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 1화 (1/11)

1권

서장

688년, 영휘(永輝) 20년 성종의 황자 연강, 하늘의 부름을 받고 희비(禧妃)로 책봉되다.

*

종이 세 번 울렸다.

영롱하고 맑게 울리는 종소리가 무녀의 발끝에 닿기가 무섭게, 무녀가 손을 올려 북을 내리쳤다. 땅에 끌릴 정도로 길게 늘어진 무녀의 소매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단아하게 움직였으나, 북을 내리치는 손은 담금질을 하듯 매섭고 단호했다. 눈을 비단으로 가린 무녀가 일어나 홀린 사람처럼 북을 거세게 두들기자, 천신전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일제히 그곳으로 눈을 돌렸다.

둥, 둥, 둥.

단 한 사람, 가장 존귀한 어좌에 앉은 남자는 턱을 괸 채 무심한 눈으로 불이 피어오르는 단상을 보았다. 불길이 바람에 따라 흔들거리고, 못다 핀 꽃처럼 사그라졌다. 불길의 미세한 변화를 좇는 금안은 가늘어지거나, 미묘하게 커지거나, 혹은 은밀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의 미소에는 불이 결코 꺼지지 않으리란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북소리가 하늘을 향해 높게 올라갔다. 건방진 소리였다. 무녀들은 우렁찬 소리가 나도록 북을 치며 하늘에게 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제사를 주관하는 신관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벌벌 떨며 무녀들의 희끄무레한 발을 보았다. 북소리의 끝에 따라오는 요기가 서린 종소리는 무녀들의 발목에서 시작된다. 핏줄이 비치는 뽀얀 발목이 장단에 맞춰 느릿하게, 그러나 현란하게 움직여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들에게 고정시켰다. 황제가 친히 내려준 종이 울렸다. 그 소리에 이성이 탁하게 흐려진다.

마치 수면에 톡 떨어진 물방울 같은 소음이 잔재되어 공중에 떠돌 때, 불길이 확 솟구쳤다. 여태 무료하게 불을 지켜보던 황제가 벌떡 일어났다. 북을 치며 사람들의 정신을 앗아가던 무녀들도 춤을 멈추었다. 무녀들에게 정신을 바쳤던 사람들도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불을 보았다. 천신전에 감도는 것은 무녀들의 달궈진 숨이었다.

“아아….”

신관의 아련한 신음이 정적을 깨트렸다. 신관은 혀 언저리에 남아있는 불안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불안함이 해소되긴커녕, 확실한 응어리가 되어 신관의 명치에 자리 잡았다. 신관은 증폭되어 가는 답답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천신전 가장 높은 곳에 앉아있는 황제였다. 고결한 백을 바탕으로, 두 마리의 늑대가 승천하는 광경을 금실로 수놓은 용포가 신관의 시야를 꽉 메웠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시선을 위로 올리자, 보기만 해도 숨이 멎을 것 같은 용안이 보였다. 황제의 금안이 밤을 다스리는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와 반대로 신관의 얼굴은 지독한 절망으로 물들었다.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황제의 면류관에 달린 진귀한 보석들이 부딪히며 영롱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황제는 절도 있는 걸음으로 열두 개의 계단을 내려왔다. 황제가 완전히 바닥에 도착하자, 무녀들이 바닥에 엎드려 온몸으로 황제를 찬양했다. 무녀들 다음으로 비빈, 몸이 망가진 친왕, 황녀, 궁녀, 내관들이 땅에 손을 대고, 손등에 이마를 대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그들을 가로질러 황제는 한 지점에 멈추었다. 미친 듯이 몸을 떨고 있는 신관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황제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눈을 반쯤 올리고 있던 신관은 하얗고, 긴 소매가 보이자 눈을 세게 감았다. 소매에서 용포보다 더 하얀 손이 나왔다. 한 떨기의 꽃 같은 섬섬옥수가 우아하게 움직여 신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신관은 부드러운 손길에 꼼짝없이 잡혀 황제만 응시했다. 황제의 금안이 짙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하늘이 주신 답을 말해야지. 그것이 그대의 본분일 텐데.”

“폐, 폐하….”

턱을 잡고 있는 엄지가 신관의 부르튼 입술을 잡아 벌렸다. 황제의 금안이 가늘어졌다. 그의 웃음이 확답의 방향으로 바뀌자, 신관은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늙은이의 울음에도 황제의 눈빛은 꺾이지 않았다.

“어서 고하라. 하늘께서 무슨 답을 주셨는지, 하늘께서 천자의 후궁을 누구로 지명했는지.”

턱을 잡은 손은 하염없이 부드러웠으며, 황제의 어투는 담백하고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황제의 금안을 올려다본 신관은 처마 끝에 선 듯한 아찔함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가슴이 널을 뛰는 것 같았다. 공포로 시작된 떨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무서웠다.

그러나 서릿발이 깃들어있던 금안에 봄이 찾아온 순간, 신관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하늘께서 고하신 폐하의 새로운 후궁은….”

새로운 후궁이라는 말에 살아있는 비빈들의 눈이 긴장으로 굳어갔고, 친왕은 불쾌한 심기를 슬그머니 드러냈다. 그 뒤에 자리 잡은 문무백관들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황제와 신관을 보았다. 신관의 턱을 잡은 황제의 손이 뜨듯한 공기를 가로질렀다. 기다랗고, 하얗지만 사내다운 손가락이 신관의 입술에 닿았다. 어서 말하라는 듯, 무언의 뜻을 담아 재촉하는 손짓에서 향이 날 것 같았다. 그는 존재 자체가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사시사철 푸르게 피어나는 꽃 같았다. 그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듯 눈을 깜박거리던 신관의 시선이 비빈 중 한 명에 닿았다. 황제의 아름다운 꽃밭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검은 머리를 틀어 올려, 목과 뺨이 드러나 있었다. 여전히 소녀처럼 곱고 뽀얀 그녀의 얼굴을 안타깝다는 듯 응시하던 신관은 고개를 틀어 황제를 보았다. 황제의 입술이 유려하게 움직이며 아름다운 미소를 만들어냈다.

