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실전(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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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강기를 일으켜 흙과 돌을 갉아냈다.
애쉬가 천천히 구멍에서 몸을 빼냈다.
풍만한 젖가슴에 걸리지 않고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후우.”
애쉬는 블라우스와 바지에 묻은 흙들을 털어냈다.
커다란 엉덩이가 꽉 끼어버리는 바람에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넓은 골반을 가지고 있어야 순산할 수 있다고 들었다.
건강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의 신체조건이 흡족하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구멍에서 혼자 빠져나온 후, 애쉬는 강아진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고블린 일곱 마리와 뒹구는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전했다.
일부로 혼자 싸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고블린 일곱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만약의 경우에도, 각인이 작동하고 있으니까.’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는다.
고블린 따위가 애쉬의 생명력과 마력을 뚫고 강아진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 리 없다.
실전이라고 했지만 실전은 아닌 그런 상황.
강아진은 나름 진지하게 단검을 휘둘렀다.
아니, 주먹을 내질렀다.
‘살짝 망설이네.’
단검으로 찌르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듯했다.
회귀 전에 만났을 때에는 저런 연약한 부분이 없었는데.
순수한 강아진의 모습도 보기 좋았다.
이런 남자가 험난한 세상에 닳고 닳아, 악마 앞에서도 살아남는 사내가 된다.
하지만 애쉬가 원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냥 내 품에 안겨 있으면 돼.’
강아진에게 힘든 일을 시킬 생각이 추호도 없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남자로 있어도 되니까.
자신의 곁에서 웃어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되었다.
다만, 최소한의 방비는 해두어야 했다.
비앙카 때문에 깨닫게 된 진실이었다.
강아진 스스로도 상대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찌를 수 있어야….
최악의 상황, 만일을 대비할 수 있으리라.
애쉬는 그 이유를 명분으로 강아진을 굴렸다.
케륵!
퍼억!
강아진이 고블린을 때려눕혔다.
회피 후 반격.
일련의 과정이 부드럽게 순환했다.
강아진은 몸에 각인된 고통을 기억해냈고, 그 감각이 알려주는 기세에 따라 움직였다.
나흘 동안 두들겨 팬 보람이 있었다.
고블린들을 하나, 둘, 셋….
천천히 잡았다.
강아진에게 얻어맞은 고블린은 잠깐 꿈틀거리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일어나지 못하고 기절한 것이다.
‘찌르지만 못하고, 패는 건 잘하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찔러서 죽이는 것과 때려서 기절시키는 것.
얼마나 다른 건지 모르겠다.
애쉬는 살상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태생부터 냉정하고 잔혹한 성격이었는데, 회귀를 거치면서 더 마모가 되었다.
천사의 피를 각성하면서 잠깐 선한 성정을 일깨웠으나….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싸늘하게 식은 강아진의 시체.
천사로서의 부드럽고 인자한 성정은 애쉬의 무의식 깊은 곳에 파묻혔다.
더 이상 그것을 건드리거나 깨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마음에 들었다.
‘저렇게 하면 안 돼.’
애쉬는 고개를 저었다.
강아진의 손속에 자비가 깃든 것을 보며, 부족한 것을 느꼈다.
애쉬가 그에게 바라는 것은 완전한 살상.
의지를 가지고 찌른 후, 그 감촉을 느끼길 바란다.
손에 묻은 피를 외면하지 않고, 똑똑히 기억했으면 좋겠다.
중요한 순간에 망설이지 않도록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잘 끝마치면 대준다고 했는데도 머뭇거리잖아.’
저 정도로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애쉬는 대충 넘길 생각이 없다.
싸움은 점점 격해졌다.
강아진은 물러서지 않고 고블린들을 잡아갔다.
진검으로 무장한 고블린, 강아진이 서로 마주보고 섰다.
‘귀여워.’
나름 비장하게 대치하고 있는데, 애쉬의 눈에는 귀엽게만 보였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보니, 제대로 찌르겠다는 각오를 다진 듯했다.
그리고 뛰어들었다.
강아진은 보다 빠르게 쏘아졌다.
