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태양뱀 사냥꾼(4).
* * *
마법진이 요동쳤다.
불길한 기운이 보랏빛으로 넘실거리며 뿜어졌다.
“애쉬!”
상황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았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애쉬를 불렀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쉬는 허겁지겁 태양뱀 독 원액을 챙길 뿐이었다.
“…….”
파밍에 여념이 없는 애쉬를 창고에 내버려두고 밖으로 나왔다.
애쉬와 함께한 시간이 매우 길지는 않지만, 나는 애쉬를 믿는다.
바리아 마을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달리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장 별 일 없으니까 저런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리라.
내 괜한 걱정이다.
‘진짜 임신하고 싶어서 저러는 거니까.’
반쪽짜리 천사인 애쉬의 자궁은 천계의 힘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고 있다.
평범한 정자는 애쉬의 난자에 닿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진한 양기와 압도적인 정력을 지닌 사내가 정액을 주입해야 그나마 비벼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좆으로 여자를 자지러지게 만드는 섹스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나?’
마스터고 나발이고, 섹스를 한 번도 못해봤다.
여자 젖가슴, 보지, 똥구멍, 전부 애쉬의 것이 처음이다.
내 정력은 왼손 딸딸이 육연(??).
제자리에서 세운 개인 최대신기록.
이런 보잘 것 없는 전적으로 과연 정력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섹스마스터라는 경지가 되도 않은 꿈이란 걸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애쉬도 회귀 때문에 자신의 몸 상태를 알아.’
내 자지와 정액으론 임신이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찐한 사이였다고 가정하면, 성관계도 무수히 많이 했을 테니까.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저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정력에 좋은 것들을 찾아다니고 애쓰는 듯했다.
회귀 전에 맺었던 인연의 끝을 보고 싶어서, 애쉬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이었다.
‘내가 뭐라고….’
부정적인 생각을 지웠다.
애쉬가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평범한 내가 회귀한 애쉬의 미련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장 창고 밖을 둘러봤다.
작은 마을을 두르고 있는 마법진이 밝게 빛나고 있다.
마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각자 집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이런 술식을 눈치 채지 못한다고? 그럴 리가.’
소르톤 마을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이상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반응이 없다.
현상을 발견하고도 외면했다.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용사에게 떠맡기고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 한둘이 아니다.
그 선한 루크가 닳고 닳아 흑화할 정도니,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히이이이이잉!
이 상황을 불안하게 느낀 말이 지랄염병을 떨었다.
그럼에도 우리 곁에서 도망치지 않고 머무는 게 용했다.
“시바, 뭔가 몸이 무거워지는데.”
제물소환 술식은 아니다.
생명력을 뿌리까지 뽑아내는 제물소환 술식이었다면, 애쉬 쪽에서 먼저 눈치 채고 즉각적으로 반응했을 것이다.
급하게 움직여도 모자랄 애쉬가 느긋한 것으로 보아, 내 걱정만큼 위험한 종류의 술식은 아닌 듯했다.
제물소환 술식보다 덜 하면서 피시전자의 체력을 떨어뜨리는 술식.
원작을 열심히 더듬어갔다.
‘아주 조금 피곤해졌어.’
자위하고 난 다음, 딱 그 정도 피로감이 느껴졌다.
‘마기를 뽑아내는 건가?’
마기를 추출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원작이 진행되면서 더 효율적인 방향으로 발전해나간다.
용사들이 스스로를 단련하며 강해지듯 흑마술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 가장 허접한 것이 마법진을 이용해 직접적으로 뽑아내는 방식이다.
지금 같은.
‘…이 이상 힘들거나 하진 않네.’
그 말은 즉, 어느 정도 뽑아내고 조절한다는 의미다.
이유는 간단.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않는 것과 같다.
계속해서 알을 얻기 위해.
흑마술사는 소도시 볼텐과 가까운 소르톤 마을에서 이들의 생명력을 착취하고 있다.
아무리 봐도 겁 대가리를 상실한 행동이었다.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건가 싶었다.
