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악마들의 밤(4).
* * *
프레소 백작의 보물창고가 개방되었다.
보안을 위해 심어둔 마법진이 금방 해제되고, 자물쇠가 박살 났다.
애쉬의 힘 앞에선 모든 것이 평등했다.
보물창고 문이 열렸다.
애쉬는 당당하게 보물창고에 입성했다.
자신의 집도 아닌데, 어색함이 없었다.
한두 번 털어보는 게 아니었다.
애초부터 용사의 필살기는 성검이 아닌 빈집털이였다.
"흠…."
보물창고 내부는 내 생각보다 허전했다.
완전히 텅 빈 것도 아니고 가득 찬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
드래곤 레어 마냥 금화가 단순무식하게 가득 차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현물을 그 따위로 간직하고 있는 귀족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재물의 양이 내 기대에 못 미쳤다.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재력의 디폴트 값을 떠올려 보았을 때, 그것에 한참 부족한 양이었다.
"흑마술사 지원하느라 다 빼돌리고 있었겠지. 쯧쯧."
애쉬는 혀를 끌끌 차며 보물창고를 들쑤셨다.
괜찮아 보이는 물건을 찾기 위해 창고 곳곳을 살펴봤다.
나도 애쉬를 따라 움직였다.
무엇이든 건져보겠다는 일념 하에, 이것저것 감정을 시작했다.
'지금 내가 쓸 수 있을 만한…."
실제로 전투를 해본 적은 없다.
애쉬가 나서서 다 해주었기 때문에, 나에게까지 차례가 오지 않았다.
안 오기를 바라고 있지만, 만약의 순간에 나설 마음은 있다.
상남자 강아진.
해야 할 타이밍에 사리는 멍청한 놈은 아니다.
'노예상인에게 잡혀가던 날이 떠오르네.'
탈출을 위해 용쓰던 그 날.
빈센트가 괜한 짓 하지 말라고 충고하던 그 날.
나는 애쉬를 만났고, 강아지로서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다행인지 아닌지.
내 존엄성은 절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이성과 생존본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쪽팔리네, 부끄럽네, 수치스럽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저런 고민들도 전부 배 부른 고민이었다.
당장 죽으면, 생각 자체를 못할 테니까.
['감정'에 성공하였습니다.]
장비 하나를 '감정'하는데 성공했다.
웬만하면 실패하는 쪽이 가치가 높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빠르게 정보를 읽고 구석에 던져두었다.
"어."
두려고 했다.
[단련용 미스릴 각반(B)]
천상의 금속 미스릴이 극소량 첨가된 각반.
무게 조절 마법이 인챈트되어 있다.
하늘빛이라고 알려진 미스릴이 미세하게 함유되어 있단다.
그런데 각반은 투박한 회색을 띠고 있었다.
먼지도 조금 쌓여서 보기에 흉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 어떤 것보다 값지게 다가왔다.
무게 조절 마법이 새겨져 있는 각반이라니.
운동 강도를 높일 수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그것이 무식한 중량 형식이라고 해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냉큼 각반을 챙겼다.
레벨을 좀 더 수월하게 올릴 수 있을 것이다.
10일 노력해야 할 것이 9일 정도로 줄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해본다.
"진짜 흑마술사한테 다 팔았나보네. 프레소, 이 시발새끼."
애쉬가 씨익씨익 성난 숨을 내뱉으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창고를 꼼꼼하게 살펴봤으나, 그렇다 할 수확이 없는 듯했다.
"돌아가자. 유테론 남작에게 보내줄게."
애쉬의 말에, 베넬로아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 표정 변화가 너무 극적이었다.
내심 불안한 속을 감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안 보내주고 협박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했을지도 모른다.
'애쉬는 베넬로아가 살든 말든 관심 없어.'
애쉬가 베넬로아를 살려주려고 결심한 이유.
조금 자의식 과잉 같기도 하지만, 나 때문일 것 같다고 조심스레 손 들어본다.
'내 목적지가 유테론이니까. 유테론의 딸인 베넬로아도 함께 보내는 게….'
유테론에 대한 경고다.
네 딸을 살려서 보내줬으니까, 애들 건들지 말고 잘 먹이고 씻기라는 협박.
애쉬에게 거래를 제안했던 유테론이라면 알아들을 것이다.
'존나 이해는 안 가지만….'
베넬로아에게 오줌을 싸게 만들었다.
귀족을 향한 모욕, 애쉬가 용사만 아니었다면 벌써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때문에, 내 논리가 약간 흐릿하게 느껴졌다.
진심으로 내가 세운 가설이 맞는 걸까?
사실 애쉬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게 아닐까.
정말 내 오줌을 맞았으니, 약속을 지키려는 것일지도.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애쉬는 우리를 데리고 교단 텔레포트 마법사를 찾아갔다.
텔레포트 마법사는 대충 손님들을 위한 별채, 구석진 방에 대기하고 있었다.
"…연회가 아직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텔레포트 마법사가 베넬로아를 흘겨봤다.
생일 연회의 주인공을 유테론으로 보내달라고 하는데, 당연히 의아하게 생각할 법하다.
"강아지랑 베넬로아,유테론에 데려다 놓고 교단 측에 내가 말하는 것들을 전달해."
애쉬가 상황설명을 간략하게 했다.
쥐고 있던 정보 중 하나인 인류배신자들의 맹세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귀족들의 동상, 말입니까…?"
텔레포트 마법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떨었다.
