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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여)용사가 집착함-68화 (68/109)

〈 68화 〉 악마들의 밤(1).

* * *

프레소 백작가의 저택은 리오스 남작과 유테론 남작의 저택을 합쳐도 상대가 안 될 만큼 거대했다.

규모 면에서 과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웅장했다.

사람 기를 질리게 만드는 위압감이 풍겼다.

"용사님, 반갑습니다."

프레소 백작은 중후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애쉬 앞에서 굽히지 않고 당차게 걸음을 옮겼다.

베넬로아는 고양이 앞에 선 쥐새끼 마냥 오들오들 떨었다.

그 강도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섬뜩했다.

'뭐지…?'

꺼림칙한 느낌을 받으며, 프레소 백작을 바라봤다.

애쉬는 프레소 백작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았다.

애초에 애쉬 자체가 누구 앞에서든 당당한 성격이다.

움츠리고 몸 사리는 편은 아니었다.

"백작이 돈 좀 많나보네."

애쉬가 저택을 둘러봤다.

지나치게 넓고 거대한 백작가 부지를 보며 빈정거렸다.

유순하게 말하고 있지만, 결국 뜻은 하나였다.

돈 좀 내놓으라는 암묵적인 협박.

프레소 백작이 못 알아들을 인물은 아니다.

노골적인 압박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둔한 인물은 귀족 사이에서 도태되고 사라졌을 테니까.

"…용사님은 조금 느낌이 다르군요. 색다른 매력으로 느껴집니다."

"그래? 입에 발린 칭찬은 썩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애쉬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돈을 가지고 오라고.

보통 용사들은 하지 않을 짓인데, 애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평판을 신경 쓰는 듯 안 쓰는 것 같았다.

"용사님을 지원할 수 있다니. 프레소 백작가를 책임지는 가주로서 최고의 영광입니다."

"대화가 좀 통하는 사람이네. 못 알아듣는 척 했으면 이 저택을 다 부숴버렸을 텐데."

"……."

프레소 백작의 표정이 구겨졌다.

불쾌하다는 감정보다는 의구심이 먼저 엿보였다.

부순다, 라는 진실의 명제보다 그러한 짓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용사가 품을 수 있는 것인가, 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애쉬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애쉬는 느긋하게 베넬로아에게 팔을 걸쳤다.

털털하게 어깨 동무를 하며 말했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베넬로아의 몸이 펄쩍 뛰었다.

"베넬로아 덕분에, 3초 정도 더 기다려줬으니까. 네 며느리한테 고마워 하라고."

"……."

프레소의 시선이 꿈틀거리며 베넬로아에게 닿았다.

베넬로아는 그 눈빛을 애써 피하고, 애쉬를 바라봤다.

너무 뜬금없는 것 아니냐.

고객님께서 컴플레인을 걸고 있었다.

정작 일을 벌린 애쉬는 관심 없어 보였다.

프레소 백작은 베넬로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애쉬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 감정은 없었다.

예의를 갖추어 용사를 대할 뿐이었다.

"셋째가 용사님과 인연이 있었나 봅니다. 저도 모르는 인연이었군요."

"어릴 때 인간관계까지 알고 있을 순 없으니까. 어지간히 뒷조사를 해도, 그건 불가능하지."

"하하. 맞습니다."

프레소 백작이 자연스럽게 웃었다.

묵직한 웃음은 기품을 품고 있었다.

남자로서, 사내로서, 본받고 싶은 그런 분위기….

저렇게 늙고 싶다.

중년 남자나 노신사에게는 최고의 찬사인 소망을 속으로 빌었다.

"생각해보니, 오늘 셋째의 생일을 맞이해 연회를 여는 날이었죠. 용사님께서 언질도 없이 들러주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요즘 바빠서 말이야. 잠깐 얼굴만 비추고 갈 생각이야. 너무 날 세우지 마."

"아닙니다. 용사님께서 와주셨는데, 연회 수준에 실망하실까 두렵습니다. 동지들 사이에서, 용사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했다고 소문이 돌면…. 그 수치를 이겨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가서 준비하는 게 어떨까?"

베넬로아와 내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애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베넬로아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내 시선까지 사로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년이 미쳤나?'

프레소 백작을 향해 날을 세우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쉬의 옷소매를 살짝 당겼다.

적당히 하라는 의미에서 말렸다.

애쉬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프레소 백작을 올려다봤다.

겉으로 보기에도 2m에 가까운 프레소 백작이라 평범하게는 마주하기 힘들었다.

프레소 백작은 전혀 불쾌하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사님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레소 백작이 물러났다.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애쉬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다시 준비를 하러 가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까칠하게 굴어? 남작들에 비해 백작은 조금 큰데."

프레소 백작이 보이지 않는다.

확실하게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애쉬에게 물었다.

애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프레소 백작. 곧 있으면 죽고 없을 놈이니까. 그 전에 가지고 있는 거 다 털자."

"뭔 소리야."

큰 활약을 보이는 건 아니지만, 프레소 백작은 죽지 않는다.

프레소 가문은 무너지지 않고 원작 후반에까지 등장한다.

배경만 채우는 귀족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런 프레소 백작이 곧 죽고 없을 놈이라니.

애쉬가 겪은 경험과 내가 읽은 원작이 다른 내용이라고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자세히 좀 말해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프레소 백작가, 가문은 구족을 멸할 거야.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교단이 알아서 일을 진행하겠지."

"뭐…?"

원작에서 연좌제는 극형에 해당한다.

그 중 최악의 형벌은 구족을 멸하는 것.

