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1)

3장. 낙화

가늘고 촘촘한 바늘 같은 비가 사정없이 내렸다. 어둠에 뒤섞여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를 씻어내는 비는 세계를 한층 어둡게 만들었다. 잘 관리된 땅은 속절없이 질척해졌다. 공기는 초겨울처럼 얼어붙어 입을 열면 뿌연 입김이 생겨났다. 너무 이르게 다가온 추위에 세상도 침묵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반응하지 않을 것 같은 고요함에 막 홍등가를 나오던 경혜왕은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그를 따르는 장군 조운과 외할아버지 강호창의 사람들, 잔여물처럼 따라오는 호위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목이 따끔따끔했다. 가시가 많은 이파리가 드러난 목덜미를 긁어내리는 기분에 신경이 쓰였다. 말에 오르려던 경혜왕은 뒷목을 만져보았다. 빗물이 자아내는 시퍼런 어둠 속에서도 분을 칠한 듯한 하얀 손가락이 보였다. 손톱 밑 둥근 살에 피가 점점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걸 본 경혜왕은 얼굴을 굳혔다.

“계집이 아니라 고양이를 안은 기분이군.”

요새 물이 오른 기녀와 한바탕 놀고 나온 경혜왕의 뒷목은 여인의 손톱에 쓸려 피가 조금씩 나오고 있었다. 저년을 죽여야 하나. 빗물에 쓸려 사라진 피를 좇던 경혜왕은 건조하게 웃었다. 몸이 호리병처럼 예쁜 기녀였다. 기녀의 역할과 책임대로 사내를 즐겁게 해주었으니 죽일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다만, 다음에 만나면 다시는 손톱자국을 내지 못하도록 호되게 혼내줄 참이었다.

어떻게 혼내줄까…. 뺨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글자를 새겨줄까, 등에 경혜왕의 노예라는 낙인을 지져줄까. 귀비를 닮은 어여쁜 얼굴로 무궁무진한 고문 방법을 떠올리던 경혜왕은 등 뒤에 달라붙는 가볍고 버석한 감촉에 등을 돌렸다. 같이 온 조운이 우의를 덮어주고 있었다.

“전하, 비가 많이 내립니다. 비를 맞으시면 고뿔에 걸리실 터이니….”

비가 오는지도 모르고 색사를 즐겼던 경혜왕은 우의를 시큰둥하게 보았다. 경혜왕이 즐겨 입는 우의였다. 보통 흑우의를 입는 연국 남자들과 달리 경혜왕의 우의는 화려한 새의 깃으로 만들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받은 것처럼 빛났다. 경혜왕은 대문 앞에서 비스듬히 서서 조운의 얼굴을 보았다. 조운은 눈을 새침하게 내리뜨고 볼까지 붉히고 있었다. 전쟁터에선 무자비하게 창을 휘두르는 그녀였는데, 경혜왕의 앞에선 언제나 연모의 감정을 드러내며 안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쉬웠지만, 한편으로는 떨떠름했다. 어째서 그녀가 자신을 이리도 열렬히 연모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므로.

“어째서 네가 이걸 들고 있는 것이냐?”

“다친 어깨가 쑤신 걸 보아하니 비가 올 것 같아, 전하께서 여인과 운우지정을 나누실 때 왕부에 연락하여 우의를 받아왔습니다.”

“누가 주든?”

경혜왕의 정실부인은 한 명, 애첩은 셋이었다. 자식은 다섯이 넘어갔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연모를 숨기지 않는 조운이 어리석었다. 경혜왕은 우의를 어깨에 걸치고 고삐를 잡았다.

조운은 밖에 오래 있었는지 파리해진 입술을 움직여 슬그머니 웃었다.

“왕비께서 주셨습니다.”

“그래? 그녀가 가만히 있었을 리 없었을 텐데.”

경혜왕이 말하는 그녀는 오로지 하나였다. 경혜왕의 정실부인이었다.

“심병으로 통증을 호소하시어 나오시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연모가 아닌 가문끼리 이어진 인연이었고, 경혜왕은 그녀가 딸을 낳자마자 찾지 않았다. 딸에게 정을 붙이며 잘 살던 것 같던 왕비는 경혜왕이 첩을 하나씩 들이고, 홍등가에 푹 빠져 지내자 상심한 듯 왕부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놓고 툭하면 마음이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 하여 경혜왕의 얼굴도 보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아프다고 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전하.”

조운이 다급하게 경혜왕을 불렀다. 막 등자를 밟고 안장에 앉은 경혜왕이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며 그녀를 보았다. 조운이 경혜왕을 존경이 담긴 듬직한 눈으로 바라보며 웃었다.

“마마께 잘해주십시오. 전하의 하나뿐인 비가 아닙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경혜왕은 그녀를 보고 담담하게 덧붙였다.

“넌 날 연모하는 듯한데 어찌하여 나에게 그녀를 잘 돌보라고 말하는 것이냐?”

조운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 자신이 그녀의 감정을 모른다고 생각한 듯했다. 흐르는 공기보다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경혜왕은 미련 없이 고삐를 돌렸다. 조운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에 올라탔다. 경혜왕을 호위하는 자들이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둠을 뚫으며 앞으로 향했다.

왕비와 혼례를 올린 지 벌써 5년이 흘렀다. 왕부에 살지만 언제나 밖으로 도는 경혜왕인지라 제대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마저 흐릿했다. 딸은 몇 살이 되었으려나…. 무심히 왕비와 딸을 생각하던 경혜왕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마부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은 야심한 시각으로 통행금지였다. 자신이야 황족이니 상관없었지만, 저 평민은 불가했다.

“이봐, 자네….”

경혜왕이 말을 멈추고 그를 잡으려는데, 마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부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둠에서 자신의 얼굴을 감춘 그가 고삐와 채찍을 놓고 꺼내든 건, 어둠을 가르는 검이었다. 검이 순식간에 앞을 지키던 두 사람의 목을 베었다. 살이 갈라지며 피가 팍 터졌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행동은 매우 빨랐다. 화살이 날아드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경혜왕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이 억, 소리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놀란 말이 히히힝, 소리를 높이며 달려갔고 말에서 떨어진 자들의 육신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경혜왕이 달아나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마부가 모는 마차에서 사람이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마부처럼 몸을 가리고 있었다. 눈도 보이지 않았다.

“전하를 지켜라!”

가장 먼저 눈치챈 조운이 호위를 위해 들고 다니는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검을 곧장 던졌다. 검이 마부의 목을 뚫고 마차에 박혔고, 마부가 부르르 떨다가 축 늘어졌다. 그의 몸을 타고 피가 범람했다.

“전하를 지켜! 전하의 몸에 상처가 나선 안 된다! 전하, 어서 왕부로…!”

조운이 소리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경혜왕이 창백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조운의 등에 화살이 박혀있었다. 조운은 떨리는 손으로 등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를 악물고 한 손으로 여분으로 들고 다니는 단도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눈을 재빨리 돌려 적을 포획하고 단도를 표창처럼 던졌다. 그녀의 단도가 향한 곳이 보이지도 않았다. 경혜왕은 그녀를 두고 고삐를 꽉 잡았다.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표적이 된 것을 빌미로 도망가야 했다. 조운은 자신을 두고 떠나는 그를 멍하니 보다가, 죽은 자의 도를 집어 들었다. 화살에 독이 발려있었는지 몸이 점점 마비되어 갔다.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둔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몸을 움직여 경혜왕을 쫓는 자들을 죽이고자 했다.

‘전하, 태자가 되셔야 합니다.’

“앞으로 가고자 한다면 나를 베고 가라!”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덩치가 가장 큰 자의 가슴을 대각선으로 그었다. 화살에 맞아 얼굴이 시퍼렇게 변해가는 그녀를 보고 방심하던 자는 피를 주르륵 흘리며 쓰러졌다. 그가 다시 일어나서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걸 막기 위해 대도를 치켜들고 뒷목을 베는데, 앞에서 달려오는 자가 조운의 뱃가죽을 뚫었다. 연달아 달려온 얇고 긴 금속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그녀의 가슴과 목, 배가 금세 붉어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몸을 덮쳤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독에 중독되어 몸에서 감각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죽창에 고정되어 쓰러지지 않았다. 세 개의 죽창이 그녀를 꼿꼿하게 서게 해주었다. 암살자들은 그녀를 내버려 둔 채 말을 타고 경혜왕을 쫓았다.

그녀는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며 그가 나오던 홍등가를 보았다. 이미 홍등가에서 거리가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붉은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상하게도 세상이 붉다고 생각했다. 그와 처음 만났던 붉은 꽃으로 가득했던 그 들판 같았다. 꽃 무더기 사이에서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잡아주던 경혜왕의 모습이 시야에 차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모한다는 말이라도 남길 것을.’

그녀는 손가락 끝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말을 타고 달려오던 자가 그녀의 머리를 베어버렸고 그녀는 생각을 멈췄다. 그녀의 머리는 허무하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남은 것 죽창이 박힌 하찮은 몸이었다. 머리가 사라져 괴이했다.

사람이 비참하게 죽었으나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수도 전체가 죽은 듯했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경혜왕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어디까지 왔지? 경혜왕은 달리면서 옆을 휙 돌아보았다. 담벼락에 피가 튀는 게 보였다. 또한 뒤에서 물꼬를 튼 비명 소리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을 지키던 호위들의 소리는 소란스럽게 멎었고, 그 뒤를 잇는 것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암살자들이었다.

도대체 누가? 진영왕인가? 아니면 강? 소현왕? 머릿속에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지나갔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아아아악!”

마지막 남은 호위마저 암살자들 무리로 인해 죽는 소리가 들렸다. 몇 안 되는 전쟁의 경험으로 경혜왕은 직감했다. 암살자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마차에서 내린 그자들뿐만 아니라 이미 여기서 매복하고 있던 자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와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전쟁터에서 느꼈던 감정이 솟구쳤다. 눈물이 펑펑 솟아올랐다. 멈추지 않는 샘처럼 흘러내려 그의 얼굴과 가슴을 형편없이 적셨다. 친왕으로 살아온 세월이 길다 해도 그도 갓 17살이 된 풋내기였다.

“빌어먹으으으을!”

전쟁터에서 동고동락했던 자가 죽었다. 자신을 연모하며 눈을 반짝이던 조운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그녀를 먹잇감으로 두고 도망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경혜왕은 머리를 스치는 도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등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식은땀 때문에 입고 있던 평복은 흠뻑 젖었다. 하지만 그런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를 지배했고, 자연스럽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영현왕부로 이끌고 있었다. 강이라면 자신을 지켜줄 것이다. 그 아이는 성품이 곱고 착하니까. 진영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기다리겠지만, 강이라면 진심으로 자신을 불쌍하다고 여겨 살려줄지도 모른다.

영현왕부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암살자를 피하면 살 수 있었다. 그 희망에 경혜왕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좁은 시야엔 이제 희미한 불빛을 뽐내며 자리한 영현왕부만이 보였다.

그러나 경혜왕을 쫓아 달려온 암살자는 경혜왕이 방심한 틈을 놓치지 않고, 단도를 꺼내 들었다. 가면이 거의 벗겨진 암살자의 손이 경혜왕의 목을 노렸다. 늑대의 피가 흐르는 경혜왕은 눈치를 채고 고개를 비틀었다.

“아…!”

그러나 암살자는 말 위에서 경혜왕을 향한 살의를 멈추지 않았다. 몸을 붕 띄운 그가 단도를 높이 치켜들고서 경혜왕의 얼굴을 그어버렸다. 경혜왕이 그토록 아끼고 가꿨던 얼굴이, 왼쪽 눈부터 시작하여 턱까지. 단도가 그 살을 갈라버렸다. 피가 터졌고, 경혜왕에게 해를 입히는 데 성공하였으나, 암살자는 결국 말 위에서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 목이 꺾여 죽었다.

“아아아아, 아, 아, 안 돼! 안 돼애애애애!”

경혜왕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절규했다. 도망쳐야 했으나 경혜왕은 얼굴이 망가졌다는 사실에 지독한 실의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기능을 상실한 왼쪽 눈에서 피눈물이, 그나마 보존된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경혜왕은 두 손으로 얼굴을 붙잡고 괴이한 소리를 내며 절규했다.

경혜왕은 타악기처럼 정신없이 들리는 다그닥, 다그닥 소리에 신음하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어서 영현왕부로 가야 했다. 얼굴이 망가졌어도…. 살 수만 있다면. 내 반드시 살아서 복수를 하리라.

경혜왕은 잘 보이지 않는 시야로 앞을 응시하며 움직였다.

“허억, 헉…. 강아, 강아! 살려다오! 강아!”

경혜왕은 영현왕부를 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이상한 일이었다. 통행금지인 야심한 시각인데 어째서 당직을 서는 병사들은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수도의 방어가 이리도 허술했던가?

황제이자 아바마마인 그는 언제나 방어에 엄청난 돈과 인재를 들였다. 방어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원칙에 따라 그는 그 누구도 수도를 공격할 수 없게끔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많은 방위군 중 누구 하나 보이는 이가 없었다. 마치 내가 진심으로 죽길 바라는 사람처럼.

“설마….”

경혜왕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으흐, 흐윽…. 하고 구슬픈 울음소리가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피를 순식간에 많이 흘린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늑대의 피가 흘러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

‘아바마마! 저도 당신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에게 사랑받고자 노력했고, 그가 사랑을 주지 않고 싸늘하게 돌아섰을 때부터 반드시 천자가 되어 그를 죽이겠노라고 결심했는데. 그를 죽여야 했는데. 그와 함께 강도, 송도도 다 죽여서 땅에 매몰시켰어야 했는데!

“저도 당신의….”

울음이 턱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끝까지 그를 추격한 암살자가 경혜왕의 등을 노렸다. 경혜왕이 피하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혼미한 정신으로 그는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팔을 안쪽으로 당기려던 경혜왕은 겨드랑이로 파고드는 금속을 느꼈다.

그리고 왕부의 문이 벌컥 열렸고, 경혜왕을 구하기 위해 영현왕부의 호위들이 쏟아진 순간 경혜왕의 팔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아아아아악!”

경혜왕의 울부짖음이 드디어 정적을 깼다. 잘린 팔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쩍 벌어진 입에선 경혜왕의 고통에 찬 울음이 흘러나왔다. 말을 타고 뛰어나온 영현왕의 실력은 어둠 속에서도 독보적이었다. 그의 봉호가 적힌 화살이 경혜왕의 팔을 벤 자의 목을 뚫었다. 그다음은 도망치던 암살자들의 말을 향했다. 영현왕은 침착하게 달려오면서 경혜왕을 지켰다. 살아남은 몇 명의 암살자들은 다른 신하들에게 쫓도록 시킨 영현왕이 서둘러 경혜왕에게 다가왔다.

“형님….”

영현왕은 피투성이가 되어 흐느껴 우는 경혜왕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예쁜 얼굴의 왼쪽은 잘려서 피가 줄줄 흘렀고, 왼쪽 팔은 사라졌다. 그의 팔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흙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영현왕은 말에서 내려와 간신히 말 머리에 몸을 기대고 있는 경혜왕을 안아 들었다. 황제가 직접 만들어준 평복이 피에 젖어 들어갔으나 강은 경혜왕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형님! 정신 차리십시오! 왕부에 어의가 와있습니다!”

“강아…! 살려다오. 너무 아파…. 죽을 거 같다. 제발…. 날 살려다오…!”

경혜왕이 어미 잃은 자식처럼 서럽게 울며 강의 가슴에 매달렸다. 강은 황망한 얼굴로 형을 안아주면서도, 그를 질질 끌어 자신의 말에 앉히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반쯤 넋을 놓고 있어 말을 탈 수 없었다. 강은 숨을 헐떡이며 그의 몸을 살펴보다가, 피가 흐르는 팔부터 지혈했다. 자신의 옷을 찢어 환부를 막고서 그를 등에 업었다. 경혜왕의 큰 몸이 강의 상체에 푹 엎어졌다. 그가 고통에 몸을 떨며 헐떡이다가 정신을 잃은 것이다.

“형님, 안 됩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강은 경혜왕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비록 그가 자신에게 모멸감을 주고, 비웃음을 날렸지만 이런 식으로 죽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는 어쨌든 어린 시절을 함께한 형제였다.

강은 이를 악물고 그를 업은 채 왕부까지 달렸다. 왕부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이 강을 발견하고 “전하!” 하며 불렀다. 강은 그들을 밀치고 왕부 안으로 들어가고서, 고함을 내질렀다.

“어의를 데려와! 형님을 살려야 한다!”

*

경혜왕의 피습 소식은 가장 먼저 황제의 귀에 꽂혔다. 황제는 경혜왕이 꽤 많은 수의 암살자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상황에 여 소의와 단조로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 소의는 황제의 기분이 언제 틀어질지 몰라 노심초사하며 그를 보필했고, 황제는 그녀의 겁에 질린 얼굴을 알면서도 따분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찻잔을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은 황제가 손을 내밀어 미세하게 떨고 있는 여 소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사내답게 딱딱하면서 보들보들한 황제의 살과 온기에도 여 소의는 겁이 풀리지 않는지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 황제는 강이 있을 때와 없을 때 현저하게 달랐다. 강이 있을 때는 이 나라에서 가장 포근하고 인자한 아비였지만, 강이 없을 때는 짜증을 내고 툭하면 사람을 말과 행동으로 괴롭히는 사람이었다.

제발, 이제 그만하고 놓아주었으면. 그리 생각하며 눈을 내리깔고 있는데 황제가 턱을 잡고 올려 눈웃음을 짓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은 촉촉했고, 입안은 차향이 은은했다. 그의 입술이 스치는 피부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여 소의가 부끄러움에 움츠러들자, 황제가 입을 맞댄 채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피부를 애무하듯 스쳤다.

그의 다정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가 언제 이렇게 다정했던가. 늘 서리가 든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볼 때와 너무 달라, 여 소의는 볼을 붉혔다.

“흐음…. 그대의 아이는 이것보다 더 좋겠지?”

황제는 그녀가 정신을 반쯤 잃을 틈을 타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매우 낮고 산뜻하여 침상에 있는 자가 아니면 들을 수 없었다. 황제는 기울어진 그녀의 뺨을 잡고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눈이 흐물흐물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주던 황제는 그녀가 신음하며 몸을 꿈틀거리자 웃었다.

“폐하….”

“그대에게 참으로 고마워.”

“예…?”

그녀가 영문 모를 소리를 들은 얼굴로 되묻자 황제가 웃으며 뺨에 입을 맞췄다.

“천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아들을 선물해주어 고맙단 말일세. 그대를 하늘께서 천자의 빈으로 점지한 이유를 뒤늦게 알아서 안타까울 뿐이야. 미리 알았다면 더 소중하게 대해줬을 터인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황제를 여 소의가 차가운 시선으로 보았다. 황제가 괜히 이런 소리를 꺼낼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황제의 자리를 빌미로 모든 것을 맛보고 버리는 잔인한 자였다. 황제로서 다스리는 능력은 탁월했고, 백성들을 소중히 생각했지만 유독 자신의 측근들과 가족들에겐 지나칠 정도로 잔인했다. 강에겐 매우 좋은 아버지였으나, 다른 아들들에겐 그가 정말 아버지가 맞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달아오른 몸과 차갑게 식은 머리와 마음으로 황제를 품평하던 그녀는 입술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에 몸을 움츠렸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이슬을 맞은 것처럼 젖어있었다. 황제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에 입술을 대고서, 약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서 빨리 강이 컸으면 좋겠는데….”

“영현왕은 충분히 컸사옵니다, 폐하.”

“그대는 아직 천자의 마음을 모르지 않나.”

황제는 쪽, 하고 입술을 부딪치고서 싱긋 웃었다.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예쁜 미소에 가슴이 흔들렸다.

“그대를 닮은 얼굴에 천자를 닮은 체격이면 건강하겠지? 아이는 한 서넛 낳을 수 있을까?”

정말 궁금하다는 듯, 눈에 호기심을 띤 채 물어보는 용안에 여 소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단번에 이해 가지 않았다.

“예?”

“농일세.”

피식 웃은 황제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황제가 차를 마시려는 순간, 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황제는 불쾌감을 드러내긴커녕 무감하게 눈을 깜박였다.

“폐하…. 경혜왕 전하께서 피습을 당하셨다고 하옵니다! 현재 영현왕부에서 치료받고 계신다고 하며 생명이 위독하다고 하십니다!”

“그래?”

아들의 위독한 소식을 들은 아비는 태연하게 웃었다.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넋을 놓은 여 소의를 건성으로 달래주며 입을 열었다.

“하늘로 가게 되면 그때 천자에게 고하라. 지금은 관심이 없으니.”

침소를 지키는 자들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황제를 응시했다. 문 너머의 내관도 동일한 반응을 보였다. 황제는 문 너머를 보고서 나긋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워낙 다정하고 부드러워 내용이 섬뜩하게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하늘로 간 것도 아닌데 천자가 신경 써야 할 이유를 모르겠구나.”

여 소의는 아들을 향한 무감정에 몸을 떨었다. 떨고 싶지 않아도 몸이 계속 떨렸다. 가슴까지 스미는 한기 때문이었고, 한기의 근본은 몸이 맞닿은 황제였다.

그녀는 황제의 비빈이 된 이후로 자신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황제의 아이를 낳아주고, 황제의 비위를 맞춰주는 노리개에 불과했다. 서글프지만 강이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그녀는 황제에게 안기지 못하고 쓸쓸히 늙어가는 처지였으리라. 그녀는 황제의 눈치에 살살 기며 그가 원하는 대로 안겨주었다. 황제는 작고 가느다란 체구의 그녀를 덥석 안아 허벅지에 앉힌 후, 고개를 숙여 보았다. 그의 황금색 눈과 마주치자 가슴이 떨렸다.

나이를 같이 먹어가는데도 그는 약관의 젊은이보다 아름답고 강한 몸을 가졌다. 그는 하늘이 만든 아들다웠다.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다.

“무서운가?”

황제는 여 소의에게 물었다. 답을 원하는 그의 눈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도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여 소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천자가 무서운가?”

황제가 허리를 손으로 더듬으며 다시 물었다. 이제 여기서 대답을 못 하면 엄한 소리를 들을지도 몰랐다. 여 소의는 서둘러 창백해진 얼굴로 웃으려고 노력했다.

“아니옵니다, 폐하. 신첩은 폐하가….”

“걱정하지 마라.”

황제는 뺨을 매만지며 웃었다. 그의 미소가 찬란해서 눈이 멀 것 같다. 언제 보아도 적응이 안 되는 수려한 외모에 침을 꼴깍 삼켰다. 황제는 뺨과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검은 머리카락을 일일이 떼어주고서 귀에 대고 나른하고 축축한 음성을 애무하듯 속삭였다.

“그대의 아이는 절대 죽지 않아. 그 아이는….”

뒷말이 들리지 않아 여 소의가 눈을 흘겼으나, 황제는 소리를 고의적으로 죽이고 웃었다.

‘그 아이는 그대를 누르고 황후가 될 내 아이니까.’

황제는 토막 난 말을 마음속으로 속삭이며 여 소의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 보았다. 강을 낳은 어미지만, 그리 사랑하지 않았다. 고마움을 담아 안을 뿐 그녀의 가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황제의 마음과 머리에서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건, 강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것도 의미가 없었다. 황제는 그녀를 안으면서 강을 투영했다. 강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땀에 젖은 싱그러운 뺨, 잘 영근 입술, 침을 삼키고 신음을 뱉을 때마다 움직이는 사내다운 목젖….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배.

연혼은 아내를 안으며 아들을 떠올렸다. 그 탓일까. 하늘이 황제의 부도덕을 일삼으며 비를 퍼부었다. 불행히도 경혜왕의 고통에 찬 울음도 빗소리에 묻혔다.

*

여 소의와 그리 열렬하지 않은 운우지정을 의례적으로 나눈 황제는 약례전으로 이동했다. 약례전 문 앞에 드리운 보석으로 만든 주렴을 거두고 이미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 움직이던 걸음을 멈췄다. 그는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고개를 움직이자 어깨에 걸쳐서 묶은 은발이 흔들거렸다. 밤 호수에 떠오른 달처럼 고고한 움직임이었다. 황제는 뒤에 따른 궁인들에게 나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지엄한 황명에 고개를 숙이고 식은땀을 흘렸다. 결코 황제를 혼자 두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눈에 서린 날카로운 서릿발에 그들은 느릿느릿 물러났다. 물러나고 싶지 않은 저의가 깃든 행동에 황제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의 건조한 웃음소리가 나부끼다가 그의 침의가 마찰되는 소리에 증발되었다.

“오랜만일세.”

황제의 앞에는 지홍왕, 태의, 대신관, 서역인이 있었다. 황제의 앞에 그들은 엎드려 우렁찬 인사를 건넸다.