“천자의 새로운 후궁은 누구인가?”

“폐하의 새로운 후궁은….”

마른 침을 삼킨 신관은 흔들리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의 아드님이자 친왕이신 영현왕입니다.”

황제의 아들이자, 친왕의 봉호가 호명되자 천신전에 한 자리씩 차지한 사람들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귀비는 굳어서 숨도 쉬지 못했고, 경혜왕은 가면 속에서 기묘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경건한 제사에서 무엄하게도 침음하는 자도 있었다. 평소라면 그런 자를 찾아 벌을 내렸을 황제였지만, 아들이 후궁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쁜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미소는 시간이 흐를수록 짙어졌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듯한 청아한 미소에 신관은 마른침을 삼켰다.

“폐, 폐하!”

비빈들 사이에 숨을 죽인 채 얌전히 있던 여 소의가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그녀를 말리기 위해 천신전을 지키던 창병이 다가왔으나 황제가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황제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자, 여 소의가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다가와 황제의 발치에 엎드렸다. 소리 내어 흐느끼는 그녀의 둥글고 가녀린 어깨는 사정없이 떨렸다.

“폐, 폐, 폐하…. 무언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강이, 아니, 영현왕은 폐하의 친자식이옵니다! 하늘께 다시 한번 말씀을 올리는 게…!”

겁에 질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뿐인 아들을 지키기 위해 여 소의가 입을 열었으나 황제의 웃음소리에 의해 막혔다. 황제는 자신의 발아래에 엎드려서 우는 여 소의를 보며 듣기 좋은 목소리로 호쾌하게 웃었다. 여 소의는 내부에서 끓는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세상에서 제일 기분이 좋은 사람처럼 선하게 웃고 있었다. 선하고 아름다운 미소에 여 소의는 울음을 멈추고 황제를 멍하니 보았다. 황제는 어느새 한쪽 무릎을 대고서, 여 소의의 뺨에 손을 대었다. 혼례 이후 처음으로 보여주는 그의 다정함에 여 소의가 살짝 떨었다. 그가 상냥하거나, 다정할 때는 항상 무슨 연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연유에는 주로 아들이 있었다. 친절하게도 황제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

“설마, 아들이 비고 그대는 빈이라 질투하는 겐가?”

“폐하!”

여 소의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황제를 불렀다. 그녀는 고개를 빠르게 좌우로 저으면서 황제의 손목을 잡았다. 황제는 냉정하게 그녀를 밀쳤다. 옆으로 넘어진 그녀는 신음도 내지 않고 바짝 다가와 다시 황제 앞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그녀의 마른 등이 쉴 새 없이 떨렸으나 그녀를 보는 금안은 심드렁했다.

“폐하, 제발…. 제발 그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강은 폐하의 아들입니다.”

그녀가 거센 울음을 토해내며 황제에게 애원했다.

“그리고 이제 천자의 후궁이지.”

웃음을 거두고, 단호하게 말을 내뱉은 황제가 친군을 모았다. 절망에 빠진 여 소의가 할 말을 잃은 채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하나둘 모여드는 친군들을 눈여겨보면서도, 자신을 보는 여 소의를 놓지 않았다. 친군들이 소리 없이 빠르게 모여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세워진 무릎에 손을 올린 채 황제를 응시했다. 굳건한 충성과 신뢰로 다져진 눈빛에 황제가 여유롭게 웃었다. 그는 아직도 희망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는 여 소의의 마음을 단칼에 짓밟았다.

“앞으로 영현왕은 그대의 아들이 아니다. 천자의 후궁으로 대하도록.”

여 소의가 신음을 내뱉더니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하지만 그녀를 안타깝게 보는 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낯익은 얼굴을 한 새로운 적을 마주하게 된 비빈들은 소맷자락 안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황제는 그걸 뻔히 알면서도 마치 보란 듯이 천신전에 있는 자들에게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후궁을 알렸다.

“영현왕은 이제 친왕이 아니다. 그는 천자의 후궁이며.”

고의적으로 말을 멈춘 황제는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비빈들을 천천히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희비(禧妃)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처럼 우아하게 미소가 짙어졌다.

*

황성의 은우문이 시나브로 열렸다. 은우문을 통해 빠져나온 것은 황명을 들고 있는 늙은 신관과 검은 무복을 입은 수십 명의 친군,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봄꽃이 그려진 가마였다. 오늘 하늘에게 부름을 받은 희비가 탈 가마였다. 장인이 혼을 담아 조각한 꽃은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아름다웠다. 이슬 한 방울이 고인 백색의 꽃은 순수한 사랑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빈의 사대 덕목 중 하나였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일컬어 비빈의 한이라고 말했다.

하늘의 부름을 받아 황제의 비빈이 되면 비빈은 죽을 때까지 단 한 명의 지아비를 섬겨야 했다. 부름을 받는 날 초야를 맞이해야 한다는 예법에 따라 처음은 황제와 침상에 누울 수 있었으나 그 후는 전적으로 비빈의 아름다움과 성품, 매력에 달려 있었다. 황제의 눈에 들지 못한다면, 비빈은 죽을 때까지 혼자 궁에 갇혀 있어야 했다. 한파처럼 끝도 없이 밀려드는 서러움과 고독함에 시달려 자살을 택할 수도 없었다. 자살을 택하는 즉시, 비빈의 가문뿐만 아니라 내관, 궁녀, 심지어 9촌까지 모조리 사형대에 올라가 목이 잘리기 때문이었다.

