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최강의 용사(8).
* * *
“저희 마을에는 수호목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마을을 지켜주던 나무였죠.”
촌장이 입을 여는 동안, 촌장 아내가 차를 내왔다.
고급스러운 찻잎은 아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천둥이 내려쳐도 멀쩡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드래곤의 피를 먹고 자란 나무라서 그렇다고 하셨지만, 솔직히 믿지는 않았습니다. 드래곤이라니, 말이 안 되잖습니까.”
“그렇죠.”
이 세계에서 드래곤은 가상의 동물이 아니다.
실제로 한 마리가 존재한다.
마왕과의 결전에 나타나 죽고 말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드래곤을 볼 수조차 없다.
구전되는 옛날이야기로만 그 존재를 접할 뿐이었다.
“그 수호목이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말라가고 있죠. 처음에는 원인을 몰랐습니다.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중 교단 성직자 한 분이 방문하셨습니다. 덕분에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마기.”
애쉬가 중얼거렸다.
나를 뚱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괜히 일을 하나 떠안았다는 사실이 못내 불편한 듯했다.
다 자기 위해서 하는 일인데.
회귀까지 해놓고 몰라주는 걸까.
촌장은 애쉬의 대답을 받아서 이었다.
“예, 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호목이 마기에 물들어 가던 거였습니다.”
“용사에게 부탁할 일이라면, 대부분 마기랑 관련된 것 밖에 없지.”
“유테론 남작님께 용사님을 보내달라고, 청원서를 보냈습니다. 한 달 전이었죠. 한 달 만에 드디어….”
촌장이 감동한 눈빛으로 애쉬를 바라봤다.
애쉬는 촌장의 표정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 시발, 진짜.”
“…….”
촌장은 지랄 맞은 애쉬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대신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감사합니다. 이 일을 해결해주시면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용사님.”
“저는 용사가 아니고요. 얘가 용사에요.”
“감사합니다.”
애쉬 말고 내게 감사를 표했다.
수정해줘도 애쉬에겐 말을 걸지 않았다.
욕을 찍찍 갈겨대는 애쉬가 껄끄러운 것 같았다.
“애쉬.”
“…왜.”
“얼른 해결하고 와서 쉬자.”
애쉬가 표정을 구겼다.
싫은 티를 팍팍 풍기며 투덜거렸다.
“내가 왜. 귀찮다고.”
“어차피 오늘은 이 마을에 머물러야 하잖아. 있는 동안 끝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도와드리자. 응? 힘든 일도 아닌데 그냥 갈 거야?”
“…….”
오늘 촌장 집에서 신세지기로 했다.
완전히 풀어지기 전에 끝내고 오면 된다.
수호목이라고 했으니 마을 근처에 있을 것이다.
많이 잡아봐야 한 시간짜리 부탁.
나는 애쉬의 손을 마주잡았다.
내친김에 손깍지도 꼈다.
이건 거부 안 하는구나.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시키는 건 용사에게 너무 가혹한 짓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해줘야지. 귀찮고 싫더라도, 용사잖아.”
“…….”
애쉬가 눈살을 찡그린다.
짜증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살짝 느껴지는 분위기가 달랐다.
“나를 네 마음대로 조종하려 하지 마라니까?”
애쉬가 나를 향해 으르렁거린다.
하지만 꽉 잡고 있는 손은 안 떨어졌다.
잠깐 정적이 찾아왔다.
그 후에, 애쉬가 나를 불렀다.
“…강아지.”
“어, 왜.”
“갔다 와서 각오해.”
애쉬는 내 손을 놓았다.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촌장의 부탁을 들어줄 마음이 생겼나보다.
애쉬가 촌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수호목이 어디에 있는 건데. 안내해.”
“예, 옙! 알겠습니다, 용사님.”
촌장은 드디어 애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촌장 집에서 나와 수호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촌장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보였다.
“촌장님. 드레이크의 동료들은 어디로 갔어요?”
“사라진 용사님을 찾으러 갔습니다. 저희는 그 용사님께서 혼자 수호목을 정화하러 가신 줄 알았는데, 수호목은 그대로더라고요.”
드레이크가 뒈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촌장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말이었다.
촌장은 한 나무 앞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이 나무입니다. 크고 우람하지 않습니까?”
보통 나무와는 전혀 다른 크기.
과연 수호목이라 칭하는 이유가 있었다.