고블린은 그의 날렵한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다.
강아진의 민첩성은 도둑의 그것과 일치했다.
한낱 고블린 따위가 쫓을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강아진이 고블린의 일격을 피했다.
간소한 차이로 검을 흘려내고, 고블린을 향해 단검을 내리 그었다.
‘결심을 했구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기회였다.
기회가 있을 때 역량을 키워둬야 했다.
실제로 험한 꼴을 당했으니, 스스로가 오히려 뼈저리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강아진이 적극적으로 움직여줄수록 애쉬는 편해졌다.
괜히 창녀처럼 엉덩이를 흔들면서 강아진에게 동기부여를 넣어줄 필요가 없어지니까.
‘별로 상관은 없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발정한 강아지가 아무 곳에나 허리를 흔드는 느낌이다.
자신에게 애원하는 강아진을 볼 때마다 웃음만 나왔다.
엉덩이를 대주면, 정신없이 침 흘리면서 매달릴 것 같았다.
무슨 꼴을 하고 있어도 애쉬 눈에는 좋게만 보였다.
촤악!
고블린의 살갗을 베었다.
고블린도 놀라고, 강아진도 놀랐다.
단검이 생각보다 예리해서 피가 크게 뿌려졌다.
강아진이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애처롭게 떨리는 손을 보며, 애쉬의 마음이 아팠다.
새하얀 도화지가 빨갛게 물들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적응해야 해.’
순수한 강아진이 좋다.
그렇지만, 그가 험한 꼴을 당하는 것은 싫다.
이제는 비앙카와 같은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할 테지만.
혹시 모른다.
또 비슷한 일이 생길수도 있다.
그 때를 위해서, 강아진은 냉정해져야 했다.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할 때, 망설이지 않을 수 있어야 했다.
생명을 해치는데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 있다.
내가 죽는 것보다는 낫다!
내가 다치는 것보다 낫다.
이 문장은 그 어떤 약자도 합리화를 가능하게 해준다.
아무리 망설이더라도, 결국에는 일을 저지를 수 있게 된다.
강아진이 뼛속 깊이 새겨야 할 마음가짐이었다.
케에에에에엑!
상체를 크게 베인 고블린이 발작을 일으켰다.
시뻘게진 눈알이 터질 듯이 부풀었다.
흥분한 놈은 광폭화 비슷하게 미쳐가기 시작했다.
“시발…!”
익숙하지 않은 장검을 대충 던져버리고,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강아진에게 달려들었다.
강아진은 당황하지 않고 놈의 돌진을 피했다.
옆으로 구르면서 흘려보냈다.
고블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 강아진을 향해 팔을 뻗었다.
누런 이빨에선 핏물이 뚝뚝 흘렀다.
강아진의 단검이 꽤 치명상을 입혔다.
고블린도 그것을 알기에,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침착해!”
애쉬는 강아진을 향해 소리쳤다.
응원 겸 해서 존재감을 비추었다.
강아진은 애쉬가 무사히 빠져나온 것을 확인했다.
놀란 눈으로 애쉬를 바라봤다.
어떻게 나온 것이냐,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강아진의 물음에, 대답해줄 수가 없다.
나올 수 있는데 일부러 안 나왔다.
라고 말했다가는, 또 어떤 표정을 보일지 모르니까.
“앞!”
고블린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치명상을 입혔을 뿐, 광기에 젖어 움직이고 있었다.
강아진은 애쉬가 가리키고 있는 고블린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전투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당황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금방 깨달았다.
애쉬가 자신의 실전을 위해 잔꾀를 부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케륵, 케게겟!
고블린의 눈알이 데구르르 굴렀다.
애쉬에게로 향하는 시선에는 욕망이 득실거렸다.
놈의 아랫도리가 부풀었다.
발기한 좆 대가리가 후줄근한 천을 들췄다.
강아진이 발끈하며 발을 굴렀다.
애쉬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다른 수컷의 눈요깃감이 되는 여성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무기를 휘두른다.
그 노골적인 소유욕의 발현을 보며, 애쉬는 만족감을 느꼈다.
