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최강의 용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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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이크 드라코니안.
드래곤의 피가 한 스푼 정도 첨가된 인간.
용사 클래스를 통해 성검을 얻고 각성하면서 용족의 힘을 일부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원작을 통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는 두 가지.
그가 바리아 제물소환 사건에서 벨리알을 격퇴한 용사라는 것.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위치에 서있다는 것.
‘이런 식으로 엮일 줄이야….’
그는 벨리알을 격퇴한 후 라베루스에서 잠깐 지내게 된다.
바리아는 거리상으로 리오스 남작령에 속해있는 땅이니까.
그런데 유테론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회귀한 애쉬가 벨리알을 끝냈다.
이후 행적이 붕 뜬 드레이크가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온 회귀자도, 소설에 떨어진 빙의자도.
“둘이서 재밌는 거 하고 있었네. 내가 방해한 것 같은 느낌이잖아.”
드레이크는 방 안을 활보했다.
그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예의 없게 들어왔으니까 일단 돌아간다는 선택지도 있을 텐데.
그는 우리가 헐벗고 있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아 했다.
수치심은 벗고 있는 사람이 느껴야 할 감정이었다.
“…병아리 용사님 정도면 뭐, 남자친구 있을 만하지.”
드레이크의 시선이 애쉬에게로 향한다.
위아래로 훑는 눈빛이 썩 곱지만은 않았다.
그도 남자니까 음흉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눈길을 내 몸으로 가로막았다.
애쉬의 몸을 가려주었다.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애쉬를 가리고 난 후에 생각이 들었다.
조금 과한 대처가 아닐까.
이불로 몸 가리고 하면 되는데.
애초에 애쉬는 제 몸을 가릴 생각이 없다.
꺄악, 거리는 성격의 히로인도 아니고.
누가 보든 말든 당당한 여자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결론을 내렸다.
차라리 내 자지를 보여주는 게 낫다고.
‘다 가려질까.’
솔직히 부질없는 짓이다.
애쉬가 옷을 빠르게 입어주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내 바람과 다르게 흘러갔다.
“흐, 귀여워.”
“…….”
뒤에서 애쉬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옷을 주워 입어야 할 상황인데도 애쉬는 느긋하게 내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은밀한 골짜기 사이를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헤집고 다녔다.
“옷 입어야겠다. 강아지가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애쉬가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 꼴이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런 애쉬를 따라 움직이며 드레이크의 시선을 차단하려 애썼다.
“강아지?”
드레이크는 애쉬가 나를 부르는 호칭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
그러나 경험을 토대로 금방 이해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사이였어?”
왜인지 모르게 기뻐하는 듯 보였다.
방긋 웃는 표정이 빌어먹게 잘 생기기는 했다.
스스로 외모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레이크의 면상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진실만을 말하면 그렇다는 의미다.
애쉬는 금방 옷을 입었다.
시작이 느렸을 뿐 과정 자체는 빨랐다.
“강아지, 이제 안 가려도 돼. 너도 가서 옷 입어.”
애쉬가 내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리고 드레이크에게로 다가갔다.
상냥하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들어오라고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멋대로 들어오고 그러네.”
애쉬는 드레이크를 상대로 살기를 일으켰다.
원래부터 눈에 뵈는 거 없이 행동하는 년인 걸 알고는 있었지만.
최강의 용사를 상대로도 이럴 줄이야.
드레이크도 놀란 눈으로 애쉬를 바라봤다.
눈빛에는 애쉬에 대한 감탄이 엿보였다.
“와, 이렇게까지 달라져?”
“…….”
“병아리 용사님, 자기 남자친구한테는 다정한 편이구나. 다시 보인다?”
드레이크는 능글맞게 말하며 나를 흘겼다.
애쉬를 바라보는 눈빛과 달랐다.
나를 썩 달갑지 않아 하는 느낌이었다.
‘…저건….’
그의 여성편력은 이 세계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
잘생기고 강하다.
용사이기까지 하니 그 누구도 드레이크의 문란한 사생활을 욕하지 않는다.
영웅은 그럴 수 있다고 그러는 게 당연하다며 그를 옹호하는 이들도 많다.
