 황제는 탁 트인 화비전 앞에 자리한 사람들을 보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저들이 무슨 소용일까.

    황제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하나 없는, 태양이 뜬 하늘. 아주 파랗다. 눈에 찬물을 붓는 것처럼 시렸다. 그의 금안에 바다보다 차가운 물이 흘렀다, 밖으로 넘쳤다.

    하늘을 뚫어져라 보던 황제는 무슨 생각인지, 갑자기 어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화려한 용포가 엎드린 자들의 시선을 채우자, 그들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때면 본래 황제가 ‘고개를 들라.’라고 말하며 웃어야 했는데.

    지금의 황제는 말없이 12개의 연단을 내려가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그의 주변이 차가웠다. 황제가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는 모습이 아름다운데, 금방이라도 연기처럼 사라질 것 같이 두려웠다. 구름을 담은 금안이 점차 가늘어졌다.

    “폐하.”

    그러던 순간, 태후가 몸을 일으켰다.

    “혼아!”

    그녀가 무엄하게도 황제의 본명을 불렀다. 황제가 고개를 돌려 태후를 보고 웃었다.

    “잠시 다녀올 테니, 현이에게 일을 맡기겠습니다.”

    태후가 저 멀리서 달려오려 했다.

    그러나 황제가 그것보다 빨리 턱에 고정된 12류 곤관의 끈을 풀었다. 그는 아주 거칠게 머리에 쓰고 있던 곤관을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붉은 바닥에 곤관이 부딪히며, 요란하고 차가운 소리를 다시 만들어냈다. 이제 대부분의 시선이 황제에게 꽂혔다. 황제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며 위에 걸친 용포를 벗기 시작했다.

    “안 됩니다, 형님! 그러시면…!”

    “이제 다 상관없다.”

    황제가 유려하게 웃으며 용포를 허공에 던졌다. 황금색 용포가 공중에 꽃잎처럼 떠올랐다가, 가라앉을 때였다.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황제를 잡으려 안달이 나 있었다.

    “안 돼! 폐하께서 변신하셨다!”

    “폐하!”

    “폐하, 안 됩니다! 소신들을 버리지 말아주시옵소서!”

    “폐하!”

    이미 늑대가 된 황제가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막는 대신, 친군, 금군을 뛰어넘고 마지막으로 황궁의 담까지 훌쩍 뛰어 사라졌다. 은빛 호선이 그들의 시야에 새겨지지도 못하고 증발되었다.

    멍하니 황제가 변해서 사라진 모습을 지켜보던 지홍왕이 서둘러 늑대로 변할 수 있는 자를 찾았다. 그나마 살아남은 이 중, 늑대로 변할 수 있는 우도독이 늑대로 변해 뛰쳐나갔다.

    “형님….”

    지홍왕이 애타게 불렀지만, 돌아온 건 매서운 비바람이었다. 언제 맑았냐는 듯, 하늘이 어두워지며 비가 내리고 번개가 쾅쾅 쳤다. 비는 매우 굵어서 맞기만 해도 쓰라렸다. 그리고 갑자기 눈으로 변해 펑펑 쏟아졌다. 말도 안 되는 날씨 변화에 지홍왕은 탄식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대신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망국의 조짐이…!”라고 외쳤고, 태후는 구석에 몸을 숨기며 벌벌 떨었다.

    하늘이 노했다.

    ‘하늘이 선택한 군주는 늘 마음속에, 머리에, 오로지 나라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 외의 것은 폐하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사소한 것에 불과합니다.’

    황자 시절부터 지겹도록 들어온 세뇌당했던 말이었다.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늘 무슨 일이 있어도 나라만을 생각하라. 우매한 백성들은 모두 너의 어깨에 달렸다. 나라를 버린 순간, 군주들이 어떤 식으로 망가지는지 잘 알았기에 연혼은 필사적으로 황제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내가 정말 지키고자 하는 게 없다면, 이 자리 또한 의미가 없는 것인데.

    천금궁을 나오기 전 새벽까지 연혼은 텅 빈 침전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이가 떠난 자리는 차다 못해 시렸다. 손도 대지 못하고, 그저 서서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총관 태감과 태후가 먹지도, 자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아이의 빈자리만 보는 황제가 걱정되어 다가왔지만 그의 서슬 퍼런 노기에 한 마디도 걸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모든 걸 알려줄 것을. 일부만 알려줘서 괜히 아이의 애만 태웠다. 아니, 그냥 아이가 형제들에게 애정을 갖기 전에 형제들을 다 죽였어야 했다. 비빈들도 내쫓고, 오로지 아이만을 위해서….

    과거에 아이들을 위해 했던 행동들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자, 황제는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거듭해서 생각했다.

    힘줄을 잘라버릴까? 성대를 자를까? 분명히 아이가 경혜를 죽인 것일 텐데, 손도 못 쓰게 해버릴까?

    그러면 아이는 나에게 아바마마라고 불러주지도 않을 테고, 날 안아주지도 못할 거고…. 무엇보다 그 예쁜 얼굴로 환하게 웃어주지 않을 것이다. 진실을 알게 되면 넌 날 버릴까.

    하지만 아이는 끝내 자신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아이의 눈에 비친 자신은 본질적으로 아이를 사랑하는 아비였고, 연인이었으니까. 아이는 마음이 약했다. 그래서 하얀 강아지를 주워다 ‘설’이란 이름을 붙이고 키운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비 대신이었겠지. 그런 주제에, 날 버릴 수 있을까. 황제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화려한 천장을 보았다.

    아이가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었다. 아이가 없었던 그 과거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시간의 틈새마다 아이가 있었다. 4살의 강, 5살의 강…. 자신의 손을 잡고 회랑을 아장아장 걷던 아이가 어느새 훌쩍 커서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겨우 나흘인데. 정말 나도 제대로 미쳤구나. 황제는 연혼으로 돌아와 얼굴을 감싸며 소리 없이 웃었다.

    새벽과 아침, 하루 중 가장 중요한 그 간극에서 황제는 숨을 조금씩 내쉬었다. 눈을 감고, 느리게 떴을 때 그는 느리게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쩔 수 없군. 역시 나가는 게 답인가.”

    자신의 백성들은 인간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민첩하고, 예민하고,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네 발을 가진 백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서한 같은 간접적인 명령은 따르지 않았다.

    오로지 직접적인 명령만을 들었다. 그러려면 자신이 이 금궁을 벗어나야 했다. 제사를 올려, 필요한 전쟁이 아니면 금궁을 벗어나지 못했던 자신의 의지로 벗어나는 건 처음이었다.

    정말 아가, 이 아비가 너 때문에 별걸 다 하는구나.

    황제는 자신의 인생 전부를 옭아맸던 금궁을 처음으로, 자신의 발로 뛰쳐나왔다. 본체로 금궁 앞 은우문에 서자 백성들이 황제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폐하가, 폐하가 나오셨다!”

    황제는 금궁을 벗어나서 안 되는 몸. 그가 금안을 번뜩이며 비가 내리는 정면을 뚫어져라 보았다. 백성들이 절규했다. 한창 무르익은 봄에 난데없는 비바람이, 눈보라가 몰아쳤다. 백성들은 추위에 오들오들 떨었다. 황제는 그들을 무감정한 눈으로 보고, 다리에 힘을 줘 뛰었다.

    그의 몸이 훌쩍 백성들을 뛰어넘었다. 백성들이 제발 가지 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어떤 아이는 갑자기 내린 눈에 놀란 듯 자지러지게 소리쳤다. 어느새 궁에서 뛰쳐나온 우도독이 황제와 나란히 뛰었다. 그리고 뒤에는 말을 탄 친군들과 기병들이 한가득이었다. 아마 현이의 짓일 거다. 자신이 떠난 사이, 현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니 이제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결정은 연현에게 있었다.

    “폐하, 폐하!”

    인간은 네발 달린 짐승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같은 네발 달린 짐승이라고 해도 말 따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나라를 대대로 이어온 늑대들은 이틀 밤낮을 뛰어도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 바꿔 타야 하는 말과는 달랐다. 더군다나 황제의 발걸음을 막기 위해 눈이 쏟아지는 때라면, 그들은 자신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황제와 친군, 기병들과의 거리는 갈수록 늘어났다. 눈은 더 쌓였다. 봄 사이 싹 튼 새싹들이 때아닌 추위에 얼어 죽었다. 이제 그다음은 가축들이다. 황제는 곁눈질로 죽어가는 생명들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그리고 하늘을 보며 산을 올랐다. 나라를 버린 황제에게 직접적으로 해가 오지 않았다. 하늘은 지금 경고를 내리고 있었다. 너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정말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진, 아이를 찾을 작정이었다.

    황제의 네 발이 경쾌하게 눈을 밟고 올라갔다.

    달이 떴다. 봄에 내리는 설원에 풍만하게 차오른 달을 보며 황제는 고개를 젖히고, 산에 숨은 백성들을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사박사박 밟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황제를 중심으로 수십 마리의 늑대가 나타났다. 그들은 하늘의 아들인 연혼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연혼의 금안이 시퍼렇게 얼어붙은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빛났다.

    ‘내 아이가 아기를 임신하고 도망갔다. 진실의 산, 만백산으로. 아이를 잡으러 가야 한다. 나를 도와주겠나?’

    늑대들이 말없이 고개를 더 숙여 굴종했다. 그는 다시 이곳에서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앞으로 걸어갈 때마다 늑대들이 벗어나 그의 길을 터주었다. 아이의 향을 가장 잘 아는 황제가 눈에 뿌려진 체취를 찾아 코를 박았다. 단향을 써서 체취는 아주 흐릿했다. 여 소의가 나름대로 철저하게 알아보고 준비했겠지만, 모든 체취를 지울 수는 없었다.