수호목 앞에는 제단이 하나 마련되어 있다.
무슨 의식을 치룬 듯한 흔적들도 남아 있었다.
애쉬는 수호목에 손을 얹고 덤덤하게 훑어봤다.
“마기가 묻어 있네. 그것도 잔뜩.”
수호목을 슥 흘기면서 견적을 냈다.
애쉬가 촌장을 향해 말했다.
“촌장. 꽤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집으로 돌아가 있는 게 어때?”
“아닙니다. 수호목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제 눈으로 지켜보고 싶습니다.”
“…아니.”
굳건한 의지로 대답하는 촌장.
한 달 동안 골머리 앓은 것이 해결되는 순간을 직접 보고 싶은 듯했다.
애쉬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욕하려다 참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야?”
“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꺼지라고. 내 집중 방해하지 말고.”
촌장이 몸을 움찔거렸다.
애쉬의 살벌한 말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바짝 굳었다.
애쉬는 살기를 찐득하게 뿜고 있었다.
여기까지 끌려왔다는 게 짜증나는 듯했다.
꿀꺽.
마른침만 삼켰다.
스스로 악마를 잡으러 가기에 당연히 착해졌다고 생각했다.
내 착각이었다.
이 정도 간단한 의뢰 정도는 들어주리라 생각했건만.
여전히 좆같은 년이네.
촌장은 먼저 제 의지를 꺾었다.
용사가 방해된다는데 끝까지 고집 부릴 순 없었다.
“알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촌장이 등을 돌려 마을로 돌아갔다.
계속 미련이 남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애쉬는 더 이상 촌장에게 관심도 없었다.
수호목 정화를 시작했다.
“에르윈.”
“네, 용사님.”
“주변에 사람 오는지 망 봐.”
“예, 알았어요.”
에르윈은 애쉬의 명령을 듣고 망을 보기 시작했다.
나도 에르윈을 따라 사주경계를 실시….
“강아지.”
“…어?”
애쉬가 나를 따로 불렀다.
“이리 와.”
“……?”
애쉬가 부르니까 곁으로 다가가 섰다.
애쉬는 무표정을 하고서 수호목만 바라봤다.
나를 불러놓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강아지,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하는지 알아. 내 명성 때문이지?”
회귀를 했으니까 명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이전에 직접 겪어봤을 텐데 그 당사자인 애쉬가 모르는 게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나도 딱히 누군가를 돕거나 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성향은 아니다.
대가 없는 일을 즐기진 않는다.
나름대로 리턴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나선 것뿐이다.
애쉬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봐주었다.
“결국 절대적인 힘이 중요해. 내가 가장 강한 용사가 되면, 그렇게 인정받게 되면…. 명성 같은 건 의미가 없어. 어정쩡한 애들에게나 명성이 중요하지.”
“…굳이 망치려고 할 필요는….”
“이런 자잘한 일은 다른 용사들도 충분히 할 수 있어.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단 말이야. 귀찮고 의미도 없는…. 이럴 시간에 방 안에서 너랑 노는 게 더 좋아.”
나를 가지고 놀고 싶다는 의미의 말을 대놓고 했다.
내 자지를 괴롭게 만들고 불알을 주물럭거리는 짓을….
“강아지 넌, 나랑 노는 게 싫어?”
“…아니, 나도 좋지. 남자잖아.”
“그런데 왜 되도 않은 오지랖을 부려.”
“그건 다 너 때문에….”
“알아, 고마워.”
수호목 정화가 끝나간다.
일렁거리던 마기가 새하얗게 타오르며 사라졌다.
애쉬는 정화를 멈추지 않았다.
“넌 그냥 나랑 있으면 돼. 아기 만들고…. 아이 낳으면 집에서 육아만 해도 돼.”
“최고네. 나 주부 하면 되는 거야?”
“응.”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애쉬는 나를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지만 나는 애쉬를 만난 지 한 달도 안 됐다.
결혼을 논하기엔 많이 일렀다.
‘애쉬보다 나은 짝이 있기는 한가 싶지만….’
전직 용사가 아내라니.
이 세계에서 용사 남편보다 장가를 잘 간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아무튼 말이야. 네가 한 말 중에…. 할 수 있으니까 한다는 말, 그거 진짜 최악이야. 다음부터 하지 마.”
“…….”
애쉬가 정화를 끝냈다.
수호목에서 손을 뗐다.
