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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여)용사가 집착함-32화 (32/109)
  • 〈 32화 〉 돼지들의 울음소리(1).

    * * *

    애쉬가 벨리알을 정리하고 라베루스로 복귀하기까지 약 4시간 걸렸다.

    실질적인 흑마술사 토벌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나머지 3시간 30분은 전부 이동하는데 쓴 시간이었다.

    애쉬는 라베루스에 도착하자마자 성벽 위에서 빈센트 일행을 기다렸다.

    혹시라도 엇갈릴 수 있으니까 찾으러 다니는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마차를 타고 하루 이동 했지. 그러면 꽤 움직였을 거야. 그 거리를 돌아오려면 적어도 이틀은 지나야….’

    대륙 남부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거리를 계산했다.

    빈센트 일행의 속도를 예측하며 도착 시간을 예상했다.

    ‘빠르게 움직인다고 가정하면 내일 도착할 수 있어. 내가 신속 마법까지 걸어줬으니까….’

    강아진을 향한 키스는 분명 애쉬 본인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저지른 짓이었다.

    키스하는 중에 빠른 복귀를 기원하는 신속 마법을 겸해서 걸어주었을 뿐.

    ‘내일 도착하지 않으면….’

    도착할 수 없는 일이 생겼거나 혹은 도착하기 싫어 도망쳤다거나.

    전자의 경우도 생각하기 싫고 후자의 경우도 생각하기 싫다.

    ‘후자의 경우는….’

    애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를 악물고 분을 참았다.

    도망치지마라고 경고까지 했는데 일을 저질러주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

    애쉬는 주인 말을 듣지 않는 강아지를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 때, 애쉬의 곁을 맴돌던 남자가 애쉬를 불렀다.

    벌써 열두 번째였다.

    “용사님.”

    “아, 알아서 간다니까?”

    “왕도에서 방문한 손님이 어제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만….”

    “나중에 내가 들른다고 전해.”

    애쉬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애쉬에겐 강아진이 복귀하느냐 마느냐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라베루스 리오스 남작의 가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성벽 위에 살림을 차려버린 용사를 어떻게든 데려가야만 했다.

    용사 애쉬에 대한 공포를 꾹 눌러 담고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가야 할 이유를 어필했다.

    “용사님의 악마 토벌을 축하드리고 그에 관한 결과를 보고받기 위해, 라베루스에 발걸음해주신 교단 성기사님이 어제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분의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게는…. 히익…!”

    애쉬는 남자를 향해 살기를 뿜어냈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를 기운으로 짓눌렀다.

    “아주 그냥 죽여 달라고 비는구나, 빌어.”

    “끄윽, 끄르륽…!”

    애쉬의 힘을 버틸 리 없는 남자가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애쉬가 기절시킨 것이다.

    그렇게 또 한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는 성기사가 직접 성벽 위로 올라왔다.

    성기사는 애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절그럭거리는 플레이트 아머에 햇빛이 부딪쳐 번쩍번쩍 윤이 난다.

    “용사님. 바리아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애쉬는 성기사 앞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반짝거리는 갑옷이 보기 불편했다.

    성기사는 조곤조곤 용건을 꺼냈다.

    “바리아에서 용사님이 토벌하신 악마, 서열68위의 벨리알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습니다.”

    마계침식이 진행되고 훗날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교단은 그 때를 위해 악마들의 정보를 수집해놓았다.

    용사들을 돕고 그들이 남긴 위업을 기록하는 것은 왕성의 역할.

    추후에 일어날 악마와의 전쟁을 대비하는 것은 교단의 역할.

    그렇다고 왕성이 전쟁에 관심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교단이라고 용사를 방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애쉬는 성기사를 쳐다보는 척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소멸시켰어.”

    “예?”

    “소멸시켰다고. 한 번 말해선 못 알아들어 처먹나?”

    짜증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안 그래도 불안해서 짜증나는데 옆에서 신경 거슬리게 조잘거리고 있으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성기사라 해도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성기사도 성기사 나름대로 답답했다.

    이 어린 용사는 대체 무엇 때문에 성벽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하는 걸까.

    서로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고 교단 측에 서포팅 받을 게 있다면 요구하고, 좋게 헤어지면 되는 것인데 말이다.

    그래도 성심성의껏 알려주기로 했다.

    벨리알을 토벌한 것은 분명 대단한 업적임이 틀림없지만 병아리 용사라서 아직 모르는 게 많아 보였으니까.