‘아, 오늘도 꽃이 울겠구나.’

황성 근처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름 모를 비빈이 탈 가마를 보며 그리 생각했다.

사람들의 호기심이 차곡차곡 쌓일 때쯤, 꽃가마가 거대한 왕부에 멈췄다. 영현왕부였다. 소금궁이라고 불릴 정도로 영현왕부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황제가 그만큼 영현왕을 귀애한다는 반증이었다. 손에 든 옥구슬보다 더 소중하게 다룬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한 늙은 신관은 헛기침을 하며 말에서 내렸다.

“황명이 내려왔소.”

가래가 낀 듯, 탁하고 걸걸한 음성이 주름진 입술 바깥으로 밀려나오자 문을 지키던 자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예를 갖추었다.

“일어나시오.”

황명이 적힌 두루마리를 든 신관이 말한 뒤에야 그들은 엉거주춤 일어나 문을 열 수 있었다. 은우문이 열릴 때보다 조급하게 열린 대문 안으로 신관과 친군들이 잇따라 들어갔다. 가마는 바깥에서 멈추었다. 신관과 친군들이 들어가고서 고개를 든 그들은 꽃가마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째서 비빈들이나 탈 법한 붉은 가마가 이곳에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다. 서로의 얼굴을 보던 그들 중 한 명이 눈치를 살피며 띄엄띄엄 말했다.

“혹시… 왕부에 있는 여자가 빈이 된 거 아닌가?”

그의 말을 들은 허리가 살짝 굽은 남자가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것 같네. 그렇지 않고서야, 꽃가마가 왕부에 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들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가슴을 붙잡은 채 허허하고 웃었다. 황명은 한 달에 몇 번이고 내려왔다. 황제가 영현왕을 부르는 지시였다. 사소한 것부터 귀찮은 것까지, 황제는 영현왕을 옆에 두고 모든 것을 공유했다. 황제를 잘 따르는 영현왕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황제의 명에 따라 황궁으로 갔다.

그러나 신관과 꽃가마까지 온 적은 처음인지라 그들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었다. 그들이 한숨을 푹 내쉬며 왕부의 문을 닫을 때쯤, 신관과 친군들은 꽃이 만개한 나무가 심어진 외원을 지나 전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영현왕부에서 일하는 자들은 늙은 신관의 등장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반사적으로 무릎을 땅에 붙였다. 그들은 한 번도 보지 못한 황제를 대하듯, 경건하고 절도 있게 신관을 맞이했다. 신관이 ‘고개를 들라.’라고 말할 때까지 들지 못하고, 소리도 내지 못하기에 그들은 입을 단단히 다물고 왕부의 돌바닥만 응시했다.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가 금세 감돌았다.

신관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명을 받을 당사자를 찾기 시작했으나, 정작 당사자는 왕부를 비웠는지 털끝도 보이지 않았다. 황금색 두루마리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던 신관이 입을 열었다.

“영현왕은 어디로 갔는가.”

늙은 신관의 말은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매우 느리고 스산했다.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영현왕이 간 곳을 말했다간, 그들의 주인이 당장이라도 신관의 손에 잡혀 끌려갈 것 같았다.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바탕으로 한 정적이 계속 이어지자, 친군의 대장인 예담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의 눈은 무심한 듯 보이나, 잘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롭게 움직여 왕부의 전각과 정전을 거침없이 누볐다. 예담영은 허리 뒤로 찬 도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신관에게 말을 건넸다.

“영현왕은 사냥을 하러 간 것 같습니다.”

신관이 주름으로 늘어진 눈을 치켜 올리며 예담영을 응시했다. 예담영은 의심하지 말라는 듯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저는 영현왕과 각별한 사이입니다. 물론 신관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쪽이 아니라, 남자로서 나누는 우애로 다져진 사이죠. 영현왕은 원래 정무가 없는 평일에는 종친들과….”

예담영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예담영은 신관보다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활짝 열린 문틈으로 정제되지 못한 빛이 확 쏟아져 내렸다. 예담영은 지나치게 눈부신 빛에 인상을 찡그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신기하게도 빛은 곧 서서히 종적을 감추기 시작하더니, 그 빛을 뚫고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한 손으로 고삐를 여유롭게 몰며, 다른 손에는 사냥감을 쥐고 있었다. 정신없이 달리는 말과 흔들리는 사냥감과 다르게, 그 말을 다루는 훤칠한 미남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흘러내리던 빛보다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에서 휙 내렸다. 등자를 한 발로 밟고, 거기에 힘을 실은 후 한 번에 내려온 것이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에 예담영은 자신도 모르게 쓰게 웃고 말았다. 어릴 적과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황제가 붙여 준 호위나 다름없었던 예담영은 영현왕과 함께 사냥터를 달렸고, 활시위를 당겼다.

바람이 흩날리며, 단정하게 묶은 영현왕의 머리가 흐트러졌다. 영현왕의 서늘하고 긴 눈꼬리가 바람에 따라 가늘어졌다. 설원에서도 꼿꼿한 자태를 유지하는 소나무 같던 영현왕의 얼굴에 변화가 생기자 묘한 감정이 들었다.

예담영은 먼지를 털며 다가오는 영현왕을 뚫어져라 보았다. 영현왕은 들고 있던 사냥감을 유모에게 건네주고서 신관과 예담영 앞에 섰다. 영현왕은 훌렁한 소매를 고정하던 끈을 풀었다. 매화가 수놓아진 소매가 바람에 흔들려 흐느적거렸다.

“무슨 일로 신관께서 왕부까지 행차하셨는지, 그 연유가 궁금합니다.”