애쉬는 괜히 뜸 들이는 모습에, 눈살을 구겼다.
"나중에 보여주면 되잖아. 그러니 강아지부터 안전한 곳으로 보내."
"…예, 알겠습니다."
텔레포트 마법사는 더 이상 애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다.
나와 베넬로아에게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강아지. 깨끗하게 씻고 기다리고 있어라? 흑마술사 새끼들 조지고 먹는 자지가, 제일 맛있으니까."
"……."
낯 부끄러운 말에, 나는 애쉬의 시선을 피했다.
베넬로아의 얼굴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시야가 뒤틀렸다.
순식간에 유테론 남작의 저택으로 이동됐다.
"……."
텔레포트 마법사는 대놓고 유테론 남작의 집무실로 우리 둘을 데리고 왔다.
용사와 태양신을 제외하고, 그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교단 마법사다운 판단이었다.
유테론 남작이 우리 셋을 빤히 쳐다봤다.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베넬로아가 후다닥 다가가, 아비의 품에 안겼다.
"아빠! 흐윽, 흑…!"
그간 설움이 북받친 듯 베넬로아는 울음을 터트리며 유테론의 품에 안겼다.
"베넬로아, 대체 왜…. 왜 이곳에 온 것이냐. 네 생일 연회가 곧 열릴 시간인데…."
"흐윽, 흡!"
베넬로아는 도통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울먹거리며 유테론 남작의 품에 얼굴을 비벼댔다.
유테론 남작은 내게 말해달라는 듯 고개를 들고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프레소 백작이, 인류를 배신…? 말도 안 되는…!"
그의 심성을 아는 이들로서는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원작을 읽은 나도 믿기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래서 애쉬가 베넬로아 아가씨를 보냈습니다. 악마가 소환되고 전투가 벌어질 곳에 있으면 위험하니까요."
"…베넬로아를 살려주신 거군. 감사하게도…."
유테론 남작은 제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쉬에게 거래를 제안하고 억지로 보낸 사실이 내심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용사님은 혼자 계신 게 아닌가? 위험하지 않나?"
"……."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애쉬는 벨리알을 소멸시켰다.
소환된 악마를 소멸시킨 것은 보통 실력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강하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지.'
방식이 틀렸다.
'아이폰 충전기로 갤럭시를 충천할 순 없으니까.'
손목이나 팔을 날린다고 해도, 악마를 완전히 죽이진 못한다.
애쉬는 할 수 없는 일을 해내고 말았다.
원작 최종전에서 활약하는 최강의 용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크게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 것 없었다.
병신 같지만 애쉬가 말한 대로, 자지 닦고 기다리는 것밖에는….
'일하고 온 남편 어깨 주물러주고 밥 차려주는 게 내조지.'
각자의 역할이 있는 법이니, 실망하지 않기로 했다.
위험한 일을 맡아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 * *
교단 텔레포트 마법사는 유테론 남작의 저택에서 빠져나와 프레소 지부로 향했다.
프레소 백작가와 가장 가까운 교단의 지부.
그곳에 말을 전달할 생각이었다.
애쉬도 볼텐 지부가 아닌 프레소 지부를 겨냥하고 일을 맡긴 것이리라.
"지부장님!"
텔레포트 마법사가 다급하게 지부장을 불렀다.
보고체계를 전혀 지키지 않은, 직급에 맞지 않은 행동이었다.
텔레포트 마법사의 만행에, 사제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교단 프레소 지부장이 나타났다.
정갈한 차림새의 지부장은 용사 애쉬가 있는 저택을 주시하고 있었다.
때마침 나타난 애쉬 담당 텔레포트 마법사.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주지 않아도 대충 알아차렸다.
"지원이 필요한가?"
"그게…."
텔레포트 마법사는 이런저런 사족을 덧붙여 애쉬의 말을 전했다.
들은 그대로 전달했다간 영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아, 조금 순화해서 표현했다.
다행히 프레소 지부의 사제들이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텔레포트 마법사의 염려가 통한 것이다.
"지원이 필요 없다고 하셨다?"
"예. 스푼 얹을 생각은 손톱 만큼도 하지 말라 했습니다."
"……."
결론은 그랬다.
애쉬는 교단과 완전히 선을 긋고, 악마를 토벌하겠다고 자신했다.
"실패하면 프레소 백작령이 날아갈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수많은 용사들이 죽고, 넓은 땅이 악마의 손에 떨어질 거야. 용사 애쉬는 너무 자만했다. 벨리알을 소멸시키고 최단기간에 S랭크 평가를 받을 만큼 강하지만, 그녀를 완전히 내버려둘 순 없어."
프레소 지부장은 교단 성악단과 성기사단을 호출했다.
프레소 지부가 자랑하는 교단 병력들이었다.
텔레포트 마법사가 그를 만류했다.
"용사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 미친년…. 아, 아. 용사 애쉬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고 본부 측에서…."
"우린 최소한의 대비를 할 뿐이야. 용사 애쉬가 무모한 부탁을 한 것이지."
프레소 지부장이 병력을 이끌고 프레소 백작 저택으로 향했다.
텔레포트 마법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애쉬를 계속 서포트 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은 생각해주지 않는 건지.
프레소 지부장을 곱게 바라볼 수 없었다.
"직접 프레소 백작의 배신을 확인한다. 동상에 새겨진 흑마술사의 증거를 수집한 후, 프레소 백작을 처분하겠다."
그리고 프레소 백작가.
굳이 동상을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하늘 위로, 새까만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