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실전(1).
* * *
마왕 바알을 죽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원작의 흐름을 따라가면 4년.
하지만 애쉬는 원작에서 벗어난 존재다.
회귀를 통해 원작보다 더 강한 용사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4년보다 이르게 끝날 확률이 높다.
‘이대로 흘러가면….’
나와 애쉬가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애쉬는 회귀 전부터 나를 만나 인연을 쌓았지만.
나는 애쉬와 함께한 시간이 생각보다 짧았다.
보름 정도 되는 것 같다.
적은 시간 동안 악마를 두 마리나 잡았다.
그것도 설렁설렁 다닌 결과물, 다른 용사들이 들으면 믿지 못할 만큼 엄청난 위업이었다.
애쉬가 룬을 모으고 강해지면서 악마를 사냥하러 다닌다고 가정을 할 때.
독자의 시선에서 판단을 내려다본다.
1년 안에 바알을 잡아도 이상하지 않다.
애쉬라면 해낼 수 있다.
‘마계 침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악마들이 알아서 용사들 앞에 나타나기 시작해.’
찾으러 갈 필요도 없어서 악마 사냥에 가속도가 붙게 되는 것이다.
물론 수많은 생명이 사라진다.
흑마술사와 악마들에게서 모두를 지킬 순 없다.
애쉬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짧고 굵게 1년 정도 고생하면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1년이면 애쉬에 의해 중간계와 마계가 평정될 것이다.
이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올 것이고, 나는 유유자적 한량 생활을 즐길 수 있다.
‘원래는 애쉬에게서 도망치려 했겠지.’
애쉬가 내 뒷구멍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기겁하며 탈주를 계획하고 있었다.
정조대를 착용하고 불알을 약점으로 잡혀도, 내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뒷구멍에 박히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삽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당하는 것이라니.
남성성을 완전히 짓밟히는 것, 출력 공간에 입력 하는 것.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그러나 비앙카에 의해 엉덩이 구멍이 뚫렸다.
동정을 빼앗기고 순결하지 못한 몸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애쉬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모든 경험은 처음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두 번째부터는 장벽이 확연하게 낮아져, 허락하기가 더 쉽다.
애쉬가 원한다면, 기꺼이 엉덩이를 내어 줄 마음이 생겼다.
상대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의 일환으로서 애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체념하듯 대주겠다고 하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잘도 하겠다. 응?”
애쉬는 내 다짐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나름대로 각오 하고 용기 내서 말한 것인데.
“괜히 괴로운 기억을 들쑤시면서까지 내 욕망을 채우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
약간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내 뒷구멍을 본인이 뚫었으리란 말 아닌가?
미워도 다시 한번.
애쉬에게 여운을 남겨두었다.
“해 보고 싶어지면 나중에 말해.”
“…됐어.”
애쉬는 아주 찰나의 순간, 망설였다.
내 눈에는 그 잠깐이 보였다.
이 빌어먹을 년!
내 앞에서 아닌 척, 연기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 표정이 어이없고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큼, 흠흠.”
애쉬 자신도 자기 눈빛이 이상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뒤늦게 표정을 숨기며 흘겼다.
그 시선이 마치, 나를 탓하는 것만 같았다.
“오늘부터 네 수련을 겸하면서 움직일 거야.”
“수련…. 나쁘지 않지.”
비앙카에게 납치당하면서, 나 자신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설렁설렁 살아가던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할까.
무의식적으로 애쉬에게 기대던 것, 그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큰지 깨달았다.
비앙카의 목적이 특이해서 망정이지, 상대가 작정하고 내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면?
분명 끔찍한 꼴을 당하고 꼼짝없이 죽고 말았을 것이다.
‘운이 좋았어.’
뒷구멍을 바치고 살아남았다….
그리 생각하면, 마냥 손해 보는 교환은 아니었다.
애쉬의 표적이 되는 것으로, 비앙카가 큰 교훈을 전해준 것이었다.
은사님이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 대가로, 비앙카는 애쉬의 표적이 되었지만.
내가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똑똑똑.
─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용사님.
우리는 아직 교단 지부에서 머물고 있다.
비앙카 때문에, 대륙 동쪽 코렌으로 넘어온 상태에서 추가로 이동하지 않았다.
교단에 신세를 지면서 이틀 동안 요양 아닌 요양을 즐겼다.
내 정력이 받쳐주는 한도 내에서, 이 방은 애쉬의 신음 소리로 가득했다.