“고귀한 천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그들의 인사가 듣기 싫었던 황제가 의자에 앉아 팔걸이를 내리쳤다. 한순간에 약례전이 고요해졌다. 고요를 깬 것은 고요를 일으켰던 황제였다. 그는 의자에 기대앉아 다리를 꼰 채, 떨고 있는 두 사람의 등을 보며 입을 열었다.

“본론부터 시작하지. 막 정사를 마치고 와서 기분이 좋거든.”

고개를 먼저 든 사람은 가장 좌측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지홍왕이었다. 지홍왕은 자신이 먼 곳에서 데리고 온 서역인을 반듯한 손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폐하, 저자는 대산을 통해 온 서역인 갈레시아스라고 합니다. 서역에서 유명한 의사로 그가 발명한 탕약이 사내를 임신시킬 수 있다 하여 제가 데리고 왔습니다.”

“거짓은 아니겠지.”

황제가 나른하게 깜박이던 눈을 또렷하게 뜨며 서역인을 뚫어지게 보았다. 서역인 갈레시아스는 황제의 집요한 시선에 어깨를 떨었다. 지홍왕은 안심하라는 듯, 서역인에게 서역어를 이용해 말을 걸었다.

[거짓이 아닌지 폐하가 확답을 원하고 계시니 가지고 온 것을 보여주게.]

[알겠소.]

모든 소지품과 무기를 빼앗긴 갈레시아스는 약례전에 흐르는 분위기를 기민하게 읽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체격이 유달리 좋은 연국 사람들을 보았지만 황제는 그중에서도 으뜸이었다. 보자마자 혼이 나갈 것 같은 얼굴과 다르게 체구가 매우 좋았다. 떡 벌어지면서 끝이 말끔한 어깨와 긴 팔다리, 큼직한 손. 과연 가장 우월하다는 늑대의 피를 이어받은 자다웠다. 저자가 늑대로 변하면 범처럼 크다는 말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연국 황제의 손과 허리에는 흔한 도 한 자루가 없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황제는 본인 자체가 무기였다. 늑대로 변해 베어 물면 끝이었다. 실제로 자신의 인척을 늑대로 변해 모조리 씹어 죽인 자가 아니던가. 서역에도 무시무시하게 들은 황제의 일화를 더듬듯 기억한 갈레시아스는 조심스럽게 품 안에서 약초를 꺼냈다. 자신의 나라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효약으로 사내도 임신이 가능하게끔, 안에 자궁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이 약초를 삼 년에서 사 년 정도 지속적으로 먹이면 자궁이 생길 것입니다. 안심할 수 없으니 임신할 때까지는 지속적으로 하루에 한 번 먹이시면 되고, 첫 아이가 생기면 제대로 자궁이 생기고 씨앗이 착상이 된 것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지홍왕은 그 말을 고스란히 황제에게 번역해서 들려주었다. 황제는 턱짓으로 태의를 가리켰다.

“이미 알아듣고 있으니 태의에게 설명해 주거라. 어떻게 달이는지, 양은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지. 그러라고 있는 태의니까.”

지홍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무료한 듯 곱게 마련된 연초를 물었다. 연초 연기가 약례전에 뿌옇게 퍼졌다. 연기는 지속해서 뿌연 구름을 만들어냈다. 황제의 긴 속눈썹에도 연기가 슬며시 걸렸다. 구름이 긴 꼬리만 남기고 자취를 감출 때쯤 지홍왕이 입을 다물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태의는 얼굴에 당황한 기색을 역력한 채 몸을 살짝 떨었다. 왜 그들이 자신을 불러들이고 남자의 임신 가능성에 대해 거듭 설명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황제는 단 한 번도 사내를 안은 적이 없었다. 그는 완벽하게 여자를 좋아했다.

그가 왜 힘들게 삼사 년이나 걸려 남자에게 자궁을 만들려는 것인가. 심지어 저 먼 서역의 사람까지 데려와서. 더군다나 황제가 사랑하는 남자는 없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이 동동 떠다녔다. 울렁거릴 정도로 치밀어 오르는 혼란스러움에 태의가 주름진 입술을 덜덜 떨며 움직였다.

“폐하, 소신 우향주 폐하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황제가 뱀처럼 느리게 눈만 돌려 태의를 보았다. 황제는 입에 물고 있던 연초를 내려놓았다. 그의 입술이 묘한 웃음으로 젖어 들어갔다. 기쁜 듯, 탄식하는 듯, 혹은… 갈망하는 듯한 일그러지고 묘한 웃음에 눈이 흔들렸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사내가 누구이옵니까? 또한 그 사내에게 폐하의 씨앗을 잉태시키고 싶어 하시는 연유가…. 소신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자에게 약을 먹여서 임신을….”

“그대도 잘 아는 사람이야. 걱정 말게.”

황제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 지었다.

“천자의 아들 강일세.”

“…영현왕 말씀이십니까?”

태의의 얼굴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귀를 통해 들은 게 납득이 가지 않았는지 고개를 돌려 지홍왕과 서역인을 보았다. 서역인은 연국 언어를 모르니 눈만 멍청하게 뻐끔거리고 있었다. 지홍왕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였기에 덤덤했다. 지홍왕의 여유로움에 인상을 찡그린 태의가 황제를 보고 입을 달싹였다. 그의 몸 전체에 드리운 혼란을 예측한 황제는 눈을 반쯤 내리뜨고 양손으로 깍지를 꼈다.

비밀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나간 순간 비밀이 아니다. 언젠가 다 퍼질 일이었다. 그렇다면 미리 자신의 사람이 한두 명 정도 아는 건, 상관없겠지.

이 일은 다 역사가 기억할 것이니. 빠르게 고민을 수그러뜨린 황제는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 태의를 보았다. 태의는 황제의 고아한 자태에 침음했다. 그는 거짓을 표명한 게 아니었다. 흔들림이 전혀 없는 동작마다 황제의 진심이 배어있다.

“천자는 아들을 연모한다.”

“폐하…!”

태의가 절망에 찬 목소리를 힘겹게 터트렸다. 태의의 눈앞에 어린 시절의 강이 스쳐 지나갔다. 황제의 커다란 손을 잡고 느리게 걷던 강을 뒤에서 흐뭇하게 보곤 했다. 그때만큼은 황제도 여느 아버지 같았다. 아들의 느린 걸음에 맞춰 걸어주던 다정한 아버지였는데. 그가 고개를 돌려 강을 볼 때 부드럽게 웃어줄 때면 분위기가 고양이 꼬리처럼 살랑살랑 움직여 달콤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렇게 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황제는 생각지도 못한 진실을 듣고 진심으로 경악하고, 절망에 물든 태의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몸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드리우는데도 태의는 눈 한 번 깜박이지 못했다. 그는 이미 정신을 놓은 듯했다. 황제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다른 무릎을 세워 앉았다. 황제는 미련 없이 태의의 늙은 뺨을 후려쳤다. 태의가 피를 쏟아내며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황제는 멈추지 않고 연달아 태의의 뺨을 때렸다. 태의의 양쪽 입가에 피가 물줄기처럼 흘러내렸다. 황제는 태의가 폭력에 함락당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걸 확인하고 웃었다.

“정신 차려야지. 이 황궁에서 정신 놓고 목이 잘려 죽고 싶은가? 그대만 죽으면 상관없겠지만, 그대의 딸들은? 아들들은? 자식들이 먼저 죽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그렇게 살아도 된다. 하지만 그대가 정신을 놓고 멋대로 행동하는 순간, 그대는 자식들이 먼저 사지가 찢겨 죽는 모습을 눈에 박아 넣고 죽게 될 것이야.”

“사, 살려… 살려주시옵소서. 폐하, 소신 우향주, 이 긴 세월 오로지 폐하만 보고 살아왔습니다!”

“그럼 끝까지 천자만 믿게. 천자만 보고, 천자의 말만 듣고, 천자만 보란 말일세.”

황제가 오열하는 태의의 뺨을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사정없이 뺨을 후려쳐 침몰될 뻔한 정신을 깨친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태의는 긴 세월 궁에서 살아오면서 익힌 습관을 떠올렸다. 겁을 먹지 않고 눈을 들어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태의가 겁을 먹었지만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다시 의자에 앉았다.

황제는 턱을 괸 채 발끝을 까닥거리며 산뜻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사 년이라…. 딱 좋은 시간이군. 지금 강이 열여섯이니 사 년 후면 약관이 된다. 그쯤이면 회임하기에도 무리는 아니지. 그렇지 아니한가?”

“…예, 폐하.”

태의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이 일엔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달려있었다. 며느리가 임신한 손자, 아들이 낳은 손자…. 그들의 얼굴을 떠올린 태의는 울음을 털어냈다. 앳된 얼굴로 웃으며 황제에게 안기던 강이 그 끝에 남았다.

“약을 달여 와.”

황제는 태의를 지그시 보며 웃음기 띤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강이 무사히 아이를 낳을 때까지 이 비밀은 그대와 천자가 공유하는 것이야. 만약 이 비밀이 새어나가 강이 알아채고 도망가면….”

황제가 소리 내어 웃으며 머리를 검지로 툭툭 건드리고, 미끄러지듯 내려와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머리 잘 쓰게.”

죽고 싶지 않으면. 황제의 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태의는 두려움에 떨며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충성을 맹세했다. 황제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흘리며 약초를 힐끗 보았다. 저 약을 구하기 위해 몇 달을 소비했는지…. 하지만 얻은 과실은 달콤했다.

진짜로 얻은 과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할지 감이 오지 않아 황제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머릿속으론 몇 번이나 회임시켰다. 강의 배는 꺼질 날이 없었다.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가슴은 아이의 것이 아니라 황제의 것이었다. 강은 아픔을 호소하면서도 황제가 안아주면 고분고분하게 안겨 와 황제에게 입을 맞췄다. 뻐끔 열린 구멍으로 씨앗물이 흘러내려 보료를 적셨다. 그것이 아까워 손으로 훔쳐 직접 안에 넣어주었다.

‘아바마마, 이제 그만….’

애처롭게 매달리는 입을 입으로 막았다.

“이거 곤란한데. 망상이 심해져.”

탄식한 황제는 부풀어 오르는 남근을 보고 쓰게 웃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강을 정말 사랑스럽다는 듯이 안아주는 것도 불가할 듯했다.

그 입술이 신첩이라고 말해줄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황제는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팔걸이를 검지로 쓸어 만졌다.

경혜가 죽지 않은 것이 못내 가슴에 걸렸다. 확실하게 죽였어야 했는데…. 강이 발견한 게 문제였다. 하필이면 영현왕부 근처에서 발견될 줄이야. 냉정한 얼굴로 황제는 생각을 곱씹었다.

그렇다면 남은 아들들은 다른 방법으로 죽여볼까…. 방법은 무수히 많았다. 그는 처음 자신의 손으로 죽였던 태유 황후를 떠올렸다. 태후가 며느리로 마음에 든다며 데려온 여자였지만 그녀는 탐욕스럽고 욕심에 비해 멍청했다. 황후가 자신의 것이었지, 황제가 황후의 것이 될 수 없는데 황제를 자신만의 남자로 여겼다. 황제가 그녀를 죽이겠노라고 결심한 이유는 그때였다. 태후와 작당을 하여 자신이 아끼던 애첩과 아이를 죽였을 때.

황제는 태후가 더 이상 손을 쓰지 못하도록 황후를 독살했다. 그리고 그녀가 살던 궁도 불태웠다. 아이도 어미와 똑같은 길을 걷게 해주었다. 그녀가 외롭지 않도록 말이다. 이젠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아이를 생각하던 황제는 웃는 낯으로 지홍왕을 보았다.

“강이 살 중궁을 만들어야겠다.”

“노역자들을 우선 고용해야겠군요.”

“시간은 오래 걸려도 상관없다. 강에게 어울리는 가장 아름다운 궁을 만들어야겠어. 더불어 강은 동물들을 좋아하니 근처에 유원도 만들어주고, 화원도 따로 만들어야겠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가 놀 만한 장소도 필요하겠지.”

어차피 황후가 되면 나가지 못할 테니, 가장 아름답고 작은 세계를 만들어 선물해줄 생각이었다. 강은 평생 그 안에 살 것이다. 황제와 황제가 만들어준 아이와 함께.

지홍왕은 연국에서 가장 호화롭고 안락한 감옥에 갇힐 강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어린 조카의 삶이 기구하게 느껴져 가슴이 아프긴 했으나 신경 쓰진 않았다.

*

“눈이 안 보여….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아프다! 아파…!”

발작적이고 쉰 신음에 강은 처박았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밤새 경혜왕의 병상을 지킨 강의 얼굴이 초췌했다. 졸음이 가시지 않던 눈은 연신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에 번쩍 떠졌다.

“차라리 죽여다오! 아아, 흐으윽…! 죽여줘! 죽여 달라고! 눈이 보이지 않는데 살아서 무얼 한단 말이야!”

그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듣는 이를 절망에 빠뜨렸다. 지독한 무저갱이었다. 강은 갈색으로 변한 피가 여전히 남은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조금이라도 형제의 비명에서 벗어나려 한 노력이었으나 의미는 없었다. 벌어진 손 틈새를 비집었다. 경혜왕의 울음, 신음,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는 비참한 소원이 강의 정신을 갉작갉작 갉아먹었다.

아파, 아파, 아파….

밤에서 청초한 새벽으로 넘어가는 내내 경혜왕은 아프다는 소리를 외쳤다. 그는 살았지만 왼쪽 눈은 기능을 상실해 앞을 보지 못한다. 왼쪽 팔은 사라진지도 몰랐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팔이 달려있다고 착각했다. 강은 이리저리 움직여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오른쪽 눈을 보고 뒤로 물러나 도망쳤다. 경혜왕의 아름다운 얼굴이 너무 흉측했다. 그의 모습이 괴물 같다고 생각한 자신이 추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강은 귀를 막아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고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피 냄새가 흥건하게 비강을 적셨다.

“아바마마를 죽여버릴 거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경혜왕이 악에 받쳐 지르는 소리가 강의 귀를 단숨에 찔렀다. 강은 ‘아바마마’란 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그가 소리를 질러서 다른 이의 귀에 들어가면 경혜왕은 진짜로 죽게 된다. 황제를 죽이겠다고 말하는 친왕을 누가 살려두겠는가. 강은 하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혜왕이 있는 침소로 걸어갔다. 그곳은 본래 강의 침소였다. 영현왕부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강은 경혜왕을 함부로 내버려 둘 수 없어 그를 자신의 침소에 눕히고 간호를 하도록 명령했다.

강은 문에 걸린 주렴과 장막을 거두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손바닥에 묻어있던 피 냄새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비린내가 강을 훅 덮쳤다. 강은 침대에서 오른팔을 휘저으며 고통을 호소하는 경혜왕을 보다가 걸음을 멈칫했다.

이대로 도망가고 싶었다. 그의 괴물 같은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으니까.

황제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전쟁도 할 수 없는 나약한 몸이었다. 고작 이런 걸로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강은 황제가 세뇌하듯 말한 것을 떠올리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전쟁의 선봉장으로 나가지 못한 몸이었다. 그러니 자신을 대신해 전쟁터에서 힘들게 싸워 돌아온 형제의 곁은 지켜주고 싶었다. 그가 불쌍했다. 전쟁터에서 구르고 돌아왔으나 돌아온 것은 외팔이, 그리고 애꾸였다.

“형님….”

강이 애써 울음을 지우며 경혜왕에게 다가갔다. 두텁게 쳐진 장막 아래에 경혜왕이 피범벅이 된 채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미친 사람 같았다. 정말 보이지 않는지 핏줄이 서 붉게 변한 흰자위가 부릅떠져 무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숙였다.

“헉!”

경혜왕이 가까이 다가온 먹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강의 멱살을 잡아 아래로 당겼다. 팔이 잘린 경혜왕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악귀나 다름없었다. 절대 널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손은 강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강은 괴로움에 어깨를 비틀었다. 핏줄이 선 강의 하얀 목에 손자국이 남고, 손톱에 쓸려 피가 흘렀지만 강도 경혜왕도 미처 알지 못했다.

“아바마마다. 아바마마가 날 이리 만들었어. 나도 아바마마의 아들인데! 나도! 나도 너처럼 아바마마의 아들이었단 말이다!”

“형님! 더 이상 아바마마를 모욕하시면 아니 됩니다. 형님의 목숨이 위험해지실 겁니다. 무엇보다 정말 아바마마가 했다는 물증도 없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형님의 착각이고 오만입니다!”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경혜왕이 흐느끼듯 웃으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왼쪽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오른쪽 눈에서도 피와 뒤섞인 눈물이 흘렀다. 강은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뿌리쳤다. 강은 숨을 헐떡거리며 엉덩방아를 찧고 뒤로 물러났다. 경혜왕은 아픔에 힘겨워 일어나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울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아바마마는 너만 예뻐하신단 말이다…. 넌 몰라…. 그가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하긴, 너는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을 테지…. 아바마마의 가랑이 사이에 앉아있으면 행복할 테니까!”

경혜왕이 누워서 헛소리를 지껄였다. 강은 피가 나는 목덜미를 손으로 막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어의가 말한 대로 약을 먹여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그가 잠시라도 정신을 잃는 게 나았다.

“너 때문이야….”

경혜왕이 울음을 뒤섞은 웃음을 기괴하게 흘리며 외쳤다.

“다 너 때문이야! 연강! 너만 아니었어도…!”

“어의를 부를 테니 약을 드시고 쉬십시오, 형님.”

그러나 경혜왕은 강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누워서 피를 흘리고 눈물을 토해내며 저주를 퍼부었다. 그의 모든 말과 시선, 손짓엔 다 악이 있었다.

“너도 죽여버릴 거다! 아바마마와 함께 죽여버릴 거야!”

“…쉬십시오, 형님. 몸이 상하십니다.”

그저 그가 너무 불쌍하고, 가여웠다. 저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여 우는 그가 안쓰러워 안아주고 싶었다. 그의 사라진 왼팔도, 왼쪽 눈도 다시 가져다가 붙여주고 싶었다. 자신을 모독해도 좋으니 의기양양하게 말을 타고 누비던 그가 그리웠다. 그가 미웠지만, 이렇게 비참해져 우는 걸 원한 것이 아니었다.

누워서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연주를 보며 손을 뻗었으나 강은 멈췄다. 아바마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난 자신이, 아바마마의 사랑을 지금도 갈구하는 그에게 얼마나 오만이고 독일까. 강은 피 묻은 손을 축 늘어뜨렸다. 그를 안아주고, 힘껏 달래주고 싶다는 생각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이런 배려와 마음도 비틀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괴로워할 테니. 연주, 경혜왕이 괴로움을 호소하는 게 너무나 버거워 강은 도망치듯 침소를 빠져나왔다.

*

황제의 황명이 영현왕부에 전해진 시간은 해가 중앙에서 비스듬히 꺾인 때였다. 강은 스스로 멱리를 착용했다. 검은 멱리와 잘 어울리는 검은 예복을 입고 가마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에 황제가 황궁으로 오라는 뜻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황제를 향한 경혜왕의 터질 듯한 분노를 익히 알아서일까. 손끝이 마비되는 증상이 있었다.

“내가 잘해야겠지….”

강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매만졌다. 그 말을 들은 담영이 고개를 돌려 강을 보았다. 멱리를 쓰고, 목을 가리는 긴 예복을 입은 강은 누가 보아도 침울한 사람이었다. 서늘하고 차가운 인상을 가진 강답지 않은 야릇하고 청아한 분위기에 담영은 헛기침했다. 시선을 뗄 수 없는 오묘한 분위기가 강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왠지 더 울리고 싶은 분위기였다. 이 상태로 갔다가 황제가 정말 어릴 때처럼 볼을 깨물고 빨아서 강을 울릴까 봐 걱정되었다. 강은 무거운 숨을 내쉬며 목을 만졌다. 경혜왕의 손톱에 긁힌 상처가 생각보다 깊어서 걱정이었다. 황제가 보지 못하도록 목을 가리는 의복을 입었지만, 황제가 의아하게 여길 것 같았다. 이른 추위였지만 아직 목을 가리는 옷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뿔에 걸려 추웠다고 할까. 여러 가지 고민을 걸쳐서 하던 강은 이윽고 시야에 도달한 붉게 번쩍거리는 황궁에 고개를 세웠다. 이젠 자신의 발로 가야 했다.

“전하.”

담영이 손을 내밀었다. 강은 그걸 가볍게 무시하고서 일어나서 성큼성큼 은우문 앞에 섰다. 멱리를 벗어 담영에게 건네주었다.

“따라오지 말거라.”

고민하던 담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전하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강의 검은 예복이 바람에 흩날렸다. 힘이 넘치는 걸음으로 은우문을 통과했다. 담영은 은우문이 닫힌 후에야 후, 하고 가벼운 숨을 뱉어냈다. 강이 무슨 생각으로 담영을 오지 말라 했는지 알고 있었다.

강은 은우문 앞에서 이미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호화로운 가마에 올라탔다. 비들이 탈 법한 가마에 약간의 의문을 가졌으나 이내 깔끔하게 지웠다. 가마는 숙련된 내관들이 움직이는 덕분에 흔들림 없이 천금궁까지 갈 수 있었다. 강은 가는 길에 피어난 꽃들을 무덤덤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붉은 꽃에 꽂힌 강의 동공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전날 경혜왕의 피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눈이 피곤했다. 손으로 눈가를 가린 강은 한숨을 느리게 잘라내어 내쉰 후, 앞을 보았다. 어느새 천금궁이었다.

그의 황명을 거부하고 싶었지만, 막상 천금궁에 오니 황제가 그리웠다. 빨리 그의 널찍한 품에 안겨 어릴 때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전하, 따라오십시오.”

강은 총관 태감을 물끄러미 보고 느슨하게 웃으며 물었다.

“폐하께선 어디에 계시는가?”

“침전에 계십니다.”

“내 발로 갈 터이니 안내는 필요 없네.”

총관 태감은 빙그레 웃을 뿐 말이 없었다. 그가 상체를 틀어 가라는 듯 몸으로 말했다. 강은 그들을 느리게 지나쳤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던 강의 발은 점점 속도가 붙었다. 강은 어느 기점으로 하여 달리고 있었다. 검은 예복 자락이 허공에서 흩날렸다.

빨리 아바마마가 보고 싶어…. 아바마마에게 안기고 싶다. 형님을 간호하느라 힘들었다고, 그를 달래느라 너무 힘들었다고…. 미안하지만, 여전히 아바마마가 날 사랑해서 좋다고.

강은 이를 악물고 달리느라 12개의 문이 척척 열리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강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통로를 통과했다.

가장 안쪽 문이 열렸다. 그 가운데 황제가 붉은 용포를 입은 채 서 있었다. 황제는 막 면류관을 벗으려던 손을 멈추고,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온 아들을 보고 슬그머니 웃었다. 황제가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물렸다. 그는 몸을 돌려 강을 직시하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아가, 어서 오렴.”

강은 아까 전과 다르게 힘을 실어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황제는 형체도, 소리도 없는 울음을 감내하는 아들을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성인처럼 컸지만, 황제에 비하면 작고 가는 몸이 완전히 감싸였다. 황제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두 팔은 가시덤불처럼 움직여 강을 완전히 옭아맸다. 강의 팔은 그에 화답하듯 움직여 넓고 사내다운 등에 닿았다. 강은 손끝을 갈고리처럼 세워 그의 등에 닻을 내렸다. 강의 손이 그를 놔주지 않았다. 황제는 우아하게 웃으며 강을 번쩍 안아 올렸다.

“울었구나.”

황제가 부은 눈을 보고 유쾌하게 말했다. 강은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할 말을 잃고 그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강은 황제에게 밀착해서 안겼다.

“울어도 된단다.”

“안 웁니다.”

강이 굳건한 목소리로 쓸쓸하게 대답했다. 강은 말과 다르게 그에게 더욱 매달리며 중얼거렸다.

“안 웁니다, 아바마마. 더 이상 아기가 아닌걸요.”

“…그런가.”

황제가 강의 등을 쓸어 토닥거리며 말했다. 그의 눈은 허공을 쉴 새 없이 더듬었다. 황제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강의 얼굴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강은 실제로 울지 않았다. 단지, 무척 울적해 보였다. 16살, 세상을 알지 못하던 아이가 드디어 세상을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추악한 욕망에 물든 얼굴이지만 아직도 아이답고 선했다.

아마 그건 강이 가진 성품 때문일 것이다. 황제는 자신을 닮지 않은 아들을 보며 요염하게 웃었다. 그는 아직 풋풋한 뺨에 입술을 맞댄 채 속삭였다. 황제의 숨결과 목소리가 뺨에 닿자 간지러웠는지 강이 몸을 움츠려 황제의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내 아가가 많이 컸구나.”

“아가라고 부르는 건 그만해주시면 안 됩니까?”

“아비 눈에는 아무리 커도 아가로 보이더구나.”