    황제의 점막에 아이의 체취는 각인되었고, 몸에 핏줄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들은 피로 이어진 부자였다. 황제는 아들의 냄새를, 단 한 톨만이라도 뿌려져 있다면 찾을 수 있었다.

    아들의 체취를, 설원에서 거의 흩어진 냄새를 코로 찾아냈고 그의 고개가 올라갔다. 그의 금색 눈이 표창처럼 박힌 곳은 강이 도망쳤던 경로 그대로였다.

    황제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늑대들이 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산을 하나씩 넘을 때마다 늑대의 무리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차라리 계속 도망가렴.

    확실하게 잡아서,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해줄 테니까.

    황제는 달리면서 웃었다. 그의 후회는 그것이 전부였다.

    *

    허억, 헉….

    입에서 단내가 났다. 몸은 이미 힘이 쭉 빠져 말 등에 걸쳐진 상태나 다름없었다. 한쪽 팔이 축 처져 흔들거렸다. 어떻게든 상체를 일으키려 해봐도 유산한 몸으로 쉬지 않고 달려서 그런지, 지쳐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도 겨우 반쯤 뜬 상태로 앞만 보며 가다가, 결국 강은 비틀거리며 말에서 내려왔다.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 구역질을 했으나 나오는 건 없었다. 노란 액체와 타액만이 턱을 타고 줄줄 흘렀다.

    배가 너무 아팠다.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전신을 내달렸다. 흙과 마른 초목을 짚는 강의 손등에 힘이 들어갔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강은 배를 직격하는 통증에 신음 한 번 못 내고 기절했다.

    온몸이 무거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팔다리에 돌이 달린 듯한 무거움에 강은 고개를 틀며 신음했다. 감은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뚝뚝 흘러내렸다. 각질이 일어나고, 피가 맺힌 강의 마른 입술에서 희미한 고백이 새어나왔다.

    “아바마마….”

    울음이 걷잡을 수 없이 나왔다. 강은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몸을 뒤틀며 아버지를 향해 애원했다.

    “아파요…. 소자, 제발….”

    아파요. 이러지 마세요. 아이도 아프다고 우는데.

    “아….”

    아이는 없어졌는데. 이미 죽어버렸다. 강의 호흡이 가파르게 변했다. 처음에 아이가 유산 됐다고 들었을 때는 뭔가가 텅 빈 것처럼,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막상 조용한, 따스한 기운이 흐르는 이곳에서 황제와 황제의 아이를 생각하니 미안함과 동시에 개운함이 밀려들었다.

    아이가 사라졌다고 생각해서 느끼는 후련함에 대한 묘한 죄책감. 아주 꺼끌꺼끌하고 뒷맛이 쓴 감정에 강은 눈을 번쩍 떴다. 눈물이 반동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어?”

    내가 왜 울고 있지. 눈을 뜨자마자 전신을 짓누르는 아픔과 피곤함에 강은 얼굴을 감쌌다. 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아이를 잃은 대가는 정신적인 것보다 육체적으로 오는 게 더 컸다. 아이가 사라지면서 원한을 배 속에 새기고 갔는지 배의 살이 다 뜯긴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피를 흘린 건가. 강은 초점이 흐린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전형적인 산간 마을의 집이었다. 황제를 피해 달아나면서 보았던 집들과 흡사했다. 가운데에 열기를 주는 화로가 있었다. 흙벽과 나무로 지어 만들어 집 내부는 훈훈했고, 자연에서 맡을 수 있는 향이 물씬 풍겨 나왔다. 이불은 비단이 아니라 다 헤어진 면이다. 귀한 솜이 비죽비죽 나온 이불을 들어 올렸다가, 강은 목침을 베고 눈을 감았다. 일어나려 노력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잡힐까 봐 쉬지 못하고 달린 것이 몸에 큰 무리를 준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그사이에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죄책감도 몸이 너무 피곤하니 단숨에 잊혀졌다. 겨우 잡았던 정신을 놓고 잠을 청하는데,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치아 관리를 안 하는지, 누린내가 나는 숨소리가 가까워질 때 강은 눈을 번쩍 뜨고 그 사람의 손목을 잡았다.

    “아, 아파요!”

    “누구십니까?”

    황족인 걸 알아차리지 못하게, 경어를 사용했다. 손목을 잡힌 이는 치열이 삐죽삐죽한 소녀였다.

    “놔요! 구해줬더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강이 멍한 얼굴로 소녀를 보자, 소녀는 입을 서서히 다물더니 얼굴을 붉혔다. 먼지를 옷처럼 뒤집어썼던 얼굴이 눈을 뜨자 새롭게 보였다. 가위로 듬성듬성 자른 듯한 머리는 덥수룩했지만, 그것으로도 남자의 미모를 가릴 수 없었다. 소녀는 처음 보는 남자의 외모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 가득 홍조를 띄웠다.

    바둑알 같은 검은 눈이 반질반질하니 예뻤다. 꼭 밤에 보는 호수 같았다. 어두운데, 투명해서, 볼수록 빨려드는 검은 눈을 홀린 듯 보던 소녀는 남자가 몸을 일으키자 놀라서 손을 잡았다. 남자는 더 놀라서 화들짝 손을 뿌리쳤다.

    “미, 미안합니다. 그게….”

    “우리 아버지가 가지 말랬어요.”

    “예?”

    강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소녀는 강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놀란 강이 얼떨결에 이불로 감싼 상체를 뒤로 물렀다.

    “몸이 많이 안 좋다고 그랬어요. 의원까지 사 와서 진료받게 해줬어요. 몸이 많이 지친 상태래요.”

    돈을 주려고 강이 등을 더듬었지만 나온 게 없었다. 그리고 나서야 지홍왕이 어떻게 알고 봇짐을 화살로 쏴서 없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에 단향도 있었는데….

    멍하니 생각을 이어가다가, 강이 불현듯 목을 만져보았다. 나온 게 없었다.

    “모, 목걸이…. 목걸이 어디 갔는지 아십니까?”

    “목걸이요?”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지, 소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에 왔을 때부터 없었어요,”

    “…그게 무슨.”

    단향이 사라졌다. 그게 없으면, 분명히 어떻게든 추적이 들어올 텐데. 황제는 자신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금궁을 벗어나지 못할 테지만, 지홍왕도 자신의 체취를 알고 있으니….

    어서 빨리 이곳을 도망가야 했다. 이불을 걷어내고, 다 낡아빠진 신을 신던 강은 소매에서 돈을 꺼내 소녀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소녀가 받지 않고 손을 저었다.

    “돈은 이미 받았어요.”

    “예?”

    “어떤 남자가 당신을 여기에 맡기고 가면서….”

    소녀가 우물쭈물 손을 맞대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사이 강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갔다.

    “당신과 비슷한 체격의 남자가 당신을 여기에 데리고 왔어요. 돈을 주면서, 잠시만 봐 달라고…. 금방 돌아온다고 했어요.”

    이제야 하나씩 맞아들어 갔다. 강은 몸을 벌떡 일으켜, 소녀를 밀치고 달렸다.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는데, 왜 소녀를 믿고 있었을까.

    그런데 밖으로 나가니 온통 눈이었다.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소복하게 쌓여 앞으로 갈 수 없었다. 추위에 강한 짐승이 아니라면 꼼짝없이 얼어 죽게 생긴 날씨였다. 지금은 봄이었는데. 왜 눈이 온 거지? 아니, 내가 도대체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거지?

    “눈이 와서, 여기에 다들 발이 묶여서…. 그 남자도 지금 돌아오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선 쉬고 있어요. 그 남자는 당신의 친구라고 했어요.”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지요?”

    “하루요.”

    단 하루였지만, 늑대라면 그 거리를 돌파하고도 남았다. 강은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다. 이 변화를 알아채고 누군가 옷을 갈아입혀 준 듯 목화솜을 기워 만든 옷이었다. 강은 소녀를 두고 설원으로 뛰어들었다.

    황제가 나온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날씨가 봄에서 겨울로 단번에 바뀌었을 리가. 무엇보다 눈은 황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그는 겨울에 가장 빨리 달렸다. 그가 자신을 태우고 얼마나 빨리 설원을 달렸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안 돼요! 위험해요!”

    소녀가 강의 허리를 잡고 매달렸으나, 강은 소녀의 팔을 뿌리치고 설원으로 뛰어들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황제가 직접 금궁을 벗어나, 자신을 잡으러 왔다는 건….

    벌써부터 이가 딱딱 부딪혔다. 추위와 두려움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도 잃은 지금 이 상황에서 황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강은 필사적으로 눈을 파헤쳤다. 얼마나 집중해서 걸었는지 어느 순간 마을이 멀어져 있었다. 강은 어둠만이 살아 숨쉬는 산으로 향해 걸어갔다. 그곳이 정말 동남부 현, 만백산으로 향하는 길인지도 모르는 채.

    황제를 피해 달아나야 했다.

    이제 오기가 생겼다. 왜 내가 이렇게 아이와 설까지 잃어가면서, 이 고생을 하면서 만백산으로 가야 했는지 그 마음을 되새기며 강은 눈을 파헤치고 걷고, 또 걸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아바마마의 설원이었다. 그곳에선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행복하며 뛰어다녔는데. 과거의 황제는 설처럼 귀여운 늑대였다. 커다란 몸에 주먹만 한 황금색 눈을 가졌던, 귀여운 늑대. 그 늑대는 자신의 체취를 맡고, 우는 자신을 달래주고, 직접 물어서 어머니에게 데려다주었다.

    그 후로 황제는 눈이 오면 늑대로 변해서 자신을 태우고 설원을 직접 보여주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강은 어둠 속에 홀연히 서서, 서늘하게 얼어붙은 얼굴로 너무 조용한 세상을 보았다.