‘마법진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흑마술사보다 뛰어난 기교로 마법진을 해석하고 파훼하거나 압도적인 힘으로 마법진 작동 술식 자체를 박살내면 된다.
둘 다 내 수준으론 불가능한 상황.
골골거리면서 애쉬에게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잠깐의 상황분석을 마치고 다시 창고로 들어갔다.
애쉬의 배낭이 두둑해져 있었다.
“애쉬. 바깥에 마기추출 술식이 발동되고 있어.”
“알아.”
창고에 있던 태양뱀 독 원액을 죄다 털어먹고도 모자란 듯했다.
애쉬가 창고 구석구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흑마술사의 꿍꿍이에는 관심 없는 모습이다.
나는 애쉬에게 투덜거렸다.
괜히 피곤하고 몸이 무거워져, 힘들었다.
“…나 힘들어.”
“…….”
부산하던 애쉬의 움직임이 움찔거리며 멈추었다.
커다란 배낭을 등에 멘 채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애쉬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별 거 아닌 것 같아서 나중에 부숴도 된다고 생각했어, 미안해. 표정 보니까 내 생각이 틀린 것 같네. 이건 나중에 챙겨도 되는 건데….”
애쉬가 손에 쥐고 있던 태양뱀 독 원액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마력을 폭발시켰다.
애쉬의 몸에서부터 분출된 은빛 마나가 바닥으로 타고 흘렀다.
츠즈즈즈즛.
마법진의 획을 따라 술식 전체를 태워버렸다.
흑마술사의 마기가 관여한 것들이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힘들어?”
“…조금 피곤한 정도?”
애쉬가 내 뺨을 어루만졌다.
다친 곳은 없나, 확인하는 손길과 시선이 내 몸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우리 엄마도 이렇게 꼼꼼히 봐주지는 않았다.
애쉬는 미안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과거로 돌아와서 그런가. 방심을 많이 하게 되네.”
“그럴 수도 있지.”
“이러다가 널 잃었던 건데….”
드레이크의 목을 썰고 최강의 용사가 되었다.
공식 랭킹은 아니지만, 언젠가 애쉬의 이름이 최강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그런 용사가 악마도 아닌 고작 흑마술사를 상대로 전력을 다하는 것도 우습다.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꼴이었다.
‘물론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지만….’
잘 모르겠다.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뭐, 그래주면 고맙고.”
“각인이 알아서 보호해줄 거라 생각해서, 너무 안일했어.”
“죽지만 않았으면 됐지.”
질질 시간 끌고 싶지 않아서 혹시 통할까 싶은 반신반의한 마음을 가지고 불쌍한 척 한 마디 던져봤을 뿐이다.
손목 날아갈 뻔 했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양반이었다.
애쉬는 아닌 것 같았지만.
“…아니야. 그렇게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야.”
“어…?”
“이러다가 일이 터져. 설마 하는 순간에 소중한 사람을 잃어. 다른 용사라면 몰라도, 나는 그래선 안 돼. 잃고 난 후에 후회하는 건 이제 질렸단 말이야.”
“애쉬?”
애쉬가 배낭을 내려두었다.
성검을 소환해서 창고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마법진이 파훼된 후, 마을 사람들이 각자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끝나기라도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다들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았다.
나처럼 피곤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왜 안 오시는 건가?”
“곧 오실 겁니다. 술식도 해제되었으니까요….”
“오늘은 좀 짧은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게 아닐까?”
마을 사람들은 누군가를 찾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애쉬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랐다.
“요, 용사…! 어째서 용사가 우리 마을에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저희는….”
“쉿, 조용히 해. 입 다물어.”
마을 사람들이 소곤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눈살이 절로 찡그려졌다.
한 남자가 애쉬에게로 다가왔다.
우람한 근육질을 가진 건장한 사내였다.
“용사님이 어쩐 일로 저희 마을에 오셨습니까?”
애쉬는 사내를 혐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멸시에 가까운 시선에, 사내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용사님?”
