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단련(2).
* * *
애쉬가 사라졌다.
설마 나를 버렸을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잠식해나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았다.
금방 그것이 내 망상이란 것을 깨달았다.
‘에이, 애쉬가 날 버릴 리가 있나.’
나와의 인연 때문에 회귀를 선택하고 실천까지 했다.
그만한 인연을 쌓는 동안 몸도 수백 번을 섞었을 것이다.
섹스 한 번으로 떠난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회귀했을 리가 없다.
‘그럴 거면 회귀도 안 했겠지.’
마왕 바알을 무찌르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지내는 게 몇 배는 이로울 테니까.
애초에, 섹스를 먼저 하자고 한 것은 애쉬였다.
나는 꾹 참고 내일 하려고 했는데, 애쉬가 나를 데리고 가서 범하려고 했다.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일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내 할 일이나 하면서 기다리자.’
점심을 먹고 포만감이 느껴진다.
허기 때문에 골골거리는 상황은 없을 것이다.
오전 운동을 고작 뜀걸음으로 마무리하고 끝냈다.
오후에는 보다 본격적인 단련을 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볼트가 알려줬던 곳이….’
기사들이 이용하는 수련장에 가서 단련을 한다.
오후 시간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시작은 초라해도 끝은 창대하리라.
하루하루 꾸준하게 하다보면 내 레벨이 오를 것이다.
레벨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
성장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단련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 세상으로 온 이후, 처음으로 실시하는 체력단련.
왜인지 설레는 기분이다.
별채에서 나와 기사 수련장으로 향했다.
정원을 걷는데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이런 저택을 하나 구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애쉬 혹은 다른 용사를 따라 마왕을 처치하면….
귀족 작위나 땅이 생길 수도 있다.
강아진 남작이나 백작으로 불리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현재로서는 망상에 가깝지만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수련장으로 들어갔다.
1층 건물인데, 안쪽에 넓은 터가 있었다.
대련을 위한 경기장 느낌이었다.
반은 대련, 반은 수련.
그렇게 공간이 나뉘어져 있었다.
검술이나 무기술 수련을 위해 목각 인형이 실제로 쓰이는가, 에 대한 의문은 애써 외면했다.
‘아무도 없나?’
수련장 내부는 조용했다.
점심시간이라서 다들 식사를 하러 간 듯했다.
나는 구석에 모아둔 목검을 주워들었다.
목검은 내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나름 날이 벼려져 있어, 위협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진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감정’에 성공하였습니다.]
[수련용 목검]
수련을 위한 목검이다.
랭크도 뭣도 없는 평범한 목검.
무기로 쓸 만큼 좋진 않다는 의미였다.
목검을 쥐고 목각인형을 향해 다가갔다.
가장 평범하게 생긴 목각인형이었다.
허수아비에 가까운 목각인형을 바라보고, 목검을 휘둘러봤다.
팍!
“아…!”
둔탁한 타격과 동시에, 손아귀가 찌르르 울렸다.
목각인형은 내 생각보다 단단했고 목검은 충격흡수가 잘 안 됐다.
힘을 세게 싣고 때리면, 내 손목이 먼저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하긴, 검술이란 것이 휘두르기만 해서 장땡인 기술은 아니니까.
이 세계에서 검을 놓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검을 잡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고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검술이다.
단순히 휘두르는 것조차 부족한 내게는 너무도 낯선 것이었다.
‘이제 시작이야.’
오늘 처음 검을 쥐고 휘둘렀다.
위협용이나 호신용으로 검을 쥔 것과 별개로, 진짜 익히기 위해 잡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익숙할 리가 없었다.
다시 한 번 휘둘러본다.
팍!
“잌…!”
손이 너무 아프다.
시발, 이게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목검을 내려두고 손에 바람을 후후 불었다.
아파서, 다시 휘두를 엄두가 안 났다.
방금 막 시작했는데, 의욕이 꺾이려고 한다.
‘설마.’
목각인형을 향해 ‘감정’을 사용했다.
원작에서도 루크가 수련을 하는데, 사용하는 목각인형에 따라 성장효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었다.
[수련용 목각인형(E)]
수련하는데 쓰이는 목각인형.
받은 물리량을 증폭하여 상대방에게 반사한다.