당연히, 교단 사제들은 방 근처에도 오지를 못 했다.
기껏해야 문 앞에 식사를 두고 가는 수준이었다.
“두고 가.”
애쉬는 사제를 쫓아냈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애쉬가 익숙하게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교단이라고 해서 엄청 부유한 건 아니라서, 아침 식사는 생각보다 단출한 식단이었다.
귀족 저택에 비하면 소소하고 맛없는 식사.
그래도 감사히 먹었다.
차려주는 것을 받아먹는 주제에, 불평불만을 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다.
배를 채우고 지부 밖으로 나섰다.
교단 지부의 규모는 도시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코렌은 프레소 백작령보다 작은 도시다.
때문에, 프레소 지부보다 작은 규모를 자랑했다.
비와 바람을 막아줄 벽과 천장.
푹신푹신한 침대만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지만.
애쉬가 말했다.
“넌 장검보다 단검이 어울려. 알아?”
“…그렇겠지.”
단검이 내게 어울린다기보다는, 그나마 뽑을 수 있는 차선책이 단검인 것이다.
도둑 클래스의 한계였다.
‘격투술이나 다른 무기술 중에 뭐든 좋으니까, 스킬로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레벨 업 시스템의 보조를 받으면 부족한 실력으로도 안심할 수 있다.
‘소매치기’와 ‘해제’가 그렇듯이, 전투와 관련된 스킬이 있으면 수련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하지만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도둑 클래스를 지닌 나로서는 전투 관련 스킬을 습득할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피, 땀, 눈물.
스킬이 아니라 기술을 익혀야 한다.
내 손과 발로 실력을 갈고 닦아야 한다.
노력이라니, 정말 끔찍한 일이다.
“괜찮아. 내가 도와줄 테니까.”
교단 코렌 지부 앞마당.
성기사단을 위한 수련장이 있다.
볼텐 기사 저택에 비하면 허접하지만 얼추 구색은 갖춘 장소다.
그곳에서 애쉬가 목검을 쥐었다.
그리고 내게 겨누었다.
“맞으면서 구르다 보면, 생각보다 빠르게 익숙해지는 너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전혀 아닐 것 같은데.”
“실전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모의 대련으로 경험을 쌓아야지.”
애쉬의 말에 동의한다.
목숨을 건 실전은 버닝 이벤트에 가깝지만, 그만큼 페널티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황천길 편도 티켓을 뽑고 대기줄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애쉬가 내게 단검 하나를 건넸다.
“여기.”
어디서 구해온 건지 모를 근사한 단검이었다.
칼날은 방금 날을 세운 듯 예리하게 빛나고, 가죽을 덧대어 만든 손잡이가 손아귀에 기분 좋게 감겨 왔다.
어린 시절, 전쟁 놀이에서 선봉장에 섰을 때 그 고양감이 느껴졌다.
괜히 나대다가 신명나게 두들겨 맞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목검을 쓸게.”
애쉬는 목검을 붕붕 휘두르며 말했다.
대충 휘젓는 것 같아도, 그 결이 남달랐다.
검술에 조예가 깊은 것이 겉으로 티가 났다.
“…….”
나만 진검을 쓴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무엇이든 베어버릴 듯 살벌한 예기는 살갗에 스쳐야 의미가 생긴다.
내 실력으로는 애쉬에게 닿을 수 없다.
불가능에 가깝다.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검사들도 애쉬를 상대로 버티지 못한다.
“…그냥 하면 뭔가 심심하니까. 대련을 좀 더 재밌게 할 겸해서, 내기 하나 하지 않을래?”
“내기?”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흥미를 잃어 버린 내 표정을 읽은 걸까.
애쉬가 한 가지 제안했다.
“나흘 동안 대련을 할 건데, 단검을 손에 익히고 실전 감각을 깨우는 것에 초점을 맞출 생각이야.”
“그래?”
“아마도 두들겨 맞고 구르기만 하겠지. 이제는 진심이라서 봐줄 생각이 없거든.”
“…….”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도 재능의 영역이다.
내가 알기로, 애쉬는 교육자로서 자격이 없다.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
글러 먹은 수준이었다.
그러니, 무식한 방법을 선택했다.
둔해빠진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새기고자 했다.
애쉬가 히죽 웃었다.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는 웃음이었다.
“내기 내용은 간단해. 나흘 동안 한 번이라도 내게 닿으면 강아지, 네가 이기는 거야.”
