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여)용사가 집착함-103화 (103/109)

〈 103화 〉 꾼(2).

* * *

“…….”

마왕 하나만을 남겨둔 상황, 전장에 나설 수 있는 용사가 몇 남지 않았다.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는 중, 더 이상 후퇴할 곳도 남지 않을 만큼 밀려났다.

더 이상 밀려났다가는 중간계에 멀쩡한 땅이 없다.

마왕을 죽인다고 해서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무차별적인 피해를 입었다.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용사들은 포기하지 않고 피로 점철된 길을 걸었다.

희생된 이들을 위해서라도 멈출 수가 없었다.

“성유물. ‘태양의 징벌’, ‘태양의 걸음’, ‘태양의 약속’, 성유물을 분배하고자 해요.”

성녀는 교단 본부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성유물을 꺼냈다.

지저분한 먼지도, 유물 본연의 기품을 가리진 못했다.

생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두 눈, 용사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살벌한 시선이 성녀에게 닿았다.

애쉬 그레이필드, 그녀가 성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성유물을 왜 이제야 꺼내온 거야?”

“…….”

애쉬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분노를 억눌렀다.

평소, 툭하면 욕을 내지르던 것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그런 애쉬를 보며, 성녀는 오히려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모두가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

그럼에도, 애쉬만큼은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함께 싸우던 병사가 죽어도, 자신을 대신해서 동료가 희생해도, 대수롭지 않게 굴었다.

그런 애쉬가 화를 낸다.

차분하게 말하려 노력하고, 목소리에서는 열이 느껴지지 않고 있지만, 성녀는 애쉬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남자, 강아진, 죽은 건가?’

성녀라고 전황을 완벽하게 꿰뚫어보는 것은 아니다.

다른 성직자들보다 더 강한 신성력을 품고 있을 뿐, 전술전략에 대해선 무지렁이에 가까웠다.

연합군 진영에는 참모가 따로 있었다.

더군다나 성유물을 가져오기 위해 왕도 교단 본부에 침투하기까지 했다.

마왕과의 전투가 아니라 다른 작전에 투입되어 있었다.

최근 전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애쉬가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애쉬에게는 불과 한 시간 전에 죽은 강아진이 더 중요했다.

그가 죽은 이후에야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은 세계 평화 따위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다.

─ 일단 마왕을 잡아야해. 얼른 용사들의 이야기를 끝내야지, 나도 내 이야기를 쓸 수 있을 테니까.

마왕을 봉인해야 한다.

항상 붙어 다녔던 강아진이 지겹도록 떠들어대던 것이다.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았다.

“…교황님께서 미래를 보셨기 때문이에요.”

애쉬의 살기 가득한 물음에, 성녀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목소리를 떨지 않은 것으로도, 그녀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미래? 미래라고? 미래는 아진이가 더 잘 봤어. 그 치매 걸린 노인네보다 강아진이 본 미래가 더….”

애쉬가 주먹을 꽉 쥐었다.

강아진은 왜 예언자면서, 분명히 자신의 죽음을 보았을 거면서, 그 지옥에 스스로 걸어간 것인가.

애쉬는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피가 원망스러웠다.

자신을 낳은 천사, 애미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여자를 죽이고 싶었다.

자신을 천사로 낳는 바람에, 강아진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외부에서 이유를 찾으려 들었다.

‘안 그러면 내가, 내가 죽어버릴 것 같아….’

차오르는 죄책감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잘못임을 아는데, 인정했다가는….

스스로가 어떻게 될지 몰랐다.

“교황님은 마왕과의 결전을 봤어요. 하지만, 마왕을 상대하고 있는 용사가 누구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죠.”

성녀는 교황의 말을 더듬어갔다.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지만, 과거를 짚어갈수록 점차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 마왕을 상대하고 있는 용사, 그인가 그녀인가, 형체가 애매해. 특징을 무엇 하나 잡지 못했다. 위기의 순간에 성유물을 누구한테 쥐어주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 혹시 그 순간에 내가 없다면, 성자, 네가 판단을 내려야 한다. 성자조차 없다면, 성녀, 그대가 냉정하게 결단을 해야 돼.

기억이 날 듯 말 듯.

필요한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

─ ……! ……!

성녀가 품에 안은 성유물들을 살펴봤다.

태양신의 힘을 품고 있는 성유물, 이것들로 마왕을 이겨야 했다.

누구에게 그 역할을 맡겨야 할까.

자신의 어깨에 대륙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행할 수 있는 용사가 과연 있을까?

‘루크, 루크 세인트세이버.’

루크가 보여준 위업은 다른 용사들에 비해 압도적이다.

불굴의 정신을 바탕으로, 불가능한 전투들을 승리로 이끌었다.

성유물을 장착한다면 마왕을 상대할 수 있을….