영현왕의 나직하고 묵직한 저음이 정적을 부쉈다. 고고하고 서늘한 외모에 잘 어울리는 중저음에 뒷목이 오싹해졌다. 강직한 눈빛을 마주한 예담영은 모르쇠를 고집하며 신관의 뒤로 물러났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자, 영현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잘생긴 외모에 흠이 가진 않았다. 영현왕의 미모를 감상하던 예담영은 탁한 한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신관이 두루마리를 열고서 영현왕을 보고 있었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신관을 무심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영현왕은 천천히 바닥에 양쪽 무릎을 대고 엎드렸다. 영현왕의 널찍한 등으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황명이오.”

그때까지도 왕부는 조용했다.

“하늘께서 영현왕, 그대를 황제의 새로운 비로 들이셨소. 그대는 앞으로 희비라는 봉호로….”

“뭐라고?”

감히 신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현왕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신관의 뒤로 나란히 엎드리고 있던 왕부 사람들도 충격을 받고 신음을 흘리거나, 어수선하게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그 말이 무성하게 불어나 사람들 사이를 돌고 돌았다. 그걸 다그칠 새도 없이 영현왕은 주먹을 쥐고서, 신관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폐하의 비가 된단 말입니까? 저는 남자이고, 무엇보다….”

영현왕은 입에서 맴도는 ‘아들’이란 단어를 차마 내뱉지 못하고, 느리게 삼켰다. 단숨에 사방이 무거워졌다. 미리 황명을 들은 친군과 늙은 신관들을 제외하고 모두 경악에 빠졌다. 영현왕은 사내였고, 황제의 친아들이었다. 영현왕에게 젖을 먹이고 키운 유모도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쓰러지려는 그녀를 빠르게 잡아준 영현왕이 신관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드디어 혀끝에 머물고 있던 단어를 내뱉은 영현왕이 떨리는 시선으로 예담영을 보았다. 언제나 자신의 든든한 편이 되어주었던 예담영을 뚫어지게 보는데, 마주친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면 늘 먼저 나서던 담영이, 오늘따라 이상했다. 마치 영현왕을 모르는 사람 대하듯 차갑게 다가갔다.

그러나 예담영은 거짓이라고 말하긴커녕, 오히려 앞장서서 황명을 전했다.

“폐하께선 어떠한 수단도 가리지 않고 마마를 모셔오라고 명하셨습니다.”

“담영아! 마마라니, 지금 그게 무슨…!”

예담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소리치는 영현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영현왕 주변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친군들이 소리 없이 재빠르게 움직여 영현왕 주변을 감쌌다. 익숙하지만, 낯설게 느껴지는 광경에 영현왕이 입을 떡 벌렸다.

“담영아….”

영현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영현왕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던 늙은 유모가 신음했다. 그 소리를 듣고 혼미해지던 정신을 다잡은 영현왕이 주변을 살폈다. 어림잡아도 스무 명이 넘는 친군들이 영현왕을 호위라는 명목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하나같이 얼굴이 익숙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명확하게 달라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영현왕은 유모를 내려다보았다. 유모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지 않았다. 그녀를 멍한 시선으로 보던 영현왕이 고개를 들어, 예담영과 신관을 보았다.

눈은 여전히 혼란으로 가득했지만, 아까보단 단단했다.

“내 발로 가겠다.”

“가마를 타고 가셔야 합니다.”

예담영이 몸을 일으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영현왕은 자신을 완벽하게 황제의 비로 대하는 친우의 태도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흐느낌에 가까운 웃음소리를 천천히 멈춘 영현왕이 입을 열었다.

“내 발로 가서 페하의 입으로 듣겠다.”

“황명을 거부하시면, 저희의 목이 날아갑니다. 정녕 저희가 죽길 바라시는 겁니까?”

예담영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영현왕을 몰아붙였다. 영현왕은 유모의 남편을 불러, 그녀를 데려가도록 시킨 후 허리띠에 고정했던 도를 풀어 바닥에 내던졌다. 영현왕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늙은 신관을 지나쳐 예담영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자신과 엇비슷한 신체를 가진 예담영을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보던 영현왕이 난데없이 예담영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자신 쪽으로 바짝 잡아당긴 영현왕이 예담영을 가늠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도록 하마. 그럼 되는 것 아니겠느냐?”

예담영은 이제 황제의 공식적인 비가 된 친우의 손목을 차마 잡지 못했다. 그는 영현왕의 폭력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묵묵히 말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충직한 황제의 친군이었다.

“모든 책임을 마마께서 지신다고 해도, 결국 피해를 입는 건 저희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폐하께선 절대로 마마를 해치지 않는 것을. 언제나 피해를 입는 건, 아랫사람인 저희였습니다.”

거기까지 말을 한 예담영은 고개를 숙인 채, 영현왕의 귀에 대고 느릿하게 속삭였다.

“설마 진영왕 때와 같은 일을 또다시 만들고 싶으신 겁니까?”

진영왕이란 칭호에 영현왕이 잔뜩 굳어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가슴을 직격하는 통증에 숨도 쉬지 못하고 땅에 붙어있는 하찮은 자들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이 알알이 맺혔다. 영현왕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느리게 뜨며 예담영의 멱살을 놓았다.

예담영은 아까보다 담담해진 눈으로 영현왕을 보며 뒤로 물러났다. 영현왕은 신관의 얼굴을 눈여겨보다가, 자신을 둘러싼 친군들의 얼굴도 보더니 선이 뚜렷하고 고운 입술을 열었다.

“그래도 가마는 도저히 못 타겠구나.”