해당 인물과 엮인 모든 이를 죽이고, 뿌리부터 뽑아 없앤다.

'흑마술사에 가담한 놈에게만 주어지는 형벌이지.'

인류배반.

흑마술사에 대한 즉결심판이 가능한 이유.

작정하고 인류를 배신한 놈들에겐 재판 따위의 절차조차 자비였다.

보이는 순간 죽여도 된다는 합의가 떨어졌다.

선한 용사들은 그것을 망설이지만, 그럼에도 검을 휘둘렀다.

"잠깐, 잠깐만요!"

베넬로아가 애쉬의 손을 붙잡았다.

다급하게 놀란 눈으로 애쉬를 바라봤다.

애쉬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베넬로아의 손이 기분 나쁜 듯했다.

"시아버님이 인류를 배반했다니, 말도 안 돼요!"

"말이 안 돼?"

"네!"

베넬로아는 확신하듯 고개를 주억였다.

애쉬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턱을 까딱거렸다.

"확신할 수 있어?"

"네?"

"프레소 백작이 흑마술사에 붙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냐고. 나는 확신할 수 있는데."

애쉬의 당당한 태도에, 베넬로아가 목을 움츠렸다.

용사 앞이다.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는 교단의 이단심판에 엮이게 될 수도 있다.

"그, 그건…."

"네 의견은 그다지 안 중요해. 네가 확신하든 말든, 그를 보증하겠다고 나대도 말이야. 프레소 백작은 인류를 배신했어.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

베넬로아가 입을 뻐끔거리며 답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프레소 백작에 대한 신뢰 문제가 아니야. 상대는 용사. 용사가 내뱉는 말의 무게감이 더 크다는 거지.'

대륙을 지키겠다는 사명을 품고, 위험한 여정을 이어나가는 영웅들이다.

용사라는 영웅이 귀족을 상대로 모욕적인 말을 뱉을 리 없다.

프레소 백작이 아무리 건실한 사내라고 해도 의심이 생긴다.

용사 애쉬의 발언은 그만한 힘이 있었다.

애쉬는 베넬로아를 흘기며 키득키득 웃었다.

"인류배반죄는 구족을 멸해. 프레소 가문의 피가 이 대륙에서 지워지는 거지."

"……."

"현재 프레소 백작가에 시집 온 너도 마찬가지야. 유테론의 딸이지만, 지금은 프레소 백작가의 며느리니까."

베넬로아를 비롯해 프레소와 연관된 모든 이가 죽는다.

인류배반은 자비 없이 극형으로 다루었다.

베넬로아가 소릴 질렀다.

"주, 죽고 싶지 않아요! 저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단 말이에요…!"

"세상 사는 게 자기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힘들고 괴로운 거야. 그냥 마음 편하게 먹어."

부드럽게 답해주고 있지만, 속뜻은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애쉬는 베넬로아에게 말했다.

얌전히 목 내밀고 기다리라고.

죽으라는 말을 웃으면서 하고 있었다.

"시간 꽤 많이 남았네. 맛있는 거 먹으면서 기다려."

"…시간도 알고 있어?"

나는 애쉬에게 물었다.

원작을 읽었다고 해도 모든 내용을 알지는 못한다.

묘사되지 않은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봐도 무방했다.

때문에, 직접 겪은 애쉬가 더 자세히 아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응. 오늘 유테론 아가씨 생일 연회. 성대하게 일을 벌이겠지."

"……."

처음 듣는 이야기다.

원작에서 나오지 않은 사건.

애쉬와 내가 있어, 원작 그대로 따라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 건은 지나치게 크지 않나?

내가 되물었다.

"며느리 생일 연회에서 일을 벌인다고?"

"응. 이유는 잘 모르겠네. 귀족들 앞에서 마기로 술식을 펼치면, 빼도 박도 못하게 되는데."

그 때, 베넬로아가 입을 열었다.

"…올 귀족이 없으니까요."

애쉬와 나는 베넬로아를 바라봤다.

베넬로아는 입술을 앙 깨물며 말을 이었다.

"제 생일 연회에, 와줄 귀족이 없으니까…."

"흠, 그런 거였구나."

베넬로아는 치마자락을 꼬옥 쥐고 고백했다.

자신이 사교계에서 왕따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어 있던 퍼즐 한 조각을 받아서 끼운 듯했다.

"저번에, 교단 때문에 흑마술사 잡았지?"

"나 놔두고 갔을 때?"

"응."

애쉬는 느긋하게 설명을 이었다.

베넬로아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귀족 영애로서 쪽팔린 진실을 밝혔음에도, 누구도 위로해주지 않았다.

베넬로아의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 맺혔다.

"그 때, 단서를 잡았거든. 근데 따로 보고하지는 않았어. 일을 그대로 진행하도록 했지."

"그런데?"

"포기하지 않을까 했어. 꼬리가 잡혔는데 일을 진행할까…. 그냥 하려는 걸 보니, 교단이 내 정보를 잘 관리하고 있나봐. 아니면 쟤들 사이에도 파벌이 극명하게 갈렸다거나."

정보교류가 중요했다.

잿빛 머리에 하늘색 눈동자.

애쉬 그레이필드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았다면, 무모하게 일을 진행하진 않을 것이다.

다 뒈지고 싶지 않은 이상에야….

그러나 흑마술사들은 거사를 진행하려 했다.

애쉬를 흔한 용사1로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나야 고맙지."

애쉬가 입 꼬리를 말아올렸다.

웃는 모습이 악마처럼 살벌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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