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처음(2).
* * *
“마왕! 마왕이다! 마왕이 다시 강림했다!”
“병사들을 소집해! 기사가 아닌 병사들은 불부터 꺼라!”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용병! 모험가! 모두 모여!”
왕성을 관통하는 대로에서 기사들이 뛰어다녔다.
지옥이라도 재현된 것 같은 황성을 수호하기 위해 병력을 모으고, 피해구제 작전을 펼쳤다.
무너지는 건물을 향해 수 속성 마법을 뿜어 불을 끈다.
잔재에 깔린 민간인을 구하고 탈출시킨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다고 끝을 막을 수 있는 건가….”
황궁 직속 기사단에 입단 했을 때,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했다.
자신의 노력으로 황제를 모시고 제국에 봉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도 잔혹했다.
“도대체 왜 갑자기 마왕이….”
용사들은 힘을 모아 마왕 바알을 무찔렀다.
어릴 적에 읽었던 동화책의 엔딩처럼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
그것이 1년 전의 이야기다.
기사는 그 뒤로도 꾸준히 실력을 갈고 닦았다.
노력 끝에 원하는 자리를 쟁취해냈다.
부질없는 시간이었다.
벽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우물 안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를 마왕이라 자칭한 존재 앞에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힘의 격차 앞에서, 다가올 운명에 순응하는 것 말고는….
“꺄아아아아아악!”
“살려, 살려주세요!”
“다리가 깔렸어요. 크흑…! 안 움직여…!”
제국이 무너진다.
마왕의 강림에도, 그 세를 굳건하게 다지고 있던 제국이 화마에 휩싸여 무너지고 있다.
죽음의 파도가 밀려와 생명의 꽃을 무수하게 꺾어나갔다.
황혼의 나이가 된 노인 부부도, 갓 태어난 갓난아이도, 장래에 미래를 약속한 소꿉친구도, 무자비한 검기를 피할 순 없었다.
콰과과과광!
마왕은 새까만 하늘, 붉은 불꽃으로 점철된 황도 위를 부유하듯 날았다.
성검을 휘두를 때마다 수백의 목숨이 끊어졌다.
“…….”
오페리아 제국 황성.
황제를 비롯한 황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용케도 남아있네.”
마왕 애쉬는 도망치지 않은 황족들을 보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분명히 경고를 하고도 침공을 시작한 것인데, 끝까지 대피하지 않은 것은 황제와 그의 친족들이 죽음을 각오했다는 의미이리라.
“용사, 애쉬 그레이필드.”
“용사라고 부르지 마. 그만뒀으니까.”
애쉬가 키득키득 웃었다.
스스로 웃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감정을 죽이고 살아서, 지금 느껴지는 감각이 낯설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황성 바깥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광기를 감추지 않았다.
황제가 앞으로 나섰다.
“마왕 바알을 소멸시킨 최강의 용사….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오?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다고 했소. 재력을 원하면 그에 맞는 금을, 명예를 원하면 그에 맞은 자리를, 자유를 원하면 붙잡지 않고 놓아줄 거라고…. 그런데 왜,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이오? 죄 없는 양민들을 학살하는 것이오?”
“…왜 이러는 거냐고, 물어보는 거야?”
황제는 애쉬를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로 당차게 물었다.
애쉬는 어색하게 들썩이는 입술을 손으로 집어 내렸다.
“그렇소. 마왕 바알이 소멸하고 평화를 되찾았는데 왜….”
“원래라면 마왕 바알에게 죽었을 놈들이잖아.”
애쉬가 황제의 말을 끊었다.
더 듣기 싫은 듯 인상을 구기고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이오? 바알은 그대가 무찔렀잖소. 그런데 제국이 바알에게 당했을 운명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이오.”
“…….”
애쉬는 황제를 노려봤다.
황후가 젖먹이를 안고 있었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것 같은 아기였다.
겨우 1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악마들이 할퀴고 간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자, 자신은 아직도 1년 전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황제란 놈은 아래로 새끼를 까고 있었다.
애쉬가 중얼거렸다.
“…마왕으로부터, 누가 세상을 구했지?”
“그대요. 그대가 이 세상을 구했소.”
“……누가 마왕을 죽이고, 대륙에 평화를 가져왔지?”