    다 죽어버렸다. 자신이 알던 이들은…. 내가 사랑했던 이들은 모두 죽어서, 사라지고, 황제와 어머니만이 남았다.

    그걸 정말 아바마마가 원한 것이냐고 하늘에게 물으러 가던 길이었다. 자신이 도망친 이유를 몇 번이나 다잡고, 머리와 마음에 강하게 새겨 넣던 강은 불현듯 뒤를 스치는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너무 조용했다. 모든 생명이 숨을 죽인 듯이, 곤두선 침묵에 강의 검은 눈이 커지고 두려움이 서렸다. 강은 주먹을 쥐고, 온몸과 숨결을 얼어붙게 만드는 설원을 향해 달렸다. 이 인위적인 침묵.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 땅의 진정한 군주인 황제가 직접 군림한 것이다.

    사사삭, 눈을 밟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강은 주먹을 쥐고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달렸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땀도 흐르지 않았다. 너무 추워서 온몸이 굳어가고 있었다.

    오기로 생각하던 다짐마저 생존의 본능에 잊혀졌다. 이젠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강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때, 저 멀리서 늑대의 숨소리가 들렸다. 숨이 찬 듯, 헐떡거리는 소리. 그것은 늑대와 정사를 맺을 때도 들었던 황제의 소리였다.

    싫어…!

    강은 더 속력을 냈다. 이제 달릴 수 없을 것이라고, 가슴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달렸는데도 살기 위해 힘을 줘서 달렸다. 저 멀리서 희끄무레한 빛이 보였다. 달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달리면 도망갈 수 있다. 강은 눈을 크게 뜨고 앞을 향해 온몸을 던졌지만, 그곳은 낭떠러지였다. 강의 몸이 속력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튕겨나갔다. 눈보다 싸늘한 감각이 몸으로 솟구쳤다.

    이대로 죽는 건가?

    “아!”

    그리고 떨어지려는 강의 옷깃을 늑대가 잡아 땅에 던졌다. 강의 몸이 설원에 나뒹굴었다. 강이 “흐으….” 우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사박사박 눈을 밟으며 다가오는 늑대에 의해 몸이 굳어 멈춰야 했다. 강은 눈에 얼굴을 처박은 채 오들오들 떨었다.

    “아, 아바마마….”

    늑대가 발을 들어 강의 상체를 눌렀다. 온몸에 실리는 체중에 강은 꼼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늑대는 너무 무거웠고, 컸으며, 강의 건장한 몸은 늑대에게 다 가려졌다.

    몸이 부딪힌 충격으로 강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강은 기침을 쿨럭이며 고개를 간신히 들어 앞을 보았다. 자신이 도망쳤던 길에서 수많은 늑대와 황제를 따르는 친군들이 보였다. 친군들은 늑대를 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강을 담담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정말 황제의 애첩으로 보는 듯, 약간의 책망도 있었다. 강은 그걸 참을 수 없어 고개를 수그리려다가, 누군가를 발견했다.

    진짜 친구였던 담영이 있었다. 담영은 타고 온 늑대에서 훌쩍 뛰어내려 강의 앞에 섰다.

    “마마.”

    강은 멍한 얼굴로 눈물을 뚝, 뚝 흘러내렸다. 차마 강에게 손을 댈 수 없었던 담영은 땅에 무릎을 대고서 강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싫어…. 이러지 마.”

    “죄송합니다.”

    담영이 강의 두 손목을 겹쳐 끈으로 단단하게 묶었다. 강이 담영의 옷깃을 잡았다.

    “너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날 살린 거야?”

    담영이 말없이 강을 보았다. 그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허탈해진 강이 버석하게 웃음을 흘렸다.

    늑대가 발을 들어올렸다. 담영이 강을 안아 늑대의 등에 앉혔다. 늑대가 어렸을 때처럼, 자신의 등에 타서 몸을 웅크리는 강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눈웃음을 살짝 지었다.

    *

    ‘불쌍하게도.’

    누구지? 누가 나에게 불쌍하다고 말하는 거야. 강은 열로 잠식된 의식을 일으키려 노력했다. 자신에게 동정하는 이에게,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불쌍하게도.’라고 속삭이며 이마와 목을 만져주는 손이 서늘하고 기분이 좋아,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더 만져줘. 강은 누군지도 모르는 손길에 이끌려 어리광을 부렸다.

    ‘도망치라 했더니 정말로 도망쳐? 괘씸하고 못된 것. 예쁜 것.’

    불쌍하다고 말하고 다정하게 다독여줄 땐 언제고, 이젠 자신을 타박한다. 강은 억울했다. 그럼 당신도 아버지랑 정사를 맺어보고, 강제로 애를 가져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심지어 그걸 오래전부터 약을 먹여 계획한 일이었다면서. 천명이라는 이름인지, 거짓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의사도 없이 안겨야 했는데 누가 가만히 있었을까.

    ‘무서워서….’

    그러나 강의 입에서 나온 답은 모호한 애원이었다. 강은 눈을 감은 채, 열병을 앓고서 자신을 만져주는 이를 향해 울음을 터트렸다.

    ‘무서워서…. 다….’

    ‘다?’

    ‘다 죽어서….’

    ‘누가 다 죽었지?’

    ‘…형제들, 설이… 비빈들…’

    ‘누가 죽였지?’

    강은 울음을 삼키며 열이 감도는 대답을 내놓았다.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강은 울면서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 다들 죽어야 했는지. 그 죽음을 하나하나, 어린 시절부터 목격했던 강은 스스로 소극적으로 변했다. 그래야 모두가 산다고 믿었다. 황제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다 떠나갔다. 황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네가 전쟁에 나가고 싶다고 빈 대가가 이것이라며 비참하게 죽은 진영왕의 시체까지 보여주었다.

    정말 나 때문에 죽은 거면, 난 어떡하지. 강은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렸다. 미안해서, 자신 때문에, 살리고자 노력했던 그 행위가 시발점이 된 거 같아 너무 미안했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야만 했던 설이가 눈에 선했다. 다른 이들은 말이라도 했지, 설은 말도 못 하고 자기만 좋아하다가 개죽음을 당했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느니, 빨리 죽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아윽….”

    강은 아래에서 연신 올라오는 통증에 허우적거렸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아래가 뻥 뚫린 듯한 이 익숙하고도 낯선 감각. 익숙해져서는 안 되는 감각에 강은 눈을 떠서, 자신의 위에 있는 사람을 보고 싶었다. 이 단단한 팔뚝과 시원하면서 달콤한 체취. 볼 필요도 없었다. 황제였다.

    “…아.”

    “아이를 다시 만드는 중이란다.”

    황제가 서럽게 우는 강의 얼굴을 닦아주며 속살거렸다. 다 알았구나. 아이를 잃어버린 것도. 그러나 황제는 채근하는 법이 없이, 강의 다리를 활짝 벌려 자신이 만든 태까지 자신의 것을 넣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래 봤자 들어오지 않는데. 이곳은 아이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강은 황제의 음모까지 바짝 붙은 둔부를 움직이려 했으나 남근에 깊숙이 박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강은 결국 황제의 목에 매달려 황제가 원하는 대로 흔들려야 했다.

    “핫, 아, 아읏, 아, 아바마마…. 아, 너무, 너무… 깊습니다, 아윽!”

    “불쌍하게도, 내 아가. 많이 아팠지?”

    그가 끊임없이 강을 달래며 허리를 난폭하게 움직였다. 연결된 그 부분은 아예 감각이 없었다. 그의 것이 들어온 배만이, 그의 움직임에 맞춰 볼록해지고 꺼지는 아릿함만이 남았다. 안이 질퍽한 걸 보니 처음은 아닌 듯했다. 그러면, 자신이 아파서 열병을 앓고 있을 때도 정사를 맺고 있었다는 건가.

    찔걱, 찔걱….

    “아으….”

    황제와 연결된 그 부분에서 야릇하게 젖은 소리가 들렸다. 호흡을 제대로 이어갈 수가 없다. 강은 다급하게 황제의 긴 목을 잡고 버텼다.

    “아바마마, 흐읏, 아…. 거, 거긴… 드, 들어오실 수가… 흑!”

    “뭐든 해봐야 아는 법이지. 안 그런가?”

    황제가 느긋하게 웃으며 강을 안았다. 땀이 맺힌 상체끼리 맞붙었다. 강은 고개를 젖히며 헐떡였다. 그가 너무 깊이 들어왔다. 정말 태까지 들어온 건가? 아예 확실하게 아이를 갖게 해줄 생각이었는지, 그가 남근을 깊숙이 넣은 채 얕고 빠르게 움직였다. 착, 착하고 살과 살이 맞붙는 소리가 연신 잦게 울려 퍼진다.

    “아파….”

    아이를 잃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아이를 갖자고 달려드는 그가 원망스러워 눈물을 뚝뚝 흘렸다. 황제는 눈을 반쯤 뜬 채 자신을 원망 가득 담아 보는 아들을 보며 맑게 웃었다.

    “벌이라고 생각하거라.”

    “…벌이라뇨.”

    황제가 강의 안에 사정하며 신음했다. 느릿하게 퍼져가는 정액에 강이 눈을 감고 입술을 달싹였다. 황제가 남근을 빼내었다. 황제가 침상에 늘어진 강을 안아 강제로 창가로 데려갔다.

    시린 기운이 가장 먼저 강의 뺨을 두들겼다. 자꾸만 으스러져가는 의식을 다잡아 강은 앞을 보았다.

    “눈이….”

    “그대 때문이지.”

    너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목소리는 하염없이 달달했다. 강이 움찔, 하고 놀라는 사이 황제가 창가를 잡게 하고 강의 다리를 벌렸다. 다물리지 못한, 잘 익은 입구를 타고 정액이 주륵 흘렀다. 황제는 강의 몸이 비틀거리자, 두 손으로 허리를 꽉 잡으며 고정시켰다. 그리고 단숨에 발기한 남근을 밀어 넣었다. 남근이 한 번에 배를 다 채웠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압박감에 강이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아흑!”