그럴싸한 대답에 강은 눈을 깜박였다. 황제는 강을 어린아이처럼 품에 안았다. 강의 등이 황제의 한쪽 팔에, 두 다리는 허벅지에 늘어져 있었다. 황제는 그 상태로 강을 안아 손을 잡아 올렸다. 활을 쏘고 도를 다루느라 굳은살이 박인 손을 음미하듯 만지던 그가 고개를 숙여 강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강이 화들짝 놀랐지만 굳이 빼지는 않았다. 눈을 내리감고 입을 맞추는 그가 고결해 보였다. 하늘에게 제사를 드리던 때처럼, 경건하고 아름답다.

그가 자신의 아바마마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이토록 아름다운 자가 아버지고, 자신을 사랑해준다는 것도 행복했다.

한참을 강의 손등에 돋아난 핏줄과 여린 살을 입술로 맛보던 황제가 눈을 들어 올렸다. 영혼을 앗아갈 것 같은 금안이 강을 감쌌다. 황제는 강을 좀 더 바짝 끌어당겨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고서 속삭였다.

“피 냄새가 난다. 주의 피냐?”

“예… 형님이 많이 다치셨어요.”

“그렇구나.”

황제는 지나치게 덤덤했다. 슬퍼하는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강은 그가 거듭하는 입맞춤이 좋아 가만히 있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대놓고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하다는 빛을 보였지만 강은 이번만큼은 순순히 안기지 않았다. 강은 무릎을 침대에 대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 황제와 시야가 얼추 맞았다. 황제는 등을 좀 더 뒤로 당겼다. 강이 무슨 짓을 하나 보려는 듯, 눈엔 선선한 웃음이 감돈다. 강은 황제에 비해 작은 손을 움직여 황제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가까이 맞대고, 그의 뺨에 입술을 쪽 부딪쳤다. 강은 멈추지 않고 연달아 그의 뺨에 입을 맞대고서, 얼굴을 터질 것처럼 붉혔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아랫입술이 하얘질 때까지 이로 물고 있었다. 황제는 생각지도 못한 강의 애정행각에 눈을 크게 뜨고 숨까지 멈추고 있었다. 가슴이 뛴다. 두근, 두근…. 강이 알아차릴까 봐, 무서워서 도망갈까 봐 가려야 했는데 가려질 생각도 못 했다.

너무 좋아서 이대로 죽어도 될 정도로 행복했다. 황제는 얼굴이 파리해질 때까지 숨을 참고 있다가 강을 와락 끌어안았다.

“강아, 강아. 아비가 널 정말 사랑한단다. 정말로,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아비는 널….”

황제는 끝내 내뱉지 못하고 아들을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그의 몸이 쉴 새 없이 떨렸다. 그토록 크고 듬직해 보였던 황제가 겁을 먹고 떨고 있었다. 강은 그런 그를 순한 눈을 보았다.

“아바마마, 소자도 아바마마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강은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랑 고백을 하며 그의 등을 꼭 감쌌다. 황제는 아아… 하고 신음하며 강을 끌어안아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가 늘 하던 행동이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강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그의 등을 다독였다.

“아바마마…. 형님이 아프신데 가주시면 아니 됩니까? 형님께서….”

오해를 하고 계신 거 같아요. 가서 아바마마가 안아주시면 형님도 그 마음을 풀지 않을까요.

황궁까지 오는 내내 그 말을 연습했는데, 강은 생각지도 못한 황제의 말에 눈을 크게 떠야 했다.

“강아, 아우들이 좋지?”

“아우들이요? 소현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진짜 아우들 말이다.”

떨림을 강의 손아귀에서 잠재운 황제가 강의 얼굴을 한없이 쓰다듬으며 물었다. 강은 ‘진짜 아우’란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아우들은 넘치도록 많았다. 어머니는 달랐지만 아바마마가 같았으니 그들도 진짜 아우였다.

“이미 있습니다.”

“진짜 아우를… 갖게 해주마.”

희망에 찬 황제의 목소리와 눈빛에 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애처롭고 귀여운 행동에 황제는 실실 웃었다.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웃음이었다.

“어머니가 회임하셨습니까?”

황제가 소리 내어 웃으며 강의 허리를 감쌌다.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뜨겁다.

“곧 알게 될 것이다.”

“무슨 뜻인지 소자는 우매하여 잘 모르겠습니다.”

“굳이 지금은 알 필요 없단다. 아비가 다 알려줄 터이니 기다리렴.”

다정하게 말한 황제는 강을 허벅지에 앉히고서 눈웃음을 지었다. 겨우 모든 인내심을 동원해 두근거림을 멈춘 황제는 검은 눈을 보고 황홀한 신음을 흘렸다. 저 눈이 오롯이 자신만 보고 있다. 저 눈엔 자신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에도 강밖에 없다. 혈연으로도, 연인 관계로도 이렇게 맺어질 것이다.

가장 완벽한 내 연인.

황제는 속으로 웃으며 강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강은 방금 전과 달라진 온도와 뜨거워진 눈빛에 간지러워져 시선을 돌리고 싶었다. 기묘한 일인데 그의 금안이 처음으로 무섭게 느껴졌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이 살을 쓸어내리고, 그 안에 깃든 가슴마저 파고든다. 강은 자신도 모르게 겁을 먹고 눈치를 봤으나 도망가진 않았다. 강은 본능적으로 황제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맞댔다.

황제는 강의 비녀를 풀어 던졌다. 강의 검은 머리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에서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비가 오늘부터 약을 내려줄 테니 잘 먹어야 한다.”

“무슨 약이지요?”

강이 물었다. 황제는 밖에서 대기하는 내관을 불러들였다. 내관이 약 한 사발을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황제는 직접 사발을 받아들고 강의 오동통한 입술에 대었다. 강은 의문을 가지면서도 착하게 황제가 주는 약을 받아먹었다. 강은 황제를 의심하는 일이 없었다. 황제가 주는 사랑이 극진했고, 한없이 높았으니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황제가 주는 것이라면 뭐든 받아먹고 가만히 안겨있었다.

“자, 쓸 테니 당과를 먹자.”

황제는 써서 인상을 쓰고 있는 강의 입에 당과까지 직접 날랐다. 강이 제일 좋아하는 당과였다. 강은 눈을 새초롬하게 내리뜨고 당과를 받아먹고서, 황제를 보고 싱긋 웃었다. 황제도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미소를 선사하며 달콤한 명령을 내렸다.

“잊지 말고 잘 먹어야 한다. 쓰면 당과도 먹고.”

“예, 아바마마.”

황제가 주는 것이니 몸에 좋은 거겠지. 그리 생각하며 강은 얌전히 있었다. 모두 그가 가르친 것이다. 끝이 없는 두터운 신뢰를 손과 눈으로 맛본 황제는 흐릿한 미소를 띠고 속살거렸다.

“아우를 낳으면 너의 자식인 것처럼 예뻐해도 된단다.”

*

조정에 참석한 황제의 얼굴이 여느 때와 다르게 온화했다. 단출한 옥관에 샛노란 예복을 입은 황제는 입가에 연신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작야에 좋은 일이 있으셨던 걸까. 문무백관들은 각자의 머리를 열심히 굴려봤으나 황제가 딱히 사랑하는 비빈을 안은 것도 아니었다. 황제는 최근 들어 사내를 자주 안았으며 비빈들의 패가 올라와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더군다나 그 사내들 또한 한 번 안고 찾질 않으니 어여삐 여긴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경혜왕이 최근에 나아져서 왕부로 돌아간 것 때문일까. 하지만 경혜왕의 피습에도 찾아가긴커녕 태의만 보냈던 그였다. 밤낮으로 울부짖는 귀비도 찾지 않은 황제였으니, 경혜왕 일도 아닐 것이다.

그들은 오늘따라 빛이 나는 황제의 용안에 골똘히 생각에 잠겼으나, 조정이 진행됨에 따라 따라 생각을 점점 지워갔다. 주국을 정복한 이후로 주변 오랑캐들의 침입이 줄어들어 국경이 편안해지고, 더불어 식량까지 풍부해졌다는 일석이조의 소식에 황제가 미소를 짙게 덧그렸다. 주국의 불행은 곧 연국의 행복이었다.

두 식경이 훌쩍 넘어가는 조정을 마무리 지으려는데, 갑자기 문이 활짝 열렸다. 사람들, 그리고 황제의 금안도 문을 향했다. 문을 연 자들은 신전에서 일하는 내관들이었다. 내관들 틈에는 하얀 신복을 입은 무녀들이, 그 안에는 늙은 대신관이 무녀의 손을 잡고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들어오고 있었다. 신관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에 황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황제는 옥새를 정리하는 내관에게 옥새를 넘기고서 몸을 일으켜 연단을 내려갔다. 황제의 예복이 사락사락 부딪히는 소리가 대전에 은은한 종소리처럼 울렸다.

황제의 우람한 덩치에 맞게 탄탄한 그림자가 무녀와 신관을 덮쳤다. 입가를 하얀 비단으로 가린 무녀들이 황제를 향해 엎드렸다. 이미 문무백관들은 신성한 명령을 받들고 온 신관에게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그를 보고 있었다. 당당하게 서서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건 황제뿐이었다.

“폐하, 오늘 새벽 천명이 갑작스레 내려왔습니다.”

신관은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신관과 눈이 마주친 황제는 기묘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치 고의적인 장난을 들은 사람처럼 얼굴엔 거북이 등껍질 같은 균열이 있었고, 눈은 연약한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하늘로 올라갈 때쯤 신관이 씩 웃으며 말했다.

“새로운 비빈이 정해졌습니다. 꽃가마를 보내셔야 합니다.”

새로운 비빈이란 말에 황제의 웃음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하, 하고 짧게 웃더니 허리에 손을 올리고 한쪽 손을 내밀었다. 신명을 받는 자답지 않게 건방진 자세였다. 내놓으라는 듯 손을 까닥거리자 신관이 눈썹을 꿈틀거리긴 했으나 거부하진 않았다. 신관이 아주 느린 동작으로 두루마리를 건넸다. 황제는 자신에게 오기 전에도 답답하다는 듯 신명을 낚아챘다. 그는 호탕한 동작으로 두루마리를 펼쳤다. 거기엔 새로운 비빈을 정해진 여자의 이름과 가문이 적혀있었다.

“우도독 신소정의 차녀 신림을 비빈으로 간택한다.”

그리고 황제는 두루마리를 양손으로 찢어 허공에 날렸다. 문무백관들은 당돌한 행동에 눈을 크게 떴다. 황제는 전신에 꽂히는 시선 따위 가볍게 무시하고서 신관과 눈을 마주하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웬만한 사내들보다 훨씬 큰 사내가 무녀들보다 작은 신관을 보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손을 내밀어 대신관의 쭈글쭈글한 뺨을 툭, 툭 쳤다.

“잘하게. 응? 다 늙어서…”

거기까지 중얼거린 황제는 웃음을 싹 지우며 차갑게 말했다.

“궁형에 처해지고 싶지 않으면.”

“전 충분히 소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폐하. 하지만 천명은….”

황제는 신관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무녀가 깜짝 놀라 “폐하!”라고 외쳤지만 황제는 거침없었다. 황제는 신관을 허공으로 대롱대롱 들어 올렸다. 목을 조이는 신복과 큰 손이 목젖을 누르는 힘에 신관이 컥, 컥 소리를 내며 발을 굴렀다. 얼굴이 붉어지는 늙은이의 얼굴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황제가 신관을 바닥에 내던졌다. 신관이 앓는 소리를 흘리며 몸을 버둥거렸다. 무녀들이 울먹거리며 다가와 신관을 일으켜 세웠다. 황제는 등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대전을 벗어나고 있었다. 신관은 흐트러진 관을 잡으며 황제의 늠름한 등을 보고 소리쳤다.

“폐하! 하늘의 뜻은 거부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선 신림을 비빈으로 들이시고 씨를 남기셔야 합니다!”

비빈으로 정해진 여자에겐 첫날 밤 무조건 씨를 남겨야 했고, 그게 태중에 아이가 생길 확률이 가장 높았다. 하늘에 의해 간택된 여자는 그날 신력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아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황제가 아무리 씨를 남기고 싶지 않더라도 황제는 하늘의 뜻에 따라 여자에게 씨를 남겨야 했다.

대전을 벗어난 황제의 얼굴은 굳어져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먹을 움켜쥐고 푸는 모습에 살기를 느낀 내관은 총관 태감을 보았다. 총관 태감은 굽힌 등을 세우지 않고서도 그의 손등에 퍼진 푸른 기운에 눈을 찡그렸다. 태감이 뒤를 돌아보고 눈빛을 보내자 내관이 빠른 속도로 뒤돌아 도망쳤다.

가마를 타고 침전에 오는 내내 황제의 금안은 어두컴컴했다. 늘 화사한 봄처럼 빛나던 눈이었는데, 비빈 간택 소식에 무척 침울해하고 있었다. 오늘 조정에 참석하여 황제의 가장 옆에서 그를 지키던 지홍왕은 눈치 빠르게 그를 따라왔다. 황제는 굳이 동생의 침입을 막지 않았다. 침전이 아니라 모호전으로 지홍왕을 불러들였다. 지홍왕은 의자에 앉은 황제에게 차를 따라주려 했지만 황제가 손을 들어 막았다. 지홍왕이 큰 눈을 깜박거리며 의문을 표하자 황제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따르는 차는 맛이 없어.”

한 마디로 투정이었다. 지홍왕은 다기를 다소곳하게 내려놓고 웃는 낯으로 말했다.

“폐하, 영현왕이 따라주는 차는 잘 드시지 않습니까.”

“그건 강이니까….”

황제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중얼거렸다. 황제답지 않게 기운이 빠진 모습이었다. 강을 위해 사내를 안는 연습을 다 마쳤다며, 이제 피를 보지 않는다며 의기양양하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었다. 황제는 턱을 괴고 앉아 무거운 관도 벗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는 멍한 듯 보였지만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금가락지와 팔찌를 낀 하얀 섬섬옥수가 정갈하고 우아하게 움직였다.

“기분이 불쾌하군.”

황제가 혀를 차며 다기를 툭 건드렸다. 신전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눈치챈 황제가 다기를 집어 들어 벽에 던졌다. 다기가 순식간에 조각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지홍왕은 침착해 보이나 실은 가장 분노하고 있는 황제의 내면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황제는 자신의 일에 방해를 놓는 이들에 대해 무척 분개했다. 겉으로 웃고, 속으로 창을 꺼내 드는 황제였다. 아마 이번 비빈이 아이를 갖더라도 그 아이가 무사히 살 일은 없을 것이다. 하늘이 황제의 뜻을 알아채고서 비빈을 간택한 듯했으나 황제는 거기에 수그러들 자가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잘 됐어.”

황제가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고 상냥하게 웃었다. 황제 대신해서 깨어진 다기 조각을 줍던 지홍왕이 고개를 돌렸다. 황제는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순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불안한 시선으로 보는 동생 지홍왕을 보고서 유쾌하게 말했다.

“강에게 미리 예행을 보여준다 생각하면 되겠어. 강도 갑자기 아바마마에게 안기면 놀랄 것 아니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여인과 혼례를 치르는 법을 보여준다면, 강도 아마 혼례를 치르는 날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폐하….”

그것과 이건 다를 것 같습니다.

그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으나 시원하게 웃는 황제를 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강은 엄연히 황제의 친아들이었고, 아마 혼례를 치르는 날이 되면 놀라서 펑펑 울 것이다. 어쩌면 기겁하고 도망치려 할 수도 있었다. 아바마마에게 안기는 것도 모자라서 가족들과 문무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늑대가 된 아바마마에게 안겨야 했다. 그것도 나신으로 말이다.

늑대로 초야를 지내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임신이 가장 잘 되기 때문이었다. 강에게 지금부터 약을 먹이는 황제가 임신이 가장 잘 되는 초야를 허투루 맺을 일이 없을 것이다.

어엿하게 큰 강이 황제의 밑에 깔려 헐떡이는 모습을 떠올리던 지홍왕은 기겁하고 다기 조각만 열심히 주웠다.

“본인도 어느 정도 예측은 할 수 있게 해주어야지. 갑작스레 안기면 너무 커서 울 테니까.”

예측 안 해도 충분히 큽니다, 폐하.

역시나 말이 맴돌았으나 지홍왕은 화끈한 낯을 감추었다. 본인도 늑대가 되어 아내를 안았을 때를 생각했다. 늑대는 세 번의 사정을 거쳤다. 첫 번째는 어느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두 번째는 본격적인 움직임을, 그리고 세 번째에는 그 안에서 성기가 부풀어 올라 안을 꽉 메웠다. 씨앗물이 맞물린 틈을 타고 흘러넘쳤다. 그때도 성기가 얼마나 부풀었는지, 계속 흘러 허벅지 안쪽을 다 적셨다. 사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 싸고 씨앗이 집에 안착할 때까지 서로 그 부위를 맞대고 있었다. 안기는 자는 느끼는 부위가 짓눌려 흐느껴 울다가 실신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황제의 다리 사이에 매달린 흉기 같은 남근을 눈으로 덧그려보던 지홍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황제의 그것은 강의 마른 배가 볼록해질 때까지 부풀어 오를 것이고, 강은 어쩔 줄 모르고 울 것이다. 강은 동정이었으니까.

“폐하, 부디 영현왕은 더욱 소중히 여겨주시옵소서. 남자의 몸으로 회임을 하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지금도 듣자 하니 약 때문에 메스꺼워서 힘들어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거르지 않고 잘 먹는다고 하더군. 참으로 기특하지 않은가.”

둘이서 강에 대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쯤, 문밖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현왕이 도착하였사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강의 출입에 황제는 요사스러운 눈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멀뚱히 서 있는 지홍왕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서 얼른 다기를 가져오도록.”

“예, 폐하.”

지홍왕은 자신이 내어준 차를 극도로 싫어하고, 강이 내어준 차만 좋아하는 황제를 보고 쓰게 웃었다. 그래도 아우보단 역시 연인이란 말인가. 지홍왕이 깨어진 조각을 내관에게 내밀고, 내관과 함께 다기를 보관하는 실로 향했다.

내관의 다급한 명령을 새를 통해 들은 강은 한달음에 달려와 볼이 붉었다. 말을 타고 달려와 멱리는 흐트러졌고, 차림새도 엉망이었다. 강이 숨도 거르지 못하고 주춤거리며 걸어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가온 황제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황제는 멱리를 고정한 끈을 풀어 던졌다. 하얗고 조막만 한 얼굴에 퍼진 홍조에 황제가 슬며시 웃음을 띄웠다.

“강아.”

“폐하.”

숨을 헐떡이면서도 고분고분하게 폐하라고 부르는 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은 걸 애써 참고, 황제가 강의 배를 만졌다. 아직도 판판했다. 그러나 저 안에 아이가 생길 집은 제대로 생기고 있을 터였다.

“아비의 혼례가 정해졌단다.”

“예, 들었습니다. 경축드립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강이 활짝 웃었다. 황제는 늦은 여름의 바람과 같은 후덥지근한 미소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조금 더 큰 강에게 저 혀가 움직이는 입술에 입을 맞추고 농염하게 타액을 공유하고 싶었다. 목젖이 툭 오른 목덜미를 핥고, 저 아래 달린 과실 같은 젖꼭지와 아이가 들어설 배까지 애무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혼례에 초야를 치러야 아이가 확실히 들어서겠지만, 굳이 직접적인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됐다. 강과의 초야만큼은 인간의 모습으로 안아주고 싶었다. 그래야 아이가 겁을 덜 먹고 안길 것 같았다. 처음부터 늑대의 부풀어 오른 성기를 들이대면 찢어질지도 모른다며 엉엉 울고 도망치리라.

그럴 수는 없지. 천자가 얼마나 참고 견뎠는데. 넌 반드시 아비의 아이를 낳아야 해. 그 아이가 태자가 되고, 넌 내 옆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관을 쓴 황후가 될 것이다.

“아바마마?”

황제는 선한 웃음을 머금으며 스스로 안겨오는 강을 마주 안았다. 떨리는 입술로 뺨에 입을 맞춘 황제가 듣기 좋은 소리를 흘리며 강을 떼어놓았다. 그리곤 의도적인 손짓으로 강의 턱이며, 뺨, 입술을 순차적으로 만지고서 힘을 실어 말했다.

“혼례를 잘 봐야 한다.”

“예, 아바마마.”

황제가 길들인 대로 강이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황제는 강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고 안을 매만지며 세뇌하듯 말했다.

“아비가 늑대로 변해 여인을 안는 모습을 잘 봐야 한다는 뜻이다. 알겠느냐?”

순간 알아듣지 못한 듯했지만, 강은 곧 볼을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지 이 아비만 보고.”

그의 손가락이 내려와 귀를 스쳤다. 아주 간지러운데, 그 가운데에서 피어나는 아찔한 감각에 강이 눈을 찌푸렸다. 황제의 웃음이 농밀해졌다.

“이 아비만 생각하고.”

그의 손이 입술에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차마 만지지 못하고 날개처럼 내려와 강의 어깨와 목덜미 사이를 꽉 잡았다.

“이 아비를 위해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건 아주 신성한 혼례니까.”

그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그윽해졌다. 정신이 눅눅해진 음성에 홀렸다. 강은 용안을 지그시 보다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황제의 금안이 순식간에 봄을 맞이한 겨울처럼 녹아내렸다.

“예, 아바마마. 그리 하겠습니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아들의 얼굴을 하염없이 훑은 황제가 미련 없이 눈과 손을 떼어 내었다. 시간은 아직 멀었고, 인내는 짜증 날 정도로 길었다.

그 안에 확실히 아이들을 죽여야겠다. 강이 눈치채지 못하게, 차근차근.

욕정으로 용솟음치는 마음과 겉도는 아름다운 미소가 강의 시야에 흐드러졌다. 황제는 강의 봉긋 솟아오른 뺨을 스치듯 만지며 속삭였다.

“언제나 이렇게 말을 잘 듣는 아들이길.”

*

황제의 침전을 벗어나는 길은 황궁 내에 있는 원림처럼 깊고 길었다. 넓고 탁 트인 공간에 들어찬 것이 기둥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불빛뿐인데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걸을수록 농담이 짙어지는 붉은 빛에 초점이 흐려졌다. 선이 두 개, 세 개로 늘어나 기둥이 여러 개처럼 보였다. 연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아닌데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변했다. 가빠진 숨과 어울리지 않게 강의 통통한 뺨은 잘 여문 쪽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입술 또한 푸른 염료를 빨아들인 것처럼 푸르렀다.

빛의 파도로 넘실거리는 회랑을 벗어나, 외정과 내정으로 이어지는 돌길에 들어설 때가 되자 강은 걸음을 멈추고 주저앉았다. 양팔로 배를 감싸고 숨을 헐떡거리는 강을 응시하던 담영과 그를 따르는 부하가 따라와 안색을 살폈다. 혈색 좋던 얼굴은 한여름의 물이 증발되듯 사라지고, 빛이 사라진 창호지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 눈을 감은 강은 그들의 손길과 눈빛도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여린 짐승처럼 떨었다.

“전하. 어의를 부를까요?”

“아니….”

강이 띄엄띄엄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눈을 반쯤 떴다. 배를 감싸고 있던 팔이 스르륵 풀어졌다. 담영은 반사적으로 강의 손을 꼭 잡아주며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물었다.

“전하, 배앓이가 심하시면 폐하께 말씀을 올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강이 고집스럽게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울 것처럼 물기가 올라온 눈은 요동 없었다. 담영이 등을 토닥거려주자 안심이 되었는지 강은 토막 난 숨을 느리게 뱉어내며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아프다고 나서면 아바마마께 폐만 될 뿐이다. 지금은 형님이 가장 중요하고….”

강은 담영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러나 창백해진 얼굴로 웃어봤자 더 아파 보일 뿐이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에 잔잔하게 스며든 성숙함에 담영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올려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아바마마가 나 때문에 걱정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구나.”

약을 먹은 후로 지속되는 통증 때문인지 강은 오늘따라 지쳐 보였다. 언제나 생기 넘치던 눈도 한풀 꺾여있었다. 황제가 매만지던 하얀 목덜미는 강이 고개를 숙이자 빛에 물들어 도드라지게 보였다. 핏줄이 비치는 피부가 백옥처럼 하얗다. 목덜미 위로 나부끼는 몇 가닥의 잔머리가 보였다. 황제가 오늘도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머리를 풀고 머리카락을 매만졌는지, 엉성한 맺음이 보였다.