짧고 빠르게, 그리고 차가운 어조로 중얼거린 영현왕이 친군을 밀치며 말에 올라탔다. 영현왕이 곱게 오지 않는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데려오라고 황명을 들은 친군들이지만, 영현왕에게 손을 댈 수 없어 멀찌감치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어쨌든 영현왕은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친아들이었고, 지금은 비가 되었으니 무력을 써도 되는지 모호했기 때문이다. 친군대장인 예담영을 보는 친군들의 눈빛이 초조하고 불안했다.

“마마, 저희와 가시지요. 위험합니다.”

“위험하다고?”

짧게 코웃음 친 영현왕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누가 날 위험하게 만드는지 모르겠구나, 담영아.”

영현왕은 말의 옆구리를 발로 후려쳤다. 훈련받은 흑마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엄청난 속도로 열린 문을 돌파했다. 그 광경을 살펴보는 늙은 신관은 태연했고, 예담영은 현실에 맞게 움직였다. 지금은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환궁한다!”

그가 명령을 내리자, 친군들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영현왕을 따라나섰다.

*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하늘의 명령으로 비빈이 정해지고, 태자까지 정해지는 나라라고 해도 친아들까지 비로 만드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근친혼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하늘도 염치가 있었으니 친부모와 자식이 혼례를 하는 일은 없었다.

영현왕은 왕부에서 금궁까지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언제나 평온하게 달렸던 수도의 저잣거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달려오는 말에 사람들이 넘어질 뻔하고, 실제로 넘어져서 투덜거려도 영현왕의 귀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의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폭풍에 휘말려 머리가 어지러웠다. 얼마나 고삐를 세게 잡고 있었는지, 고삐에서 손을 뗐을 때 손등과 마디 부분이 온통 하얗게 질려 있었다. 떨리는 손을 떼자 고삐 모양에 따라 생긴 붉은 자국이 보였다. 주먹을 세게 쥔 영현왕을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푸른 염료를 풀어 만든 비단처럼 지독하게 푸르렀다. 눈이 시려서 오랫동안 하늘을 볼 수 없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숨을 내뱉었다. 손바닥에 달아오른 숨이 부딪혀 간지러웠다. 영현왕은 떨리는 눈으로 구름과 봉황, 소나무, 늑대 등이 새겨진 은우문을 보다가 말에서 내려왔다. 그는 고삐를 잡고 말을 잡아끌며 은우문으로 걸어갔다. 은우문을 지키는 금군이 영현왕을 보자 교본처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문을 열어라. 영현왕께서….”

영현왕이라고 말하던 금군 한 명이 눈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천제를 알현하기 위해 오셨다. 문을 열어라!”

그들도 이미 하늘의 부름을 들었는지, 영현왕을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손도 스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어머니나, 혹은 다른 비빈들을 대할 때 하던 행동을 직접 마주하자 머리가 아찔해졌다. 영현왕이 흔들리는 눈으로 금군을 보았지만, 그들은 끝끝내 눈을 피했다. 문이 천천히 열릴 때까지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현왕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워낙 미약해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영현왕은 자신의 목소리가 그들에 닿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서, 고개를 들어 올리며 확실하게 말했다.

“정말…. 그 황명이 사실인가?”

그러나 당장 쓰러질 것처럼 흔들리는 목소리에 금군이 움찔거렸다. 창을 들고 있는 금군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강이 쓰러져도 잡아줄 이는 없었다. 강은 명백한 황제의 희비였다. 황제의 아들이자 비가 되었으니, 그 누가 강을 건드릴 수 있을까. 배려 때문에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아, 금군은 묵묵히 자세를 지켰다.

“제발 말해주게. 정말, 내가 폐하의 비가 되었다는 게 사실인가?”

영현왕이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금군들은 허공을 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영현왕은 한결같은 그들의 반응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문을 보았다.

자신은 그대로인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황명 하나로 다 변해 있었다. 혹시 어머니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실까. 어머니가 아신다면, 어머니는 기뻐하셨을까 슬퍼하셨을까. 유약하고 연약한 분이시니 졸도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바마마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답은 없었다. 영현왕은 눈을 반쯤 감은 채 황제를 떠올렸다.

‘강아.’

영현왕이 된 지 어느새 8년이나 흘렀지만, 언제나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황제였다. 보기만 해도 다리가 풀릴 것 같은 아름다운 외모에 그에 걸맞은 육체, 그리고 그의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달콤하고 감미로운 목소리. 이 나라의 지존이고, 아버지인 그가 자신을 어여삐 여겨주는 건 그리 싫은 일이 아니었다. 아니, 좋았다. 아버지가 진심으로 사랑해준다는 건, 자식으로서 행복한 일이었다.

‘이리 오렴, 아가. 아비한테 와서 안겨야지? 아비를 기쁘게 해주지 않을 것이냐?’

어렸을 적에는 아가라고 부르며 안아주던 황제였다. 그의 달콤한 미소에 홀린 듯이 다가가 안기면, 그가 자신을 금덩어리보다 소중하게 안으며 속삭였다.

‘내 아가. 오늘도 어여쁘다.’

그런 그가 자신이 비가 되었다고 했으니 기뻐할 리는 없을 것 같은데. 강은 구름이 낀 산을 등반하는 아찔함에 주먹을 쥐었다.

“마마, 들어가시지요.”

흙먼지 하나 없는 돌길을 보던 영현왕은 자신을 부르는 ‘마마’란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영현왕이 정신이 나간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자, 놀란 금군이 황급히 고개를 처박았다. 영현왕이 숨을 내뱉고, 힘겹게 마시는 소리가 노골적으로 들렸다. 금위군은 그가 평온하게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다행히 강은 빠른 시간 안에 마음을 다잡고 발을 움직였다.