    갑자기 예고도 없이 들어온 남근에 강이 배를 감쌌다.

    “아파….”

    “그래도 그대는 벌을 받아야 해. 나라를 이리 만들고, 천자를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물론, 벌이 하나는 아니지만.”

    황제는 강의 머리채를 잡아 누른 후, 힘을 허리에 실어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남근을 박아넣었다. 내벽이 한계까지 벌어지며 황제를 안까지 받아들였다. 강의 둔부가 황제의 치골과 단단한 근육과 만나며 빨갛게 익어갔다.

    “흐윽, 아아…. 아응, 아!”

    아파야 했는데, 뒤에서 그가 들어오니 더 깊숙하게 잘 느껴져 다리가 움찔 떨렸다. 허벅지 안이 덜덜 떨렸다. 열병으로 앓는 몸이 쾌감으로 뜨거워졌다. 내벽도 덩달아 흥분해서 아비의 남근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아기를 만드는 건 좋은 일인데, 왜 내 아가는 도망을 갔을까. 아비는 그게 궁금했지.”

    “그, 그런 식으로…. 흐읏, 싫어요! 아바마마, 싫어요…!”

    그런 식으로, 아가라고 부르지 말라며 강이 서글프게 울었지만, 황제가 치골이 세게 닿을 정도로 남근을 내벽에 짓누르자 강은 입만 벙긋거렸다. 숨이 남근에 틀어막힌 기분이었다. 나무를 잡는 강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분홍빛 손톱이 하얗게 변했다.

    “섰구나.”

    황제가 웃음을 터트리며 강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강이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말랑한 고환을 쓸어 만져주자 강이 높아진 목소리로 울었다. 간간이 쉰 소리가 섞였지만, 분명히 강은 좋아서 울고 있었다.

    “아, 아응….”

    끝소리가 달콤하다. 황제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강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노곤해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리도 아비를 좋아하면서, 왜 아비를 두고 갔느냐? 그리도 무서웠느냐? 무엇이? 다 죽어버린 것이? 어차피 너에게 필요도 없는 존재들이 사라진 것인데…. 아, 설이는 빼두지. 그 아이는 천자를 닮았으니.”

    강은 그의 남근이 내벽을 짓누르고, 주름마저 없앨 정도로 거칠게 움직이는 도중에도 묻고 싶었다. 정마 아바마마가 그들을 죽이신 건가요? 연주 형님의 말이 사실이었나요?

    그러나 그의 입으로 진실을 듣게 될까 봐 무서워 강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황제는 강이 겁을 먹고 움츠러든 것을 입술로 감지하고서, 땀에 젖은 목에 입술은 댄 채 웃었다. 그의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척추를 타고 미끄러졌다.

    “돌아가면 제사를 올리겠다. 그대가 그렇게 알고 싶어하는, 모든 진실을 알려주지.”

    그가 귀두가 걸쳐질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빼냈다가, 강이 숨도 못 쉬고 바르작거릴 만큼 세게 박아넣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천명을 듣게 해주겠다.”

    그 후로도 정사는 계속 되었다. 밤부터 아침까지. 강은 의식을 잃고, 깨길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그곳이 황궁으로 가는 근처 마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황제는 환궁을 하려다, 강의 열이 심해지자 가장 가까운 마을에 들러 강을 쉬게 한 것이다.

    그리고 참지 못하고 강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친군과 따라온 내관에게 말했다. 군관들과 같은 훈련을 받은 덕분에 지친 기색 없이 내관이 고개를 숙이며 천명을 받았다. 아이를 잃은 죄로 다시 아이가 생기는 벌을 받아야 했고, 더불어 강은 정신이 완전히 깰 때까지 푹 쉬어야 했다. 마치 벌을 주기 전의 전초 같다고 생각하며, 강은 다시 잠이 들었다.

    재차 눈을 떴을 땐, 눈이 조금 녹아있었다. 그와 정사를 맺으면서 볼 때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엉금엉금 기어가 창가를 확인하던 강은 들이닥친 황제와 친군들을 보고 어깨를 굳혔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원래 비빈이 도망을 가면, 능지처참이지. 그건 용서할 수 없는 죄야.”

    “…죽이실 겁니까?”

    강이 창가에 달라붙어 쉰 목소리로 물었다. 강의 눈은 의연했다. 강간도 마음껏 당했고, 아이도 유산했고, 다시 아이가 생기는 벌까지 받은 마당에 무엇이 두려울까. 강은 황제의 남근이 몇 번이나 오갔던 아릿한 배를 만지며 그를 보았다.

    “천자가? 그대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황제가 웃기지도 않는 농을 듣는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화려한 붉은 비단으로 만든 평복을 입고, 느슨하게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다. 저렇게 있으니, 자신의 아비가 아니라 같이 왕부에서 자란 형님 같았다. 아름답고 우아한 얼굴로 부드럽게 웃은 황제는 걸음을 천천히 옮겨 강에게 다가갔다. 강은 구석에 꽉 틀어박혀, 비 맞은 강아지처럼 미세하게 떨었다.

    떨고 싶지 않아도 황제와 자신을 압박하기 위해 온 친군들, 담영까지 보고 나면 몸이 알아서 떨렸다.

    어린 시절의 강을 겹쳐 생각하던 황제가 싱긋 웃었다. 황제는 손을 천천히 움직여 추위에 거칠어진 강의 뺨을 매만졌다.

    “그렇게 예뻤는데. 아비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정말 많이 컸구나. 다 컸어.”

    다정한 말투와 따사로운 눈빛에, 감미로운 손짓인데 왜 이리 무섭고 떨리는 건지. 강은 오들오들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려움에 오금이 저렸다. 황제는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을 따라 바닥에 무릎을 대었다. 그리고 강의 뺨을 만지던 손을 덥석 내려 어여쁜 발목을 꽉 잡았다. 강의 눈이 커졌다.

    “다시 어렸을 적으로 돌아가자, 강아.”

    황제가 발목의 관절 부분을 정확히 만졌다. 솜털이 곤두섰다. 황제가 전에 말했던 ‘벌’이 생각났다. 아직 벌이 남았다고 말했다. 그 벌이 설마, 다리를 자르는 건가? 눈을 빠르게 돌려 친군들을 보았지만 손에 다리를 자르는 형구를 든 이는 없었다.

    “…그럴 수 없어요. 소자는 다 컸습니다.”

    강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애써 담담한 척하려 노력했으나 황제가 웃는 바람에 그것도 무의미해졌다.

    “누가 크지 말라 했든?”

    황제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강의 머리를 만지며 속삭였다.

    “짧은 머리도 예쁘구나.”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강이 지금보다 순종적으로 행동하던, 어린 시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만 사는 아이로. 강은 싫었다.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소매를 잡으며 매달렸다.

    “…아바마마, 그러지 마세요.”

    “어렸을 적에도 머리는 짧았지. 어렸으니까. 그래, 다시 어릴 때로 돌아가는 거야. 그대는 천자가 안고 다니고. 그때가 그대도 좋았잖아.”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친군들이 다가왔다. 강이 도망가려 몸을 일으켰으나 때는 늦었다. 담영이 다가와 강의 입에 강제로 재갈을 물렸다. 누군가는 강의 손목을 잡아 뒤에 고정시켰고, 손톱이 파고들어 상처가 날까 봐 두꺼운 천까지 잡게 했다.

    “으읍! 읍!”

    강이 재갈을 꽉 문 채 눈물을 펑펑 쏟으며 황제에게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황제가 입고 있던 장의를 벗었다. 그가 강의 발목을 잡아 올렸다. 눈물이 맺히고, 일그러진 강의 얼굴을 보던 황제가 어여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리를 자르진 않으마. 이렇게 어여쁘고 사랑스러운데 아비가 어찌 다리를 자르겠느냐?”

    우드드드득.

    황제의 엄청난 악력에 발목이 뚝, 소리 내며 부러졌다. 뼈가 서로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은 발목에서 시작되는,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흰자위에 핏줄이 설 만큼 재갈을 물었다. 턱을 기점으로 온몸이 떨렸다. 식은땀에 흠뻑 젖었다. 차라리 기절하면 좋을 텐데, 얼마나 아픈지 기절도 쉽지 않았다.

    “후읍, 흐, 흐으읍, 읍!”

    부러진 왼쪽 발목을 황제가 서슴없이 바닥에 내려놓았다. 둔탁한 소리가 귀를 느리게 때렸다. 다시 몸을 타고 흐르는 통증에 강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 아팠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턱에도 힘이 바짝 들어가 덜덜 떨렸다.

    “그걸 알았어야지.”

    황제가 손을 뻗어 오른쪽 발목을 잡았다. 강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너무 아픈데, 황제가 발목을 세게 잡아 올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천자는 그대가 다시 땅을 밟지 못하게 할 거야. 그러면 도망은 꿈도 못 꾸겠지. 평생, 아비의 품에서 사는 거야.”

    관절이 갈리는, 우드드드득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 뒤로 뚝,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강은 참지 못하고 혼절했다.

    *

    황제가 나라보다 희비를 우선하여 금궁을 비운 지 엿새가 지났다. 꽃이 한창 알록달록하게 지상을 물들이고, 초목은 녹음으로 우거지고, 짐승들은 먹이를 찾아 뛰어다녀야 할 땅이 눈으로 뒤덮여 삶이 꺼져갔다. 차례대로 생을 잃어가고 있었다. 모든 춘추나 나라에서 그렇듯 가장 약한 생명체부터 숨결이 엷어졌다. 저승에서 올라와 어린 생명의 기운을 빨아먹는다는 악귀가 연국 곳곳에 퍼졌다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이 틈을 타 타국에서 흘러들어온 무당들이 악귀를 쫓아준다는 이름하에 돈을 뜯어먹고 도망갔다.