일정 물리량을 넘어설 경우, 파괴된다.
“시발.”
왜 이렇게 아픈 건지 알게 된 순간, 수련장 밖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란이 들려왔다.
대화소리 비슷한 무언가.
기사들이 들어오는 듯했다.
나름 가벼운 복장을 한 기사들이 수련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수련장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발견했다.
다들 초면인 상황에, 볼트가 이쪽을 알아봐주었다.
볼트는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 하더니…. 식사하고 왔나?”
“예. 저택 식사가 맛있더라고요.”
“아하하. 기사란 족속들이 입맛이 까다로워서 말이야. 먹고 수련하는 것이 전부인데, 뛰어난 요리사를 고용하고 있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것도 그러네요.”
“그나저나. 혹시 이 목각인형을 쓰고 있었나?”
볼트가 내 앞에 있는 목각인형을 팡팡 두드렸다.
인상을 팍 찡그렸다.
내게 보여주듯이 약하게 쳤으니까, 그 데미지가 반사되었을 것이다.
“이 목각인형은 받은 충격을 반사하는 효과를 가졌네. 아직 제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신입들에게 어울리는 도구지. 계속 두드리다보면, 수준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서 깨닫게 해주거든.”
“…예. 덕분에 손이 너무 아프네요.”
다른 목각인형들도 확인해보고, 그나마 가벼운 것을 가지고 노는 게 나을 듯했다.
아니면 기초체력을 단련하던가.
볼트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용사님은 어디에 계신가?”
“…따로 할 일이 있어서요.”
애쉬의 행적에 대해서,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다.
“자네는? 용사님의 동료가 아닌가?”
“동료 맞긴 한데, 설명하기가 조금 애매하네요.”
볼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내 목에는 여전히 애쉬의 개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세상에는 여러 취향이 존재하니. 용사님이 그런 취향이라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네.”
“어차피 개의치 않을 걸요.”
“하하. 용사님 정도 되는 여자라면, 무슨 취향을 가지고 있든 존중 받아 마땅하지. 어느 누가 용사님을 손가락질 하겠는가?”
볼트가 유쾌하게 웃었다.
오히려 내 처지가 부러운 듯 오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혼자서 나름 수련을 할 생각이었나?”
“예. 멍하니 보내기가 조금 그래서요.”
“뭐, 자네가 멍하니 보낸다고 나무라는 사람은 없을 텐데?”
볼트의 뒤로, 기사들이 오후 단련을 준비하고 있다.
웃옷을 벗고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근육들을 보니,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왜인지 모르게 몸이 움츠려들었다.
“그래도, 강해지면 좋잖아요.”
“…그 말도 맞긴 하지.”
볼트는 다른 말들을 아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았다.
귀족의 기사단에 속할 실력이라면,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재능을 가늠해볼 수 있을 테니까.
‘내 클래스가 기사나 검사…. 하물며 전사도 안 된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챘겠지.’
시스템에 등록된 클래스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검이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볼트가 말했다.
“그러면, 오늘 함께 해보겠나?”
“…저기에요?”
“검술에 대해서는…. 용사님이 더 잘 알려줄 것 같아, 괜히 오지랖 부리지는 않겠네. 하지만 체력을 가꾸는 것은…. 누구라도 알려줄 수 있으니 말이야. 기사들과 함께 하면, 오늘 하루는 빡세게 하고 갈 수 있을 걸세. 어떤가?”
“…….”
우락부락 근육게이 기사들 사이에서 단련…?
여기사들 사이라면 모를까, 살짝 꺼려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저택에서 얼마나 머물 생각인가?”
“…길게 잡으면 닷새 정도 있겠죠? 유테론 아가씨 생일파티에 참석해야 하니까요.”
“그럼 그 5일 동안이라도 자네를 단련시켜주지. 아마 확실하게 변화가 있을 거야.”
“…아직 한다고 안 했는데요?”
볼트는 이미 나를 단련시키기로 다짐한 듯했다.
“이곳까지 올 정도면, 마음속에 각오를 끝마친 것 아닌가? 용사의 곁을, 사내로서 지키고 싶다는…. 그런 각오 말이야.”
“…….”
볼트의 말이 내 심금을 울렸다.