황제의 하얀 손이 강의 풍성한 검은 머리를 농밀하게 헤맬 때면, 풀 사이를 유영하는 백사를 보는 것 같았다. 마디가 분명하고 핏줄이 세월이 흐른 나뭇가지처럼 일어난 손이 강의 머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거침없이 만지면 배 안에서 열이 솟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강이 눈을 내리깔고 숨을 색색 내뱉은 소리에 겹쳐지는 황제의 고운 웃음소리, 그리고 머리카락과 소매가 부딪혀 마찰하는 바삭거리는 소리가 내부에 있는 경계를 무너뜨렸다. 강은 황제의 넓은 상체에 폭 안겨있었다. 두 팔은 황제의 목에, 가늘고 탄탄한 두 다리는 황제의 허리에 감겨 긴 이파리처럼 늘어졌다. 황제를 응시하는 강의 눈은 티 없이 맑았다. 의심이라는 걸 모르는 황자답게 황제를 보고 웃었고, 황제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웃었다. 황제의 손은 연신 강의 목의 부드러운 살과 머리카락, 손목, 허리, 허벅지 등등을 어루만졌다. 황제가 고개를 숙이고 강의 귀에 대고 아무도 듣지 못하게 속삭이면 강이 영롱한 웃음소리를 터트리며 황제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황제는 그런 강을 보며 무아지경에 빠져 눈을 깜박거리고, 숨을 힘겹게 터트리는 것으로 행위를 마무리 지었다.

자신의 냄새를 퍼트리는 짐승의 행위와 흡사했다. 황제는 인간의 모습을 했지만 내면의 반은 짐승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은 들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집요해지는 모습에 담영은 그럴 때마다 혼란을 감지하고 뒤로 물러났다.

작금의 상황도 그러했다. 외정과 내정의 중간쯤에 걸터앉은 강이 허리를 숙이고 소리 없이 앓는 모습을 보면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강에게 손 하나를 내어주고, 다른 손으로는 강의 척추를 따라 등을 만져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것조차 황제가 알아채고 자신의 목을 뎅강 잘라낼까 봐 두려웠다.

담영은 결국 등에서 손을 슬며시 떼어 냈다. 담영의 시선은 줄곧 우두커니 서 있던 부하에게 향했다. 용케도 담영의 눈빛을 알아챈 부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등을 돌려 사라졌다. 강의 몸을 보살피는 태의를 찾으러 떠난 것이다.

“전하. 몸이 많이 편찮으시면 잠시 황궁에서 쉬다 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강은 쥐며느리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가, 담영의 손을 지지대 삼아 꼭 잡으며 일어났다. 어지럼증을 느꼈는지 길고 날씬한 몸이 비틀거렸으나 중심을 잘 잡아 섰다. 강이 소리를 죽이며 숨을 흘렸다. 강의 숨은 있는 힘을 다 쥐어짜 달린 사람처럼 뜨겁고 거칠었다. 여전히 배의 통증을 느끼는지 허리에 손을 올리고서 허리를 살짝 숙였다.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가 안 그래도 냉정한 얼굴에 짜증이 서린 것처럼 보여 성격이 나빠 보였다.

“가자.”

강의 짤막한 명령에 담영이 수그러졌다. 이 소식을 알았다면 황제가 알아서 태의를 보낼 것이다. 담영은 강의 뒤에서 몇 걸음 물러나 걸었다. 강은 느리지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걸어가 미리 기다리고 있던 가마에 올라탔다. 내관들이 가마를 들어 올렸다. 불분명한 형태를 유지하며 쫙 펴진 햇빛이 강의 몸을 감싸 안았다. 허리를 반듯하게 세운 강이 재차 인상을 찡그리다 얼굴을 한 손으로 감쌌다. 허리를 뒤틀거나, 상체를 번갈아 가며 바꾸는 것이 통증을 그나마 덜 느끼려 애쓰는 것 같았다.

잠자리가 어색한 아이처럼 몇 번을 움직이던 강은 허리를 나른하게 젖히는 것으로 만족하고서 그 상태로 은우문 앞까지 갔다. 애마에 올라타려던 강은 배에서 치고 올라오는 통증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강의 입매가 비틀리고, 흐릿한 신음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간격을 두지 않고 때때로 엄습하는 통증이 태풍 같았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흐트러지고, 몸도 중심을 잃어 기울어지려는데 듬직한 팔이 강의 허리를 꽉 안았다. 그 힘에 정신을 차린 강이 자신도 모르게 “아바마마….”라고 중얼거렸다. 힘이 쭉 빠진 칭얼거림을 들은 사람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강을 안아 안장에 앉혔다. 힘을 주어 눈을 뜬 강은 자신을 안은 사람을 보고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

“이거야 원….”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과 혼탁한 웃음소리가 연이어 이어지다가 뚝 끊겼다. 지홍왕은 고삐를 정도를 벗어나 억세게 잡고 있는 강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말간 눈이 직시하는 것은 황제처럼 우뚝 솟은 궁이었다. 황금 기와와 어우러지는 붉은 벽돌을 보는 그의 시선에 개구진 미소가 감돌았다. 황제처럼 고아하고 우아한 얼굴에 짙게 퍼지는 미소에 강은 어리둥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많이 아파 보이는데, 그 상태로 왕부에 갔다가는 쓰러지지 않겠습니까.”

지홍왕이 친절한 척 물었다. 하지만 강은 섣불리 그를 믿지 않았다. 붉은 담에 휩싸인 황궁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딱 셋이었다. 어머니, 황제, 진영왕. 그 외에는 모두 웃는 입에 칼을 머금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강이 파리한 안색으로 중얼거리듯 말하자 지홍왕이 웃으며 턱을 매만졌다.

“예. 그 정도로 약하시면 안 되지요. 그래야 혼례도 치르시고, 아이도 많이 낳으시지 않겠습니까.”

지홍왕이 어깨를 으쓱하며 당연한 말을 농담처럼 내뱉었다. 지홍왕은 여전히 의심의 그림자를 감추지 않는 강을 보며 눈웃음을 덧그렸다.

“이제 곧 혼례를 치르실 테니 더더욱 강해지셔야죠.”

“그걸 어찌 아십니까.”

강이 아픔을 억누르며 물었다. 이상한 대답을 늘어놓으며 장난을 칠 것 같던 지홍왕이 웃음기를 서서히 누그러뜨리며 상냥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혼례를 결정하셨습니다. 아마 얼마 안 있어서 희소식이 갈 겁니다. 영현왕도 황족이니 황족의 명분을 다하셔야지요.”

“지홍왕께서 그리 말씀을 안 하셔도 제 몫은 제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강이 눈을 내리깔며 쌀쌀맞게 대답했다. 서늘한 이목구비에 스민 냉기가 표독스럽긴커녕, 고양이가 발톱을 세우고 경계하는 것 같았다. 평상시보다 느슨하게 묶인 머리를 유심히 보던 지홍왕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걸음은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는 강이 멈추라 할 새도 없이 다가와 강의 뒤에 올라탔다. 등자를 밟지 않았는데도 능숙한 솜씨였다. 그는 강의 허리에 팔을 감고, 다른 손으로 고삐를 잡은 채 말의 머리를 돌렸다.

“지금 무슨…!”

강이 놀라서 더듬거리자, 지홍왕이 뒤에서 “쉬잇.”이라고 달랬다. 강이 휙 돌아보자 지홍왕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황족으로서 본분을 다하시려면 건강부터 챙기셔야죠. 지금 그 몸으로 가셨다간 왕부에서 심하게 앓으실 터이고, 잘못하면 혼례까지 미뤄질 터이니 저와 함께 폐하께 갑시다. 폐하께서 다 알아서 잘 보살펴 주실 겁니다.”

“싫습니다. 저는 왕부로 돌아갈 것이니, 내려가 주십시오.”

강의 목소리엔 대쪽 같은 위엄이 있었으나 지홍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을 움직였다. 그는 태연하게 달리면서 창백하게 질려가는 강을 힐끔 보고 웃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별걸 다 하고 있습니다.”

“예?”

확실하게 들었으나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혼잣말에 강이 되물었다. 그러자 지홍왕이 나지막이 웃으며 강의 허리에 손을 휘감았다. 황제처럼 무언가를 찾듯 더듬던 그의 손이 멈췄다.

“제가 요새 폐하의 사소한 일까지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막 뒤이어 말하던 지홍왕은 말을 멈췄다. 강은 전보다 심해진 통증에 숨까지 멈추고 잘게 떨고 있었다. 강이 느끼는 통증이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아는 지홍왕은 혀를 짧게 찼다. 없는 걸 만들어내는 약을 지속적으로 먹고 있으니 아픔이 없을 리 없었다. 서역에서 온 자도 몇 번이나 강조했던 얘기를 떠올리던 지홍왕은 얼굴을 굳히고 속도를 높였다. 말은 더 멀리 가지 못했다. 고통에 울먹거리는 소리를 내는 강을 무감한 눈으로 지켜보던 지홍왕은 강을 조심스럽게 안아 내렸다. 강을 바닥에 앉힌 지홍왕은 턱에 고정된 끈을 풀어 관을 벗어던졌다. 그는 양손으로 화려한 쪽빛 예복을 찢어버렸다.

“제가 늑대로 변하면 올라타십시오.”

갑자기 멈추지 않는 통증에 급기야 눈물을 대롱대롱 매단 강이 지홍왕을 보았다. 그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눈을 떠보니 엄청난 크기의 늑대가 강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길고 두툼한 주둥이로 강의 얼굴이며 가슴을 툭툭 두들겼다. 황제와 비슷했지만 전혀 다른 촉감에 강은 진저리쳤다.

그러나 고통이 점점 심해지자 강은 끝내 포기하고 지홍왕의 등에 얌전히 올라탔다. 풍성하게 솟아난 털을 약하게 쥐었다. 지홍왕은 털이 당기는 느낌을 인식하고서 황궁을 달렸다. 은빛 선이 유령처럼 생겨나고,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에 그것을 본 궁인들이 허겁지겁 엎드려 절을 했다.

지홍왕은 황제가 있는 곳을 찾아 코를 킁킁거렸다. 은색 털에 휩싸인 뾰족한 눈이 예리하게 황제가 있는 장소를 보았다. 황제는 원림에 있었다. 늑대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는 원림 입구로 향하자, 호위들이 알아서 몸을 틀어 그들이 들어가게 해주었다.

늑대는 청록색으로 물든 세상으로 진입했다. 강은 그 위에 엎드려 몸을 웅크리며 잘게 떨었다. 어째서 이렇게 배가 아픈 것일까. 배탈이 난 것일까. 내관이 제발 와달라는 부탁에 너무 빨리 달려온 탓일까…. 여러 이유를 생각해봤지만 이리 아픈 연유를 몰라 억울해 눈물이 났다. 아픈 게 싫었다. 그리고 약해 보이는 것도 싫었다.

자신은 혼례를 치를 당당한 나이였고 성인이었다. 항상 강해야 했으며 듬직해야 했다. 그래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황제도 지켜줄 수 있는 친왕이 될 것이니.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황제가 자신을 친왕으로 탐탁지 않아 할까 봐 불안해졌다. 그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굳세게 쥔 주먹으로 아주 살짝 솟아오른 땀과 눈물을 닦아냈다. 강은 고개를 틀어 흔들리는 그림자를 보았다. 흙에 돋아난 그림자가 바람을 타고 위태롭게 움직였다. 언젠가 보았던 광경이었다. 그때도 황제와 원림을 왔던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숨을 간헐적으로 내쉬며 과거를 돌이켜 보던 강은 흐릿하게 웃었다. 황제가 원림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늑대로 변해 자신을 태우고 원림을 총총 거닐던 날이었다. 아직 어렸던 강은 황제의 등에 올라타 까르륵 웃었고, 황제는 강의 웃음소리에 기분이 좋아 강아지처럼 뛰어다녔다. 늑대가 덩실덩실 움직이면 강의 몸도 덩달아 덩실덩실 움직였다.

단내가 솔솔 풍기는 과거에 흠뻑 젖어있던 강은 불편한 움직임이 멈추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올렸다. 황제는 돌에 걸터앉아 물고기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지홍왕이 온 걸 눈치챈 황제가 고개를 젖히고서 웃었다. 그의 안면에 퍼진 미소에 강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켜 그에게 걸어갔다.

“아바마마, 아파요….”

강이 초췌해진 얼굴과 목소리로 그에게 엉겨 붙었다.

“이상하게 배가 아파요….”

“이런.”

황제가 강의 등을 토닥이다가 뺨을 잡아 올렸다. 강의 크고 검은 눈이 축축했다. 다 하얗고 창백한데, 눈가만 발그레했다. 입술도 선홍색이었다. 울음을 참느라 붉어진 부분을 보며 황제가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러나 강은 피하는 그를 가느다랗고 쭉 뻗은 하얀 팔로 막았다. 강은 그저 안긴 것뿐이었지만 황제의 머릿속은 축축하게 젖다 못해 침전되었다. 아예 푹 물들었다.

황제는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강의 마른 배를 만졌다.

“여기가 아픈 것이냐?”

“네…. 아파요.”

목소리는 울음기가 가득했지만, 얼굴은 고통을 참느라 눈물도 없었다. 식은땀이 가득했다.

“거기가 아파요. 그런데 아바마마가 만져주시니까…. 그래도 괜찮은 거 같습니다.”

황제가 웃었다. 그러다가 끝이 뭉툭해졌다. 황제의 목소리가 거칠어지다가, 한숨 같은 소리를 내며 강의 배를 슬슬 쓸어 만졌다.

“미안해야 하는데….”

황제가 자신의 품에서 안온함을 찾아가는 강을 보며 소리 죽여 웃고, 속으로 속삭였다.

‘기분이 정말 좋구나.’

“통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느냐.”

황제가 땀에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며 물었다. 그의 손끝과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따스하고 부드러워 강은 그가 어떤 식으로 웃는지 느끼지 못했다. 강은 황제의 손목을 잡아 아픈 부위를 계속 만지도록 강요했다. 황제의 금안에 요기가 서리며 동공이 뾰족하게 가늘어졌다. 그의 본능에 불씨가 붙었다. 강의 뜨거운 숨은 불씨를 키우는 바람이었고, 강의 흐릿하고 멍한 눈은 기름이었다.

황제는 나무에 기대앉아 자신의 품을 둥지 삼아 웅크리고 있던 작은 새 같은 강을 허벅지에 반듯하게 앉혔다. 허리가 쭉 펴지는 바람에 배에 통증이 직격으로 와 강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황제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들을 통해 미래의 아들, 희비, 태자를 낳아준 황후를 떠올렸다.

음습한 생각에 젖어 눈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럴싸한 아버지의 감투를 쓰고 그가 상냥하게 물었다.

“어떤 식으로 아픈 것이냐? 아비가 태의를 만나면 상세히 너의 상태에 대해 물어봐 주마.”

그래야 태가 제대로 생기고 있는지, 혹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지, 임신이 제대로 될 것인지 알 수 있으니.

황제는 음흉한 속내를 억누르고 웃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급증하는 고통에 고개를 젖힌 강이 입술을 달싹였다. 붉은 입술을 비집고 나온 혀도 붉었다. 입안도 붉고, 눈가도 붉었다. 황제는 품에 안겨 옴짝달싹도 못 하고 숨만 내뱉는 아들의 뺨을 핏줄을 따라 만졌다. 강은 상냥하기 짝이 없는 손짓에 이슬같이 매달린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배 안에 뭔가… 움직이는 듯합니다. 마치 단도로 안을 푹푹 찌르는 것 같은 찌릿함도 들고… 허리를 제대로 펼 수가 없습니다, 아바마마.”

통증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던 강이 원인 없는 병에 겁을 먹었는지 황제의 소매를 꼭 잡았다. 황제는 걱정 말라는 듯 강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소자가 잘못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천자가 널 잘못되게 두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진지하게 속삭이며 강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의 입술이 강의 작고 여린 손등에 착지했다. 나비가 꽃을 찾아 내려앉듯, 진중하고 차분한 입맞춤이었다. 입술을 타고 흐르는 온기와 애정이 불분명하게 뒤섞여 강의 피부를 타고 들어가 가슴을 느리게 만들었다.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뛰던 마음은 가라앉았다. 통증은 지속되었으나 강은 자신을 가둔 황금빛 세계를 보고 안도했다.

황제가 있다면 상관없었다. 그가 자신을 지켜줄 테니까.

“천자를 떠나, 난 너의 아비다. 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또한 연혼이라는 인간으로서 널 지켜줄 것이다.”

고백이었다. 당사자는 절대 알 수 없는 암호로 둘러싸인 고백. 열렬한 감정이 밑바닥에 깔린 고백은 아버지라는 위장을 했다.

황제는 문득 자신이 강의 아버지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겁이 많고 유순한 강에게 타인으로 다가갔다면 연모의 감정을 이런 식으로 외설적이게 언급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제의 고백은 강의 귀를 간지럽게 만들었다. 강은 목덜미를 깃털로 비빈 듯한 감각에 어깨를 안으로 말고, 부끄러움에 물든 낯을 황제의 가슴팍에 숨겼다. 강의 작은 몸이 황제의 상체에 딱 들어맞았다. 황제는 웃음을 흘리며 강의 허리를 안아 번쩍 올렸다. 강은 움직일 때마다 거세지는 통증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신음했다. 황제의 목을 세게 잡아도 될 테지만, 강은 그러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픔을 참느라 황제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 고통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었다. 나이답지 않게 서툴게 구는 자신을 받아주는 황제가 고맙고 미안할 뿐이었고, 그에게 혹여나 상처를 낼까 봐 그 와중에도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황제는 끈적하게 달라붙는 아들의 뺨을 음미하며 손가락으로 기간을 헤아려보았다. 하사한 탕약을 먹은 지 한 달하고 닷새가 지나고 있다. 남자의 몸에 태를 억지로 만들려니 아플 수밖에 없었다. 생살을 찢어 그 안에 뭔가를 욱여넣는 듯한 통증이라고 설명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렇게 참고 있는 게 용할 정도였다. 다른 이였다면 아프다고 배를 감싸 쥐고 데굴데굴 굴렀으리라.

그러나 아픈데도 자신이 주는 약이라고 꼬박꼬박 챙겨 먹었을 테지. 황제는 점점 앓는 소리를 크게 내는 강을 안장에 앉혔다. 황제는 원림까지 말을 타고 온 터라, 돌아갈 때도 말을 타야 했다. 강이 고삐를 쥐고 허리를 숙였다.

“오늘은 왕부에 가지 못하겠구나. 이리 아파서 갈 수나 있을지…”

황제가 강의 뒤에 올라타 허리를 단단한 팔로 휘어 감았다. 넝쿨처럼 허리에 감겨드는 그의 팔뚝에 자그마한 손을 올린 강이 고개를 말없이 끄덕였다. 이제 허리까지 옮겨간 통증에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지홍왕이나 황제의 충고처럼 왕부에 가기 전에 쓰러질 것이다. 강은 자신의 등에 닿는 체온에 기댔다. 제법 잘 여물어가는 강의 몸이 무안할 정도로 황제의 상체에 가려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색 늑대도 입을 쩍 벌리고 웃으며 그림자에 몸을 묻었다. 황제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는 동생을 향해 싱긋 웃어준 후, 강과 함께 원림을 벗어났다.

“몸이 나아질 때까지 당분간 황궁에 머물도록 하거라.”

“…안 돼요, 아바마마.”

자신을 돌보다가 하늘로 돌아간 안 내관이 그토록 고치라고 말했던 입버릇이 튀어나왔다. 강은 그런 줄도 모르고 고통에 범벅이 된 눈을 들어 올려 황제를 보며 봉긋 솟아오른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만 나아지면 바로 왕부로 돌아가겠습니다.”

황제가 말없이 강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들어 올려 정면을 보았다. 억세게 다물린 입술과 근육이 당겨진 턱을 보니, 그의 심기가 그리 좋지 않은 듯했다. 강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고삐를 쥐고 있는 그의 손등을 소심하게 만졌다. 황제가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강은 눈을 내리깔고 황제의 핏줄, 손등에 돋아난 힘줄을 뭉툭한 손끝을 세워 일일이 만져보았다.

“저에게도 책임질 생명이 있습니다. 설이나 고양이….”

특히 저잣거리에서 데려온 설은 강이 없으면 밥도 잘 먹지 않았다. 자신을 유독 잘 따르는 설의 멍청하게 귀여운 얼굴을 떠올리던 강은 쓰게 웃었다. 뾰족하게 올라간 황제의 눈꼬리가 심상치 않았다.

“설이는 소자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도 황궁으로 데려오면 될 것을.”

황제가 깔끔하게 강의 문제를 해결했다. 강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황제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어차피 유원에도 동물들이 있으니 거기에 있어도 된다.”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천자가 된다는데 뭐라 할 자가 어디 있을까.”

황제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강을 보았다. 금안이 웃자 강도 어색하게 웃었다. 황제는 강의 이목구비를 따라 눈을 굴렸다. 그의 말은 강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속도로 움직였기에 평상시보다 느리게 내정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말발굽이 사금파리같이 쪼개진 햇빛에 닿았다. 내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가장 먼저 천금궁이 보이고, 더 안으로 들어가면 비빈들의 처소가 나타났다. 그 둘을 이어주면서도, 명확하게 분간해주는 중궁은 없었다. 중궁이 있어야 할 터는 매우 깔끔했다. 가끔 휘날리는 흙먼지와 낙엽, 초목들을 제외하면 아예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황제가 여태껏 원했던 황후의 자리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강아.”

“네.”

강이 고통에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제는 내관들과 궁인들, 친군들의 보호 아래 내정에서 더 안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사람의 발자국,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내정은 두 사람의 세계인 듯 안온했다. 황제의 말은 중궁이 있어야 할 공터에 도착했다. 눈을 감은 채 그의 등에 몸을 맡기고 있던 강은 그가 뺨을 만지는 손에 눈을 느리게 떴다.

“황후마마가….”

강은 멍하니 중궁에 들어선 자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황후가 간택된 겁니까, 아바마마?”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황제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강은 왼쪽을 시작으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텅 빈 공간을 관찰했다. 황제의 수많은 비빈, 자식들 중에 누구인가. 태자는 진영왕이면 좋을 텐데. 사심 가득한 생각을 하던 강은 황제가 목덜미를 만지는 손에 정신을 다잡았다.

“하지만 황후 마마가 사시기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던 강은 황제가 웃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황제는 자신의 시야 중앙에 걸린 강의 통통한 뺨을 보고 웃고 있었다. 16살, 다 컸다면 다 컸다고 말할 수도 있고, 아직 작다면 작다고 할 수도 있는 나이였다. 강의 체격이나 손, 발은 성인처럼 크고 단단했지만 여린 뺨과 목, 입술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빨아들여서 먹어치우고 싶을 만큼. 음습한 생각 속에서 자유롭게 나뒹굴던 황제가 고개를 숙여 강을 보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그 어떤 춘추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궁을 만들어 선물해줄 것이다. 천자의 아이를, 태자를 낳아줄 황후이니 말이다. 이곳은 황후의 세상이 될 것이야. 영원히 천자의 유일한 연인으로 남아 이곳에 살 테지.”

당연한 말이었다. 황후는 황제의 사람이었다. 황후는 황제가 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어째서 황제의 말이 소름 끼치게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입안이 열 때문인지 버석하게 말라 갔다. 강은 중궁에서 시선을 돌렸다. 강은 지친 기색을 감추지 않고 황제의 품에 완전히 몸을 늘어뜨렸다. 강은 눈을 감고서 입술을 움직였다.

“…아바마마, 이제 그만….”

“응?”

탁한 목소리로 속삭이던 강이 황제의 손목을 잡으며 애처롭게 말했다.

“쉬고 싶습니다.”

왕부에 하루 안 간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니, 어서 가서 쉬고 싶었다. 허리가 몹시 당겨와 참을 수 없었다. 칼끝으로 아랫배 가죽을 긁는 듯한 느낌에 강이 이를 악물었다. 황제는 “그만….”이라고 중얼거리는 강의 얼굴을 보며 혀를 찼고, 속으론 웃었다.

황제는 말을 내버려 두고 강을 직접 안아 침소로 돌아왔다. 화려한 휘장을 찢듯이 거두었다. 몸을 눕히자 강이 본능적으로 몸을 말았다. 새우처럼 둥글게 말린 등을 쓰다듬어주고, 흠뻑 젖은 땀까지 닦아주었다. 강의 속눈썹에 매달린 눈물 몇 방울이 황제의 움직임에 따라 흐트러졌다. 황제의 시선이 겨우 선 바늘처럼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황제는 강의 예복을 자신의 손으로 벗겼다. 누구에게도 맡기고 싶지 않았다. 아들의 진줏빛 육체는 자신의 것이었다. 병에 걸린 사람처럼 떨리는 그의 손이 가장 먼저 겉에 입은 남색 예복을 벗겼다. 강의 옥대까지 풀어 바닥에 내던졌다. 강의 옷매무새가 흐트러지며 가슴이 드러났다. 뽀얀 가슴이 보였다. 만지면 무척 부드러울 것 같은 피부였다. 피부를 타고 흐르는 땀 한 방울을 본 황제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위험을 알리는 깃발이 머리에서 쉴 새 없이 요동쳤다.