    돈도 잃고, 식량도 잃고, 가족마저 엿새 만에 잃게 된 백성들이 금궁 앞까지 도착했다. 그들은 황제를 당장 돌려보내라는 말을 외치며 돌을 던졌다. 은우문을 지키는 금위군들이 창으로 백성들을 위협했으나, 그 앞에 백성들을 이끌었던 태학관 관생, 대신, 그리고 관생들을 이끄는 정3품의 태학상, 정2품의 박사 등이 합류하니 그들도 할 말을 잃고 창을 거두었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황제의 폐위를 주장하고 있었다.

    “나라를 버린 군주는 천제의 자격이 없소! 오륜에도 그리 나와 있는데, 어찌 나라를 버린 천제가 다시 돌아와 천제 노릇을 한단 말이오? 신성한 제사를 통해 다시 군주를 정해야 하오!”

    그들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땅에서 하늘로 제사를 드려, 하늘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신력을 이어받은 대신관만 가능했다. 그 대신관은 딱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만백산에, 다른 한 명은 금궁에 있었다. 만백산에 있는 대신관은 비교적 어린 나이로, 금궁에 있는 대신관이 수명을 다하면 금궁으로 가는 구조였다. 그리고 다시 제사를 통해 신관을 뽑았다. 유일하게 연국에서만 시행되는 제사로, 백성들은 자신의 나라가 하늘의 지지를 받는다는 자부심과 긍지가 있었다. 그 긍지의 결정체는 군주였는데, 그가 자신들을 버렸으니 배신감이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고작 아들 때문에. 비 때문에, 나라를 등지고 직접 찾으러 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은 황제가 오면 가만두지 않을 심산으로 은우문을 지켰다. 물론 황제가 오죽했으면 찾으러 갔겠냐는 민심도 있었으나, 은우문으로 돌진하는 그들의 행태가 거치니 달랠 방도가 딱히 없었다.

    미심이 하루가 다르게 들끓는 사이, 황제는 멈추지 않고 금궁으로 향했다. 하늘에서 내리던 눈이 멈추었지만, 공기는 아직도 한겨울처럼 응결되어 있다. 하늘이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신관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신력을 가지고 있던 황제는 품에 안은 강을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짧아져, 얼굴을 보기 위해 더 이상 손으로 머리카락을 거두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내려만 보아도 어여쁜 연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강은 두 발목 관절이 정확하게 뚝 부러져 부목을 대고 있는 상태였다. 부목을 대었지만 부기는 심각했고, 강은 조금만 움직여도 고통에 신음했다. 소피와 조반, 석반 같은 일상도 황제의 손을 통해 할 수 있었다. 정말 황제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어설프고 서툴렀던 그때의 강이 되어버렸다.

    황제의 마차가 저잣거리로 들어서자 백성들의 아우성이 들이닥쳤다. 그 소리에 몽롱한 의식에 빠져있던 강이 눈을 떴다. 작은 휘장으로 가리긴 했지만 바깥에서 사람들이 “물러나라! 물러나라!” 하고 외치는 게 들리고 보였다. 다들 몹시 화가 나 있었다. 늘 자신에게 “우리 전하.” 하며 좋아해 주던 백성들이 한순간에 등을 돌린 모습을 본 강은 생각보다 거친 그들의 반응에 몸을 움찔했다. 저런 날 선 눈빛은 처음이었다. 정말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는 게 사람들을 차단한 마차에서도 느껴지다니.

    황제는 겁을 먹고 움츠러들어 무의식적으로 품을 파고드는, 다람쥐 같은 아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강은 이 사태를 만들고도 도리어 태연한 황제의 반응에 허탈했다. 황제는 자신에게 반박도 못 하고 물끄러미 보고만 있는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마가 뜨거웠다.

    “열이 나는구나.”

    “…아프니까요.”

    쉬고, 갈라진 목소리가 퉁명스럽다. 황제는 그런 강이 귀엽다는 듯 뺨을 매만졌다. 새삼스레 느끼지만, 그는 정말 자신의 일이 아니면 인간적인 반응을 하지 않는 듯했다. 강은 그가 물고 빨았던 뺨, 목, 쇄골을 다시 만져 흔적을 남기는 그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소자가 없었을 때는 잘 계셨는지요?”

    황제가 금세 침울해졌다. 화사하고 반짝이던 그의 외모가 시들어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물기가 차오른 눈에 강은 하고 싶었던 말을 다 잊어버렸다.

    “아니. 단 하루도 자지 못했다.”

    그가 눈을 감았다.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던 그가 강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댔다. 강은 자신에게 안기고 싶어 안달이 난 황제를 보며 멀거니 마차 천장을 보았다. 황궁에서 늘상 보던 침전의 천장 무늬와 흡사했다. 하늘에 앉아있는 범 같은 은색 늑대의 형형한 금안이 강을 짓누르고 있었다. 황제와 똑같은 눈이었다.

    “그대가 없는 하루가 너무 길었어.”

    황제의 목소리에 물기가 습하게 배어있다. 강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와 동침해야 했고, 아이까지 가졌고, 잃었고, 다리도 부러져 아무것도 못 하는데 그가 더 아파하고 있었다. 금궁으로 향하는 이틀 내내, 열병으로 앓은 건 자신이었다. 소피조차 보러 가지 못해 그가 뒤에서 안아 남근을 잡아줘야만 했는데. 그런 수치까지 감당한 것도 강이었는데, 왜 그가 아파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강은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대는 천자가 없어도 행복했는가?”

    그걸 행복이라 말해야 할까. 황제가 언제 쫓아올지 몰라 한숨도 자지 못하고 달리기만 했다. 먹을 수 있는 음식도 한정적이었다. 혹여나 사람들이 눈치를 챌까 봐 육포로 굶주림을 달랬다. 정신적 충격에 유산까지 한 몸을 혹사시킨 것도 모자라 굶주리기까지 했으니 쓰러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간 동안 버틴 몸이 대단했다.

    행복과는 거리가 먼 촉박하고 아슬아슬한 긴장감으로 이루어진 짧은 도주였지만, 강은 왠지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고 싶어 강은 차가운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황제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예. 행복했습니다. 처음으로 자유를 맛보니 좋더군요.”

    “…천자가 없어도 행복했다고?”

    황제가 유려한 발음으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되물었다. 강은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관의 나이가 되도록 소자 손으로 무엇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해봤으니 좋았습니다. 그 자체로 행복했습니다. 아바마마가 걱정하시는 대로 소자는 그리 작지도 않았고, 약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걸 알고 나니… 더욱 이런 상황이 씁쓸할 뿐입니다.”

    황제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금안이 강의 이목구비, 상체, 그리고 유실이 달린 가슴과 아이가 사라진 배, 하체까지 골고루 훑었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강의 전신을 느리고, 집중적으로 보던 그가 픽 웃었다. 상쾌하기까지 한 미소에 강의 얼굴이 반대로 굳어졌다. 설마 상처 하나도 못 낸 건가?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자, 그가 검지로 슬슬 입술을 빼냈다. 그리고 예쁘다는 듯, 입술에 꾹 자신의 입술을 누르고 비비며 속삭였다.

    “역시 부러뜨리길 잘했어.”

    몸이 공포로 굳어갔다. 그는 강이 다리가 부러진 고통이 엄습해, 덜덜 떠는 걸 알면서도 우아하게 웃었다.

    “그대가 행복하다면 되었다. 비록 천자는 그대가 없는 곳에서 슬펐지만, 다시 그대를 찾아왔으니. 이제 남은 건, 남은 자들의 입을 다물리는 것이겠군.”

    지나치게 뻔뻔하고 태연자약한 반응에 강이 한숨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잊은 게 있었다. 자신을 이리 만든 것에 대해 적어도 사과는 해야 했는데, 아예 잘못을 모르는 것처럼 강의 몸을 구석구석 만졌다.

    “…소자한테 미안하지 않으십니까?”

    “왜 미안하지? 잘못은 잘못이란다.”

    황제가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그는 일부러 힘을 줘서 강을 세게 안았다. 부목을 대고 있어도, 강제로 부러졌던 발목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천자는 “쉬이, 괜찮다.”라고 강에게 속삭이며 경직된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황제가 다리가 부러져도 안을 탐하고 육신을 맛봤던 덕분에 강의 몸은 얼룩덜룩했다. 심지어 아래는 정액이 흥건했다. 황제가 안에 덧대어 입는 옷도 입히지 않아 정액이 새지 않게 조이고 있어야 했다.

    정말 미안함이 하나도 없는 행동에 강은 황제의 상체를 밀어내려 노력했으나, 황제가 발목을 잡는 바람에 포기했다. 자각되는 통증에 강이 황제의 등을 부여잡고 버텼다. 기댈 곳이 이곳밖에 없다는 게 슬펐고, 또 거의 이십 년 동안 머물렀던 품이라 편해서 좋았다. 상반되는 감정에서 강이 눈을 질끈 감고 버티는 동안, 황제는 바깥을 보았다. 백성들의 눈은 흉흉하고, 손에 든 농기구는 험악했으며, 목소리는 높고 거칠었다.

    정말 자신의 폐위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었다. 황제는 무심한 눈으로 아이를 보았다. 분지른 발목을 잡고 만지자, 너무 아파서 강이 흐느끼고 있었다. 생리적인 의미보다 마음의 상처로 인한 눈물 같았지만, 황제는 그저 담담히 보았다.

    “아가.”

    황제가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에 강이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강제로 창밖을 보게 했다. 그의 손이 강압적으로 뒷목을 눌렀다.