“루크.”

성녀는 루크를 불렀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루크는, 한참 피폐해진 눈으로 성녀를 올려다봤다.

“당신 밖에 없어요.”

“…….”

루크의 얼굴을 마주한 성녀는, 이제까지 봐왔던 루크와는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동료의 죽음, 희생, 여러 사건들이 거름이 되어 루크를 이루었다.

하지만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막바지에 다 왔는데, 버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성녀님…. 죄송합니다…. 저는…. 못할 것 같아요….”

무엇이 그를 무릎 꿇게 만들었나.

성녀는, 루크의 곁을 항상 지켜주던 여인을 떠올렸다.

연인이라 해도 될 만큼 가까워 보였던 둘….

‘설마….’

루시아, 루시아가 죽은 건가?

만개한 아름다움을 미처 펼쳐보지도 못하고…?

‘그러면 대체….’

마음 약한 성녀는, 루시아가 어찌 되었는지를 차마 묻지 못했다.

“이, 일단. 성유물을 받아보세요. 성유물의 힘을 알려드릴게요.”

성녀가 막사의 용사들을 불러 모았다.

동료 용사가 루크를 일으켜 세워, 부축하며 걸어왔다.

“…….”

설명이 이어졌다.

성유물이 지니고 있는 힘에 대해서 떠들었다.

성녀는 애써 희망을 품으려 노력했다.

“태, 태양의 약속이에요. 이 성유물은 용사의 맹세에 보답을 해줘요. 말 그대로 태양신의 약속, 맹세를 지킨 용사에게 소원을 들어주는데요….”

성녀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막사 내부의 우울한 분위기에 잠식되었다.

‘숨 막혀….’

성녀는 최선을 다했다.

성자가 제물소환, 악마소환에 희생하였을 때에도.

왕도 시민들이 대피할 시간을 끌기 위해, 교황이 자신의 몸을 불태웠을 때에도.

태양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하나 때문에, 그저 뒤에서 지켜만 봐왔다.

용사들만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성녀도, 구하지 못한 생명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팠다.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건지, 눈물로 지새는 밤이 늘었다.

그 때, 루크가 고개를 들었다.

소원이라는 단어가 그의 정신을 깨웠다.

“태양의 약속?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는 겁니까?”

“태양신의 의지가 판단을 내려요. 용사가 내뱉는 맹세와 원하는 소원이 불공정하지는 않은지….”

“성녀님, 태, 태양의 약속을 제게 줘보세요. 잠시만…. 확인을 좀 해보겠습니다.”

루크의 눈가에 희망이 스며들었다.

깊게 빨아들이는 늪 속에서 동아줄을 발견한 듯 펜던트를 쥐었다.

잠깐 집중한다.

눈을 지그시 감고, ‘태양의 약속’에 대한 정보를 읽었다.

그리고 맹세한다.

“나, 루크 세인트세이버는 마왕을 죽인다. 그에 대한 대가로 루시아 체리블라썸….”

말을 도중에 바꿨다.

“소원으로, 악마에 의해 고통 받은 모든 이를 살려줘.”

간절하게 빌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마왕, 바알.

놈이 부수고 빼앗은 것을 다시 돌려받는 것이다.

당연히 합당한 소원이지 않나?

루크가 눈을 떴다.

그리고 애쉬를 바라봤다.

자신이 다짐한 맹세와 원하는 소원이 출력된다.

그리고 소원 부분에 줄이 그어진다.

자신과 똑같은 눈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태양의 약속(SSS)]

맹세 ─ 루크 세인트세이버, 마왕 바알의 소멸.

소원 ─ 마계 악마에 의해 고통 받은 이들의 소생.

이것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태양의 약속(SSS)]

맹세 ─ 루크 세인트세이버, 마왕 바알의 소멸.

소원 ─ 마계 악마에 의해 고통 받은(강아진을 제외한)모든 이들의 소생.

* * *

“개소리하지 마.”

애쉬가 태양의 약속을 빼앗았다.

루크의 말이 진실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내가 마왕을 죽일게. 그러면 되는 거 아니야?”

─ 강아진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소생.

태양신의 의지는 애쉬에게 답변을 내놓았다.

자기 나름대로 최대한 베푼 것이라는 듯 말했다.

“몇 천만이 살아난다고 해도! 강아진이 없으면, 씨발 필요가 없다고!”

애쉬는 펜던트를 쥐고 부탁했다.

“왜 안 돼? 왜 강아진은 안 되는 거냐고. 이유를 말해봐, 어?”

─ 강아진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소생.

“이 개씨발, 병신같은 게 성유물? 좆까 씨발련아!”

애쉬가 태양의 약속을 집어던졌다.

루크는 그 어느 때보다 날쌔게 몸을 던져, 태양의 약속을 받아냈다.