궁 안에서는 말은 절대 탈 수 없었기에, 친왕이나 패륵(왕실의 종친에게 내리는 작위의 하나), 출가한 황녀들이 오면 무조건 가마를 타야 했다. 외정에서 내정까지는 도보로 가기엔 무리라 언제나 문이 열리길 기다려야 했다. 보통 영현왕도 궁에 올 때 가마를 타고 오긴 했으나 오늘은 정신없이 말을 달리고 온 터라, 가마가 올 때까지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서 가마를 기다렸다.

내관 여덟 명이 저 멀리서 가마를 들고 왔다. 그들 옆에는 친군까지 있었다. 내관이 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나 친군은 아니었다. 친군은 황제를 지켜야 한다. 황제의 뜻이 피부로 느껴지자 가슴이 찌르르하고 아파왔다.

정말로 황제의 비가 되었다는 게, 일상적인 변화로 분명하게 느껴지자 단숨에 발까지 가슴이 철렁였다. 영현왕을 자신을 보고 예법에 따라 인사하는 자들을 보고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도망가고 싶었다.

황제의 비가 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말을 타고, 왕부로 도망갈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고민일 뿐, 실현되지 못했다.

“폐하께서 천금궁에서 기다리십니다, 마마.”

그러니 어서 타라는 듯, 내관들의 앞에 선 태감이 영현왕을 다그쳤다. 태감의 시선을 마주한 영현왕은 숨을 잠시 멈추고 입을 열었다. 그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다.

“정말로 내가 폐하의 비가 된 것인가?”

태감은 헐렁한 소매 안으로 두 손을 넣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오늘부로 희비 마마가 되셨으며, 예월궁을 하사받으셨습니다.”

“예월궁…?”

낯익은 궁에 영현왕이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장차…. 황후가….”

영현왕이 백치처럼 말을 더듬거렸다. 과거의 일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영현왕이 불과 16살 때 일이었다. 예월궁은 태유 황후와 그녀의 자식 둘이 죽은 궁에 원혼이 있다며 황제가 그 궁을 허물게 하고, 새로 지은 궁이었다. 그 후로 줄곧 비어 있었다. 황제가 태자도, 황후도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빈들의 관심은 예월궁의 주인이었다. 예월궁의 주인이 곧 황후였고, 이 나라의 두 번째 주인이며, 백성들을 따스하게 품어줄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점점 기이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영현왕은 멈칫했다. 움직이고 싶어도 몸이 굳어져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리도 석화되어 버린 듯, 딱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햇빛에 데워진 바람이 불고 나서야 영현왕은 거북이처럼 가마에 올라탔다. 가마에 올라타자마자, 이마를 손으로 짚은 영현왕이 묵직한 숨을 내뱉었다. 미간까지 찌푸린 그는 태감을 슬쩍 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봐온 태감은 부쩍 늙어있었다.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제사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게 분명한 것이겠지.”

영현왕이 묻자, 태감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슬쩍 올라간 입술 끝이 웃는 것 같기도 했다.

“하늘을 향한 제사도, 하늘에서 내려온 답도 언제나 진실입니다.”

태감이 아주 느리게 고개를 돌리며 싱긋 웃었다. 역시 웃는 게 맞았다. 기괴한 가면 같은 웃음에 강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하늘을 향한 제사가 애초에 거짓이라면, 망국이 된다는 사실은 마마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확고한 태감의 태도에 영현왕이 앓는 듯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흙먼지와 사냥감의 피로 엉망이 된 가죽신이 보였다. 바삐 오느라 목욕을 하지 못했다. 황궁에 오기 전에, 항상 몸을 청결하게 하고 마음까지 비우고 가야 했지만 들려온 소식이 워낙 충격적이라 깨끗하게 씻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행복에 군데군데 먼지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기력이 없었던 터라 영현왕은 가마에 기대어 가만히 있었다. 머리와 가슴에서 시작된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이었다.

가마는 은우문을 시작으로, 외정을 지나 두 번째 문 수여문을 지나 내정으로 들어섰다. 황제가 정무를 보고, 문무대관들과 업무를 보는 외정과 달리 내정에는 각종 꽃들이 심겨 있어 향부터 달랐다. 무척 진하고 달콤한 꽃냄새가 진동했다. 그 향은 과거에 맡던 것과 똑같았다. 영현왕은 멍하니 눈을 반쯤 떠 화원을 보았다.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어머니와 보냈다. 그 당시에는 여 미인이었던 어머니라, 다른 첩들과 같은 궁을 공유했었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여 미인에서 여 소의로 변했을 때도 영현왕이 기준이었다. 친왕으로 봉해지자 조정에서 ‘아들이 귀해졌으니 그에 따라 어머니도 귀해져야 한다.’는 법칙을 언급하며 어머니를 비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황제는 단칼에 거절하며 여 미인을 여 소의로 남겨두고, 그 이상의 조치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비빈들처럼 사랑받지 못한 채로 몇 번 안겼지만 여 소의 이상은 되지 못했다. 강이 넌지시 부탁해 보긴 했으나 황제는 웃을 뿐 말이 없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정작 어머니는 비가 되지 못했는데, 자신은 하늘의 부름에 따라 비가 되었다니.

“마마.”

태감이 영현왕을 불렀다. 예월궁에서 영현왕을 기다리던 궁녀들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으나 영현왕은 그녀들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궁으로 들어갔다.

“신월전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가지 않겠다.”

단칼에 거절한 영현왕은 궁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폐하를 뵈어야겠다.”

“폐하께 올릴 패를 준비하겠습니다.”