    “아, 아픕니다.”

    강이 바르작거리며 눈물을 뚝, 흘리자 황제가 눈물을 받아먹었다. 우는 것도 예뻐서 큰일이었다. 강의 눈물을 탐하던 황제가 창밖을 검지로 가볍게 건드리며 속삭였다.

    “아가가 한 짓을 보렴.”

    “배, 백성들이 들고일어난 게 왜 소자 탓입니까? 원인은 아바마마이십니다.”

    황제가 싱긋 웃었다.

    “천명이 진실이라면 천자의 탓이 아니지.”

    “그럼 하늘의 탓입니까?”

    강이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삐딱하게 나온 강을 보며 황제가 놀란 듯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언제 이렇게 거칠어졌지?”

    황제가 강을 보더니 짧게 침음했다.

    “반항이라. 어릴 때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더니…. 이제 와서 반항기가 온 것이야?”

    “천명의 의도를 알았고, 그 과정에서 형제들이 저 때문에 죽었다면 소자가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직설적이고 날이 곤두선 강의 되물음에 황제가 눈을 감고 웃었다. 강의 반항도 마음껏 음미하는 태도였다. 흠집이라곤 하나도 안 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 속만 답답해져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라서 아예 버릴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만약 다른 형제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즉시 사형인 걸 떠나서, 가족들도 다 사형이었다. 황제의 말대로 그가 엄청난 아량을 베푼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의도 자체가 불순했다. 자신을 아들로 보는 게 아니었다는 뜻이었으니까. 자신을 사랑하는 건 맞는데, 그 의미가 다르게 전해졌고 결과 또한 이런 식이니 강은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그를 완전히 버리기엔 자신도 그를 사랑하고, 그를 받아들이기엔 그가 아버지라는 사실이 돌부리처럼 튀어나와 걸린다.

    어릴 때처럼 그는 어려웠다. 항상 어렵고 풀리지 않는 난제 같았다.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착한 아비요, 타인의 눈으로 보면 아들 하나를 위해 가족을 다 죽인 폭군이었다.

    차츰 눈을 뜬 황제는 강의 떨리는 동공을 보고 진하게 웃었다. 자신만만한 황제의 미소에 강이 입술을 물었다. 은우문이 열리고, 대신들도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친군들은 위험천만하게 다가오는 백성들에게 도를 겨누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황제는 여유롭게 턱을 가리며 웃었다.

    “그대는 나를 버릴 수 없어.”

    천자가 아니라 나라는 칭호를 쓰는 황제에게서 눈을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너무 강렬했다. 한 가지 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만, 이라는 말도 거기에 파묻혔다.

    “그렇게 진실이 알고 싶었다면 아비에게 묻지 그랬어? 다 알려줬을 텐데.”

    “진심이십니까?”

    “그래.”

    황제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이어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너에게 형제 따위를 주는 게 아니었어. 이렇게 애먹일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마차는 계속 달려 황궁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화비전으로 향했다. 대전에서 제사를 준비하라는 황제의 전언에 대신들, 관생들이 모였다. 황제의 마차를 뒤따라 폐위를 종용하던 자들이 의기양양하게 들어왔다. 나라가 이렇게까지 기울었으니 황제의 폐위는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황제의 여유로운 태도에 비해 친군들은 눈에 분노를 물들이고 도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황제는 말끝을 흐리더니 강의 뺨을 매만지며 웃었다.

    “나머지는 천명으로 들으려무나. 그게 너에게도 낫겠지. 어차피 내 입으로 듣는다면 거짓이라 생각할 테니.”

    오래 달리던 마차가 드디어 화비전에 멈췄다. 황제는 문이 열릴 때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강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둠이 스민 마차에서 강도 지치고 피곤한 얼굴로 황제를 마주했다. 다리가 지독하게 아팠다. 퉁퉁 부은 다리는 아마 나아도 제대로 못 걸을 듯싶었다.

    과연 황제가 낫게는 해줄까. 강은 아픈 몸을 어떻게든 일으키려 했으나, 황제가 두 팔로 강을 단단하게 안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황제가 다리에 부목을 댄 강을 아이처럼 안고 땅에 발을 디디자, 우습게도 사방에서 끓던 분노가 식었다. 황제는 추위에 강이 떨자 덮어주었던 장의를 더 끌어올려 턱까지 싸주었다. 황제의 금안은 천천히 화비전 앞을 메운 사람들을 훑었다.

    대신들이 좌우로 갈라져 있다. 지홍왕은 황제를 보자마자 이미 엎드리고 있었다. 태후도 별다를 바 없었다. 저쪽은 자신의 폐위를 반대하는 쪽,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은 폐위를 찬성하는 쪽이었다.

    대충 무리의 수가 비슷해 보였다. 황제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친군과 내군의 호위를 받으며 강을 안고 대전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대신들은 추운 눈이 소복하게 쌓인 곳에 무릎을 대고 황제를 향해 예의를 표했다.

    “고귀한 천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하지만 인사하는 쪽은 폐위를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계단 끝에서 인사를 올리던 지홍왕이 황제의 걸음이 멈추자 고개를 들었다. 황제와 눈이 마주친 지홍왕의 눈이 담담하다. 동생을 보며 싱긋 웃어준 황제가 강을 편하게 안고서 대전으로 들어섰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수십 개의 금색 기둥에 늑대, 용, 우담화가 새겨진 홍, 백, 금의 휘장이 서로 겹쳐서 걸려 있었다. 장수와 명예,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몇십 년을 넘게 보아온 장식들이었다.

    장식들을 한 걸음씩 지나쳐 걷다 보니 준비된 제단이 보였다. 그 앞에 대신관과 신관 여섯 명이 백의를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죽을 날을 앞둔 대신관은 오늘도 무심한 얼굴로 황제를 보고 엎드렸다. 황제는 그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하고, 고개를 숙여 강을 보았다. 강은 아비의 품에 아이처럼 안겨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천명을 듣게 해준다는데 왜 그리 떨지?”

    “…귀비는 어디 있습니까?”

    비빈 중 귀비가 보이지 않아 강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황제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불에 타 죽었다. 거짓으로 천자를 능멸했으니 응당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하는 법.”

    “예?”

    강이 무슨 말이냐는 식으로 멍청하게 대답하자, 황제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그대를 하늘로 돌려보내기 위해 연호인(경혜왕)과 귀비는 작당을 하고, 불에 타 죽은 척했다. 가짜 시체를 만들어 천자의 눈을 속이고, 막대한 피해까지 입혔으니 거기에 찬동한 이들은 모두 살아있는 채로 태워 죽였다.”

    황제의 잔인함을 알고 있었지만, 한때 자신의 아이를 낳았던 여인에게도 가차가 없는 처사에 몸이 떨렸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어머니는요? 서, 설마 소자의 어머니도?”

    황제는 은은하게 웃었다.

    “그대의 어미는 건드리지 않았어. 그대의 외가도 멀쩡해. 다만, 궁에 감금되어 있을 뿐이다.”

    왜 건들지 않았냐고, 강은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황제는 늘 그렇듯 자신의 영역에 한해서만 다정하고 온화했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가슴이 떨리게 하는 그의 사랑에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아버지가 자신에게 미쳐있었다. 미치지 않고서 이럴 수는 없었다. 황제는 자신을 보지 못하면서도, 손으로 자신의 옷자락을 꽉 잡고 있는 모순적인 태도에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는 대신관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제사를 진행하라.”

    대신관이 주름에 가려진 눈을 애써 또렷하게 뜨며 황제를 보았다.

    “폐하의 뜻은 하늘의 뜻. 소신의 미천하고 늙은 육신에 신을 받들겠습니다.”

    제사는 보통 하늘에 제단을 쌓아 장작을 넣고 답을 기다리는 방식이었다. 불이 피어오르면 인정, 불이 피어오르지 않으면 부정이었다. 구체적인 대답은 신관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직접 신을 받아들이는 건 대신관만 가능한 일이었다. 신력이 넘쳐나지 않으면 신을 받아들이다가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되도록 나라의 운이 달린 일이 아니라면 신을 직접 받아들이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대신관은 신의 목소리를 유일하게 바로 전해줄 수 있는 인재였다.

    “고개를 들고, 앞을 보도록.”

    황제가 강을 자신의 다리 사이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속삭였다. 다리가 부러져 설 수도, 편하게 앉을 수도 없는 강은 엉거주춤 장의를 잡고 앉아 앞을 보았다. 대신들의 시선이 너무 따가웠다. 자신을 마치 아비를 유혹한 사람으로 보는 듯한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다. 혼례식 때와 너무나 다른 느낌의 시선에 강은 덜덜 떨며 바닥을 보았다.

    “괜찮다.”

    그런 강을 유심히 보던 황제가 뒤에서 강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파리한 뺨에 입까지 맞추며, 고의적으로 강을 죽어라 노려보는 대신들을 같이 노려보며 말했다.

    “이 아비가 있지 않으냐? 그 누구도 강이 너를 건드릴 수 없다.”

    다리를 두 쪽 다 분질러서 도망치지 못하게 한 아버지가 다정하게 애정을 담아 속살거렸다. 고작 그것뿐인데, 뒤에서 편하게 안아주는 아늑한 품에 강은 힘을 풀며 기대었다. 그래도 이 험한 궁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건, 아버지밖에 없었다. 강이 침울한 얼굴로 기댄 채 앞을 보자, 그걸 곁눈질로 살피던 황제가 피식 웃었다.