    “용사님. 악마를 소멸시킨다는 것은 마계에 머무르고 있는 악의 존재를 없앤다는 의미입니다. 흑마술사들의 제물소환 술식으로 소환된 악마는 본체가 아니어서 소멸시킬 수가 없습니다. 용사님이 배제한 벨리알은 마계의 본체로 돌아간 것으로….”

    “소멸시켰다니까?”

    애쉬는 이들의 반응을 전부 다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히 믿지 못하고 주절주절 거릴 것을 알았다.

    용사 앞에서 본체를 현신해버리는 병신 악마는 없으니까.

    그래서 증거를 가지고 왔다.

    “교단에 계신 성자님께 이거 갖다 드려.”

    “이것은…?”

    애쉬가 가죽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성기사는 그것을 받아들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구역질이 절로 나오는 살덩어리가 보였다.

    “벨리알이었던 것. 성자님은 마계에 머물고 있는 악마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걸 통해 벨리알이 마계에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알아보면 되잖아.”

    현 교단의 성자는 악마가 남기고 간 흔적을 통해 그 악마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

    중간계든 마계든 어디든지.

    성기사는 벨리알이었던 육편을 확인하곤 입을 꾹 다물었다.

    애쉬의 태도로 미루어 볼 때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용사님.”

    “안 오면 안 돼?”

    “…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벨리알 소멸이 확인된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 큰일이라서 말이죠. 용사님을 뵈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

    안다.

    알고 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뿐이다.

    애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그럼 다시 올 때, 교단 텔레포트 마법사 좀 빌릴 수 없나?”

    “용사님께서 말씀하신 업적이 진실이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성기사는 대충 견적을 내린 후 답변했다.

    용사라고 모든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원은 한정적이고 용사는 많으니까 강하고 위대한 용사에게 많은 자원이 쓰이는 것이다.

    정말로 악마를 소멸시킨 용사가 있다면 교단은 그 어떤 지원이라도 해줄 의향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견줄 수 없는 업적이니 당연했다.

    “그러면 텔레포트 마법사 좀 빌릴게.”

    “…용사님의 위업을 확인해본 후 교단에서 알려드릴 겁니다.”

    “그래.”

    애쉬는 성기사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성벽 너머 들판과 숲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성기사는 그런 애쉬를 흘기며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 * *

    이동하는 중에도 계속해서 수련을 거듭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도둑 클래스를 갈고 닦는 것뿐.

    ‘소매치기’와 ‘해제’를 끊임없이 사용했다.

    철컥, 철컥­.

    가지고 있는 자물쇠 열쇠 구멍을 락픽으로 열심히 쑤셔본다.

    소우타가 가지고 있는 자물쇠 중 랭크가 꽤 되는 것이라 내 ‘해제’ 스킬로는 열리지 않았다.

    저 멀리서 라베루스의 성벽이 보였다.

    나는 만지작거리던 자물쇠와 락픽 세트를 소우타에게 돌려주었다.

    “쉽지 않네.”

    “하다 보면 될 거예요. 저도 처음에는 잘 안 됐어요.”

    소우타는 멋쩍게 웃으며 나를 위로했다.

    ‘언제쯤 E랭크가 되려나.’

    ‘도둑 클래스’, ‘소매치기’, ‘해제’, 현재 내 정보에서 F랭크인 것들이다.

    ‘감정’은 D랭크로 격상한 상태.

    ‘운이 좋았어.’

    ‘감정’ 랭크는 순전히 행운이 만들어준 요행이었다.

    가시 까마귀 용병대의 흉갑 파편을 발견한 것으로 랭크가 갑자기 오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한 행운이 없다면 F랭크에서 D랭크까지 올리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될지.

    재능까지 없다면 더욱 오래 걸리리라.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점은 내 레벨이 2레벨로 올랐다는 것.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걸은 게 도움이 됐다.

    ‘몸이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고.’

    원작에서 레벨은 캐릭터의 평균 무력을 의미한다.

    주인공 용사 루크만이 가지고 있는 레벨 업 시스템.

    작중에서 루크가 애쉬보다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 시스템 덕분이다.

    ‘내 레벨이 보이고 상대 레벨이 보이면, 질 수가 없지.’

    같은 클래스 내에서는 레벨 높은 놈이 절대적인 우위를 가진다.

    루크는 이기는 싸움만 골라서 했다.

    하지만 클래스가 다르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

    ‘도둑이 클래스로서 병신인 이유가 여기서 나오는 거지.’

    똑같은 10레벨이어도 활성화되는 능력이 다르다.

    클래스에 따라 다른 능력치가 성장한다.

    검사, 전사는 근력 위주의 성장을.

    마법사, 정령술사는 마력 위주의 성장을.

    도적, 궁수는 민첩성 위주의 성장을.