‘…시발.’
드레이크가 애쉬를 여성으로서 바라보고 있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가슴 속에 싹을 틔웠다.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다.
애쉬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태도를 유지했다.
상대가 용사라서 그런가, 심한 욕설까지는 하지 않았다.
“용건이 있으면 말하고 사라져. 내 휴식시간 방해하지 말고.”
“너무하네. 나한테도 강아지한테 말하듯 상냥하게 말해줘. 안 그러면 상처받으니까.”
“…….”
드레이크는 방긋 웃으면서 대꾸했다.
애쉬가 답답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힘으로 내쫓기 전에 꺼져.”
“나를, 힘으로? 악마를 잡을 만큼 강하다고 해도 불가능할 텐데. 내가 악마보다 더 세거든.”
드레이크가 성검을 소환했다.
애쉬의 성검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성검이 그 존재를 드러냈다.
애쉬도 놀란 눈으로 성검을 훑었다.
“…15레벨.”
“응. 15레벨 성검이야. 룬을 열네 개나 얻었지.”
마왕에게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성검 레벨이 10이다.
말 그대로 최소 조건이 10이라는 의미다.
드레이크는 그 조건을 만족하고 있었다.
대륙에 몇 없는 10레벨 용사들 중 최강.
15레벨의 성검을 보유한 용사였다.
‘15레벨 성검을 가지고 있다 해도 본인의 실력이 부족하면 안 되겠지만….’
그럴 리는 없다.
룬을 얻기 위해 수많은 고난을 극복해왔을 테니까.
드레이크는 결국 살아남았고 룬들을 획득했다.
15레벨의 성검은 그의 무력을 상징하는 무구였다.
때문에 용사들 사이에선 누구도 드레이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애쉬 그레이필드를 제외하고.
애쉬는 사정없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근데 어쩌라고. 시발, 따로 용건 없으면 좀 꺼져.”
“오우….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말이 험하네. 뒤에 남자친구가 있어서 그런가?”
“…….”
애쉬가 드레이크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드레이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용건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우리 병아리 용사님에게 좋은 정보 하나를 물어왔지. 그 정도 염치는 있어.”
“…정보?”
웬만한 정보로는 애쉬의 환심을 사지 못한다.
회귀자가 들어도 혹할만한 매력적인 정보를 드레이크가 가지고 있을까.
드레이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룬. 내가 알고 있는 룬의 위치를 알려줄게.”
“…나한테 알려준다고?”
“응.”
애쉬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드레이크를 경계했다.
그러나 애쉬의 목소리에서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병아리 용사님은 알려나 모르겠는데….”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룬이 무작정 많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야. 그 조합이 생각보다 중요하거든. 용사 아카데미에서 못 알려줄걸? 룬을 열 개 이상 흡수하면 룬끼리 충돌하기 시작한다는 거, 걔네도 모르거든.”
“…….”
회귀한 애쉬로서는 모를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유테론 근처에서 룬 하나를 찾았어. 근데 내 성검 상태로는 도저히 흡수할 수가 없네?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게 뻔해.”
“…그걸 나한테 넘겨주겠다?”
드레이크가 격하게 끄덕이며 긍정했다.
“대가는?”
“에이, 우리 후배님 상대로 무슨 대가를 요구할까.”
애쉬는 공짜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용사의 의무와 책임을 굉장히 싫어한다.
“룬은 ‘바람의 룬’, 처음 봤을 때 2레벨 성검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전혀 충돌하지 않을 테니까 습득해서 손해는 없을 거야.”
드레이크는 흔쾌히 정보들을 털어놓았다.
바람의 룬.
원소의 성질을 띤 룬들은 레벨이 낮을 때 획득해두는 편이 좋다.
숙련도나 랭크 등등 궤도에 오르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다행히도 바람의 룬은 부드러운 성질의 룬이었다.
신속의 룬과 잘 어우러져 상호보완적인 조합이 될 것이다.
‘루크는 불꽃의 룬을 가장 먼저 획득하지.’
루크의 화염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뜨겁고 강렬해진다.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악의 존재들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멸했다.
“자세한 위치만 알려주고 돌아갈게.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나?”