    대신관이 춤을 췄다. 신무였다. 신을 받아들이는 의식이 거행될 때마다 대전 안이 열기로 달아올랐다. 신이 온다는 증거였다. 황제의 폐위와 진실을 앞둔 제사에 대신, 비빈, 친군들도 덩달아 다 같이 긴장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연혼이 제위에 올라 통치하는 동안 한 번도 직접적으로 신을 받은 적은 없었다. 초기에는 조금 엇나가긴 했어도, 연혼은 착실한 황제였다. 가족에게 무신경한 게 흠이었지만, 백성들에겐 매우 인자하고 부드러운 군주 그 자체였다.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여기까지 온 황제였으나, 도망간 희비의 일로 그가 계속 군주가 될지 모두 궁금해했다.

    또한, 그가 되지 않는다면 누가 새로운 황제가 될지도 궁금한 사항이었다.

    강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정말 아바마마가 폐위되면 어떡하지? 폐위된 황제의 말로는 비참했다. 인간 대접도 못 받고 쓸쓸하게 죽었다. 사형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돌팔매질에 맞아 죽은 선왕도 있었다. 모두 나라를 생각하지 않은 결과였다.

    일주일 만에 나라가 봄에서 한겨울이 되었고, 백성들이 저리 분노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황제는 정작 태평했다. 오히려 빨리 신이 오지 않자 짜증내는 얼굴이었다. 유려한 얼굴에 서린 노골적인 귀찮음에 강이 지레 겁을 먹고 떨었다. 그때마다 황제는 가슴을 다독이며 “괜찮다.”라고 달랬다.

    한참 동안 얼굴에서 땀이 날 정도로 신무를 추던 대신관이 방울을 놓쳤다. 방울이 또르르륵, 굴러가는 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대전을 꽉 메웠다.

    그리고 대신관의 고개가 축 처지더니, 잘 익은 벼처럼 흔들거렸다.

    [오랜만이구나.]

    대신관의 입술을 타고 어울리지 않는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나왔다. 목소리는 아주 어여쁘고 고운데, 말투는 고상한 신선 같았다. 강이 바닥에 엎드린 채 흠칫 떠니 신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이가 정말 널 닮지 않았구나.]

    “절 닮았습니다.”

    연혼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 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강아지를 대하는 듯한 태도에 강이 손을 밀쳐내자 연혼이 눈웃음을 지었다.

    “불손한 태도가 꼭 절 닮지 않았습니까?”

    [너의 불손함과 방만함을 누가 따라갈까. 괘씸한 녀석. 이러라고 너에게 나라를 맡긴 줄 알아? 내 아들의 나라를 망칠 생각을 하다니.]

    “그럼 폐위하시죠.”

    연혼이 별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신은 웃었고, 대전을 메운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 웃고만 있었다. 대놓고 팔짱까지 끼며 해보라는 듯 빤히 신을 보자, 신이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모호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한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 없다. 너는 가치가 많은 아이니까.]

    연혼이 자신을 폐위시키자고 주장했던 대신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들은 벌써부터 겁에 질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참지 못하고, 폐위를 주장하던 대신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 신을 향해 외쳤다.

    “나라를 버렸습니다! 군주가 나라를 버렸는데도, 어찌하여 내버려두시는 겁니까? 이 나라를 생각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나라를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다.]

    신이 축 늘어진 채로 강과 연혼 쪽을 가리켰다. 강은 상체를 뒤로 물렀고, 황제는 다리가 부러진 강이 넘어질까 봐 두 다리로 아이의 상체를 기대게 해주었다. 꼼꼼하고 다정한 그의 움직임에 강은 뒤를 둘러보았으나, 황제가 가볍게 저지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신을 보라고 가리켰다.

    “제 아이가 궁금한 게 많습니다. 부디 아이가 물어보는 것에 대해 답을 주시길.”

    황제가 공손하게 물었다. 신의 몸이 강시처럼 으스스하게 움직여 강을 보았다. 죽은 것 같은 대신관의 몸에 강이 황제를 돌아보자, 황제가 머리를 부드럽게 만져주며 고개를 숙였다.

    “강이 네가 바라던 것이니 마음껏 물어보거라.”

    황제가 눈을 마주치며 상냥하게 웃었다. 제법 진심처럼 보이는 미소였다. 강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애써 감내하며 신을 똑바로 보았다. 피한다고 달라지는 현실이 아니었다. 도망을 쳐봤지만 돌아오는 건 이런 결과였다. 강은 일어설 수가 없으니 최대한 예의 바르게 허리를 펴서 신을 응시했다.

    “정말 아바마마가 절 비로 부탁한 게 맞습니까?”

    [그렇다.]

    대신들이 충격적인 대답에 입을 떡 벌리고 황제를 보았다. 한결같이 눈에 ‘저 미친놈이.’라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황제는 여전히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강을 내려다보았다. 태후는 저 멀리서 이마를 짚고 뒤로 넘어갔고, 지홍왕은 어머니를 받치느라 바빴다. 이 자리에 끌려 나온 여 소의는 참담함을 이기지 못했다. 재갈만 없었다면 입을 열어서 말릴 텐데.

    이미 들었지만, 신의 입으로 들으니 소름이 돋았다. 강이 천천히 황제를 올려다보자 황제가 입가를 가린 채 웃고 있었다. 선량하고 인자한 미소에 등이 떨렸다. 잠시 마른침을 삼킨 강은 재차 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몸은 시간이 별로 없어. 빨리 물어봐야 할 거 같은데.]

    신이 하품을 하며 투덜거렸다.

    “아바마마께서 정말 저에게… 임신이 되는 약을 먹인 게 맞습니까?”

    [그래.]

    대신들이 입이 더 벌어졌다. 황망한 시선이 황제에게 꽂혔다. 그러나 황제는 균열 하나 없이 느긋하게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오히려 그의 눈은 사관을 찾고 있었다. 사관은 이미 저 멀리서 임무에 충실하게 적고 있었다. 거기에 마음을 놓은 황제가 편안한 숨을 내쉬며 강을 보았다.

    “다 물어보았느냐?”

    “아뇨.”

    “나머지는 뭔지 알겠군.”

    단조롭게 중얼거린 황제가 손을 뻗어 난데없이 옆에 있는 친군의 창을 뺏었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행동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미친 사람이었다. 뭘 어떻게 할지 몰랐기에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신이 손을 까닥여 대전으로 모든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문을 닫았다. 불이 확 켜져 더 밝아졌다. 연혼은 밝아진 대전에서 도를 다루듯 창을 가볍게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제 아이가 궁금해합니다. 제 손으로 제 아이들을 죽였는지, 대답을 주십시오.”

    [이게 마지막이냐? 이 몸은 곧 죽을 것 같구나.]

    “예, 마지막입니다.”

    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신은 물끄러미 강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옮겨져 연혼의 신선 같은 얼굴에 닿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능력만 출중한 놈. 너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난 절대 널 황제로 결정하지 않았다.]

    “그러시겠죠.”

    연혼이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는 빨리 대화가 끝나길 바라는 얼굴이었다. 신은 한숨을 푹 내쉬며 강을 향해 쪼글쪼글 변한 입술을 열었다. 어느새 신관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네 아비는 널 제외한 모든 형제들을 죽였다. 심지어 배 속에 있는 아이까지 없애기 위해 모든 수단을 썼지. 그래서 일부러 비빈을 새로 점지해서 보냈는데, 그 아이마저 죽이더구나. 아이를 떠나 비빈들까지….]

    “그러면 애초에 왜 아바마마께 죄 없는 여인들을 보내셨습니까? 아바마마의 성정을 알면, 그러지 마셨어야죠!”

    강이 버럭 소리쳤다. 왜 그녀들이 희생당해야 했는지, 형제들이 아바마마와 신의 농락에 죽어야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은 강의 분노에 고개를 갸웃했다. 연혼도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대신들도 충격을 받아 아무런 말을 못 하는데, 한 신과 한 인간만 자유로웠다.

    신은 꺼져가는 생을 일으켜 몸을 강의 앞까지 당겼다. 단숨에 앞으로 다가온 신에 강이 흠칫 놀랐다. 신은 손을 뻗어 강의 턱을 잡으려 하는데, 연혼이 잡지 못하게 막았다.

    “제 비는 저만 만질 수 있습니다.”

    신과 연혼의 눈이 마주쳤고, 연혼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승으로 돌아가면 같은 위치인 걸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나를 저승에서 죽이겠다는 뜻이냐? 괘씸하구나.]

    “어차피 당신도 당신의 아들의 일이 아니면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아버지로서, 연인으로서, 제 아이를 제가 챙기는 겁니다.”

    신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시간이 없는지, 강을 보며 필사적으로 입을 움직였다.

    [난 너도, 네 어미도, 그 외의 여인들도 불쌍하지 않다. 저 아이도 마찬가지지. 내가 불쌍하게 여기는 건 내 아들뿐이다. 이곳은 내 아들의 나라고, 내 명이 다할 때까지 내 아들의 명예가 눈부시길 바라는 것뿐.]

    신은 피식 웃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네가 고기를 먹듯, 나에겐 사람들을 고르는 게 그것과 같다. 신에게 인간의 감정을 바라지 마라.]

    “제 아버지는요? 제 아버지는 어찌 저리….”

    저에게 미쳤냐고, 강은 묻고 싶었으나 황제의 시선이 너무 따끔했다. 그가 창을 들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설마 어머니를 죽이려는 건가? 아니면 외가? 도대체 누굴 죽이려고 저 창을 들고 있는 거지. 강은 초조함에 땀을 흘리며 신을 보고 몸을 일으키려다, 다리에서 발생하는 통증에 바닥에 엎어졌다. 앓는 소리를 내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강은 사라져 가는 신을 향해 외쳤다.

    “제 아버지는 인간의 감정을 아시는 겁니까?”

    [그는 너로 인해 인간이 되길 원했다.]

    강의 눈이 커졌다. 신이 마지막으로 가루가 되어 흩어지며 웃었다.

    [슬프지만, 너를 향한 그의 감정은 진실이다.]