말라비틀어지던 수호목은 이제 자신의 생명력을 되찾아갈 것이다.
애쉬는 손을 털며 내게 다가왔다.
장난을 앞둔 악동처럼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얼굴에 웃음기를 한 가득 품고 있었다.
“나는 내 할 일 했고, 이제 강아지는 벌을 받아야겠지.”
“벌? 왜?”
“나를 네 맘대로 움직이도록 조종하려 한 벌. 그리고 촌장도.”
내 벌은 사정관리 그 이상으로 넘어가는 성적인 고문일 것이다.
하지만 촌장은 아니다.
촌장을 죽이겠다는 말로 들렸다.
나는 다급하게 애쉬를 말렸다.
“촌장님은 왜? 안 돼, 죽이면….”
“그 새끼도 일부러 나 무시하고 지랄했어. 하지만 괜찮아. 죽이진 않을 거야. 촌장은 자기가 벌을 받았다는 것도 모를걸?”
“뭐…?”
그런 벌이 있나?
생각하기도 전에 애쉬가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 손길에 거침이 없었다.
반항도 뭣도 못하고 순식간에 나체가 되었다.
주변에 누군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강아지.”
“…왜.”
“강아지.”
“왜 불러.”
애쉬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아지.”
“…조금 무서운 데?”
“대답. 강아지.”
“…….”
애쉬가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
내게 알려주지도 않고 내 스스로 알아내서 하도록.
계속해서 나를 불렀다.
“강아지.”
“…….”
꺼림칙한 직감이 뒷골을 스쳐지나갔다.
“애쉬…? 에이, 아니지…?”
“강아지.”
애쉬는 내 목줄을 잡아당겼다.
내 예상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이를 악 물었다.
나 사나이 강아진.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아왔음에, 어찌 강아지 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강아지 소리를 내라는 게 정녕 말이나 되는 명령인가.
애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강아진.”
물러설 곳이 없다.
애쉬가 재촉하기 시작했다.
“…멍.”
“강아지?”
“…멍!”
애쉬의 눈매가 호선을 그린다.
발그레 달아오른 뺨은 기쁨으로 물들었다.
“잘 했어.”
애쉬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게 벌인가.
생각보다 무겁고 가벼운 벌이었다.
그 때 애쉬의 입에서 충격적인 명령이 떨어졌다.
“강아지, 이제 쉬야 해야지?”
“…뭐?”
애쉬가 내 뒤로 다가와 손으로 자지를 덥석 잡았다.
그리고 로브로렌 마을의 수호목을 향해 정조준 했다.
“얼른.”
애쉬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낮아졌다.
* * *
에르윈은 경청하는 애쉬를 보며 새삼 놀랐다.
진심으로 이런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
“첫 번째로, 관계를 제대로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랑 강아지 사이의 관계를?”
“예.”
애쉬는 에르윈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일단은 머릿속에 때려 박았다.
“나름 괜찮은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에르윈이 생각하기에도 서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괴한 줄타기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용사님은 강아진 씨를 모두가 존경하는 남자로 만들고 싶으시잖아요? 그래서 스스로가 용사로서 업적을 세우려는 것이고.”
“응.”
“그것과 별개로 말하는 겁니다.”
애쉬의 취향이 S에 가깝다는 것을 지난 동행으로 이미 깨달았다.
그렇지만 완전한 S는 아니었다.
강아진이 원할 때는 그냥 평범하게 풀어주는 성향이 강했다.
에르윈은 그 부분을 지적했다.
“낮에는 강아진 씨의 체면을 생각해 그의 말을 들어주더라도…. 밤…. 성적인 스킨십과 관련해서는 관계를 명확하게 심어두어야 합니다. 어떤 명령을 해도 군말 않고 수행하도록. 침대 위에서는 용사님의 말에 무조건 순응하게끔 말이죠.”
강아진을 향한 명령권의 힘을 견고하게 다져야 한다고.
“어떻게?”
“사정 통제를 확실하게 하세요. 강아진 씨가 애원해도 풀어주지 않고, 완벽하게 복종할 때에 정액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몸에 각인시켜주는 겁니다. 내일 한 번, 진득하게 해보는 것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알았어.”
애쉬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강의 용사도 단칼에 썰어버리는 여자가 자신의 충고를 듣고 배우려고 하다니.
드레이크의 시체 앞에서 에르윈은 색다른 감정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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