“…그대잖소. 애쉬 그레이필드…. 역대 최강의 용사…. 그러니, 이제라도 그만두시오. 지금 멈추면, 그래도 태양신께서 그대의 위업을 생각해 죄를 덜 물을 것이오.”
애쉬는 황제의 좌를 빤히 바라보며 성검을 휘둘렀다.
황제의 목이 떨어졌다.
“태양신, 흠….”
“으아아아앙! 으아아아앙!”
“…어떤 신이라도 좋으니까, 천벌 좀 내려주러 왔으면 좋겠네.”
황족들은 황제의 목을 앞에 두고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신음과 비명을 꾹 억누르고, 마왕 애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젖먹이의 울음소리만 울려 퍼졌다.
“마왕 바알의 마수로부터 세상을 구한 것은 누구지?”
“…….”
하나둘, 목이 떨어져나갔다.
애쉬는 망설이지 않고 황족들을 베어나갔다.
황후, 황자, 황녀….
나이가 점차 어려지고, 결국 황태손들이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애쉬는 애써 울음을 참고 있는 남아를 향해 물었다.
“마왕 바알을 무찌른 건, 누구일까?”
“…….”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히끅, 히끅, 울음 삼키는 소리만 들려왔다.
애쉬가 성검을 들어올렸다.
그 때였다.
“…요, 용사님과 강아진님이요!”
“…….”
“동화책에서 봤어요! 용사님께는 동료들이 있다고! 애쉬 그레이필드는 특이하게 동료가 한 사람 밖에 없는데, 강아진이라는 남자라고…. 책을 찾아 봤어요!”
한 여아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남아를 대신해서 먼저 대답을 내놓은 것이다.
애쉬는 잠깐 성검을 거두었다.
“…책? 무슨 책이야.”
“그, 그게…!”
“가져와.”
황태손녀는 애쉬의 명령에 움찔거리며 제 방으로 뛰어갔다.
보통 거리가 아닌지라 꽤 오래 걸렸다.
황태손녀가 돌아오기 전까지, 애쉬의 앞에 선 황태손자와 젖먹이는 숨 막히는 살기를 몸으로 직접 견뎠다.
“이런 책인데…. 보여드리기가….”
애쉬는 황태손녀가 들고 온 책을 빼앗았다.
그리고 황태손녀를 슬쩍 흘겼다.
해지고 닳은 책에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은 흔적이 보였다.
“제목이, ‘잿빛용사가 키우는 강아지’…?”
애쉬가 천천히 책 내용을 읽어나갔다.
꼬질꼬질한 책을 한 장씩 넘겨가며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전부 과장된 이야기다.
용사 애쉬를 모함하기 위해 써낸 야설이라 봐도 될 정도로, 문란하고 음탕한 내용이었다.
애쉬는 강아진과 그렇고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연인 관계라면 다들 하는 성관계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애쉬와 강아진이 노골적으로 뒹굴고 있었다.
책에서는 연인이라도 된 듯 살을 섞고 정을 나누었다.
황제의 좌에 앉았다.
황족을 정리하는 것도 잠시 미루었다.
“으으….”
황태손녀는 몸을 움츠리며 애쉬의 눈치를 살폈다.
“…저….”
그리고 보았다.
자신의 가족들을 눈앞에서 참살한 사람인데, 순간이나마 위로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어떻게 끝나.”
애쉬가 물었다.
황태손녀가 답했다.
“용사 애쉬와 그녀의 동료이자 연인인 강아진은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라고 끝나요….”
“그래?”
애쉬는 계속해서 책을 읽어나갔다.
이미 결말을 알게 되었지만.
지금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해피엔딩이라서 마음에 들었다.
“…살려줄게.”
“네…?”
애쉬가 책을 덮었다.
세 시간 동안 책을 읽고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나중에 복수를 하러 오든, 숨어서 죽을 때까지 살든, 알아서 해. 대신 이 책은 내가 가져간다.”
애쉬는 책 한 권을 챙겨서 황성 밖으로 나갔다.
신이란 작자가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학살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 * *
소도시 볼텐 중심에는 자작 작위를 받은 기사의 저택이 지어져 있다.