안 돼, 정신 차려. 지금은 안 돼.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채찍질하는데, 문밖에서 내관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영현왕께서 드실 탕약을 가져왔사옵니다.”

“가져오라.”

문이 단계적으로 열렸다. 평생을 내관으로 살아온 탓에 허리와 등이 굽은 사람이 거북이처럼 다가와 탕약을 내밀었다. 황제는 약 그릇을 들고 강에게 다가갔다. 내관과 궁녀들은 진작 눈치를 채고 자리를 떠났다. 황제가 이불을 아이처럼 꼭 쥐고 고개를 숙인 강을 불렀다.

“강아.”

“네….”

강이 억눌린 신음과 함께 대답을 했다. 황제는 여유 있는 손으로 강의 땀을 닦아주며 채근했다.

“약을 먹어야지.”

“너무 아픈데….”

강이 고개를 반 정도 들고서 중얼거렸다. 황제의 침전이라 마음이 놓였는지, 강의 얼굴에 경계심이 싹 빠져나가 있었다. 강은 황제에게만 보여주는 토라진 얼굴로 응석을 부렸다. 강은 고개를 저으며 안 먹겠다고 심통까지 부렸다. 강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일까. 이 탕약이 고통의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황제는 식어가는 약 사발을 물끄러미 보다가 강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몸이 움직이면 따라서 요동치는 통증에 강이 헐떡였다. 양손으로 배를 감싸고 있는 손이 처연했다. 황제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강을 응시했다. 가감 없이 떨어진 금안이 따사로워 강은 본능마저 지웠다.

“아비가 말하지 않았느냐. 약은 꼭 먹어야 한다고.”

“하지만 너무 아픈걸요….”

강이 먹고 싶지 않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황제는 풀 죽은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는 강의 뺨을 애틋하게 만졌다. 부드럽게 감기는 피부는 중독성이 있었다. 계속, 죽을 때까지 만지고 싶었다.

“아프니까 더욱 먹어야 한다. 계속 아프면 힘들 테니.”

“…허리를 세우는 게 힘들고…. 배가 당겨서….”

“그럼 아비가 먹여줄까.”

강이 말간 시선으로 황제를 보다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허락의 신호에 황제가 선선하게 미소짓는다. 사발을 든 손에 기쁨이 너울거렸다. 강은 그가 약 그릇을 입에 대줄 줄 알고, 가만히 입술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건 다른 것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약을 먹으면 흘릴 테니, 다른 방법으로 먹여주마. 그것이 더 확실하고 깨끗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네, 아바마마.”

순종적이고 착한 아들이 대답했다. 황제는 그릇을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천천히 쓴 약을 입에 머금었다. 태를 만드는 약이라 그런지 무척 썼다. 혀가 아릴 정도였다. 이런 약을 쓴소리 없이 먹다니.

아이가 없으면 억울할지도 모른다. 이런 고통을 감내했으니 반드시 아이는 생겨야 했다. 황제는 약을 머금은 상태에서 눈웃음을 지으며 강을 보았다. 황제가 고개를 숙여 강에게 입을 맞추었다. 작고 보드라운 입술이 닿은 순간, 황제는 몸에 힘을 주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사발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을 잡은 유일한 이성적인 인내였다.

“아….”

하지만 마음은 정반대로 달린다. 강의 입안을 더욱 탐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혀가 요사스럽게 움직인다. 약을 먹여준다는 핑계로 입천장, 혓바닥, 매끄럽고 탱탱한 입 안쪽까지 다 맛보았다. 꿀 그 자체였다. 이렇게 달 수가 없었다. 미처 영글어지지 못한 입술은 달다 못해 미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약을 삼키느라 강의 목이 젖혀졌다. 빛을 받은 검은 머리카락이 붉은 보에 쏟아졌다. 감은 눈은 약간의 민망함을 참느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달아오른 뺨은 오동통하고, 자신의 입술과 혀를 머금은 앙증맞은 입은 타액으로 야릇하게 젖었다.

강은 황제가 먹여주는 약을 의심 없이 삼켰다. 사내의 상징이 위아래로 움직여 그것을 증명했다. 약을 먹여주느라 두 사람의 혀가 공중에서 얽혀들었다. 다 먹이고 나서도 한참을 강의 입에서 노닐던 황제가 고개를 떼어냈다.

강이 눈을 슬그머니 떠서 황제를 보았다. 황제가 다시 약 그릇을 입에 대고 있었다.

“아바마마?”

그리고 아까 전과 다른 속도로 느리게 입을 부딪쳤다. 입술이 말캉하게 부딪히고, 신음은 안에서 속절없이 뭉개진 채로 강은 약을 받아먹었다. 강은 자세가 불편했는지, 몸을 모로 하며 황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황제가 숨을 삼키며 강을 더 세게 안고, 입술을 안으로, 계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혀가 여린 점막을 마구잡이로 탐닉했다. 강의 입은 침입자를 쫓아내긴커녕, 순순히 받아들이고 그의 폭력까지 감내했다. 쪽, 하는 음란하게 젖은 소리가 강의 의식을 깨웠다. 강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고개를 젖혔다.

“입을 맞춘 건 오랜만이라.”

황제가 어릴 때 몇 번 입술로 쪽 소리 나게 뽀뽀한 적이 있었던 강이 그때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강의 뺨이 오늘 처음으로 생기 있게 움직였다. 입술은 황제가 이른 시간에 얼마나 빨았는지 통통하게 부었다. 만개한 꽃잎 같았다. 움직임과 다른 모든 것을 머리에 박아 넣을 기세로 감상하던 황제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싫으냐?”

감히 싫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강은 대답 대신 한 손을 그의 목에 둘렀다. 강이 눈을 반쯤 내리떴다. 입술이 벌어졌다. 약을 달라는 뜻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 음심만 부추기는 행동에 고고히 웃고서 약을 머금었다.

“으읍….”

검은 약이 황제의 입을 통해 강의 목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쓰디쓴 약이 혀를 잠식해 얼굴이 찌푸려졌으나 황제가 농밀하고 질척이는 혀로 입안을 깨끗하게 만들어주었다. 황제의 혀는 강이 모조리 삼킨 약을 도로 가져가기라도 할 듯 더 깊숙이, 동굴을 탐험하는 사냥꾼처럼 파고들었다. 강의 호흡은 거칠어졌다. 가장 기본적인 숨 쉬는 법도 망각하고 강은 황제의 혀를 따라 움직였다. 강의 볼은 질주를 한 사람처럼 달아오르고, 손은 허공을 유영하다 황제의 어깨와 등에 머물렀다. 머리는 더욱 아래로 젖혀졌다. 목이 빳빳하게 아파왔으나, 황제가 본능적으로 아들임을 깨닫고 팔로 목을 받쳐 끌어안았다. 황제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그의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북소리처럼 우렁차게 들렸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미모가 강의 시야에 꽉 들어찼고, 귀에는 가슴에서 나는 소리가 걸려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사지가 그에게 붙들려있었다.

“흐읏…. 아바마마, 아…!”

숨을 쉬게 해달라고, 부탁하려 입술을 움직인 순간 황제가 그것조차 앗아갔다. 황제는 겨우 숨의 끝자락을 붙든 강의 입술을 뒤덮고 놔주지 않았다. 그의 혀가 넝쿨처럼 지독하게 얽혀 혀와 입안이 얼얼해졌다. 강은 약을 머금지 않고 입술을 탐하는 그를 당혹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연약한 초목처럼 떠는 그의 속눈썹을 발견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왜 그가 떠는 것인지, 세상의 모든 것을 쥐고 있는 그가 왜 약해 보이는 건지…. 처음으로 그가 황제, 그리고 아버지라는 위엄 있는 지위를 떠나 한 사람이란 걸 자각하자 마음이 수그러졌다. 강이 그의 등을 쓰다듬고, 어루만져주자 황제는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혀가 강의 고인 타액을 빨아들이자, 미처 들어가지 못한 타액이 주르륵 강의 턱을 타고 흘렀다.

“아바마마, 잠시만요. 숨을….”

강은 타액으로 범벅이 된 선홍색 입술을 다급하게 움직여 황제를 달랬다. 황제는 이성을 잃은 눈으로 강을 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강은 등에 번개처럼 타고 흐르는 섬뜩함에 자신도 모르게 황제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아무리 밀어도 타고난 골격과 탄탄하게 유지한 근육으로 뒤덮인 그를 이길 수 없었다. 황제는 아이 장난을 받아주듯 강의 손짓에 밀려가 주다가, 손목을 단숨에 잡아 눌렀다. 강은 아릿하게 흐르는 통증에 신음했다. 황제는 강을 품에 안은 채, 행동을 억압하며 느슨한 웃음이 걸린 입술을 달싹거렸다.

강은 원인도 모르는 두려움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빤히 보았다. 맑고 투명한 검은 호수에 황제가 군림했다. 그는 강이라는 세계에서도 군주였고, 황제였다. 그를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대로 도망갈까?”

황제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강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과 말에 어리둥절한 듯 눈을 굴렸다. 그러나 황제가 갸름한 턱을 쥐고 제멋대로 돌리는 탓에 그를 뚫어지게 봐야 했다. 황제가 강의 뺨을 슬며시 쥔 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체향이 짙어졌다.

“황제고 뭐고 다 관두고 너랑 살까.”

“하지만 아바마마는 연나라의 유일한 군주이신걸요. 아바마마가 황제를 뿌리치시면 하늘께서 가장 먼저 슬퍼하실 거예요.”

강이 머뭇거리며 그를 만류하려 손을 들어 올렸다. 강의 손이 허공에서 나부꼈다. 황제는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을 눈으로 좇았다. 그의 손은 이미 강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손등에 입을 맞출 것처럼 손등을 입가에 가져간 그는, 입은 맞추지 않고 강의 살 냄새를 빨아들였다. 점막이 황홀한 냄새에 젖어 들었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심장은 오로지 강에게 반응했다. 강은 피부를 타고 전율하는 간지러움에 몸을 살짝 떨었다. 이런 감각, 감정은 처음이었다. 모르는 것을 처음 접했을 때 발생하는 두려움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무의식적으로 떨면서 강은 황제의 옷깃을 세게 잡았다.

“아바마마, 그냥 약만 먹여주세요.”

“응?”

황제가 친절하게 웃으며 그윽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는 난데없이 대화의 흐름을 트는 강을 즐겁다는 듯 보고 있었다.

“뭐라고?”

황제가 뺨과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며 연신 묻자 강이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약을 먹여주신다고… 하셨으니까… 지금은 빨리 약을 먹고 쉬고 싶습니다.”

배가 아픈 강에게 약을 빌미로 시작된 입맞춤은 부드럽고 친절했다. 하지만 입을 맞출수록 뭔가 이상했다. 부어오른 입술에 닿는 황제의 입술이 거칠어지고, 그의 눈이 어두컴컴해졌다. 강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가 다시 원래의 아버지로 돌아오길 바라며 그의 옷깃을 어릴 때처럼 잡고 애교를 부렸다.

“약을 주세요, 아바마마. 아프고 싶지 않아요….”

그의 시선이 멎고, 숨도 잦아들었다. 격침은 예고치 않게 찾아와 그의 마음을 망쳐놓았다. 황제는 품에 가만히 안겨 눈치를 살피는 강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패배했다, 완전히.

그는 눈을 감고 자조적으로 웃었으나, 이내 웃음은 짙게 변했다. 그의 눈꼬리는 살랑살랑 움직여 고운 눈웃음을 만들어냈다. 패배는 빠르게 인정하고 다음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쟁취를 이뤄낼 수 있었다. 신을 이용해서라도. 혹은, 아버지라는 지위를 이용해서라도.

“약을 더 다오.”

황제가 문 너머의 내관에게 명령했다. 황제는 강을 마주 보게 하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중얼거렸다.

“올해 나이가 열여섯이지?”

“네.”

강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황제가 강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많이 컸구나.”

그리 말한 황제가 들어오는 내관에게서 약을 받으며 이어 말했다.

“정말 혼례를 치러도 되겠어.”

“정말이요?”

강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황제는 진정하라는 의미로 강의 벌어진 입가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눈치껏 말을 알아들은 강이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다소곳하게 앉아 황제의 입술을 기다렸다. 이상한 기류를 진작 알아차리고 있었으나 반항할 수도,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싫어할 테고, 그의 명령을 거부하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싫어도 참을 수밖에.

“얼마 남지 않았구나. 어서 약을 먹고, 나아져야지?”

그렇게 말하며 그가 약을 머금고 고개를 숙였다. 강 또한 눈을 감고 입을 벌려 황제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약을 꿀꺽, 꿀꺽 삼키는 소리가 막 자리를 벗어나던 내관의 귀에 당도했다. 그러하면 안 되는 일이었으나 내관을 그만 뒤를 돌아보았다.

황제의 드넓은 등이 보였다. 그의 등은 광활한 대지처럼 강을 가리고 있었다. 강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황제의 목에 두른 가는 팔이었다. 체모가 거의 없는 팔이 소매에서 뻗어 나와 황제를 끌어안고 있었다.

저 의미가 무엇인지 황자가 알고 있을까. 얼굴이 창백해진 내관이 서둘러 떠났다.

“숨을 못 쉬겠….”

“코로 숨을 쉬어야지.”

황제가 웃음을 터트리며 아들에게 입을 맞추면서 코로 숨을 쉬라고 말하는 게 내관의 귀를 간지럽혔다. 강이 숨을 거칠게 쉬는 게 노골적으로 들렸다. 첫 입맞춤인지도 모르고 당황스러워하며, 겁에 움츠러들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호흡을 통해 느껴졌다.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헐떡거리는 숨소리를 희석시키는 중저음의 웃음소리에 궁녀들은 눈을 돌렸다. 내관들은 가면을 뒤집어쓰고 무감한 얼굴로 그 자리를 지켰다.

*

뭔가 이상하다. 강은 부풀어 오른 입술을 동경을 통해 보며 의문에 빠졌다. 원래 약을 먹일 때 그렇게 혀를 깊숙이 넣는 것인가. 약을 다 먹인 후에도 왜 입을 맞추고 계셨던 걸까. 흐르는 약까지 손가락으로 훑어서 넣으신 건…. 황제의 입맞춤 하나하나를 되짚어 보며 생각하던 강은 얼굴을 붉히며 동경을 내렸다. 입을 맞춘 채 웃음을 흘리던 황제가 계속 생각났다. 그는 숨을 못 쉬는 강을 아무것도 모른다며 놀렸고, 강은 그의 웃음소리와 농을 들으면서도 숨을 쉬지 못해 헐떡였다. 황제는 급기야 강을 침대에 반듯하게 눕혀 자신의 안에 가두고 입술을 계속 붙이고 있었다.

그것이 정녕 아비가 할 행동인가. 강은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을 잡던 황제의 손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크고, 길고, 단단한 그의 손은 미약하게 반항하는 손목을 용서하지 않았다. 강은 잔상처럼 맴도는 그의 행동에 눈을 돌렸다. 설이 강의 침대 밑에서 오두방정을 떨며 놀고 있었다. 강이 장난감으로 건네준 뼈다귀가 마음에 들었는지, 입에 넣고 씹거나 발로 굴리거나, 헥헥거리며 웃고 있었다. 마치 눈밭에서 신이 나 뛰어놀던 황제 같았다.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지켜보던 강은 열리는 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유모가 들어오고 있었다. 유모의 손에는 황제의 혼례식에 입을 예복이 들려있었다. 황가의 소속임을 알리는 다홍색 옷엔 눈이 아찔할 정도로 화려한 장식이 수놓아져 있었다. 금실로 수놓아진 장식들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던 강은 배에서 꿈틀거리는 묘한 움직임에 인상을 확 찡그렸다. 약을 먹으면 나아질 거라고 했는데, 나아지긴커녕 통증은 더할 나위 없이 심해져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원래도 날씬했던 몸은 최근 들어 말라가고 있었다. 

허리에 손을 올린 강이 천천히 일어났다. 숨을 참았다가 뱉어낸 강은 입고 있던 평복을 벗고 유모가 건네주는 예복을 받아들었다. 장식도 호화로운데 옥대까지 보석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아직도 배앓이를 하시는 건가요?”

유모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드러내며 물었다. 강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회피했다. 어머니 같은 유모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입술도 부으셨네요.”

강의 파리한 안색을 지켜보던 유모가 탄식했다. 강은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작은 얼굴이 반이나 가려졌으나, 퍼져가는 홍조까지 가리진 못했다. 유모는 어딘가 미숙하고 수줍음을 타는 강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강의 눈이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바닥을 기자 유모는 팔짱을 끼고 한심스럽게 강을 보았다.

“설마 혼례도 치르지 않으셨는데 입을 맞추신 겁니까?”

“아니야.”

강이 고개를 휙 들고 대답했다. 강은 아예 목까지 붉게 물들이고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술이 한참 동안 나비처럼 바르작거렸다. 입술선이 부드럽고 아래가 더 두툼한 입술은 누군가에게 물고 빨린 것처럼 먹음직스럽게 익어있었다. 잘 익은 사과처럼 영글었다. 강은 풀 죽은 손으로 예복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게 아니야.”

“그러면 왜 입술만 그렇게….”

“약을… 약을 먹다가 어쩌다 보니…”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에 강은 몸을 돌렸다. 강은 끝없이 몰아치는 아득함에 눈을 감고 예복에 얼굴을 묻었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자신도, 황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의 분위기, 감정에 휩쓸려 원인을 깨닫지 못하고 강은 홀로 혼란 속에 서 있었다. 손끝이 마비된 듯 떨려왔다. 황제가 자신에게 한 입맞춤의 의미는 정말 아버지로서 한 것일까.

“전하.”

유모는 고개를 예복에 파묻은 채 미동도 없는 강을 불렀다. 강은 예복에서 얼굴을 떼어냈으나 여전히 등을 돌리고서 입을 열었다.

“나가줘.”

“…예. 알겠습니다. 설이도 데리고 나갈까요?”

“아니. 설이는 내버려 둬.”

유모가 자리를 비워줬다. 문이 닫히고, 정적만이 낙엽처럼 뒹굴었다. 강은 스산하게 깔린 어둠을 짓밟으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바닥에서 뼈다귀를 가지고 놀던 설이 폴짝 올라와 강의 위에 올라탔다. 강은 황제처럼 크진 않지만, 제법 성견으로 모습을 갖춰가는 설의 얼굴을 만졌다. 설이 킁킁거리며 코를 강의 손바닥에 대었다.

“아바마마도 처음에 이러셨는데. 원래 강아지들은 다 그런가.”

황제가 들으면 몹시 싫어할 소리를 중얼거리며 강은 두 팔로 설을 끌어안았다. 싫을 법도 한데 설이 안겨서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강은 코를 간지럽히는 강아지 털에서 얼굴을 들고 백나무 꽃 문양이 음각된 천장을 보았다. 문양을 하나, 둘 세어보던 강은 눈을 감았다.

눈을 떠도, 감아도 그날의 황제가 떠나지 않는다. 저 문양처럼 자신의 눈꺼풀 뒤에 음각된 것 같았다. 그의 체취는 코에 그림자처럼 들러붙고, 그의 온기는 심장에서 뛰고 있다.

“설아…”

설을 끌어안은 강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해. 이거 입맞춤인데….”

싫어야 했는데.

입을 꽃망울처럼 오므린 강이 설을 안고 몸을 빙글 돌렸다. 그사이에 낀 예복이 구겨졌다. 강은 터질 것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설의 털 안에 숨기고 발을 굴렀다. 부어오른 입술이 따가울 때마다 괴롭다.

“내가 몰라서 그런 거겠지? 단순히 약을 먹여주시려고 그런 건데, 내가 모르니까.”

강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설을 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설은 순수한 얼굴을 뒤로 당기더니 혀를 내밀어 강의 얼굴을 핥아주었다. 설의 혀가 순식간에 강의 입술을 쓸었다. 간지러움에 웃음을 터트린 강은 설의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설이 기분이 좋은지 강의 목덜미에 코를 대고 체취를 맡고, 혀를 댔다. 익숙한 행동에 강은 가만히 있었다.

황제도 늘 이런 식으로 행동했다. 체취를 맡고, 코를 대고, 입을 맞대고. 그때도 입을 맞댄 것에서 조금 더 진해졌을 뿐이다. 별 의미를 두지 않아야겠지.

그는 아버지였고, 자신은 아들이었으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상대로 그런 입맞춤을 할 리가 없었다. 애써 꿉꿉하고 질척이던 감정에서 빠져나온 강이 설을 안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자신이 아기인 줄 아는 설이 강에게 안겨 꼬리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착한 녀석.”

강은 설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서 빙그레 웃었다.

“황궁에서 좋은 음식을 먹어서 살이 찐 거야? 왜 이렇게 무거워.”

강이 타박하자 설이 듣기 싫다는 듯, 강의 입술을 사정없이 핥는다. 안 그래도 황제에게 잡혀 며칠 동안 물리고 빨린 입술이 쓰라렸다.

‘숨을 제대로 못 쉬겠다고?’

입을 맞추고 숨을 못 쉬는 강의 등을 토닥이며 황제가 속삭였다. 강은 반항 한번 하지 않고 안겨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손이 목덜미에 머문다. 그는 핏줄이 비치는 곱고 뽀얀 살결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그의 서늘한 웃음소리가 반대로 심장을 더 뛰게 만들었다. 강이 고개를 올리고 달아오른 얼굴로 쳐다보자 황제가 웃으며 입을 맞추었다. 또 숨이 멎는다. 숨 쉬는 법을 다 잊어버린 것처럼.

쪽, 소리가 날 정도로 빨아들이고 떼어 낸 황제가 웃음을 흘리며 명령했다.

‘자, 코로 숨을 쉬고… 뱉어내고. 그래, 그렇게. 잘하는구나.’

‘너무 힘들어요.’

‘원래 뭐든 힘든 법이지.’

단호하고 부드럽게 중얼거린 황제가 강을 눕히고, 머리맡에 손을 짚은 채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의 상체가 강을 다 가려 강은 순식간에 어둠에 물들었다. 황제는 부르트고 부어오른 입술을 매만지며 씩 웃었다.

‘쉽게 얻으면 쉽게 잊고, 힘들게 얻으면 잊지 못하는 법이니.’

‘…아픈 건가요?’

강이 뜸을 들이고 물었다. 황제는 복숭앗빛으로 물든 뺨을 쿡 찌르며 대답했다.

‘처음은 아프겠지만 걱정하지 말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투명한 시선에 황제가 어깨를 들썩였다. 그는 행복에 한껏 젖어 웃었다. 강은 무지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황제는 미소를 슬쩍 지우고 고개를 띄우며 말했다.

‘천자도 거기에 함께할 테니, 걱정할 것 없단다.’

*

황제를 위해 설계된 작은 연못 같은 노천탕에 김이 서렸다. 황제의 나신을 가리기 위해 산에서 노니는 봉황이 그려진 장막이 설치되었다. 황제의 아름다운 옥체를 탐미하는 햇빛을 가리고자, 내관들이 차양막을 들고 노천탕 안에 들어왔다. 혹시나 목욕을 하다가 황제가 목이 마를 것을 생각해 능실(빙실, 얼음저장고)에서 가져온 얼음으로 물을 차갑게 했다. 사소한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다. 황제를 어릴 때부터 모셔온 총관 태감은 주름진 눈가 사이로 안광을 뽐내며 노천탕 안, 밖을 살폈다. 내관, 호위, 궁녀, 그리고 황제의 목욕을 도울 첩까지 포함하여 오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이제 황제가 올 시간이었다.

황제의 발이 돌길을 가볍게 밟았다. 어찌나 부드럽고 가뿐한지, 신으로 돌이나 흙을 밟는 흔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노천탕에 들어선 황제가 두 팔을 벌리자 궁녀들이 다가와 황제의 평복을 벗겼다. 한 겹, 두 겹…. 벗겨지면서 황제의 우람하고 사내다운 상체가 드러났다. 그는 떡 벌어진 어깨와 올곧은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등을 숙이거나 팔을 움직일 때마다 척추에 연결된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그의 몸을 이루는 모든 신체 부위들은 다른 생명체인 것처럼 활력 넘치게 움직였다.