“…….”
애쉬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드레이크는 피식 웃으면서 바람의 룬 위치 정보를 알려주었다.
의외로 멀리에 있었다.
오고가는데 3일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위치를 전해들은 애쉬는 눈살을 찌푸렸다.
바람의 룬을 간단하게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나보다.
“그럼 행운을 빌어.”
드레이크가 등을 돌렸다.
정말 룬에 대한 것을 알려주러 온 것인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갔다.
끼익. 쿵.
“…….”
문이 닫히고 둘만 남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실컷 물고 빨고 하던 중에 갑자기 들이닥친 드레이크 때문이었다.
‘내가 조금만 강했어도.’
조금으론 안 될 것 같다.
내가 많이 강했으면 드레이크 멱살이라도 잡았겠지만.
아쉽게 됐다.
“강아지.”
“……?”
애쉬가 나를 불렀다.
드레이크를 상대할 때까지만 해도 잔뜩 날 선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또 평소에 들을 수 있는 애쉬의 톤이었다.
“둘이서 바람의 룬 가지러 다녀올까?”
“…둘이서?”
“빈센트나 다른 애들한테는 일주일 쉴 거라고 말해둔 상태여서, 끌고 가기가 조금 그러네?”
“…….”
솔직히 말해서 애쉬 외에는 전부 있으나 마나한 인원들이다.
잡일을 하는 것 말고는 쓸모가 없었다.
바람의 룬을 가지러 가는 것도 애쉬 혼자서 가는 게 훨씬 더 빠르고 수월하다.
그럼에도 굳이 짐을 데리고 가려는 이유는 단 하나.
가는 길에 심심하니까.
가지고 놀 장난감으로서 나를 데리고 가려는 것이다.
‘좋은 건가?’
이런 취급을 기뻐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한테 선택권이 있었나?”
“없었지.”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그저 해맑은 미소와 함께 돌아왔다.
“그럼 왜 물어보냐?”
“그냥? 이유는 없는데.”
애쉬의 반응에 할 말을 잃었다.
“그나저나 강아지, 아까 전에 뭐였어?”
“…뭐가.”
“흐흫. 쑥스러워?”
“아니? 전혀?”
애쉬가 방긋 웃었다.
“씻으러 가자. 내일 출발할 거니까 오늘은 푹 쉬고.”
애쉬를 따라서 목욕탕으로 향했다.
방에도 욕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만 귀찮음을 무릅쓰고 움직였다.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겪어 피폐해진 몸 상태를 개운하게 씻어내고 싶었다.
물론 애쉬와 함께였다.
혼탕도 아닌데 혼탕처럼 목욕탕을 이용했다.
“꺄아아아아악!”
별채를 우리만 쓰고 있는 게 아니라서 껄끄러운 상황도 겪었다.
다 씻고 나오는 중에 드레이크의 여자들을 마주하고 만 것이다.
“남자가 왜 여탕을 이용해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요?!”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불쾌하다는 듯 나를 째려봤다.
“아, 시끄러워. 꺼져, 병신년들아. 눈깔 뚫어버리기 전에 눈 곱게 떠라.”
애쉬는 망설이지 않고 욕을 때려 박았다.
애쉬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지만 애쉬 덕분에 든든함을 느꼈다.
그 날은 애쉬와 함께 방 안에서 먹고 자고 푹 쉬었다.
진짜 휴식다운 휴식 시간을 즐겼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최고의 시설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다음날.
바람의 룬을 획득하기 위해 유테론 저택을 나섰다.
귀찮은 일을 질색하는 애쉬인데.
애쉬의 발걸음이 생각보다 가벼워보였다.
오늘 일정을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유테론 박으로 나서기 전.
한 사람을 만났다.
우리와 함께 할 일행이란다.
“…이 분은 왜…?”
“같이 가면 재밌을 것 같아서.”
일행에 에르윈이 추가되어 있었다.
“반갑습니다….”
에르윈은 똥 씹은 표정으로 나에게 인사했다.
애쉬와 눈이 마주칠 것 같으면 금방 표정을 갈아엎고 화사하게 웃었다.
불쌍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