백작가의 기사들 중 몇몇을 소도시에 파견해 지배 관리하는 구조다.
용사 애쉬는 기사들의 저택을 향해 나아갔다.
신세지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주인공 용사 루크는 여관방을 빌려 생활하는데,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여긴 조용하네.”
기사들의 저택이라서 그런가, 경비도 따로 세워 두질 않았다.
침입자에 대해서 개의치 않은 모양이다.
자작이라고 해봐야 개인 영지도 없는 명패뿐인 작위니까.
남작이나 백작에 비해 저택 분위기가 시큰둥한 것도 이해가 됐다.
애쉬는 볼텐 기사의 저택으로 들어가려 했다.
정문에 아무도 없다고는 해도, 무단으로 침입하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인데.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그래?”
애쉬가 나를 흘기며 당당하게 말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뻔뻔해질 수도 있구나.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맑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애쉬와 다르다.
이런저런 주변 시선들을 신경 쓰고 있었다.
용사에게 중요한 것은 평판이니까.
때문에 아직 얼굴에 철판을 깔지 못했다.
애쉬처럼 합금강판을 몇 겹으로 덧대야 할 텐데, 많이 부족하다.
애쉬는 5m 정도 되어 보이는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저택 안에서 성검을 꺼냈다.
“한 번 움직여봐. 가볍지 않아?”
연둣빛 바람이 나를 포근하게 감싸고 안았다.
땅을 사뿐하게 박차고 뛰어 본다.
내 몸이 붕붕 공중으로 떠올랐다.
몸이 한참 가볍게 느껴졌다.
“이야, 이거 지리네.”
저택 담벼락을 넘을 수 있을까.
5m에 가까운 높이를 뛰어야 하는데, 살짝 겁이 난다.
‘…애쉬가 알아서 해주겠지.’
최강의 용사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다.
이런 관심 속에선 다치는 것도 힘들다.
나는 살짝 도움닫기를 하고, 담벼락 위로 뛰어올랐다.
내 점프력이 상상이상이었다.
5m의 벽을 가뿐하게 넘어섰다.
“오옵…!”
“괜찮아.”
애쉬가 바람을 지휘했다.
공기의 흐름이 내 피부 위로 선명하게 스쳤다.
부드럽게 착지했다.
‘단련을 해야겠어.’
레벨이 높아져야 한다.
도둑이라고 해서, 신체 능력치가 아예 안 오르는 것은 아니다.
1레벨 도둑보다 2레벨 도둑이, 2레벨 도둑보다 10레벨 도둑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근력, 민첩성, 손재주, 관찰력 등등….
내 육체를 단련해서 레벨을 높이면, 모든 행동에서 어드밴티지가 생길 것이다.
이런 담벼락도 애쉬의 도움 없이 가뿐하게 넘나들 수 있게 되고.
‘운동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단련해서 손해 볼 게 없다.
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볼텐 기사들의 저택은 의외로 운치가 있었다.
리오스 남작가나 유테론 남작가의 정원과 약간 수준 차이가 느껴졌지만, 아예 못 봐줄 만큼 엉망은 아니었다.
남작가 정원은 전문가의 손길을 타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면, 기사 자작 저택의 정원은 개인 취향이 가득 담겨 푸짐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나쁘지 않았다.
정원을 가로질러 포장된 앞마당을 걸어간다.
기사 자작의 저택에는 본채와 별채 여럿이 있는데, 건물 간의 차이가 별채가 하나도 없었다.
“용사님! 용사님 아니십니까!”
한 건물에서 사람이 달려왔다.
절그럭거리는 갑옷을 거추장스럽게 걸친 상태로, 기사가 우리를 맞이했다.
“볼트입니다.”
“애쉬.”
애쉬는 시큰둥하게 기사의 인사를 받았다.
“교단한테서 얘기 들었나?”
“아직 못 들었습니다만. 혹시 볼텐 근방에서 터진 소란이 애쉬님 때문에…?”
“맞아. 그래서 그런데, 좀 씻고 쉬고 싶어서 말이야.”
“아하하하, 괜히 갑옷을 입었군요! 이쪽으로 오시죠.”
볼트의 안내를 받아 건물로 향했다.
볼트가 나온 건물과 다른 건물, 아마도 별채인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