황제의 신과 족의까지 벗겨준 궁녀가 물러났다. 김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린 노천탕에 나신으로 첩이 들어왔다. 비빈들 중 가장 어린 여자로, 4년 전에 책봉 받아 들어온 소 첩여였다. 그녀가 황제의 목욕 시중이 된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 이유였다. 손이 곧고, 부드럽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몇 살인지, 아이를 몇 명이나 낳았는지 알지 못했다. 황제는 겁에 질려 움츠러든 그녀를 보고 피식 웃었다. 말없이 손가락을 까닥이자,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다가와 황제가 입은 얇은 의복을 벗기기 시작했다. 황제의 숨소리조차 무서운지 그녀의 손이 오들오들 떨렸다. 황제는 흥미를 잃은 눈으로 그녀의 둥근 어깨와 가녀린 손목을 빤히 보더니, 손을 느리게 움직여 턱을 잡아 올렸다. 황제의 커다란 손아귀에 잡힌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턱을 잡아 여인의 얼굴을 돌려가며 살펴보던 황제는 손을 빠르게 떼어냈다. 소 첩여는 얼굴을 좀 더 깊숙이 숙여 사죄의 뜻을 표하고, 떠는 손으로 마저 옷을 벗겼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하고 아름다운 몸이 안개에 드문드문 가려졌다. 태초의 연국을 건국한 황제가 다시 군림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습윤하게 젖은 은발에 가려진 미모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뛰어났다. 아름답다는 말도 부족한 외모에 소 첩여는 얼굴을 붉혔다. 안개 때문일까…. 그의 외모가 한층 신비롭게 느껴졌다.

황제는 정신을 못 차리는 소 첩여를 두고 탕으로 들어갔다. 적당하게 데워진 물 안에 들어가자 지나친 정무와 색사로 뭉친 몸이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황제는 욕탕 주변을 두른 턱에 긴 팔을 걸치고서 고개를 젖혔다. 목이 뻐근했다.

“뭐 하는 건가.”

황제가 느긋한 말투에 짜증이 서렸다. 그제야 허겁지겁 소 첩여가 다가와 황제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깨와 목을 주물렀다. 소 첩여는 그가 혹시라도 분개하며 자신을 냉궁에 보낼까 무서웠다. 냉궁에 간다는 것은 다시는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해 쓸쓸히 죽어간다는 뜻이었다. 최근 들어 냉궁에 갇힌 비빈의 수만 넷이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에 넷이나 냉궁에 갔다는 건, 심상치 않은 숫자였다.

이런 식으로라도 황제에게 약소한 사랑을 받아 살아남아야 했다. 그녀는 병아리처럼 오들오들 떨면서도, 그가 가르친 대로 뒷목에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 팔까지 섬세하게 주물렀다. 황제의 입에서 나른하고 뜨거운 숨이 나오고 나서야 그녀는 안도의 숨을 겨우 내쉬었다.

“그대는 냉궁에 보내지 않을 테니 걱정 말게.”

황제의 입에서 튀어나온 본심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축축하게 젖은 돌이 그녀의 이마를 붉게 만들었다.

“폐하! 신첩은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신첩이 하나뿐인 지아비를 무서워하고, 서투르게 모시겠습니까? 신첩은 폐하께서 가르치신 대로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늘 폐하를….”

“연모하고 있다고?”

황제가 고개를 돌려 웃었다. 말도 안 되는 거짓을 들은 사람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황제가 다시 수면을 보았다. 그는 걸치고 있던 팔을 쭉 뻗어 술잔을 집어 들었다. 소 첩여가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술병을 들어 잔에 술을 채웠다. 황제가 목욕을 할 때마다 즐겨 마시는 술이었다. 술을 소리 없이 우아하게 마신 황제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소 첩여가 다가와 목을 주무르려 하자, 황제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소 첩여는 그 자리에 돌처럼 멈춰 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사심을 드러내면 안 된다. 항상 호수의 수면처럼 마음을 어질게 다스려야 한다.

그녀는 수없이 배운 가르침대로 자신을 달래며 이를 악물었다. 냉궁에 끌려가고 싶지 않아 소리를 지르던 후궁들의 목소리가 날것처럼 생생했다.

“귀비는 잘 지내는가?”

황제는 경혜왕의 피습 이후 찾지 않은 귀비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귀비는 괜찮지 못했다. 그녀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워하며 몸부림쳤다. 매일같이 울었고, 웃었고, 물건을 박살 내고, 끝내는 바닥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가슴을 두들겼다. 그녀의 가슴은 안팎으로 시퍼런 멍이었다. 황제는 멍이 점점 번져가 그녀의 머리까지 지배하는데도 내버려 두었다. 그것은 명백한 방치였고, 살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잘 못 지낸다고 황제에게 가서 돌봐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그렇게 미쳐 죽어버리면, 소 첩여에게 더 이득이었다. 그녀가 죽어주는 게 비빈들에게는 평화였다. 소 첩여는 정신을 놓고 살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미소를 머금었다. 이번이 기회였다. 황제가 귀비를 완전히 버리게끔 만들어야 했다.

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면, 그녀도 아이를 잃고 황제의 사랑도 잃어야 했다. 소 첩여의 누그러졌던 눈에 날 선 악의가 서렸다.

“귀비께선 심병 때문에 아향궁에서 칩거하고 계신답니다. 매일 같이 경혜왕 전하의 이름을 부르시며 우시고, 폐하를 원망하시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무서운지 신첩은 홍궁 근처에 가지 못하겠습니다, 폐하. 신첩뿐만 아니라 다른 마마들도 어찌나 괴로워하시는지….”

그녀는 거짓된 눈물을 말끝에 매달며 황제에게 칭얼거렸다. 그러나 황제는 듣기 싫다는 듯, 수면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겼다. 소 첩여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고 황제의 어깨에 양손을 올려 주물렀다. 탄탄하고 사내다운 피부가 손에 착착 닿았다. 향도 무척 상쾌하고 좋았다. 물에 젖은 황제의 은발을 감탄 어린 눈으로 보며 그녀가 손에 힘을 주었다.

“범인이 곧 잡힐 것 같으니, 귀비를 만나면 안심하라고 말하거라.”

“그렇습니까? 정말 다행입니다, 폐하. 살수들을 잡으면 반드시 폐하의 위엄과 힘을 보여주십시오. 지엄하신 폐하께서 다스리시는 이 나라에서 감히 폐하의 아드님을 피습하다니요.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소 첩여의 능숙한 거짓말에 황제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손을 뻗어 소 첩여의 손목을 잡아 확 끌어당겼다. 소 첩여의 작은 몸이 순식간에 미끄러져 노천탕 안으로 들어갈 뻔했다. 간신히 손으로 황제의 어깨를 잡아 몸을 지탱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걸 깨닫고, 그녀가 허둥지둥 벗어나려 했으나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황제는 무슨 영문인지 아름다운 용안을 가까이하며 웃었다. 그의 미소가 어찌나 부드럽고 농염하던지, 소 첩여는 침을 꼴깍 삼키며 어깨를 움츠렸다.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그녀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황제의 얼굴을 살피며 분위기를 읽으려 노력했다. 안개가 둘 사이를 계곡처럼 갈랐다. 황제의 미소는 옅어졌다. 소 첩여는 도통 읽어낼 수 없는 황제의 얼굴을 보고 겁에 질려 딸꾹질을 했다.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뭐라고 답해야 하지? 뭐라고 답해야, 그가 자신을 풀어줄까. 그녀는 발아래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몸을 잘게 떨다가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호박같이 맑고 영롱한 황제의 금안이 무서웠다. 그의 시선과, 말없이 직시하며 답을 추궁하는 그의 용안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말없이 겁에 질려 우는 그녀를 보고는 미소를 싹 지웠다. 침전이든, 어디서든 우는 것들은 딱 질색이었다. 황제가 우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는 걸 깨들은 소 첩여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황제는 벌떡 몸을 일으켜, 우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질질 끌어당겼다.

“폐하! 폐하! 신첩이 잘못하였습니다! 제발…!”

“시끄럽다.”

“폐하! 제발, 한 번만…!”

황제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밖으로 밀어버렸다. 그녀는 뜨뜻한 햇빛과 내관들의 무감한 눈이 포진한 바깥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황제의 희끄무레한 애정에서도 벗어났다. 황제는 차가운 시선으로 엎드려 비는 소 첩여의 둥근 등을 보며 입을 슬그머니 열었다.

“다시는 목욕 시중에 그대를 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목욕 시중에도 필요가 없으니 침전에도 올 필요는 없겠지.”

“폐하, 폐하…. 신첩이 잘못하였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의 뜻을 우매한 신첩이 알지 못하여 저지른 잘못을 어진 마음으로 용서해주시옵소서!”

“천자가 왜 그래야 하지.”

황제는 감흥 없는 눈으로 그녀를 보며 뒷목을 스스로 주물렀다. 그녀는 덜덜 떠는 눈을 들어 올려 황제의 몸을 타고 올라가, 그의 얼굴을 보았다. 황제는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고 노골적으로 웃었다. 그의 미소는 지독하게 아름답고, 악귀같이 싸늘했다. 완전히 떠난 그의 애정을 확인한 그녀의 눈매가 일그러지고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대가 뭐라고.”

그가 이제 매달릴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소 첩여를 두고 노천탕으로 들어갔다. 내관들이 알아서 용서를 비는 그녀를 잡아 끌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애정이 떨어지면, 내관들도 가차 없이 후궁들을 대했다. 황제는 탕 안으로 들어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혼례까지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여인을 안아야 했다. 황제이자 지아비의 의무였다. 하늘이 선택한, 태자를 낳을 만한 자질이 있는 여인들을 많이 안아 자식을 많이 낳아 그중에서 아이를 선택해야 했으므로.

“…지겹군.”

정말, 지겨웠다. 애정 없이 하늘이 선택한 여인들을 안고, 아이를 강제로 마주해야 하는 것은. 가장 훌륭한 태자, 그리고 황제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던가. 황제는 물끄러미 하늘을 보았다. 혼롓날이라 그런지, 하늘이 흠집 없이 맑았다. 늘 그랬다. 황제가 혼롓날 늑대가 되어 여인들의 안에 파정할 때마다 새하얀 달이 떠올라 천신전을 적셨다. 하늘도 보고 싶은 것이다. 황제가 또 다른 아이를 갖는 과정을….

입맛을 다시며 옥경을 매만지는데,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황제는 눈을 감고 분노로 입매를 비틀었다.

“폐하, 태후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급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태후는 아픈 태상황을 현에 두고, 홀로 혼례식을 보기 위해 올라온 참이었다. 그녀가 황궁에 머무는 건 너무나 당연한 절차였지만 황제가 혼례식을 위해 노천탕에서 씻는 날 찾아오는 일은 적절하지 못했다. 황제는 욕심이 많은 그녀가 어떤 연유로 찾아왔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행적은 그녀의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태후는 황제가 점찍은 황후가 궁금해 참지 못하고 이곳에 달려온 것이다.

여전히 욕심이 많은 태후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계곡을 만들어내던 황제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물기도 닦지 않고, 위에 장의를 걸쳤다. 긴 장의가 그의 나신을 어느 정도 가렸다.

“들라 하라.”

“예, 폐하.”

장막이 들렸다. 태후가 궁녀의 손을 잡으며 물기가 곳곳에 스민 내부로 들어왔다. 황제는 차양막 안에서 태후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태후가 애써 그럴싸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손을 맞잡았다. 황제는 그녀를 향해 예의상 웃어주며 먼저 대화의 물꼬를 텄다.

“무슨 일이십니까.”

“방금 전 귀비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그러십니까?”

태후가 귀비를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관심 없다. 어차피 그녀도 귀비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관심 있는 건, 새로 지어지는 중궁의 주인이었다. 그 주인이 손자인 영현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녀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귀비가 많이 아파하더군요. 심병이 몸으로 번져가 거동이 불편하였고, 경혜왕의 대한 걱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둔 같은 어미로서 마음이 편하지 않아 폐하를 뵙고자 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요?”

황제가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얼굴로 웃었다.

“어머니도 많이 늙으셨군요. 고작 그런 일로 천자를 다 찾아오시고.”

연혼을 태자로 만들기 위해 애첩의 아이를 독살하고, 자신의 딸과 아들마저 죽였던 태후였다. 황제가 두리뭉실하게 비꼬는 말에도 태후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 손을 곱게 포개며 고개를 들었다.

“귀비를 달래줄 수 있는 분은 단 한 분이십니다. 폐하, 부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귀비를 품어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오늘은 혼례를 치르는 날입니다.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새로운 첩을 받아들여야 훌륭한 아이를 낳지요. 그것이 하늘의 뜻인데, 어머니께선 천자가 하늘의 뜻을 어겨 그릇된 아이를 낳길 원하시는 겁니까?”

황제가 느슨하게 여몄던 장의 끈을 좀 더 세게 묶으며 눈을 치켜떴다.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시던 태자를 고작 귀비 따위의 일로 망치길 원하시는 겁니까.”

“그 여인에게서 태자를 보실 겁니까?”

태후가 물었다. 황제는 눈을 반쯤 감고 태후의 늙은 목을 보았다. 늙은 구렁이 주제에…. 여전히 자신의 원하는 여인을 앉히고, 원하는 대로 태자를 보고 싶어 한다.

태후의 주인은 아들인 자신이었는데도. 황제는 뒷목에 손을 올리고 목을 주물렀다.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게 거슬렸다.

“어머니는 가끔 자신의 위치를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태후라는 자리가 대단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태후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욕을 들은 듯 얼굴이 붉어졌다.

“폐하.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저는 폐하의 친모입니다. 태상황께서도 폐하께 누누이 말씀하셨을 텐데요.”

“그래서요?”

황제가 턱에 손을 대고 미소를 지웠다. 그의 얼굴에 냉기가 서려 태후의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태후가 드디어 본심을 드러내고 얼굴에 노기를 띄웠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그것이 마음에 든 것처럼 눈을 둥글게 휘었다. 그의 웃음이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이 땅의 주인은 천잡니다. 어머니가 아니라요. 황후도 천자가 선택하고, 태자도 천자가 선택합니다. 어머니가 감히 태자를 누구에게서도 볼 것인지 물어볼 게 아니라 그겁니다.”

“이제 어머니로서 대우도 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태후는 모멸감에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선을 지키던 아들이었는데. 고이고이 키운 아들이었다. 딸과 아들을 죽여 태자로 만들고, 처첩들을 죽이고, 또 다른 여인의 자식까지 죽여 황제로 만들었는데.

자신을 이리 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태후가 이를 억세게 물고 노려보자 황제는 소리 내서 웃었다.

“어머니, 천자는 어머니의 아들이기 전에 이 나라의 황제입니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황제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토닥이며 우아한 말투로 말했다.

“천제를 대하는 태도를 갖추셔야지요.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대고, 그리고 물어보십시오. 예의를 갖추지 않는 신하에겐 천자도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니까요.”

황제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몸에 힘이 빠진 태후가 바닥에 무릎을 댔다. 젊은 시절, 태상황이 아니라면 그 누구에게도 꿇지 않았던 무릎이었다. 그나마 태후로 대우를 해주던 아들은 이제 날을 드러내며 자신에게도 군주로 군림하려 했다.

이대로 물러나고 싶은 마음보다 훗날의 황후를 알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어머니였다. 아들에 대한 미움보다 아들이 견고히 황제가 되어 이 자리를 지키는 게 중요했다. 그걸 위해서라면 아들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아들의 말대로 그는 이 나라의 유일한 황제였다.

태후는 몇십 년간 하지 않았던 예법대로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황제는 신하의 예를 갖추는 어머니를 보며 소리 죽여 웃었다. 그녀가 주제도 모르고 황후 책봉에 나서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음을 계속 짓밟아 강을 공격할 적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호기심에 미리 답을 주고, 강을 책봉하는 날에 아군으로 만들 셈이었다.

뭣도 모르는 여자보다 내 피가 흐르는 아들이 황후가 되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그렇게 된다면, 더 훌륭한 태자가 태어나 이 아들이 위대한 황제가 될 것이라고….

아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하는 여자니까.

황제는 몇 번이나 숨을 고르는 그녀의 등을 무심하게 보았다. 구겨진 자존심을 아직 다 펴지 못한 그녀였다. 황제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허리를 숙여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어머니이니, 너무 매정하게 대할 생각은 없었다.

“어머니가 무엇을 궁금해하시는지 잘 압니다.”

황제가 웃음을 길게 늘이며 중얼거렸다.

“중궁이 세워지고, 비빈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태자로 밀었던 진영왕도 요새 몸이 좋지 않아 마음이 심란하시겠지요. 어머니께선 천자가 가장 위대한 황제로 남길 원하시니까요. 천자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태후가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완연한 궁금증으로 물들었다. 황제는 의무적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한때 태상황을 유혹했던 낭창한 몸이 황제에게 쏙 안겼다.

황제는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귀에 대고 음습한 뜻을 속삭였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가 황후가 되어 태자를 낳는 걸 원치 않으시지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태후가 불길한 예감을 알아차린 듯, 느리게 물었다. 황제는 목소리를 좀 더 낮추었다.

“어머니의 손자가 황후가 될 것입니다.”

태후가 충격에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멈췄다. 놀라 황제의 품에서 빠져나온 그녀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황제는 넘어진 그녀를 안아 올려주었다. 흐트러진 머리까지 정돈해준 그는 옷깃을 여며주며 나른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누굴 연모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혼아!”

태후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체면도 잊고, 황제의 이름을 부르며 팔뚝을 잡았다.

“혼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야! 그 아이는 네 아들이야! 아들이라고! 역사에 길이 남을 황제가 되어야지! 그 아이를 황후로 만들면, 네 이름은 오명이 되어 남을 뿐이다!”

“어머니, 조용히 하십시오. 듣는 귀가 많습니다.”

황제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황제라는 직위를 떠올리고 망부석이 되어 가만히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전하기 위해 그녀의 끌어안고서 달랬다.

“어머니가 원하지 않는 여자보다 차라리 잘 알고 있는 손자가 황후가 되는 편이 어머니 마음에도 편하지 않겠습니까. 어머니가 원하시는 완벽한 황후입니다. 정통의 피가 흐르면서, 똑똑하고, 아름다우며…. 영원히 천자에게 순종하며 몸과 마음을 바칠 황후.”

태후가 신음하며 눈을 감았다. 태후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황후의 표본이 강이었다. 황가의 피가 흐르고, 지성이 있고, 그러면서 눈치가 빠르고, 순종하며, 아름답고, 황제의 잠자리까지 완벽하게 책임져줄 황후.

“그 황후가 바로 강입니다. 제 아들, 강이요.”

“그 아이는 사내아입니다. 어떻게 아이를…!”

“방법이 다 있습니다.”

황제가 웃었다. 태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침음했다.

*

혼례는 매우 신성하고, 조용한 의식이었다. 절대 소리를 내어선 안 되었다. 혼례의 주인공은 늑대가 되어 직접 안에 파정할 황제, 그리고 그에게 안기는 여인이었다. 천신전에 앉은 가족 친지들이 할 일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었다. 초야를 지켜보는 이유는 단순했다. 황제와 선택을 받은 여인이 제대로 교접을 했는지, 확실히 황제에게 아내로서 복종하고 예의를 다 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 과정을 통해 확실한 황가의 가족이 되었다. 친지 중 늑대로 변할 수 있는 자는 황제처럼 늑대가 되어 여인을 핥아주었다. 가족이 되었다는 행위였다.

강도 오늘 혼례의 일원으로 다홍색 예복을 입고 푸른 보석으로 장식이 된 옥대를 착용했다. 품이 넉넉한 소매가 바닥에 닿을 것처럼 길게 늘어졌다. 소매에 새겨진 붉게 피어오르는 구름을 손가락 사이에 넣어 만지던 강은 통증이 파도처럼 몰아치는 아랫배를 만졌다. 언제나 건강하던 몸이 갑작스레 변해서 당혹스러웠지만, 4년 만에 일어나는 혼례식에서 말썽을 부릴 수 없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참아야 했다. 아바마마의 신성한 혼례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후우….”

잇새로 무겁게 처진 숨을 흘린 강은 예복에 걸맞은 관을 착용했다. 동경을 보며 끈을 여몄다. 턱에서 잘 맺어진 끈이 덜렁거렸다.

‘붉은색이 잘 어울리는구나.’

문득 황제가 스쳐 지나가듯 말한 칭찬이 떠올랐다. 황제가 잘라주는 과일을 따박따박 아기 새처럼 받아먹던 강이 눈을 깜박였다. 황제는 그런 강을 보며 슬쩍 웃고 입에 자른 사과를 쏙 넣었다. 사과의 상큼함에 정신이 팔린 강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떠올리지 못했다.

왜 갑자기 그때 붉은색이 잘 어울린다고 했을까. 그때 강은 붉은빛이 강렬하게 도는 분홍색 예복을 입고 있었다.

동경을 보며 갸웃하던 강은 고개를 내저었다. 별 의미 없이 지나간 말에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황제는 강이 무슨 옷을 입든 예쁘다고 칭찬했으니까. 금팔찌와 가락지, 귀걸이를 낀 강이 헥헥거리는 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몸을 돌렸다.

이제 황제의 교접을 보러 가야 했다. 엄연히 말하면, 늑대가 된 황제의 교접을.

황제의 정사를 볼 생각에 벌써부터 얼굴이 달아올랐다. 붉어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준비한 부채를 만지작거렸다. 제대로 볼 수나 있을까. 고아한 황제가 여인을 안는 모습을. 강은 부끄러움에 가마에 올라타면서도 얼굴이 달아올라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강이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담영은 그게 퍽 귀여워서 웃고 말았다.

혼례식 날에는 되도록 말을 아끼는 법이라, 담영은 말없이 가마를 따랐다. 침묵은 거리에도 지속되었다. 말이 많은 것보다 침묵을 지키는 게 더 예의라고 생각하는 연나라다운 묵직한 정적에 숨도 자연스레 느려졌다. 수면향이라도 피운 것처럼 의식도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가마가 활짝 열린 은우문을 통해 들어갔다. 강은 앞만 분간이 될 정도로 켜진 불을 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불꽃이 늦은 밤바람에 흐느적거리고, 마음도 거기에 따라 흔들린다.

늑대가 된 황제는 귀엽고 발랄했는데…. 과연 그런 황제가 어떻게 여인을 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늑대의 성기는 매우 커서 여인이 약 없이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클까.

황제 때문에 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도, 강의 머리는 음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뽀얀 뺨이 상기되어 가라앉지 않았다. 강도 그걸 알고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얼굴을 식히려 했지만 무의미했다. 강은 합죽선을 접고 제사 때 신관이 올리는 기도문을 마음으로 경건하게 읽었으나 역시 역부족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는 걸 포기한 강은 한숨을 삼키며 계단에 발 하나를 올렸다.

천신전 내부로 향하는 계단을 밟는 이가 옆에 또 있었다. 강과 똑같은 다홍색 예복을 입은 장신의 사내였다. 그에게서 나는 풋내에 강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영왕이었다. 경혜왕의 피습 이후로 외출을 자제했던 터라, 형제들을 잘 보지 못한 탓에 강은 반가움에 진영왕을 미소 띤 얼굴로 보았다.

진영왕의 얼굴을 힐끔 본 강은 걸음을 멈칫했다.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인가. 진영왕의 입술에 혈색이 없었다. 눈도 피로에 지배당해 퀭했다. 초점이 흐리고, 어딘가 멍한 듯한 눈빛에 강은 계단 한가운데에 멈춰 그의 등을 보았다.

진영왕의 등이 저렇게 가느다란 것은 여태까지 보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늠름한 형이었다. 진영왕의 잘생긴 얼굴에 감도는 호쾌한 미소를 사랑했다. 그가 동생들 앞에서 창을 휘두르고, 활을 쏘며 사냥감을 잡을 땐 그가 형제라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가 진심으로 태자가 되길 바랐다. 자신도 한때나마 꿈꿔보았지만, 될 수 없으리라고 믿었던 태자가 그가 된다면 성심성의껏 신하로서 그를 모시고 싶었는데.

어째서 그가 저리 아파 보이는 건지, 가슴이 뛰었다. 무서웠다. 그도 경혜왕처럼 한순간에 팔이 잘릴까 봐. 이미 한 번 본 형의 불행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강은 계단을 뛰어 진영왕의 손목을 잡았다.

탁!

진영왕이 흠칫 놀라며 강의 손을 사납게 뿌리쳤다. 진영왕에게 얻어맞아 붉게 달아오른 손등을 감싼 강은 그를 멍하니 보다 괜찮다는 뜻으로 웃으려 했다.

그러나 진영왕이 검게 변한 안색으로 등을 보이자, 강은 그러할 수 없었다. 진영왕은 강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묻고 싶었으나 진영왕이 빠른 속도로 자리를 뜨자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주먹을 쥐고 서 있던 강은 숨을 멈추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가슴이 느리다가도,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한다. 심경 변화를 신체가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을 거부하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어렴풋이 잡히는 한 가닥의 추측에 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모두 같은 형제였다. 애정을 공유해야 하는 사이였다. 비빈들처럼 형제들도 황제인 아버지의 사랑을 나눠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왕부에 신음하며 누워있는 경혜왕의 몰락은 피습이 아니라 황제의 매몰찬 편애였다. 경혜왕이 범인도 알지 못하고 누워 괴로워하고 황제를 찾을 때, 황제는 경혜왕이 아니라 배앓이 하는 강을 찾아왔다. 천금궁 침전에 강을 눕히고 통증이 멎을 때까지 배를 만져주며 달래주었다. 강이 눈치를 살피며 경혜왕을 언급해도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걸 진영왕이 안 것이 아닐까. 그도 안색이 창백하고 검은 것을 보아하니, 아픈 듯한데.