궁녀가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황제를 따라 예월궁을 구경한 적이 있던 영현왕은 기억을 더듬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넓게 펼쳐진 공간이 보였다. 왼쪽엔 비빈들을 알현하는 곳이, 안휘전 더 안쪽에는 황후가 쉬는 공간이 있다. 수묵화에서 툭 튀어나온 것처럼 으슥하고 서늘한 기운이 넘친다. 온몸이 빨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영현왕은 우측에 있는 신월전을 의도적으로 피해 걸어 들어갔다.

비빈들을 알현하는 곳은 궁녀들이 깔끔하게 정돈했는지 먼지가 없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이국에서 들여온 도자기에 닿았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던 하늘과 다른 색이었다. 청록색도 아닌 것이, 또 다른 각도로 보면 녹음처럼 보였다. 참으로 신기한 도자기였다. 신기함을 못 이기고 만지려다가 멈칫했다.

이곳에 있는 것들은 모두 강의 물건이 아니었다. 이곳이 아닌 왕부에 있는 것들이 강의 소유였다. 여기에 있는 모든 물건들은 황후를 위한 것이었으니, 그 누구도 허락 없이 만져선 안 되었다.

영현왕은 마른 침을 삼키며 궁녀들이 열어주는 문을 통해 다른 공간으로 넘어갔다. 그곳엔 황후가 누울 수 있게 만들어진 긴 의자 형태의 침대가 있었다. 강은 그제야 숨을 조금씩 내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정말 이게 현실인 건지, 아니면 꿈인 건지, 꿈속에서 꿈을 꾸는 것인지, 머리가 어지럽다. 아득해지는 감각에 눈을 감고 주저앉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마마. 패를 가져왔습니다.”

잠자리 날개 같은 얇은 옷을 입은 궁녀가 다소곳하게 다가와 앉았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신음을 하던 영현왕을 멍한 얼굴로 궁녀를 보았다. 궁녀는 흐트러진 옷차림과 자세로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영현왕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검은 머리에 창백한 낯빛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도 영현왕의 얼굴에 흠을 낼 수 없었다. 아름다운 황제와 뛰어난 미모로 유명한 여 소의의 자식답게 얼굴이 참으로 잘생겼다. 부모의 장점만을 가져와 빚어 만든 듯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체격도 좋고, 어깨도 넓었다. 손은 여인네보다 더 곱고 뽀얗다. 사냥을 즐겨한 탓에 굳은살이 있었지만, 단점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어여쁘다 보니 굳은살이 있어서 현실감이 더 살아났다. 영현왕의 흔들리는 손끝에 정신이 팔려있던 궁녀는 영현왕이 일어나, 패를 집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영현왕이 붓을 들었다. 황제에게 개인적인 만남을 원할 땐, 하나 같이 다들 패에 자신을 써서 바쳐야 했다. 패를 들고 만지작거리던 영현왕은 거침없이 글자를 적어 내렸다. 희비가 아니었다. ‘영현왕’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그걸 본 궁녀가 입을 열었다.

“마마, 잘못 적으셨습니다.”

“…내 손으로 비라고 적으라고?”

영현왕이 자조적으로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몸에 힘을 줘 일어나,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궁녀를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폐하께 내가 직접 물어서 확인을 받을 생각이니, 우선 그렇게 패를 올려라. 책임은 내가 질 터이니.”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고,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듯 영현왕은 왔을 때보다 차분했다. 궁녀는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영현왕이 워낙에 강경하게 고집을 부리자 포기하고 물러났다.

궁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자유로워진 영현왕은 반듯하게 서 있었다. 곳곳에 쉴 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나 결코 앉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가슴은 뻐근했지만 억지로 버텼다. 침착해지려고 무척 노력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모두가 자신을 황제의 비로 대하고, 실제로 그렇게 보고 있었으나 끝내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입으로 듣지 않는 이상,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의 입을 통해 비라고 확인을 받아도 과연 납득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만약 비가 된다면, 어머니는 빈이니 자신이 어머니를 아랫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어머니를 어떻게 ‘여 소의’라고 부르겠는가? 황제가 자신에게 아바마마이듯, 어머니도 끝까지 자신의 어머니였다.

‘강아.’

진영왕의 장례식 날이었다. 어머니는 형제를 잃은 슬픔에 잠긴 강의 손을 잡고 중얼거렸다.

‘강아, 살아남았으니 됐다. 그거면 된 거야…. 난 네가 진영왕처럼….’

진영왕이 떠올랐다. 자신 대신 죽어야 했던 형. 이 궁에서 자신을 예뻐해 주던 착한 형이었다. 출전하기 전, 자신을 보며 호전적으로 웃던 진영왕의 얼굴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강아.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와 아바마마에게 인정을 받겠어. 돌아와서, 태자는 아니더라도 좋다. 아바마마에게 충직한 신하로 인정받아서….’

진영왕이 손을 잡았다. 그의 손길이 아직도 이 피부에 남아있는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너와 나란히 어깨를 하고 싶다. 나도 너처럼, 아바마마에게 사랑받는 자식이 되고 싶어.’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그는 죽었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애초에 이토록 아름다운 궁에서 살아남았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죽어가는 이는 수없이 많았고, 살아남은 이는 매우 적었다. 태자가 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경쟁이었지만, 혈육끼리의 싸움은 가슴 한구석에 치명상을 남기곤 했다. 특히 그 혈육을 사랑했고, 죽은 후에도 사랑하게 되었던 사람이라면.

“마마, 천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던 영현왕은 뒤에서 사박사박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제사가 끝난 뒤였지만, 황제는 여전히 12류 곤관에 곤복을 입고 있었다. 은발에 잘 어울리는 화사한 백색 용포에 시야가 어지러웠다. 황제의 곤복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12류의 옥구슬과 진주, 그 외의 보석들이 부딪히는 게 맑은 종소리처럼 들렸다.

