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꾼(4).
* * *
빈센트, 린과 소우타를 만났다.
얼마나 잘 먹고 지낸 것인지 얼굴빛이 맑고 곱다.
특히나 린의 변화가 극적이었다.
노예로 팔려갈 뻔했던 시절이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달라졌다.
‘그 때는 비쩍 말랐었는데.’
살이 귀엽게 붙었다.
소우타랑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뭐하고 지냈어?”
애쉬가 근황을 물었다.
그 목소리가 은근히 부드러웠다.
보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린과 소우타가 놀란 눈으로 애쉬를 바라봤다.
“뭐하고 지냈냐니까?”
“나는 ‘룬’에 대해 알아보고 다녔네. 명색이 용사 동료인데, 도움이 되고 싶어서 유테론 이곳저곳을 알아봤지.”
재촉하는 애쉬의 말에, 빈센트가 먼저 나섰다.
꼴을 보아 하니 린과 소우타는 놀고먹고 지낸 것 같았다.
평소에 굶주리며 살아왔으니, 귀족 저택의 편안함에 몸이 녹아내렸으리라.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최근에 내가 너무 고생을 해서 말이지.’
약간 불만이 있을 뿐이었다.
애쉬는 빈센트를 쳐다봤다.
‘룬’에 대한 정보를 토해내라는 눈빛을 보냈다.
“당장 유테론 근처에는 ‘룬’을 찾을 수가 없었네. 모험가나 용병들도 따로 알고 있는 것이 없더군.”
“조금 멀리에는 있다는 말인가?”
“왕복 나흘 정도 걸리는 거리에.”
빈센트가 제법 진지하게 알려주었다.
“정보를 가져온 모험가는 은급 모험가야. 곧 금으로 승급할 수 있는 실적을 쌓은 상태라서, 확실한 쐐기를 원하고 있지. 용사의 성검, 자신이 구해온 정보로 ‘룬’을 얻었다…. 그것만큼 효과 좋은 실적은 없으니 말이야.”
용사는 룬을 얻고, 모험가는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서로 윈윈.
때문에, 모험가들은 용사에게 정보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드러내고 떠벌리는 편이다.
애매한 것들까지 다 말하는 바람에 골치가 아프지만.
적당히 걸러서 취득하는 것도 실력이니까.
애쉬는 빈센트의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슬슬 3레벨 성검으로 힘에 부치는 상황.
어떻게든 성검을 강화해야 했다.
‘마지막 악마는 거의 반쯤 억지로 잡았지.’
마력의 농도와 품질, 충분한 수준이다.
최강의 용사답게 압도적인 힘을 자랑했다.
하지만, 성검이 그 힘을 받쳐주질 못했다.
성검이라서 깨지지 않고 버텼을 뿐.
그 출력을 완벽히 뿜어낸 것은 아니었다.
“위치가 어디쯤인지 아나?”
“유테론 남동지방 지도를 얻어서 표시를 해뒀네.”
“오….”
애쉬가 귀찮아 할 수 있는 일들을 미리 처리해둔 상태.
애쉬는 새삼 놀란 눈으로 빈센트를 흘겼다.
“왕년에 용병으로 이름을 날렸어. 이 정도 준비성은 기본이지. 대충해서는 용병으로 살아남지 못하거든.”
또 붉은 늑대 시절 무용담을 떠들어댄다.
저걸로 폼 잡다가 내기에서 졌던 것을 까맣게 잊은 걸까?
‘그 때…. 애쉬가 자위를 했다고 그랬었지.’
새벽에 홀로 자위 하는 것을 빈센트가 봤다고 했다.
그 정보를 가지고 나와 내기 했지만, 나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애쉬와 함께 지내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회귀하고 꽤 오래 지났다는 것, 회귀 전에 나와 찐득한 사이였다는 것.
원작을 읽은 나로서도 어떻게 회귀했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그 당시의 애쉬는 어떻게든 나를 따먹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의지를 발휘해서 쌓여있던 성욕을 억눌렀다.
내게 정조대를 채우고 정액을 묵혀두었다.
그래서 새벽에, 어쩔 수 없이 자위를 했다.
너무 열중한 나머지 빈센트에게 들키고 말았다는 게 패착….
‘근데 왜 빈센트를 살려뒀지?’
애쉬의 성격이라면, 죽였어야 정상이다.
노인 하나 잡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그런데 애쉬는 빈센트를 살려뒀다.
꼭 죽여야 하는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애쉬가 살려둘 이유도 없었다.
변덕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죄가 컸다.
애쉬 본인의 자위 모습을 봤는데?
‘…이유가 있나?’
애쉬와 빈센트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그 변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 따로 물어보든가 해야겠다.
“지도를 줘봐.”
“방에 있소. 가져오면 되겠나?”
“응.”
애쉬는 빈센트에게 명령했다.
전혀 거리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변함없이 좆대로 구는 모습이 든든하다.
비앙카 때문에 까칠한 성정에 금이라도 갔을까 걱정했는데 말이다.
빈센트가 방으로 가고, 린과 소우타가 남았다.
둘은 여전히 손을 잡고 있었다.
“너희 둘, 사귀는 거야?”
“…넵.”
꼴에 사내라는 걸까.
소우타가 애쉬의 물음에 답했다.
애쉬는 둘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섹스는 했고?”
“…….”
린과 소우타가 애쉬를 올려다봤다.
눈빛이 꼭, 진심으로 말하는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도 애쉬를 바라봤다.
장난인지 아닌지 궁금했다.
애쉬는 진심이었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애들한테 섹스 했냐고 묻고 있었다.
어리니까 하면 안 된다고 조언하려는 걸까.
그 정도라면 세이프 존 안이다.