주국을 멸망시킨 후, 병을 앓았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재발한 건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입에 쓴맛이 느껴졌다. 강은 입을 틀어막고 토기를 막았다. 이상한 일이 반복되었다.

“아….”

강은 아까부터 무시하려 했던 통증이 거세지자 허리를 숙였다. 얼굴을 잘 아는 친지들이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소름이 곤두섰다. 강은 억지로 힘을 줘 허리를 펴서 걸었다. 희미한 빛만이 고요히 춤추는 어둠 속에서 강이 눈을 또렷하게 떴다. 식은땀이 흘렀다. 손등으로 땀을 닦아낸 강은 합죽선을 펴 얼굴을 가리며, 배정된 자리로 이동했다. 왼쪽 기둥에서 세 번째 열이었다. 그리고 맞은편엔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초목같이 생생한 연녹색 예복에 단아한 면사를 쓰고 계셨다. 멱리보다 투명하며 은가루가 뿌려진 듯, 은은한 면사였다.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였다. 강은 허리 통증을 참으며 주먹을 쥐고 무릎에 올렸다. 어머니도 강을 보고 슬쩍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얌전히 눈을 내리까셨다. 강도 딱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처지였기에 인위적으로 고조된 정적에 몸과 정신을 맡겼다.

둥, 둥, 둥….

예고도 없이 울린 북소리는 달리는 맥박 같았다. 간격을 두던 소리가 어느 기점으로 매섭게 빨라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의식 때마다 듣던 흔한 북소리가 오늘따라 흥분을 밑바닥부터 서서히 끌어올렸다. 발바닥에 열이 붙은 것처럼 뜨겁다. 목이 메말라간다. 눈에 열이 고이고, 뜨끈해진다. 사방에서 들리는 높고 낮은 숨소리에 강은 눈을 내리떴다. 손에 쥔 합죽선을 펼쳐 얼굴을 가렸다. 그것만이 여기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천신전 단상 뒤의 문을 향해 무희들이 춤을 추듯 이동했다. 그녀들은 새처럼 날아 문을 열고, 살이 비치는 얇은 붉은 혼례복을 입은 여인을 양손으로 잡아 단상 앞으로 데리고 왔다. 혼례복보다 옅은 핏빛의 면사를 쓴 그녀가 무릎을 꿇고 부끄러움 한 점 없이 고개를 들어 신관을 응시했다. 신관은 욕심으로 범벅이 된 눈을 마주 보고 옹골찬 입술을 열었다.

그는 고어로 기도문을 읽었다. 다 늙어 곧 죽을 것처럼 보였지만, 신관이 목소리는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롭고 차가웠다. 입에 칼을 머금은 사람이란, 저런 사람을 일컫는 거겠지. 강은 귀를 파고드는 첨예한 말을 새겨들으며 문을 보았다. 늑대가 된 황제가 나와 여인을 맞이할 시간이 그리 멀지 않았다. 가슴이 달리기를 시작했다. 친아버지의 정사를 봐도 되는 것인가. 잠시 덮어둔 도덕관념이 연기처럼 피어올랐지만, 무희들의 춤에 금방 진압되었다. 무희들은 북을 치며 춤을 추어, 새로운 비빈이 될 그녀를 하늘 대신 맞이했다. 그녀의 얼굴이 묘하게 달아올랐다. 혼례 전에 미리 먹인 약이 춤과 흐느끼는 듯한 노래에 맞춰 반응하고 있었다.

갑자기 노래가 뚝 멎었다. 무희들의 춤도 멈추었다. 무희들은 북을 매단 채 바닥에 엎드렸다. 여인을 안내하기 위해 잠시 열어두었던 문이 다시 열리며 진정한 주인이 강림했다.

형체가 분간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하나의 존재가 금안을 빛내며 다가온다. 일 년에 몇 번이고 자주 보았던 귀여운 늑대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늑대로 변해 자신을 눕히고 핥아주던 강아지 같던 늑대가 아니라…. 황제 그 자체였다. 늑대가 어둠을 휘장을 거두듯 나와 고개를 들어 서릿발 같은 금안을 드러냈다. 동공이 긴 금안이 천신전을 거침없이 휘젓는다. 금안이 화살처럼 박힌 곳은 왼쪽 기둥 세 번째 열에 앉은 강이었다. 강은 가슴을 강타하는 늑대의 강렬하고, 열이 넘실거리는 금안에 주먹을 쥐었다.

늑대가 웃는다.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 혼례의 주인공은 약을 먹고 지아비를 기다리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늑대는 곧바로 여인에게 가지 않고, 강이 있는 주변으로 슬슬 다가와 맴돌았다. 늑대는 오롯하게 강을 직시했다. 강은 그르릉거리는 숨소리에 어깨를 흠칫 굳혔다.

자신이 알던 그 귀여운 강아지 같은 늑대가 아니었다. 눈만 보면 좋아서 늑대로 변해 달려들어 등을 비비고, 헥헥 웃고. 자신을 등에 태워 야트막한 설원을 달리던 늑대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늑대가 휙 몸을 돌려 여인을 덮쳤다. 가늘고 높은 신음이 금세 천장까지 도달했다. 늑대는 네 다리로 그녀를 감싸고 얼굴을 숙여 목덜미의 향을 맡았다.

신이 내려준 새로운 비빈을 확인한 늑대가 고개를 들고 아우우우우, 하고 운다. 옆에 앉아있던 진영왕이 가장 먼저 반응하여 곧바로 옷을 벗고 늑대가 되었다. 황제에 비교하면 작은 집 같은 늑대가 사람을 폴짝 뛰어넘어 여인의 냄새를 확인했다.

가슴이 박동한다.

“아아, 폐하…! 신첩을 안아주시옵소서! 신첩에게 아기를… 으응! 폐하!”

여인이 늑대의 목을 안아 매달렸다. 강이 황제에게 애교를 부리며 하던 짓이었다. 늑대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저어 여인의 팔을 뿌리쳤다.

황제가 빠르게 신관을 보았다. 신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보내자, 무녀들이 다가와 여인의 옷을 벗겼다. 여인이 쓴 건 이제 면사밖에 없었다. 여인이 알아서 몸을 돌리고 엉덩이를 갖다 대었다.

늑대가 삽입을 위해 자세를 잡았다. 늑대의 입이 벌어지며 혀가 나와 여인의 목덜미를 핥았다. 자신의 것이라고 냄새를 남기는 행위였다. 여인이 흐응, 흥… 하고 애틋하고 달콤한 신음을 쉴 새 없이 흘리며 엉덩이를 움직였다. 약 때문인가. 아니면 다시 폭풍처럼 몰아치는 음악과 춤 때문인가.

문제는 강도 여인의 흥분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부분이 터질 듯이 아팠다. 배의 통증도 거기에 맞춰 세진 탓에, 강은 신음을 참느라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아!”

털에 가려져 있어도, 엄청나게 부푼 늑대의 성기가 여인의 젖은 음부를 파고든다. 적나라하게 젖은 소리가 연결 부위에서 들렸다. 처음 보는 남녀의 정사에 강의 눈가가 발그레해졌다. 분명히 야릇하고 보고 싶지 않아야 할 정사인데 계속 보고 싶었다. 황제가 여인을 소유하는 모습을…. 강은 배에서 일어나는 통증을 참으며 부채를 거두고, 황제를 응시했다.

“아으응!”

여인에게 푹, 소리 날 정도로 성기를 삽입한 늑대가 고개를 돌려 강을 보았다. 여인을 안는 상상을 하며 다리를 들썩이던 강은 순간 퍼지는 고통과 쾌감에 배를 감쌌다. 늑대가 다시 고개를 돌려 여인을 보며 웃었다.

강은 손을 들어 올려 입을 막았다. 토기가 올라온다. 자신이 여인이 된 듯 배가 뒤틀리고,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무서웠다.

자신이 아는 황제가 아니었다. 아예 다른 사람을 가져다 놓은 듯했다. 저기서 울부짖는 여인을 범하고 성기를 싹 붙여 사정을 기다리는 늑대는 황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는 황제는 언제나 다정하고 부드러웠으니까.

“읏…”

강은 치밀어 오르는 통증에 결국 피를 흘렸다. 입술을 얼마나 물었는지 잇자국이 남고, 피가 주륵 흘러 손등에 뚝뚝 떨어졌다. 강은 손으로 피를 닦아내고 흔들거리는 시선으로 앞을 보았다.

“헉…!”

늑대가 자세를 바꿨다. 여인이 도망가고자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나가자, 늑대가 앞발로 누르며 삽입했다.

엄청난 속도였다. 연결된 부위가 닳아 없어질 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안을 파헤치며 정복하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은 강을 움직이게 했지만, 신관들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열이 흐트러지는 걸 보지 않고 직접 안으로 들어와 강의 등을 받치고, 손을 결박해 황제의 정사를 보게 했다.

“시, 시, 싫어….”

“보셔야 합니다.”

신관이 강에게 명령했다. 그는 몸을 뒤트는 강을 향해 고개를 숙여, 단호하게 말했다.

“신성한 혼례가 아닙니까. 보셔야 합니다.”

강은 이를 악물고, 신관의 말에 따라 떨리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황제가 신음한다. 여인의 신체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을 보며 허리를 움직였다. 벌써 두 번째 삽입이었다. 여인은 반쯤 기절한 듯 바닥에 널브러져 움직이지 못했고, 여인과 황제의 연결 부위에서 정액이 흘러 뚝, 뚝 소리를 내었다.

강은 싫다는 소리를 반복하면서도 눈가를 붉게 물들이고 야릇한 소리를 띄엄띄엄 흘렸다. 성에 무지한 강은 자극적인 광경에 덜컥 겁을 먹고 울면서도, 반응하는 아래에 착실하게 신음했다. 다른 이들은 황제와 여인의 정사에 혼이 팔려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맞은편에 있는 여 소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윽!”

하지만 황제에게 안긴 여인이 세 번째 삽입에 파드득 놀라며 울자, 여 소의도 그녀를 봐야 했다. 강은 신관에게 거의 안긴 듯한 자세로 황제와 마주했다.

아바마마, 싫어요!

평상시라면 단숨에 나왔을 말이 안으로 먹혀들어 갔다.

황제가 후우, 잇새로 숨을 내쉬며 허리를 퍽, 소리 나게 움직였다. 여인이 눈을 뒤집으며 기절했다.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소리가 연결 부위에서 연신 들렸다. 본래 첫 번째, 두 번째보다 느긋하게 행해지고 부드러워야 할 세 번째가 매우 급하게 이어졌다. 미숙하기 짝이 없는 행동은 안긴 자에게 그리 좋지 않았으나, 늑대가 된 황제는 낯선 사람을 보듯 울먹거리는 강을 보고 빠르게, 더 빠르게 움직였다.

“아읏, 아, 아, 아파, 아파! 흐으윽!”

세 번째 삽입은 연결 상태에서 성기가 부풀어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여인은 배가 팽창하는 고통에 바닥을 긁고 울었다.

“배가… 아으응! 흐응! 시, 싫어! 싫어!”

하지만 무희들이 다가와 그녀의 몸부림을 막았다. 애초에 성기는 윤곽이 드러날 정도로 배에서 팽창하고 있어, 여인이 도망갈 수도 없었다. 심지어 부푼 상태에서 늑대가 허리를 움직여, 얇은 뱃가죽으로 성기의 출입이 보였다.

“읏…!”

경악스러운 정사에 강은 아래가 찌르르하게 울려 놀랐다. 그 증세가 무엇인지 깨달은 강이 혼비백산했다.

남근이 발기했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몽정 이후로, 여인과의 혼례를 위해 깨끗하게 정돈했던 몸이 황제의 정사를 보고 발기했다.

“아아아아!”

황제가 여인의 몸에 더 성기를 밀어붙였다. 둘은 아예 한 몸이 된 듯 완벽하게 틈 없이 밀착했다. 황제의 더운 숨이 여인의 머리 위에 흩뿌려졌다.

여인이 불쌍해야 했는데 강은 황제의 아래에 깔려 신음하는 자신을 환상처럼 떠올렸고, 그때의 맞춰 반응하는 성기에 충격을 받고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러면 안 돼. 아바마마의 정사를 보고….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강은 억지로 흥분을 참으려 했으나, 열이 고인 눈에서 눈물을 만들어냈다. 극심한 쾌감에 몰렸을 때 생성되는 생리적인 눈물이었다.

차라리 황제를 보지 말자. 그를 보지 않는다면, 스스로 거부한다면 이 있을 수 없는 흥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은 달달 떨리는 신음과 흥분을 감내하며 눈을 감았다.

“눈을 떠야지.”

늑대가 된 황제는 말을 할 수 없는데, 분명히 웃고 있는 듯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비를 봐야지, 강아.”

“아바마마.”

강은 틀어막고 있던 손을 내리고, 눈물을 닦았다. 너무 이상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친아버지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자신이 너무 더러웠다.

또한 이 사실을 알고 황제가 싫어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니 어서 이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강이 눈을 감고 흥분을 식히던 그사이에 황제는 사정을 마치고, 무녀들이 건네주는 용포만을 느슨하게 걸친 채 몸을 겨우 가리고 있었다. 그의 떡 벌어진 가슴이 선명하게 보였다. 황제는 친왕들, 친지들 사이에 앉아 흥분으로 얼굴을 붉힌 아들을 보고 웃으며 합환주를 머금었다. 그는 거의 기절한 여인을 안아 입에 합환주를 흘려보냈다. 입술을 맞댄 채, 황제가 눈을 반쯤 떠 강을 보며 고혹적인 웃음을 보냈다.

“아….”

그걸 보자 다리를 꼬아 겨우 식혔던 성기가 꼿꼿하게 반응했다. 강이 본능적으로 도망가려는 낌새를 보이자 황제가 불쾌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건성으로 그녀에게 합환주를 먹이느라, 그녀의 벌어진 입술을 타고 술이 흘러 바닥에 버려졌다.

백색 용포만을 나신에 걸친 황제가 여인을 무희에게 건넸다. 혼례는 아직 남았으나, 형식적인 예식이라 황제는 과감하게 무시했다. 신관이 다가와 발돋움을 하며 만류했지만 황제는 그를 가볍게 뿌리쳤다.

황제는 사람들을 파헤쳐 흥분을 멈추지 못하는 아들에게 다가왔다. 강은 황제의 손이 닿자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 신관의 품에 안겼다. 황제의 시선이 어둡게 변하자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흥분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

황제가 큰 손으로 강의 손목을 잡아당겨 안았다.

“아바마마, 싫어요.”

“아비가 싫다고 말해도 된다고 가르쳤느냐?”

황제가 강의 턱을 쥐고 강제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제의 엄지와 검지가 강의 젖살이 남은 뺨을 만졌다. 살이 봄날의 햇살처럼 보드랍다. 핏줄이 비치는 피부는 초승달처럼 투명했다. 황제가 안으면 안기고, 황제가 오라면 오고, 황제가 하라는 대로 다 하던 강은 처음으로 황제의 손목을 잡고 밀었다. 약해도 거부는 거부였다.

황제는 잘게 떨리는 눈을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며 웃었다. 시선이 곧장 낙하하자 강의 떨림이 더 거세지고, 하얗고 뽀얀 뺨에 홍조가 서렸다. 입맞춤에 담긴 의미도 모르는 아이가 흥분을 제대로 알 리 없었다.

하긴, 강은 황제만의 백지였다. 그 위에 새겨질 먹물은 오로지 황제였다.

다른 건 허용하지 않을 참이었다.

황제는 “잘못했습니다, 아바마마.”라고 사죄하는 아들을 안아 올렸다. 친지들의 시선 속에 섞인 태후의 강직한 눈을 발견한 황제가 싱긋 웃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아들이 뺨에 합환주를 마시느라 젖은 입술을 대고, 눈을 가늘게 떠 어머니를 보았다. 태후의 눈은 강의 손끝에 달려있다. 강이 수그러져 황제의 목에 팔을 두르고, 듬직한 어깨에 이마를 비비는 것을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손자와 아들의 기묘한 기류에 등을 돌렸다.

그녀만의 동의를 알아챈 황제는 아들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입술을 갖다 대고서 속삭였다.

“아래가 아프지?”

강의 얼굴이 붉어졌다. 황제는 아들을 더 바짝 안겨 웃으며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흥분했다는 뜻이란다. 아바마마를 보고서 말이지.”

“아니에요!”

강이 울먹거리며 황제의 용포를 잡고 매달렸다. 호화로운 용포가 16살 어린 아들의 손에 구겨졌으나 상관없었다.

“소자는 아바마마를 보고, 그런….”

강은 소리를 죽인 후, 황제를 보고 단호하게 말했다.

“음험한 생각은 한 적이 추호도 없습니다. 아바마마는, 영원한 소자의 아바마마인걸요.”

타락하지 못한 아들. 황제가 조절한 순결.

황제는 자신이 범할 여린 육체를 보며 흡족하게 웃는다.

“그래.”

너는 그러렴. 나는 끝없이 음험해질 테니.

*

촘촘하고 풍성한 은색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속눈썹을 파고드는 불빛은 그 안에 투영되지 못하고 밖에 겉돌았다. 그의 속눈썹이 아래로 내려가고, 위로 들릴 때마다 지켜보는 열다섯 명의 조사단은 손을 생명줄처럼 붙잡았다. 하늘에 떠다니는 별빛보다 찬란하고 황홀한 금색의 작은 연못이 두루마리의 마지막까지 닿았다. 두루마리는 평소의 상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길었고, 황제는 그 안에 적힌 모든 사항을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후….”

황제가 한숨인지, 웃음인지 분간이 안 되는 모호한 소리를 흘리며 두루마리를 접었다. 황제는 나른하게 기대고 있던 어좌에서 몸을 떼고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그는 연단 아래에서 느릿하게 엎드리며 굴종을 보이는 조사단을 일일이 살펴보았다. 황제의 붉은 입술이 재차 열렸다.

“한 치의 거짓도 없겠지.”

황제가 확신을 원했다. 조사단의 단장 여하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황제의 정제된 눈을 보고도 겁을 먹지 않았다. 그녀는 튕겨내듯 확신에 찬 눈빛을 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폐하, 소신은 항상 폐하께 직접적인 증거와 함께 범인도 잡아왔습니다.”

“그대의 능력은 천자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천자는 천자를 떠나 아버지로서….”

황제는 눈을 지그시 감고 비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착잡한 심정을 얼굴 근육을 통해 섬세하게 표현한 황제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슬플 뿐이다.”

“폐하, 천명도 내려오지 않은 상황에서 권력을 위해 형제를 노린 것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알고 있다.”

그녀를 보며 자조적인 미소를 보인 황제가 두루마리를 섬섬옥수로 말았다. 비단 끈으로 두루마리를 완벽하게 봉한 황제는 조사단을 힐끔 보았다. 황제는 허리에 걸린 거대한 대도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스르릉, 하고 서늘한 소리를 내며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던 대도를 집어넣은 황제는 말없이 손가락을 까닥여 형부에 소속된 군사들을 불렀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들어왔다. 조사단 뒤로 몇십 명이 넘는 군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황명이다.”

“황명을 받듭니다, 폐하!”

하나같이 우렁찬 목소리로 복종을 표했다. 황제는 그들을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입을 천천히 열어, 천명을 말했다.

“소현왕, 정비, 좌복야, 그리고 그들의 가족, 하인, 할 것 없이 모두 잡아 들여라.”

황제는 참담한 심정을 쓸쓸히 내비치다 싸늘하게 웃었다. 언제 슬퍼했냐는 듯 가벼운 미소가 산뜻하게 입가에 걸렸다.

“감히 천명이 내려오지 않았는데도 어좌를 노려 형제를 시해하려 한 죄는 천자를 노린 것과 마찬가지다! 천자가 태자를 정하지 않았는데도 형제들을 하늘로 보내 자신이 태자가 되고자 하다니! 목숨으로 죄를 사해도 부족하다!”

황제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점차 소리를 죽이고, 나지막이 말했다.

“임신한 여인도 상관없다. 전부 다 잡아와.”

황제가 대도를 빼 들었다. 빛을 빨아들인 대도가 피를 원하고 있었다.

신성하게 진행된 혼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황실이 벌컥 뒤집혀 졌다. 경혜왕을 피습해 팔을 잘라내고, 더불어 진영왕과 영현왕을 노려 살수를 보냈던 것이 좌복야와 정비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연좌제에 따라 소현왕과 왕비, 그들이 고용한 하인들까지 모조리 황궁으로 잡혀 들어왔다. 멀쩡히 왕부에서 잠을 청하고 왕비와 오순도순 지내던 소현왕은 자신을 죽일 듯이 쳐다보는 황제를 보고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오줌을 지려 바지까지 푹 젖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두 눈이 뽑힌 좌복야의 몸이 창에 꽂혀 시장에서 파는 음식처럼 변해있었다. 가족을 시해하려 한 죄에 대한 벌이었다. 창 여섯 개로 몸을 관통해 공터에 두고, 짐승에게 뜯어 먹히게 만든다.

아직 뜯어 먹히지 않은, 곧 생살이 뜯어 먹혀 뼈만 남을 할아버지의 시체를 보며 소현왕은 결박당한 상태에서 머리를 땅에 박았다.

“사, 살려… 살려… 주시옵소서… 아바마마!”

모든 증거는 좌복야의 소행임을 말하고 있었다.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손을 맞잡고 자신을 태자로 만들려 했는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좌복야는 황제가 태자를 만드는 것에 미적거리자 가장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진영왕을 전쟁터에 내몰아 죽게끔 시도했고, 그 시도가 실패해 손가락 마디가 잘리는 걸로 끝나자 잠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경혜왕을 시해하려 했지만 또 실패했고, 도망치다 잡힌 살수가 고문 끝에 토해낸 자백을 따라 조사단이 움직였다. 오랑캐들로 이루어진 암살단을 고용하고, 그들에게 준 저택과 상당량의 재산이 속속들이 밝혀졌다. 점진적으로 꼬리를 물고 밝혀지는 증거를 황제의 입을 통해 들은 소현왕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황제에게 빌고, 또 빌었다. 빌수록 황제의 한탄과 분노가 증폭하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정말 소현왕은 모르는 일이었다. 또한, 임신한 아내와 어머니만은 살려야 했다.

단 일말의 희망도 놓을 수 없었다. 소현왕은 눈물, 콧물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자신의 코앞에 다가온 황제의 신에 깜짝 놀랐다. 황제가 어느새 처형장 의자에서 내려와 피가 스민 흙바닥에 서 있었다. 황제는 우는 아들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 걸린 어이없음과 약간의 애정에 소현왕은 비굴하게 웃었다. 비굴해도 좋았다.

아내가 살고, 아내의 배 속에 든 아이가 살 수 있다면.

“살고 싶겠지.”

황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는 고민을 손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허리 뒤에 고정한 띠돈에 걸린 대도를 뽑아낼 것처럼 손을 움직이다가, 손을 움직여 흐트러지고 피가 묻은 아들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리고 머리를 뽑아낼 것처럼 휘감아 당겼다. 목이 젖혀지는 통증에 소현왕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네가 모르는 일이냐?”

“예, 아바마마! 소자는 결코 모르는 일이옵니다! 이 모든 일은 어머니와 좌복야가 저지른 것이옵니다! 소, 소자와 왕비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전혀요!”

재갈을 문 정비가 포기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다리는 압슬형에 처해 소생할 수 없었다. 죽느냐, 병신이 되느냐. 그 둘 중 하나였다. 소현왕은 자신이 살기 위해 고문을 당한 어머니와 고문을 당하다 죽은 할아버지를 팔아넘겼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소자도 아바마마의 자식이옵니다. 제발, 아바마마의 은덕을 베풀어 소자를… 아니, 소자가 안 된다면 왕비라도 살려주시옵소서. 왕비는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아바마마의 손자이옵니다!”

“그래, 넌 천자의 아들이고 저 여인이 임신한 아이는 내 손자지.”

그런데 말이다, 아무런 감흥이 없다. 황제는 텅 빈 눈을 돌려 소현왕의 뒤에 있는 며느리를 보았다. 앳된 얼굴이 황제를 보자 울음을 왈칵 터트리고 반사적으로 살려달라고 빈다. 황제는 며느리의 부푼 배를 보았다. 아이라…. 눈을 느리게 깜박이던 황제는 상체를 틀어 욱, 욱하고 우는 정비를 보았다. 한때 자신과 몸을 섞고, 아이까지 낳은 아름답던 여인은 이제 없다. 대신 고문으로 몸이 만신창이가 된 여자가 있다. 그는 정비에게 수려한 미소를 보여주고서, 바닥에 이마를 박아 사죄를 고하는 아들을 보았다. 아들의 이마가 깨져 피가 줄줄 흘렀다. 아들은 거의 반 미친 상태에서 하염없이 빌었다.