    대전에 정적이 감돌았다. 황제는 차가운 눈으로 강을 보며 미소 지었다.

    거봐, 내 말이 맞지 않느냐?

    황제의 얼굴이 개구지게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상태에서 황제는 돌보다 무거운 정적이 감도는 대전에서 유려한 선을 그리는 입술을 열었다.

    “천명은 진실이지. 이제 너의 선택에 따라 달렸단다, 아가야.”

    “…아바마마.”

    강이 타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황제가 걱정 말라는 것처럼 인자하게 웃으며 창을 바닥에 탁, 소리 나게 부딪혔다. 무거운 창이 그의 손에 들어가자 마치 가벼운 검처럼 느껴졌다.

    “널 처음엔 아들로 만났고, 지금은 연인으로 만났지. 난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난 널 살리고 내 옆에 두기 위해 같은 방법을 택할 것이다. 네 형제들을 다 죽이고, 배 속에 있는 아이들도 죽이고, 비빈들도 냉궁에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내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약을 먹이고….”

    이야기가 구전설화를 얘기하는 것처럼 나른하다. 그러나 내용은 잔인하기 그지없어 가슴이 시려왔다. 지홍왕은 쓰러져 정신을 잃은 태후를 안은 채, 난감한 얼굴로 황제를 보았다. 이 모든 내용은 기록이 된다. 후대에 전해질 것이다. 그걸 알면서 뻔히 저 짓을 저지르는 황제는 제대로 미친 것처럼 보였다.

    황제가 입가를 가리며 해맑게 웃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정사를 맺겠지. 그게 나라의 전통 혼례니까.”

    강이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고 입술을 깨물었다. 대신들도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느라 바빴다. 하지만 황제의 폐위를 추진했던 사람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여기서 자신을 살려줄 사람은 이제 희비밖에 없었다. 그들은 ‘마마….’라고 부르며 희비에게 매달려보았지만, 황제의 창이 가장 앞에 있는 사람에게 꽂혔다. 비명과 함께 피가 터졌다. 확실하게 죽을 때까지 창을 무심한 얼굴로 박아넣은 황제가 “시끄럽다.”라고 말했다.

    사람의 목에 창을 박아 넣고, 다시 빼낸 황제가 피 묻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괴이함에 몸이 떨렸다. 그는 자신에게만 사람이었다. 강은 어느새 아버지를 보며 울고 있었다.

    “아가가 고르렴. 아비와 함께할지, 연인과 함께할지.”

    “…아바마마, 그러지 마세요.”

    강이 멍한 얼굴로 눈물을 툭, 툭 흘렸다. 고개가 떨구어졌다. 천명을 들었고, 황제의 마음도 알았다. 이제 자신의 선택이 남았다는 걸 안다. 대전은 신력으로 문이 잠겨 열리지 않는다. 황제의 뜻에 따라 열리거나, 영원히 닫히거나 둘 중 하나이다. 강은 눈물을 닦아내고 바닥에 엎어진 채 입을 열었다.

    “소자가 만약… 연인이 아닌 아바마마와 함께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황제가 잠시 심드렁한 얼굴로 생각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망하겠지. 이따위 나라, 네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널 지키기 위해 여태껏 버텨왔는데. 난 너에게 최고의 권력을 주고 싶었다. 내 옆에서, 나와 함께. 태자? 황제? 그 자리는 재미도 없고 책임만 크지. 그리고 보거라. 나는 이 사람들, 이 나라를 지배하지만 넌 날 지배할 수 있단다.”

    황제가 피 묻은 창을 든 채 두 팔을 벌려 자신을 보도록 종용했다. 강의 앞에 우뚝 서서, 황제는 피에 젖어 그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웃었다.

    “네가 이 나라의 권력자가 되는 거다. 아비가 널 그리 만들었지? 평생 원망해도 좋다. 평생 옆에서 미워해도 좋아. 그걸 이용해서 네가 갖고 싶은 걸 다 가져도 된다.”

    강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소자가 원한 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소자는 그저 다정한 아버지가 좋았습니다.”

    “그 다정한 아버지와 정사를 맺으면서, 너도 좋아하지 않았느냐? 그건 아들의 자태가 아니었다.”

    황제가 단호하게 강의 진심을 밟았다. 강은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천천히 강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여 바닥에 있는 강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비가 입을 맞추면 좋아서 울었으면서.”

    강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창백한 얼굴에 떠오른 홍조에 황제가 슬며시 웃으며, 강과 마주 보았다. 창을 내던진 황제가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쉬더니 강에게 두 팔을 벌렸다.

    “착하지? 내 아가. 이리 오렴.”

    강이 주춤했다. 황제는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중얼거렸다.

    “이런 아비가 원망스럽겠지. 이해가 안 될 거야. 하지만 난 늘 너만을 생각했다.”

    황제가 강을 똑바로 보고 아름다운 금안을 휘며 말했다.

    “그대를 연모하고 있어. 내 아들로, 내 연인으로….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되겠나?”

    황제가 아무 말 없이 울면서 눈을 감는 강의 손을 잡았다. 강의 몸이 힘없이 딸려갔다. 이미 다리가 부러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강은 황제의 품에 안겨 팔을 감았다. 강이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떨었다. 아직도 답은 내리지 않았다. 그저 무의식이 그에게 안겼다.

    “미워요.”

    강이 그의 품에 안긴 채 똑바로 말했다. 황제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강은 그의 등에 상처가 날 만큼 힘을 줘 세게 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워요. 정말로….”

    황제가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은 죽어도 안 하는 아버지였다. 애초에 미안한 게 무엇인지를 모르는 아버지였다. 그런 사람에 사과를 바라는 건 자신의 욕심이었다.

    그는 최선의 방식이라고 했다. 죽어나간 형제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경혜왕이 왜 그리 자신을 원망했는지, 진영왕이 왜 자신을 마지막에 그런 눈으로 봤는지…. 하나하나 이해가기 시작한 강은 하염없이 오열했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자신과 아비 때문에 벌어난 학살이었다. 그가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도 이해가 가고, 왜 그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이해가 갔다. 궁에 완벽한 나의 편은 없었다. 권력은 나누어 가질 수 없었다. 황제는 정말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두를 죽이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내가 못할 것을 아니까.

    그가 다정하다고 해야 할지, 잔인하다고 해야 할지…. 혼란이 왔다. 그가 좋은 건지, 싫은 건지도 이제 어려운 문제가 되어버렸다. 아무래도 두고두고 풀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날 아비라고 인정할 거냐?”

    황제가 강을 떼어놓으며 물었다. 강의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주는 손길이 부드럽다. 강은 그의 손에 뺨을 대고, 눈을 감았다. 볼은 뜨겁고, 그의 손은 차갑다.

    처음부터 인연은 차가웠다. 설국에서 만난 인연에서 그가 따사로운 품을 주었다. 확실한 건, 자신은 그를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아무리 이런 짓을 반복해도, 끝내 남은 한 톨의 애정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게 아버지로서 그에 대한 향한 애정인지, 정사를 맺을 때 생겨나는 쾌감인지는 훗날에 알아보고 싶었다. 지금 거기까지 알아낸다면, 머리가 복잡해서 망가질지도 몰랐다.

    자신은 그렇게 똑똑하지 못했다.

    그도 살리고, 어머니도 살리고…. 대신들도 살리고, 나라도 살린다. 그리고 자신도 산다. 강은 눈을 떠서 흐릿한 시야 속에 있는 그를 보았다. 강은 뜨거운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비빈들은 다 내보내 주세요. 남아있는 자식들도요.”

    “천명을 받은 비빈들은….”

    “하실 수 있습니다, 폐하.”

    강이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만졌다. 황제의 눈이 커졌다. 강은 그의 얼굴을 만지던 손을 내려 목을 감싸고, 직접 안았다. 그의 품은 너무 커서 자신이 안기에 버거웠다.

    “신첩이 평생 남아있을 테니, 모든 비빈들과 자식들에게 자유를 주십시오.”

    황제가 신음했다. 그는 다리가 부러진 강을 아프지 않게 조심스레 안았다. 강의 얼굴에 서린 어두운 기운을 알아챈 황제가 쓰게 웃었다. 말은 신첩이라 하면서, 눈은 아버지라고 보고 있다. 황제는 강의 뜨뜻한 뺨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래. 그리하마.”

    “…예.”

    강은 지친 듯 그의 어깨에 뺨을 대었다. 황제가 강의 등을 토닥거리며 자도 된다는 뜻을 보였다. 강이 잠들 때까지 대전에서 안고 있던 황제가 친군들을 보고 입을 열었다.

    “폐위를 주장한 자들은 모조리 죽여라.”

    “천명을 받듭니다, 폐하!”

    폐위를 주장한 자들을 향해 친군들의 창과 대도가 날아들었다. 폐위를 반대한 자들은 그들을 보며 웃었다. 황제는 신력으로 잠긴 문을 열고, 당당하게 빠져나갔다. 겨울이 끝나고, 완연한 봄으로 돌아왔으며, 백성들은 밖에서 환호했다.

    말이 없는 건 죽은 자들뿐이었다. 강은 흐릿한 의식을 깨워 자신을 안고 가는 황제를 보았다. 황제가 웃었다. 강은 차마 그 얼굴을 보고 웃지는 못하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체취가 난다. 질식할 것 같았다.

    그도 따라서 강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강의 향을 빨아들였다.

    “내 아가.”

    황제가 후각으로 향을 음미한다.

    “강아.”

    황제가 마지막으로 강의 이름을 부르며 강 자체를 맛보더니, 강이 고개를 들었을 때 빤히 보았다. 강은 눈물이 살짝 남은 눈을 반쯤 감으며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네, 폐하.”

    봄의 향이 그의 입술에서 난다. 아버지의 향이었다.

    홍염 (紅炎)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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