하지만,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애쉬가 린을 빤히 쳐다보며 조언했다.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야 돼. 상대가 요구해도 들어주란 말이야.”
“왜, 왜요…? 월경을 하고 있기는 한데, 조금 무서운 데….”
“좋아하는 상대가 내일에도 살아있으리라 확신할 수 없으니까?”
애쉬는 나를 꽉 끌어안으며 달짝지근한 시선을 보냈다.
회귀 전의 이야기를 따로 해주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과거의 ‘나’는…. 애쉬랑 친해진 후에 죽었나보네.’
린과 소우타를 보고, 갑자기 죽네 마네를 말하는 이유는 그것뿐이다.
그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죽은 자에 대한 미련.
용사로서 의무를 끝마친 세상에서, 그 미련 때문에 돌아왔다.
‘근데 이상하네.’
애쉬의 목에는 ‘태양의 약속’이 걸려 있다.
저 성유물의 효과를 생각하면, 애쉬의 회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원작에서 ‘태양의 약속’은 루크의 동료들을 제외한 전원을 살려준다.
그것은 마왕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는 대신, 태양신이 내거는 조건이다.
마왕을 베어낼 용사가 짊어져야 할 희생.
본인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루크도, 동료들의 영면은 이겨내기 힘든 아픔이었다.
태양신은 잔혹하게도 그 부분을 찌르고 들어간다.
결국 자신의 동료들을 보내주기로 하고, 마왕을 죽임으로써 세계에 평화를 가져온다.
마왕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워내는 것이다.
‘마왕을 죽이고 나서, 그 다음에 내가 죽었나?’
그건 또 말이 안 된다.
용사의 동료로서 최종 결전까지 따라갔는데 에필로그 이후에 죽어?
최종 보스가 튜토리얼에 죽는 것만큼 어처구니없는 전개다.
‘…….’
린과 소우타가 애쉬와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그리고 본인들도 시선을 맞추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겉으로 어려 보이는 것도, 이 세상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남녀의 신체는 생각보다 일찍부터 번식을 준비한다.
2차 성징이 그에 대한 과정이고 결과다.
남녀는 성징이 끝날 때쯤 부모가 될 수 있는 몸이 된다.
섹스는 당연히.
애쉬의 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래도 내 가치관에는 무리다.
애들은 보호 받아야 할 존재였다.
나 스스로도 몸뚱어리를 못 가누고 있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는 거야. 괜히 부끄럽다고 밀어내고 그러면, 후회할지도 몰라.”
“그래도 좀 더 크고 나서 하는 게 맞지.”
“…뭐?”
애쉬한테 한 마디 했다가, 날 선 반응이 튀어나왔다.
“내가 왜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됐는지, 전혀 모르네?”
“…그걸 어떻게 알아.”
존나 어이없다.
회귀 전에 있었던 일로 염병 떠는 것 같은데, 나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다.
“다 너 때문이잖아.”
“…내가 아니라 다른….”
“입 다물어.”
애쉬가 손바닥을 펼쳐 내 입술을 막았다.
“강아지, 요즘 자꾸 기어올라? 비앙카 그 씨발년 때문인가? 걔 때문에 자꾸 봐주고 그러니까, 말을 안 들어? 꺄하악!”
애쉬의 손바닥을 핥았다.
짭짜름한 맛이 느껴짐과 동시에, 손이 떨어져나갔다.
“우리 이제 동지잖아. 비앙카 때문에 고통 받은 동지. 전우애가 생겼는데, 그 정도도 못 봐주나?”
“응. 안 봐줘. 비앙카고 나발이고, 넌 내 강아지야. 내 말을 들어야 돼.”
“허허….”
기껏 풀어졌던 구속이 세게 조여지는 것 같다.
“비앙카 없어졌으니까, 오늘부터 다시 길들여줄게.”
“손나….”
“솔직히 많이 봐줬잖아. 불쌍한 척 애원하면 마음이 약해져서, 원하는 거 들어주고 그랬는데…. 이젠 아니야.”
비앙카를 통해 각성했다.
애쉬는 나를 완전히 통제하겠다고 선언했다.
“용사. 지도를 가져왔소.”
빈센트가 지도 한 장을 가져왔다.
유테론 남동지방 지도였다.
“흐음….”
애쉬가 지도를 펼쳤다.
지도가 제법 커서, 걸리적거렸다.
“린, 소우타. 한쪽씩 잡아.”
“네!”
린과 소우타에게 양쪽 모서리를 맡겼다.
그리고 빈센트가 위쪽 모소리를 잡았다.
애쉬 앞에 지도가 활짝 펼쳐졌다.
“유테론이 왼쪽 모퉁이에 있고….”
유테론을 중심으로 한 대형 지도가 있다고 가정할 때, 빈센트가 가져온 지도는 우측하단 부분을 뜯어놓은 것 같은 지도였다.
남동쪽.
유테론부터 ‘룬’이 있다는 위치까지.
거리를 계산하고 편한 길을 찾아둔 것 같은 흔적이 가득했다.
“왕복 나흘이면 엄청 머네.”
“길이 험해서 어쩔 수가 없소.”
더 짧은 길은 없는 듯했다.
애쉬는 지도를 가만 지켜보다가 말했다.
“하루만 쉬고 출발해야겠어.”
“저희도 가요, 용사님?”
린이 궁금증을 한껏 품고 물었다.
데려가줬으면 하는 것이 확 느껴졌다.
“유테론 저택에 머무는 것도 너무 눈치 보여요.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시는데, 그래도 좀….”
소우타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몸이 편하니까 마음이 불편한 듯했다.
“그래, 가고 싶다면 가야지.”
애쉬가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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