제발, 아내만은 살려달라고.

황제는 아들의 음성을 귀에 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시퍼런 멍이 든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어두워진다. 하늘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이다. 빛가루가 뿌려진 금색 바다에 구름이 잔잔하게 떠다녔다. 황제의 눈이 점차 실처럼 가늘어지더니 요염한 눈웃음을 만들어냈다.

그래, 굳이 다 죽일 필요는 없다. 다른 방도로 태자가 되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었다. 영원히 정신을 죄의식에 묻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부모를 죽였다는 죄의식에 말이다.

“그래, 너는 천자의 아들이지.”

다시 한번 그 말을 반복한 황제를 소현왕이 헛된 설렘과 희망을 띠고 보았다. 황제는 아들을 보며 웃었다. 12류의 그늘이 진 하얀 얼굴의 웃음은 아버지처럼 상냥했다.

황제는 아들의 몸을 묶은 줄을 풀어주었다. 팔이 저린 소현왕이 비틀거리며 땅에 손바닥을 짚었다. 뒤로 물러난 황제는 아들의 앞에 대도를 던졌다. 소현왕은 의문이 서린 눈으로 황제를 응시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소현왕의 울대가 위아래로 느리게 움직였다. 황제는 손을 뻗어 아들에게 내밀었다.

“잡아라.”

“아바마마.”

소현왕이 감격과 공포에 젖어 중얼거렸다. 황제의 손을 맞잡은 소현왕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황제는 아들을 부드럽게 끌어당겨 자신의 앞에 세워, 정비를 보게 했다. 정비가 신음하며 눈을 힘겹게 떠 대도를 든 아들을 보았다. 소현왕은 서서히 떨어지는 황제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아바마마….”

감격에 젖기가 무섭게 소현왕이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소현왕은 대도를 양손으로 잡고 울부짖었다.

“어떻게 소자가 어머니를 죽일 수 있습니까!”

“왜 못 하지.”

황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피비린내가 싫다는 듯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네가 살고자 하면 죽여야지. 너는 잘못한 게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바마마…!”

“네 어미는 죄인이야. 그리고 넌 천자의 아들이고, 신하지.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지 않으냐.”

황제가 우는 소현왕의 눈물을 닦아주며 고아하게 웃고, 또박또박 말했다.

“죄인을 죽여 너의 무결함을 보여라.”

가장 잔인하고 부드러운 명령이 내려앉았다. 소현왕은 절규하며 대도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온몸이 떨렸다. 병에 걸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떨었다. 황제는 소매로 얼굴의 반을 가린 채 걸음을 움직여 배가 산처럼 부풀어 오른 며느리의 앞에 섰다. 그가 뒷짐을 지고 며느리를 응시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는 딸이길 바란다. 그러면 적어도 죽을 가능성은 낮아지니까.”

황제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자신과 아내, 어머니를 죽일 생각이었다. 이 모든 것이 기만이라는 걸 알지만, 소현왕은 눈물을 뚝, 뚝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기만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살고 싶다.

대도를 쥔 손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핏줄이 바짝 융기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정비는 핏발이 선 아들의 눈을 보며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어차피 살 수 없는 몸…. 더 고문을 받고 고통에 신음하느니 아들의 손에 죽고, 그 대가로 아들과 며느리가 산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다.

소현왕은 죽음을 체감한 어머니를 보고 눈을 감았다. 소현왕이 짐승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어머니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근처에 있던 충신들도 이를 악물며 눈을 돌리는데, 오로지 황제는 무감한 눈으로 아들이 어머니를 죽이는 행태를 지켜보았다.

황제가 벌인 가면무에서 웃는 건, 황제밖에 없었다. 그의 소매에 가려진 입술은 웃고, 눈은 차가웠다.

이제 남은 건, 강이 가장 사랑하는 진영왕이었다.

그 아이가 죽고, 아우이자 자식을 낳아 태자로 만든다면 넌 어떤 얼굴을 할까.

날 욕하겠지. 어떻게 형제들을 다 죽이고, 다시 아이를 낳게 해 태자로 만들었냐고.

하지만 역시 그것 또한 별 감흥이 없었다. 널 살게 할 수만 있다면 나 혼자 지옥으로 가 모든 벌을 받아도 상관없었다.

죄인은 내가 될 테니, 넌 살아만 다오. 태자가 황제가 되어야 강이 산다. 가장 간단한 사실이 가장 비참한 피바다를 만들어냈다.

황제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정말… 나도 별짓을 다하는군.”

황제는 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오늘은 조금 피곤했다. 피를 너무 많이 본 탓일까.

*

눈이 내렸다. 매서운 한파가 몰아쳐 볼에 생채기가 났다. 강은 자신보다 한 살이 어리지만, 부쩍 커진 아우의 뺨을 떨리는 손으로 매만지며 희미하게 웃었다. 소현왕은 여전히 상냥하고 착한 형의 눈을 피했다. 강은 자신을 거부하는 소현왕을 보고 손을 거두었다.

“추울 거야.”

강은 미리 데워온 돌을 소현왕의 손에 쥐여주었다. 소현왕은 머뭇거리다가, 추운 건 거짓이 아니었는지 양손으로 돌을 꼭 잡았다. 구금당해있던 터라 하얗고 반질반질하던 손이 다 트고 갈라졌다. 동물의 몸에서 나온 기름을 손등에 발라 주었지만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꽃기름으로 닦아내고 정돈한다면 다시 원래 손으로 돌아올 텐데. 강은 안쓰러움을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아우의 손을 잡았다.

소현왕은 “서방님.” 하고 부르는 연약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왕비가 아니라 평범한 여염집의 여인이 된 아내가 서 있었다. 그녀는 허름한 무명옷을 입고 있었지만, 한결 편해진 얼굴로 소담스럽게 웃었다. 아내는 품에 태어난 아이를 안고 있었다. 둘 다 낡은 무명옷을 입고 있었지만, 황제는 적어도 손녀는 건드릴 수 없었는지 따뜻한 옷과 강보로 둘러싸 보냈다. 강은 아우의 자식을 쓰라린 시선을 보았다. 눈바람이 거세졌다. 강은 담영이 이끄는 손길에 따라 몸을 뒤로 물렀다. 과거의 소현왕이었던 성인은 강을 돌아보지 않았다. 정은 자신의 어머니를 죽여 살려낸 아내의 손을 잡았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살았으니 된 거라고. 지옥에서 안식을 찾아낸 아우를 본 강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바마마, 아정의 자식은 살려주세요.’

‘살려주면?’

강이 황제에게 안겨 부탁하자 황제는 강의 허리를 감싸 안고 되물었다. 그는 강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갖다 대고, 온기를 공유하며 은근히 물었다.

‘살려주면, 넌 천자에게 뭘 해줄 테냐.’

‘…뭐든지.’

강은 숨을 삼키며 황제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부탁했다.

‘아바마마, 소자를 사랑하시니… 소자가 원하면….’

눈을 내리뜨고 더듬더듬 자신의 소원을 빌던 강은 눈을 감고, 어릴 적처럼 황제의 뺨에 연달아 입을 맞추었다. 황제는 말갛고 검은 눈이 흔들리는 걸 집요하게 응시하며 웃었다. 그는 강의 콧등을 툭 건드리며 어울리지 않게 칭얼거렸다.

‘입을 맞춰다오.’

‘…눈을.’

강은 눈을 감지 않는 황제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떴다. 부끄러움에 입술을 깨물던 강은 용기를 내어 황제의 눈을 양손으로 가렸다. 황제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강을 저지하지 않았다. 강은 그 상태로 황제에게 입을 맞췄다.

쪽.

입술과 입술이 닿고, 온기가 온기로 전해지고, 그것은 뜨거움으로 변했다.

‘…좋구나.’

입을 맞춘 채 웃는 버릇을 가진 황제가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쪽, 쪽, 쪽…. 하고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침전에서 계속 울렸다.

황제가 그만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까지 강은 황제와 입을 맞추고, 안겨있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우가 살아 평범하게 살 수 있다면.

“형님.”

“응.”

소현왕이 강을 비슷한 위치에서 보더니 고개를 숙여 쥐고 있던 돌 하나를 건넸다. 강은 왜 자신에게 주는지 몰라 만류하려는데, 그때 소현왕이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빠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폐하를 조심하십시오.”

강이 눈을 움직여 소현왕의 발갛게 변한 귀를 보았다. 소현왕은 떨어지는 사이에도 입을 멈추지 않고 강에게 경고했다.

“폐하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피할 수 있다면 피하시길.”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소현왕을 잡아 물으려던 강은 손을 멈추었다. 더 이상의 접촉과 호기심을 불 피우면 황제가 의심할 것이다. 황제의 눈과 귀가 자신의 뒤에 있었다. 강은 반듯한 자세로 서서, 덤덤한 얼굴로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아우와 여자, 그들의 품에 안긴 아기를 떠나보냈다. 점이 되어 사라지는데도 강은 그 자리에 섰다.

“전하, 가시지요.”

“알아.”

강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먹을 여러 번 쥐고 풀던 강은 손톱자국이 남은 손바닥을 보았다. 눈보다 차가운 기운으로 스민 눈이 점차 텅 비어갔다. 거기에도 눈바람이 불었다.

강은 울지 않아도 울고 있었고, 아우의 가문의 몰락을 진심으로 슬퍼하며 황제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버지이기 전에 황제다. 공평하게 법에 따라 죄인을 대해야 했다.

백성들의 말처럼 황제가 오히려 따뜻한 면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려 해도 마음은 그를 묘하게 밀어내고, 거부하고 있었다. 마음이 몹시 시려와, 강은 몸을 떨었다. 황제가 하사한 모피를 걸쳐도 왜 이리 추운지.

17살, 강은 그렇게 이별을 배웠다. 슬픔을 감내하는 법을 터득했다.

*

쿨럭, 하는 기침 소리가 새벽에 열린 비상성 회의에 울려 퍼졌다. 정적은 동경이 산산조각나는 것처럼 박살 났다. 불안한 기침 소리에 비상성 회의에 참여한 문무백관, 친왕들의 시선을 모았다. 기침을 하는 이는 급격하게 살이 마르고, 얼굴이 검게 변해 죽을상을 한 진영왕이었다. 주국을 멸망시킨 후 얻은 병세가 심해져 그는 기침을 달고 살았고, 두통을 호소했다. 강철처럼 강하던 정신은 지독해져 가는 병세에 따라 나약해졌다.

“크흑….”

진영왕은 불규칙적으로 기침하며 들고 있던 무명천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하얗던 천이 붉게 변했다. 각혈이었다. 강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강의 미려한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형님, 이라고 부르고 싶은 입술이 약하게 떨렸다. 강은 가장 먼저 황제를 보았다. 그라면 진영왕을 조금이라도 쉬게 해주지 않을까. 어의라도 불러 진맥을 보게 해주지 않을까.

그러나 황제는 기침과 각혈을 멈추지 않는 진영왕에게 차디찬 눈빛을 보내며 화를 냈다.

“어떻게 주국을 멸망시켰기에 지금 저들이 오랑캐와 한 몸이 되어 연나라를 공격한단 말이냐.”

황제가 주먹을 쥐고 책상을 쾅, 소리 날 정도로 내리쳤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황제 다음으로 입을 연 건 대장군이었다. 그는 황제의 오른편에 앉아 침착한 얼굴로 지도를 보고 있었다.

“폐하, 어차피 저들은 승리할 수 없는 몸입니다. 그들에겐 돈도, 인력도, 무기도 연나라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합니다. 천한 오랑캐들의 전술은 소신이 잘 알고 있으니, 이번 일은 소신에게 맡겨주시옵소서.”

“전쟁을 누가 장군만 보낸단 말이냐? 장군을 지휘하고 사기를 돋아줄 친왕이 필요한 법. 이 일은….”

“소신이 나서겠습니다, 폐하.”

강이 의젓한 얼굴로 황제를 보며 말했다. 강의 난데없는 발언에 장군들과 문관들은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다.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숨을 고르던 진영왕도 놀라서 강을 보았다. 17살이 된 강은 한 번도 전쟁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황제의 명령을 따르며, 가고 싶다는 말도 직접적으로 강하게 내비치지 않았다.

황제도 조금은 놀랐는지 입술 끝을 슬며시 올렸다. 황제와 강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팽팽해졌다. 시원하게 트인 강의 눈매는 수그러질 기미가 없었다. 강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도를 보았다. 오랑캐들이 있는 지점, 그리고 거기서 맞닿은 국경을 눈여겨보던 강은 결심한 듯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소신의 나이 17세입니다. 더 이상 어리지도, 작지도 않습니다. 폐하의 가르침대로 활을 배웠고, 전술도, 마술도 완벽하고 충분히 습득했습니다. 이번엔 소신을 믿고 보내주십시오. 누구보다 큰 승리를 폐하의 발밑에 바치겠습니다. 확실한 그들의 굴복을 소신의 손으로 쟁취해 보이겠습니다.”

강의 말은 빠르거나, 느리지 않았다. 단조로우면서도 힘이 있었고, 울림이 있어 소리가 크지 않아도 멀리 있는 황제에게 전달되었다. 무복을 입은 황제는 책상에 올린 손을 슬그머니 내리고,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황제의 눈이 점차 가늘어졌다.

그가 웃었다. 습관처럼 웃는 그였다. 강은 그 사실을 가장 옆에서 잘 알고 있었기에 묵묵히 자리를 지켜, 황제를 보았다.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그의 뒤에 숨어있지 않겠다. 그리 다짐한 강이 입을 열 때쯤, 황제가 턱을 괴고 나른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네가 왜 그래야 하지?”

“…소신은 폐하의 신하니까요.”

“넌 그럴 필요가 없다니까.”

황제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강은 윤곽이 뚜렷해지는 그의 의도에 눈을 슬며시 크게 떴다. 강은 그의 진심에 당황하고 있었다. 차분하게 황제를 보고 의사를 전하던 강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뇨, 소신의 역할은….”

“천자를 즐겁게 해주는 거지. 그 외의 역할은 필요 없다.”

너무나 태연하고 당연한 말에 비상성 회의가 얼음을 끼얹은 것처럼 차가워졌다. 강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황제를 직시했다. 황제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하고, 얘기한 적이 없었다. 비공식적으로는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인 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정의당하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사내로서, 아들로서, 애첩 취급을 당한 강은 입술을 핥고, 달싹였다. 그 모습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황제는 지도를 둘둘 말았다. 회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그는 끝내려 했다.

“영현왕은 출정하지 않는다. 주국과 오랑캐의 협동 작전을 막는 전쟁엔 진영왕이 출정하도록.”

“폐하!”

강이 소리를 질렀다. 벌떡 일어난 강은 출정 명령에 비참함을 금치 못하는 진영왕을 보았다. 진영왕은 체념한 듯 눈을 반쯤 내리뜨고 있었다. 저렇게 아픈 몸으로 출정을 하라는 건, 전쟁터에서 죽으라는 뜻과 같았다. 문무백관들도 그 뜻을 알고서 “폐하….” 하며 만류했지만 황제는 물러남이 없었다. 대장군이 풍성한 수염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 진영왕 전하께선 지금 몸이 많이 편찮으셔서 출정하시면 하늘로 돌아가실 수도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병사들의 사기도 현저히 줄어들 것이고 전쟁에 그리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영현왕 전하의 말대로, 이번 전쟁은 영현왕 전하께서 출정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대장군은 군인답게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황제도 그런 대장군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단지 웃으며 유려하게 말했다.

“안 된다. 전쟁터에 강을 보내서, 강이 다치거나 하늘로 가는 모습은 볼 수 없다.”

“…그러면 형님은요? 폐하.”

강이 창백해진 낯빛으로 황제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황제는 이 넓은 대전에서 홀로 서서 자신을 애절하게 보는 강을 황홀한 눈으로 보았다. 하루가 갈수록 강은 완벽하게 잘생긴 사내가 되어갔다. 젖살이 빠진 뺨은 날렵했고, 입술은 꽃잎처럼 붉고 도톰했으며, 눈은 길고 시원하게 트였다.

울리고 싶다. 자신의 밑에 깔아 눕히고 거침없이 찔러 울리고 싶은 입술이었다. 황제는 치밀어 오르는 욕구를 이성으로 누르며 웃었다. 손으로 입가를 가려보았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결국 웃음을 자제하는 걸 포기하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래. 죽어도 상관없다.”

강이 숨을 멈췄다. 문무백관들도 침음했다. 진영왕은 ‘죽어도 상관없다.’라는 황제의 말에 놀라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피를 닦아냈다. 하얗던 천이 반이나 흠뻑 젖어 시뻘겋다. 목숨은 비바람 앞의 등불처럼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황제는 진영왕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죽을 거면 전쟁터에 가서 죽으라고 말을 하는 것일 터였다.

강을 죽게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진영왕은 눈을 감고 숨을 짧게 내쉬었다. 기침이 멈추지 않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진영왕의 현저하게 마른 등이 굽어졌다. 황제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떠나려 했다. 강은 명령을 거두지 않는 황제에게 달려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아바마마, 안 돼요. 형님은 지금 아프세요. 아바마마, 제발… 제발, 형님만은… 안 돼요. 제발, 소자를 봐서라도, 살려주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형님은 안 돼요, 아바마마.”

강이 황제의 하얀 손을 양손으로 잡고 매달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살피던 대장군도 강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진영왕은 자신을 위해 황제에게 비는 아우와 신하들을 보며 주먹을 쥐려 노력했다.

그러나 정말 생명을 잃어가는 몸은 힘도 없는지 주먹 하나 제대로 쥐지 못했다. 힘을 주고 싶었는데, 힘이 무력하게 빠져나간다. 진영왕은 거칠어지는 호흡을 이어가며 황제를 잘게 떨리는 눈으로 보았다. 황제는 검푸른 빛으로 변한 진영왕을 무심하게 보고,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비는 강을 사랑스럽다는 시선으로 보았다.

그걸 멀리서 목격한 진영왕은 황제가 속삭였던 태자의 꿈을 접었다.

자신은 태자가 되지 못하고, 이번 전쟁에서 죽으리라. 죽지 못한다면 황제가 어떻게든 죽이리라….

“송이 살길 바라느냐?”

황제가 흐느끼는 강의 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강이 하얗게 변한 얼굴을 들어 올려 황제를 본다. 황제의 손은 애정을 담아 내려와 강의 눈물을 닦아주고, 하얗게 질린 뺨에 체온까지 불어넣어 주었다. 강은 그의 손바닥에 뺨을 대었다. 그가 좋아하는 행동이었다. 황제는 울음을 삼키는 강의 검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입을 열었다.

“송이 살길 바라느냐고 물었다.”

“예, 아바마마.”

“그런데 강아, 아비는 말이다. 네가 죽는 건 싫다. 하지만 송이 죽는 건 상관없단다.”

황제는 손을 거두고, 강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지며 상냥하게 웃었다.

“천명은 거두지 않는다. 이번 전쟁은 진영왕이 출정한다.”

송이 죽어도 상관없단다. 오히려 네가 사랑할수록 죽어줬으면 하는구나. 본심을 적절하게 황명에 섞은 황제가 웃음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강은 황망한 시선으로 멀어져가는 황제의 넓은 등을 보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일어나 황제에게 가려던 강은, 의자가 넘어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진영왕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

승리를 쥐고 돌아왔을 때처럼 황제는 붉은 용포를 입은 채 갑옷을 입은 진영왕을 내려다보았다. 하강하는 시선은 그때와 변함없이 차갑다. 진영왕은 곧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기침을 삭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은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처럼 나약해져 있었다. 원인 없는 병을 1년간 앓았는데도 산 게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던 몸이었다.

마지막으로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 진영왕이 느리게 한 걸음씩 태화전을 벗어났다. 진영왕을 따르는 병사들도 상을 치르는 얼굴로 그의 등을 보며 걸었다. 유독 작아진 진영왕의 등이, 그나마 갑옷을 입어서 든든해 보이는 등이 멀어졌다. 그 모습을 황제의 곁에서 멍하니 지켜보던 강은 뒤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어깨를 굳혔다. 숙비가 입술을 짓이기며 아들의 출정에 오열하고 있었다.

이건 누가 보아도 황제가 죽으라고 밀어 넣은 것이었다. 강 대신 죽으라고. 장군이나 병사들이 살아 돌아와도, 영혼의 뿌리를 흔드는 병을 앓고 있는 진영왕은 죽을 테지.

강은 힘겹게 정신을 붙잡은 상태로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찬란한 빛을 뽐내며 점멸하고 있는 군대를 보고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황제가 자주 짓는 특유의 은은한 미소가 오늘따라 굉장히 아름다웠다.

강은 미소에서 멀어지고 싶었으나, 황제의 손이 어깨에 들러붙어 놔주지 않았다. 그는 강이 자신을 떠나는 걸 잠시도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황제의 뜻대로, 진영왕은 승리를 가지고 사망한 채 돌아왔다.

*

“자, 보렴. 전쟁이 이렇게 무서운데 가고 싶다고?”

강의 몸은 쉴 새 없이 떨렸다. 눈은 충격으로 부릅떠졌고, 입은 벌어져 거친 숨이 헐떡거리며 나왔다. 강은 벽처럼 뒤에 서서 퇴로를 막은 황제 때문에 앞만 봐야 했다. 더군다나 그가 어깨를 꽉 잡고, 목까지 지탱한 터라 옆을 볼 수도 없었다.

“아가, 아비는 널 죽게 하지 않아.”

황제는 승리를 했지만, 죽어서 돌아온 진영왕의 시체를 강제로 보여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충격에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미동 없이 눈물을 뚝, 뚝 흘렸다. 자신 때문이었다. 자기 때문에 형님이 죽었다.

“…잘못했습니다.”

얼마나 아팠을까. 저렇게 피를 토하며 죽었다니. 진영왕의 입은 괴기하게 벌어져 검붉은 피를 보이고 있었다. 고통으로 팽창된 눈과 근육이 그의 고통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말 위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고 했다. 병사가 제대로 잡지 못해 목이 꺾였다. 시체를 나무와 못으로 고정하지 않았다면 강은 비틀린 시체를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 그나마 황제의 배려로 멀쩡해진 시체를 볼 수 있었다.

“잘못했어요… 잘못 했습니다, 아바마마…. 소, 소자가 전쟁에 출정하겠다고 하여, 아, 아바마마의 심기를 거스르고… 흑… 아아, 아바마마…. 흐윽, 흑…. 자, 자, 잘못… 아, 흐윽…!”

편하게 죽지 못하고, 원하지 않은 전쟁에 내몰려, 태자가 되지 못하고 죽은 18살의 형님이 너무 불쌍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멀쩡히 살아남은 형제가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다. 가장 살리고 싶었던 형님마저 죽자 강은 무너졌다. 땅이 갈라져 몸이 출렁인다. 강은 황제가 잡아주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앞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관이 흔들린다. 강의 듬직하던 어깨가 안으로 말렸다. 강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죽은 형님을 보고 싶지 않다.

“이런. 너에게 잘못을 고하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우느냐.”

“잘못… 잘못했습니다, 아바마마. 그러니 제발….”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들이 황제에게 빌었다. 강은 충격으로 초점도 잡지 못했다. 말은 백치처럼 더듬거리고 형을 죽게 만든 황제를 찾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다. 자신만을 의지하도록. 강은 황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죽은 아들 앞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안았다.

강의 몸이 폭 안겼다. 장성했지만 자신에 비하면 여전히 작은 몸. 그 몸을 으스러질 정도로 세게 끌어안은 황제가 숨을 나지막이 터트렸다. 강은 황제의 등에 두 팔을 두르고, 손가락으로 그의 옷깃을 찢을 것처럼 잡았다.

“흐윽… 아바마마… 소자는….”

“강아.”

강이 눈물을 삼키며 황제의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 황제는 시선을 맞추는 걸 거부하는 아들의 둥근 머리를 보며 쓰게 웃었다. 1년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황제는 탐욕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강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서로가 서로의 의지가 되었다. 황제는 허리에 두른 손을 더듬거려 메마른 배를 만졌다.

납작한 배가 부풀 날도 얼마 안 남았다.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황제는 짠내가 나는 뺨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진짜 아우를 갖게 해주마.”

“…다 죽었는데…. 어떻게….”

강이 정신을 반쯤 놓은 상태에서 중얼거렸다. 눈물을 그친 얼굴이 멍하다. 황제는 강을 떼어놓고, 눈물을 양손 엄지로 닦아주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예쁜 아우가 태어날 것이다. 자식처럼 예쁜 아우. 갖고 싶지 않느냐?”

강이 고개를 저었다. 강은 소리 없이 황제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대고 허리에 두 팔을 감았다.

“…다 필요 없습니다.”

황제는 말없이 강을 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약간의 틈을 두고 밀착했다. 황제의 검은 용포가 강의 전신을 감쌌다.

어둠이었다.

거부할 수 없었다.

3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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