영현왕은 가까워지는 황제의 용안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황제는 자신을 피해 도망가는 아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정신없이 도망가던 영현왕의 등이 벽에 닿았다. 영현왕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보석을 빻아 만든 듯한 햇빛을 등진 황제가 고개를 당당히 든 채, 영현왕을 애정이 담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영현왕이 예법에 따라 허겁지겁 바닥에 엎드린 후 입을 열었다.

“신 영현왕, 고귀한 천제 폐하를….”

“강아.”

말이 끝나기 전에 황제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영현왕의 이름을 불렀다. 영현왕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별다를 바 없이 녹아내릴 것처럼 다정한데 이상하게도 무서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들이 비가 되었다는데 정상적인 아비에게서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것이 공포의 근원이었다.

과거에도 어느 순간부터 황제에게 아주 가끔 느끼던 공포이기도 했다. 그때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넘겼던 희미한 두려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영현왕은 바닥에 이마를 댄 채 바들바들 떨었다. 듬직한 체격이었지만, 황제의 앞에 있다 보니 가련하게 느껴졌다. 오들오들 떨리는 어깨와 등, 손을 차근차근 눈여겨보던 황제가 소리 내서 웃었다.

“무서운 게냐.”

“…예, 폐하.”

영현왕이 숨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황제는 의아한 듯 눈을 깜박이더니, 턱에 손을 대고 중얼거렸다.

“천자는 너를 단 한 번도 무섭게 대한 적이 없는데 이상하구나. 무엇이 그리 무서운 것이냐. 비가 된 것?”

태연하게 중얼거리던 황제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의 두 손이 영현왕의 팔에 닿았다. 그가 손에 힘을 줘서 영현왕을 단숨에 일으켰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상체만 일으키게 된 영현왕이 덜컥 겁을 먹은 채, 황제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한 폭의 그림 같은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에 홀려서 영현왕은 눈치채지 못했다.

 황제가 자신에게 입을 맞추기 위해 다가온다는 것을.

“고작 그걸로 겁을 먹으면 안 된다. 앞으로 정사도 해야 하고, 아비의 애도 낳아야 할 터인데.”

“예…? 읍…!”

황제의 입술이 닿았다. 그가 부드럽게, 그러나 거침없이 여린 살을 빨아들였다. 추웁, 하고 살이 살을 빨아들이는 젖은 소리가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 영현왕은 자신이 무엇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눈을 떠서 황제를 보았다.

입을 맞춘 채로 황제가 웃었다. 그의 눈웃음이 요사스러웠다. 혀가 들어와 영현왕의 멍청한 혀를 애무했다. 영현왕의 눈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야릇한 감각에 어깨가 뒤틀리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황제가 고개를 틀어 입안 깊숙이 혀를 밀어 넣는데도, 반항하지도 않고 받아들였다. 아들의 무지함은 황제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젖은 입술을 떼어냈다. 타액이 아직 연결되어 있었다. 혀로 그것을 끊어낸 황제가 헐떡거리는 아들의 얼굴을 하염없이 어루만졌다. 너무 소중해서, 애틋해서 황제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언제 보아도 사랑스러운 얼굴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때는 이게 부성애인 줄 알고 강을 왕부로 보냈지만, 이제는 자각했으니 자기 옆에만 둘 생각이었다.

“강아.”

“아, 아바마마…. 저, 저는….”

현실을 깨달은 영현왕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곧 창백하게 변해갔다. 아비와 입을 맞춘 입술을 가리려 했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황제는 영현왕을 일으켜 세워 침대에 앉혔다. 그의 손이 소매 안으로 들어와 하얗고 탄력 있는 살을 매만졌다. 밀가루 반죽같이 하얀데도 건강한 피부가 무척 부드럽다. 만질수록 더 만지고 싶은 중독성 있는 피부를 따라 손이 움직였다.

아무리 무지해도, 이 손에 담긴 의도까지 모를 강이 아니었다. 강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황제의 손을 거부했다.

“아바마마! 소자는, 소자는 아바마마의 자식이옵니다. 소자가 어찌하여 아바마마의 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무언가가 잘못된 게 틀림없습니다.”

강이 바닥에 엎드리며 외쳤다. 황명을 받았고, 들었고, 직접 궁에 와 황제와 입까지 맞추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듣고 싶었다. 강이 바닥에서 절박하게 외치는 모습을 지루하다는 듯 보던 황제가 강을 일으켰다. 그의 손이 수치에 젖은 뺨에 닿았다. 아직 붉은 기가 남아있는 볼에서 노닐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턱을 쓸고, 입맞춤으로 인해 도톰해진 아랫입술에 닿았다. 그의 손이 분명한 의도를 담고 턱을 들어 올렸다.

강은 강제로 고개가 들려 황제를 마주했다. 황제가 웃고 있었다.

“잘못 말하였구나.”

황제가 상냥하게 타박하며 이젠 대놓고 강의 목을 쓸어 만졌다. 강은 불안한 시선으로 황제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 입에 먹힐 것 같았다. 단숨에 늑대로 변신해, 자신의 목을 물어뜯어 죽일 것 같았다. 무서웠다. 오금이 저려왔다. 강의 숨이 차츰 떨려왔다. 제발, 이라고 자기도 모르게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걸 조용히 즈려밟은 황제가 화사하게 웃으며 명령했다.

“소자라고 말하면 안 된다. 앞으로 신첩이라고 칭하거라.”

황제는 완벽하게 자신의 아들 연강을 희비로 보고 있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희비.

“그대는 천자의 희비야.”

황제가 입을 맞추었다. 강의 손끝이 떨리다가 황제의 어깨를 틀어잡았다.

아, 안 돼. 강의 입에서 부질없는 반항이 황제의 혀에 얽혀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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