“하. 씨발새끼. 자기 여자는 살릴 수 있게 되었으니, 뭐 희망이라도 보고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애쉬는 루크의 눈을 보았다.

망가졌던 눈빛은 어느새 힘을 되찾고, 마왕 바알을 무찌르기 위해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애쉬가 강아진을 포기하고 마왕 바알을 죽이는데 협조할 수 있도록 설득할 생각이었다.

한순간에 뒤바뀐 루크의 태도, 애쉬는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자신을 욕하고 경멸하는 시선, 수백 번을 마주했다.

창관의 창녀들을 보듯 하는 음흉한 눈길, 수천 번을 마주했다.

지금 자신에게 쏟아지는 눈빛은….

그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더 버티기가 힘들었다.

자신들의 소중한 사람들을 다시 되살릴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 강아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진이가 없는 세상은 망하는 게 나아.”

“…용사답게 행동해, 애쉬 그레이필드.”

“용사답게? 용사답게 행동하라고? 씨발 애미뒤진 거 티내지 마라, 죽여 버리기 전에.”

애쉬가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더 이상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다.

마왕이 강아진을 죽였다.

그리고, 용사들이 강아진을 버렸다.

누구도, 자신의 편은 없었다.

강아진을 제외한 누구도, 애쉬의 곁에 있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애쉬!”

용사들이 애쉬를 불러 세웠다.

저 하늘 멀리에서, 마왕 바알이 날아오고 있었다.

“용사들이여, 결착을 내러 왔다.”

마왕 바알은 도망친 용사들을 쫓아왔다.

그가 지나온 자리는 이미 황폐화되어, 죽은 땅이 되었다.

애쉬는 마왕 바알의 마검을 받아쳤다.

성검에서 은빛의 마나가 새어나왔다.

새하얀 날개가 펼쳐졌다.

“크하하하하하하! 천계도 결국 간섭을 한 것인가? 이래서야 마계와 다를 바가 없군!”

“닥쳐, 이 개새끼야아아아아아!”

애쉬는 광기에 젖어서 성검을 휘둘렀다.

막무가내로 파고드는 검격으로, 마왕을 벨 수 있을 리가 없다.

“정신 좀 차려라, 용사. 재미가 없잖나.”

“커흡…!”

바알은 애쉬의 성검을 가뿐하게 피해내고,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

애쉬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새 무장을 갖춘 루크가 마왕 바알 앞에 섰다.

태양신 교단의 성유물을 전부 착용하고서 마왕 바알에 맞섰다.

용사들이 빈틈을 만든다.

루크는 그 기회에 성검을 찔러 넣는다.

마왕 바알을 상대로, 용사들은 천천히 밀리기 시작했다.

애쉬의 도움 없이는 바알을 죽일 수가 없다.

애쉬가 몸을 일으켰다.

마왕 바알은 강아진을 죽인 악마, 애쉬로서는 꼭 제 손으로 죽여야 할 상대였다.

하지만, 바알이 죽는 순간, 애쉬는 혼자가 된다.

강아진은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좋다! 좋단 말이다! 계속 나를 즐겁게 해다오, 용사!”

“커헉…!”

애쉬가 갈등하는 사이, 루크의 팔이 찢어졌다.

마검에 의해 잘려나갔다.

다행히 성검을 쥐고 있는 오른팔은 무사했다.

루크는 피를 뚝뚝 흘리면서, 바알을 노려봤다.

패전이 확실하게 굳어가고 있다.

이 세계가 마왕 바알의 손에.

─ 넌, 너 하나 때문에 세상 하나가 망할 수도 있다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어?

‘나는….’

─ 사람 하나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 던지는 진짜 용사들도 많은데, 나는 한…. 1억 정도 확실하게 구할 수 있다고 하면, 내 목숨, 던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

애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귀를 있는 힘껏 틀어막았다.

강아진 목소리 때문에, 짜증이 났다.

“이 씨발, 강아진 진짜….”

강아진이 싫었다.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것 같은 그 말투와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힘으로 괴롭혔다.

나약한 강아진은 자신에게 반항하지 못했다.

“결국에는….”

강아진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내려다봤다.

애쉬는 강아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

그것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잘려나간 루크의 왼팔에서 ‘태양의 징벌’을 빼냈다.

“성유물 내놔, 병신아.”

오른쪽 ‘태양의 징벌’, ‘태양의 걸음’도 빼앗았다.

태양의 약속은 내버려두었다.

자신에게는 의미가 없는 성유물이었다.

“애쉬….”

루크가 애쉬를 바라봤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냈을 때, 그 감정을 알기 때문에….

루크는 애쉬에게 무슨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너….”

그 천하의 애쉬가….

“피야.”

“뭐?”