강아진의 암컷이라는 위치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흥분했다.
물론, 강아진이 애쉬의 강아지다.
애쉬는 강아진의 여자일 뿐, 그의 아래에 깔려 앙앙 울부짖는 건 사양이다….
‘부끄럽다고.’
쪽팔리고 쑥스러워, 강아진을 보기가 민망하다.
그래서 웬만하면 위에서 깔아뭉개고 싶은 마음이었다.
강아진과 고블린이 서로 팔을 뻗었다.
살벌한 손톱이 강아진에 닿기 직전, 강아진은 고블린의 팔을 쳐내고 비틀었다.
인간과 고블린 사이에는 압도적인 피지컬 차이가 있다.
고블린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태생부터 나뉘는 격차였다.
거기다가 강아진은 애쉬에게 특훈을 받았다.
말만 특훈이지, 실제로는 두들겨 패는 것이지만.
몸에 새겨진 고통은 최적의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이제 겨우 나흘이라서, 고블린 정도에게나 통하지.’
시간을 들이면 된다.
성장할 시간은 많다.
강아진을 조금 더 굴리다 보면….
결국에는 상대할 수 있는 마물, 마족, 악마가 늘어갈 것이다.
켁!
고블린을 걷어찼다.
강아진은 제법 자연스럽게 고블린을 때려눕혔다.
“허억, 허억, 허억.”
일곱 고블린을 모두 전투불능 상태에 빠뜨린 후, 강아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드레날린 덕분에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애쉬는 그런 강아진을 향해 소리쳤다.
“끝내!”
“…뭐?”
“단검, 들고 있는 걸로 찌르라고.”
더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
고블린을 제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살해.
완전하게 숨통을 끊어놓는 것.
강아진의 손으로, 상대의 생명을 끊는 것이다.
“…….”
강아진은 아직까지 망설이고 있었다.
애쉬가 보기에는 답답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작고 귀여운 강아진이다.
서툴고 머뭇거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애쉬가 끝까지 구멍에 처박혀 있었다면, 강아진 스스로 고블린을 죽였을 것이다.
조작된 상황이라는 사실에, 강아진은 안도감을 느꼈다.
죽이겠다는 각오가 옅어져버렸다.
“…진짜 죽이라고?”
“응.”
확인하기 위해 묻는 강아진.
애쉬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경험을 쌓아둬야 돼. 그래야 중요할 때, 냉정해질 수 있지.”
애쉬가 강아진에게 다가갔다.
강아진 앞에는 헐떡거리는 고블린이 쓰러져 있다.
“고블린이라서 수월하게 이겼어. 하지만 상대가 인간이었다면? 너보다 강한 마족이라면? 그 때도 이렇게 안일하게 굴 거야?”
애쉬는 강아진을 끌어안았다.
뒤에서 포근하게, 젖가슴이 그의 등에 닿아 뭉개지도록 꽉.
“한 순간의 방심이 위기로 이어져. 되도 않은 자비심이 동료를 위험에 빠뜨려. 나는 그런 용사들을 많이 봐왔어.”
“…….”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금씩 익숙해지는 거야. 상대는 마물인데, 살려서 보낼 생각? 착각하지 마. 명심해야 해. 이 놈들은 모험가들을 납치해, 씨받이로 써먹어. 이 놈들의 동굴에는 실종된 모험가들이 있어. 여기서 죽여야지, 다른 피해자가 안 생겨. 알아?”
강아진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살해에 대한 거부감이 살짝 무뎌진다.
애쉬는 쇄기를 박았다.
“얼른 죽이고 가서 섹스 해야지. 응? 고블린 몸에다가 단검 세게 박고, 내 보지에도 자지 세게 박는 거야. 어때?”
“……내 마음대로 해도 돼?”
강아진이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애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 일곱 마리니까, 일곱 번 하게 해줄게. 강아지 마음대로.”
애쉬는 강아진의 표정을 살핀 후, 그를 풀어주었다.
풀려난 강아진은 고블린들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검을 쑤셔 넣었다.
강아진의 레벨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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