남자답게 여자를 지킬 수 있어야지.
개 취급 받으면서 끌려 다니지 말고.
속뜻은 그러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좋은 결정, 축하하네.”
볼트가 웃옷을 벗어던졌다.
이 기사단은 상의 탈의가 기본인 모양이다.
“어서 벗어라! 우리와 함께 땀을 흘리는 거다!”
“예!”
기사들이 나를 재촉했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자, 가볍게 뛰는 것부터 시작한다. 최대한 끝까지 따라와라!”
볼트가 기사단 무리를 이끌고 뛰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숨은 금방 거칠어졌다.
혼자 뛸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달려서 그렇다.
하지만, 뒤처지지는 않았다.
“제법 잘 따라오는군!”
단체로 뛰면, 내 능력보다 조금 더 잘 뛰게 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볼트는 뒤를 흘겨, 내 상태를 확인했다.
나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 속도를 점차 높여갔다.
“후욱, 후욱, 후욱!”
숨을 고르게 내뿜으며 기사들의 뒤를 쫓아갔다.
점점 거리가 벌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수련장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힘내!”
“할 수 있다. 포기하지 마!”
“맞서 싸워!”
기사들은 나를 지나치면서 한 마디씩 던졌다.
다들 호흡에 여유가 있어 보였다.
저 속도가 익숙한 듯했다.
“헤엑, 헤엑!”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멈출 수가 없었다.
죽을 것 같이 힘들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기사들을 따라잡는 것은 포기.
불가능한 미션은 놓아줘야 한다.
목표를 다시 수정.
적어도 저들이 그만 달릴 때까지는 뛰어보자.
느리게라도 계속, 멈추지 않고.
“씨, 이, 발. 씨, 이, 발.”
호흡 대신 욕을 내뱉으며 다리를 움직인다.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
2레벨로 오른 덕분에, 겨우 버티고 있다는 것을.
‘클래스가 도둑이어도, 체력은 중요하지.’
근력에 비해 체력이 많이 올랐다.
모든 능력치의 뿌리가 되는 부분이니까.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클래스는 전투 때문에 중요하고 도둑은 도주할 때를 대비해서 중요하는 것 정도.
30분을 달렸다.
기사들이 멈춰 섰다.
정말 몸 풀기였다는 듯 각자 목검을 들었다.
나는 그들을 따라서 다리를 멈추었다.
더 이상은 움직일 수가 없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볼트가 내게 다가왔다.
“오늘 아침보다 훨씬 잘 뛰더군. 역시 단련은 함께 해야 효과가 좋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예에, 헤엑, 맞습니다.”
“자네는 나와 간단하게 체력 단련을 하지. 아니면 목검을 쥐어볼 텐가? 아주 가벼운 대련 정도는 해줄 수 있네.”
“대련이요?”
본능적인 거부감이 훅 올라왔다.
치고 박고 싸우는 대련에 겁을 먹은 것이다.
볼트가 피식 웃었다.
“자네를 상대로 내가 목검을 휘두를 것 같나? 말만 대련이지, 실제론 자네가 휘두르는 검을 받아줄 뿐이야. 목각인형을 상대로 휘두르는 것, 사람을 향해 휘두르는 것, 검과 검이 부딪치며 흐르는 힘의 감각, 경험해서 나쁠 건 없지.”
“…제가 사람한테 휘두르는 건 처음이라….”
“뭐야. 내가 다치기라도 할까봐 걱정인가? 하하하하.”
볼트는 껄껄껄 웃으며 목검 하나를 내게 건넸다.
“내 걱정은 말고 마음껏 휘둘러보게.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한 번 겪어보면 도움이 될 테니까.”
볼트가 나를 일으켜주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내였다.
목검을 손에 쥐었다.
볼트는 여유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언제든 덤비라고, 목검을 까딱거리며 도발까지 했다.
나는 나름 진지하게 볼트를 노려보았다.
‘한 번 해보자.’
이 경험도, 내 레벨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굳이 안 하고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그 때, 애쉬가 수련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강아지, 뭐해?”
나와 볼트를 번갈아 흘기며,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왜 내 몸은 애쉬의 반응에 기뻐하는 걸까.
나는 애쉬에게 다가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