“피라고. 아까 마왕한테 맞고 날아가서, 돌에 부딪쳐서 그런 거야.”

애쉬는 눈가를 닦아내고 마왕 바알을 향해 성검을 겨누었다.

얼마 안가, 은빛 날개가 펼쳐지고 바알의 목이 떨어졌다.

* * *

“생각해보니까 ‘태양의 약속’이 있었네. 이거 벌써 꺼내?”

텔레포트 마법사, 에릭 씨가 성유물 하나를 가지고 왔다.

교단 측에서 애쉬를 서포팅하기 위해 보낸 것이라고 한다.

애쉬는 ‘태양의 약속’을 알고 있다.

나도, 그 형태를 글로 읽었기 때문에 얼추 알 수 있었다.

‘태양 문양의 펜던트.’

교단에는 총 세 개의 성유물이 있다.

‘태양의 징벌’, ‘태양의 걸음’, ‘태양의 약속’, 각각 건틀릿, 장화, 펜던트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각 성유물은 번쩍번쩍한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보석이라 표현하기 미안한 물질들로 구성되었다.

태양신과 정령의 흔적으로 가득한 성유물, 평범한 용사들은 가지지도 못하는 것들이다.

‘원작에서는 루크가 써.’

위업을 하나씩 세우다가 결국, 최종전에서 각성한 루크에게 몰아주게 된다.

루크 혼자서 마왕과 맞서는 장면을, 교황이 꿈에서 보기 때문이었다.

그 중 태양의 약속은 태양신 앞에 약속을 하는 것이다.

용사 스스로 내거는 맹세.

그것을 이루는 순간, 태양신은 보답을 내린다.

맹세와 동등한 가치의 보답을 등가교환 해준다.

“교단에서 용사님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용사님께 도움이 될 만한 것이 무엇일까 회의를 통해, ‘태양의 약속’이 괜찮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에릭은 교단의 의견을 대변했다.

무려 성유물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만큼 단출한 절차였다.

[‘감정’에 실패하였습니다.]

내 스킬로는 ‘태양의 약속’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무슨 효과를 지녔는지 아니까, 크게 의미는 없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태양의 약속(SSS)]

태양신이 지상에 내린 세 가지 유물 중 하나.

유물의 인정을 받은 사용자는 스킬, ‘맹세(SSS)’를 사용할 수 있다.

‘맹세’는 태양신과 이루어지는 상호계약이다.

마왕을 무찌른 이후, 에필로그를 위해 만들어진 설정이라 봐도 무방했다.

모든 것은 원작을 연재한 작가의 마음이니까.

‘태양의 징벌’이나 ‘태양의 걸음’은 마왕 봉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마왕의 목을 베기에 약간 모자란 힘을 보충해주는 건틀릿, 마계 침식이 한참 진행된 대지를 걸을 수 있게 해주는 장화.

그리고 용사가 포기하지 않도록 확실한 의지를 부여하는 약속의 펜던트.

‘태양의 약속’에 맹세를 한다.

용사 루크는 자신이 마왕을 봉인할 경우, 자신의 동료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허나, 거부당한다.

용사 루크는 다시 맹세를 한다.

자신이 마왕을 쓰러트릴 경우, 악마에 의해 희생당한 이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그 명단에서 루크의 동료들 대부분이 제외되어 있다.

루크가 자신의 하렘 중 가장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정실로 취급되는 소꿉친구 히로인, 루시아 체리블라썸도 마찬가지로 제외된다.

태양신은 그 ‘맹세’를 받아들인다.

연인을 살릴 순 없지만, 주인공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맞선다.

결국 마왕 바알의 목을 베어내고 평화를 되찾았다.

모두가 재회에 감동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릴 때, 용사 루크는 영원한 이별을 받아들이고 활짝 웃는다.

─ 어린 시절, 네가 가져온 동화책에는 용사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었다. 용사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철부지였던 나는 용사가 되기를 꿈꿨다.

─ 용사는 시련과 고난을 깨부수고 이겨낸다. 용사는 악에 고통 받는 대륙을 구원한다.네가 곁에 있어 지옥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네가 지켜보고 있어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

─ 용사는…. 함께 모험한 동료들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

─ 나는.

“네가 동경하던 용사가 되고 싶었는데….”

“응? 뭐라고 중얼거려?”

“어? 아무것도 아니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애쉬가 태양의 약속을 쥐고 있다.

찬란하게 빛나는 것으로 보아, 이미 멋대로 맹세를 하고 소원을 빈 것 같았다.

“뭐야, 맹세했어?”

“마왕을 죽이겠다고 맹세했어.”

“…소원은?”

애쉬의 입 꼬리가 소악마처럼 얄궂게 휘어졌다.

애쉬는 검지를 세워 입술에 척 붙이고 대답했다.

“비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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