“…….”
가능할 리가 없다.
내 몸뚱어리로는 애쉬의 털끝조차 건드릴 수 없다.
이기지 못하는 내기를 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
“그래, 그런 표정 지을 줄 알았어.”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널 어떻게 잡아. 악마를 둘이나 소멸시킨 용사를….”
“너한테 맞는 난이도로 하면 되지.”
애쉬가 잠깐 고민을 한다.
어느 정도의 핸디캡을 짊어지면 될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애쉬는 한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게.”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을 가리키며, 애쉬가 말했다.
“한 발자국도 안 떼고, 네 공격을 막거나 흘릴 거야. 넌, 그런 나를 뚫고 닿으면 승리.”
“…….”
밸런스를 조절한답시고 했는데, 그래도 내가 불리한 것 같다.
최강의 용사를 상대로는 어떤 조건을 붙여도 이길 수가 없다.
애초에, 나를 위한 내기가 아니었다.
애쉬에게 물었다.
이런 내기를 왜 하는 거냐고.
“내기에서 이기면, 보상이 뭔데?”
“보상은 소원. 상대가 원하는 것, 무조건 들어 주기.”
“…….”
도대체 무슨 소원을 빌려고 하는 걸까.
무엇을 요구할 생각이기에, 이런 무자비한 결투를 신청하는 걸까.
“소원? 나한테 원하는 게 있어? 그러면 그냥 말하면 되잖아.”
내 자지에 강제로 정조대를 채운 뒤, 사정 관리를 시작했다.
자기 멋대로 내 불알을 움켜쥐고 주물럭거리며 놀았다.
소원이라는 명분을 붙여서 요구할 게 남아 있나?
아니면, 애쉬가 원하는 것이 소원으로 말해야 할 정도의 요구인가?
“…….”
애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이 시뻘게졌다.
애쉬의 소원은 딱히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다.
본인이 쪽팔리고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애쉬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뭐든 들어 줄게.”
“…….”
애쉬가 우물쭈물 말을 망설였다.
뻐끔거리며 모호하게 굴었다.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대체 무슨 소원인데? 뭘 원하면,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할 수 있는 거냐.”
발을 베베 꼬는 꼴을 보니, 더욱 궁금해졌다.
어떻게든 소원 내용을 듣고 싶었다.
애쉬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말해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내기에서 이기고, 직접 받아 갈 생각인 듯했다.
‘애쉬 성격에, 부끄러움이란 감정은 없어. 좆같으면 좆같다. 아니면 아니다. 이지 선다라고.’
얼굴에 철판을 서른 겹은 덧댄 애쉬 성격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수치심….
아까 보았던 애쉬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라면 엉덩이를 대줄 수 있다는 말에, 애쉬는 아닌 척 되도 않은 연기를 했다.
나는 찰나의 순간에 혹하는 눈빛, 그 추한 표정을 목격했다.
그 장면이 지금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에이, 설마.’
그러면 진짜 존나 추한데.
“새로운 경험을 해 보고 싶다…. 그런 느낌으로, 소원 빌 생각은 아니지? 예를 들면…. 박아보고 싶다, 라던가.”
“……!”
애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비앙카에게 뚫리지 않았다면, 얼마 못 가 애쉬에게 따먹히고 말았을 것이다.
애쉬는 그러고도 남을 년이었다.
나는 체념했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은 쉽다.
물론, 각오를 다졌다.
이것은 내기니까.
“오케이, 좋아. 내가 내기에서 이기면 애쉬, 네 애널버진을 가져가겠다….”
단검을 꽉 쥐고, 애쉬를 겨누었다.
애쉬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속내를 간파 당한 후, 얼굴이 요상하게 구겨졌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화내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으로, 목검을 들어 올렸다.
우스광스러운 겉모습과 달리, 자세는 진심이었다.
애쉬는 내게 져줄 생각이 없었다.
진심으로, 소원 따위의 명분을 빌어 나를 따먹겠다는 각오를 품고 있었다.
“진짜…. 네가 그러고도 용사냐? 어!?”
“뭐, 뭐! 비앙카 그 씨발년한테 빼앗긴 것 때문에, 안 그래도 존나 빡치거든? 괜히 아플까 봐,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서 참는 건데…. 당장 강제로 안 따먹는 걸로 고마워 해라.”
“…시바알….”
내 미래가 벌써 선명하게 그려졌다.
왜 내 인생 스포일러 당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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