    그렇다면 도둑은 무슨 능력치가 성장하게 될까.

    ‘민첩성, 손재주, 감각 따위의 그런 부수적인….’

    도적이나 궁수보다 더 열악한 환경조건이다.

    무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신체능력만 성장한다.

    도둑 클래스를 대성한다고 해도 대도(大?)가 될 뿐이란 말이다.

    악마는커녕 마족조차 상대할 수 없는 그런 약해빠진 클래스.

    그게 바로 내가 각성한 도둑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하자. 그러는 수밖에 없다.’

    태어나서 사는 인생.

    적게 주어진 것에 억울해하고 주저앉아버리면 안 된다.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써야 흥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히이이이잉­.

    길게 늘어선 마차 행렬.

    그 옆에 지저분하게 긴 여행자 검문 행렬.

    우리는 가장 뒤에 얌전히 줄을 섰다.

    “…통과할 수 있겠지?”

    멤버 조합을 살펴봤다.

    신분증이라곤 쥐뿔도 없는 이계전생 강아진.

    마찬가지로 신분이 있을 리가 없는 노예후보 견인족 린.

    뒷골목에서 쓰레기나 주워 먹고 사는 소매치기 소우타.

    자연스레 빈센트에게로 고개가 돌아갔다.

    믿을 만한 왕국민은 빈센트 밖에 없었다.

    빈센트는 우리의 시선을 피했다.

    특히 린의 간절하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외면했다.

    “…나도 신분이 밝혀지면 안 되는 처지라서 말일세.”

    “하아….”

    용사 애쉬가 빠지자마자 도시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새끼들만 모일 수 있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참담한 조합이었다.

    나는 빈센트에게 물었다.

    지금 이 파티의 리더는 빈센트니까 그의 결정을 따르는 게 옳다.

    “그럼 어떻게 하죠?”

    “그걸 왜 나한테 묻나?”

    빈센트가 톡 쏘듯이 반응했다.

    “어른이잖아요. 결단을 내려주셔야죠.”

    “이럴 때만 어른 대우인가?”

    빈센트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아, 빨리. 용병이라며? 그럼 그만큼 판단력이 좋을 거 아닙니까. 결단 내려주십쇼.”

    “결단? 결단력은 자네가 더 좋을 것 같다만….”

    “예?”

    “노예상인에게 팔려가고 있을 때, 그 마차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사내대장부는 어디로 갔나?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도망치려 하던 그 남자 말이야.”

    “…….”

    “용사에게 안겨 예쁨 받으면서 거세라도 당한 것인가?”

    빈센트가 낄낄거리며 나를 조롱했다.

    맞다.

    나는 자유를 갈망하던 상남자 강아진이다.

    지금은 새장 속에 갇힌 새, 정조대에 갇힌 자지.

    자유와 함께 남성성을 거세 당해버린 불쌍한 사내….

    “좋습니다.”

    장점으로 단점을 가린다.

    나약한 무력이 단점이라면 그것을 가릴 수 있는 장점을 만들면 된다.

    ‘판단력, 결단력, 보이지 않는 흐름을 읽는 것. 그것도 하나의 재능이자 장점이지.’

    잽싸게 경비병들의 근무태도를 확인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

    절도 있는 손짓.

    “저희, 넘치는 게 돈이니까 뇌물이나 찔러줍시다.”

    솔직히 이거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다.

    저 놈들이 받아줄 것 같지는 않지만….

    “…….”

    빈센트는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난한 방법 중 하나인 듯했다.

    빈센트가 가죽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냈다.

    눈에 보이는 검문소의 병사는 총 넷.

    인당 열 닢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다.

    ‘애쉬의 이름을 팔고 싶기는 한데….’

    안 믿을 확률이 높다.

    차라리 용사의 이응자도 거론하지 않고 돈만 바치고 빠지는 게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 차례가 왔다.

    “…….”

    내 계획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강아지!”

    검문소 너머에서 애쉬가 활짝 웃으며 서있었다.

    경비병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용사 앞에서 긴장한 것이었다.

    애쉬 뒤에 서있는 노인이 한 발짝 다가왔다.

    “이동하면 되겠습니까, 용사님?”

    애쉬는 그런 노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테론으로 보내줘.”

    “알겠습니다.”

    묘한 기운이 우리의 몸을 감쌌다.

    눈 깜빡할 사이에 배경이 달라졌다.

    근사한 식사가 차려진 식탁 앞이었다.

    “어서 오시오! 바리아의 영웅, 용사 애쉬! 그리고 그녀의 동료들이여!”

    풍채 건장한 남자가 우리를 환영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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