“…내가 용사로 지내면서 생각보다 많은 일들을 겪었는데. 그, 느낌이라는 게 있어.”
“느낌…. 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감이고 뭐고, 냄새가 맡아진단 말이야. 역겨운 냄새.”
애쉬가 사내의 목에 성검을 겨누었다.
“너, 태양뱀 독 때문에 한 번 살았어. 흑마술사에 붙은 이유를 말해.”
“…흑마술사라니, 무슨 말씀을….”
“혀 놀리다가 걸리면, 곱게 안 끝낸다.”
애쉬의 성검이 서서히 사내의 목을 파고 들어갔다.
살갗이 베이고, 핏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사내는 놀란 눈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말해.”
“말할 수 없습니다.”
흑마술사에게 협조하는 경우, 기본적인 형벌이 참수부터 시작된다.
애쉬는 사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그 뒤에 서있는 마을사람들을 흘겨봤다.
애쉬의 시선에 닿은 이들은 몸을 격하게 떨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눈을 피했다.
“여기, 태양뱀 독을 원액으로 추출할 수 있는 기술자. 앞으로 나와.”
“…….”
애쉬의 말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힐끔힐끔 돌아가는 시선들이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갈등의 농도를 대변했다.
애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빨리! 다 묻어줄 테니까, 당장 나오라고. 시발개새끼들아!”
콰과과과광!
협박성 짙은 검격이 이어졌다.
오러를 성검에 두르고 사람들과 먼 방향을 향해 휘둘렀다.
땅이 갈라지고 숲이 무너졌다.
“…….”
애쉬의 무력을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다.
감탄을 감출 수 없었다.
드레이크를 죽인 것이 요행이 아니었다.
애쉬는 진심으로 드레이크를 죽일 계획을 세웠고, 실행에 옮겨 직접 죽여 버렸다.
그 과정이 느껴졌다.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애쉬가 폭력을 휘두르니, 마을 사람들은 더욱 움츠렸다.
기술자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때,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검은색 로브를 대충 뒤집어 쓴 누군가.
딱 봐도 흑마술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내 마기추출을 방해한 거지?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용사나 교단에 신고하지 않으면, 태양뱀을 양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
“뭐야, 용사잖아?”
마을 한복판까지 걸어오고 나서야 흑마술사가 용사 애쉬의 존재를 눈치 챘다.
용사와 싸울 준비를 했다.
마기를 모으고 술식을 전개.
애쉬는 그런 흑마술사를 벌레 보듯 쳐다봤다.
“방금 뭐라고 했지?”
“…용사! 네 년이 가진 성검 수준으론 나를 이기지 못할걸? 크흐흐, 2레벨 용사라니…. 횡재했구나! 나도 드디어, ‘헬 체인’ 등급을 올릴 수 있겠어!”
“아, 시발.”
애쉬가 짜증을 내며 성검을 휘둘렀다.
촤악!
실버 오러가 뿜어지고, 흑마술사의 왼팔이 잘려나갔다.
“아─?”
흑마술사는 멍청한 소릴 뱉었다.
뒤늦게 잘려나간 팔을 확인했다.
어리둥절한 얼굴은 얼마 안가 고통으로 뒤덮였다.
“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시끄러워. 그나저나, 방금 뭐라고 말했냐고.”
“이, 이 미친년! 죽여 버린다! 죽여 버릴 거라고!”
퍼억!
“아악!”
애쉬가 흑마술사를 걷어찼다.
데굴데굴, 데구르르.
흑마술사는 계속해서 애쉬에게 얻어 맞았다.
마을 사람들 앞에서 흙바닥을 몇 차례 굴러다녔다.
그리고 항복했다.
흙먼지가 가득 묻은 몸뚱어리로 무릎 꿇고 빌었다.
“자, 잘못 했습니다…. 말, 말 할게요…!”
“그래. 방금 말한 거, 자세히 말해봐. 태양뱀을 양식하게 도와준다고?”
애쉬의 눈이 탐욕으로 일렁거렸다.
용사와는 거리가 먼 눈빛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