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죽음을 거부하는 까마귀(14).
* * *
이슬이 나뭇잎을 물고 늘어지는 시간.
떠오르는 해가 어둠을 몰아내고 달갑지 않은 새벽이 밝아온다.
빛 한줌 통하지 않는 천막 안에서 시꺼먼 형체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였다.
“일어나세요, 용사님.”
“으응…. 일어났으니까, 꺼져….”
말번초 불침번인 린이 애쉬를 깨웠다.
애쉬는 린의 손을 뿌리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용사라고 아침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소리 때문에 이미 깬 상태였다.
긴장감이 극도로 달해서 더 자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는 것에 가슴이 떨렸다.
애쉬까지 기상을 한 후 우리는 숙영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해가 뜨기도 전부터 떠날 준비를 했다.
“…….”
천막을 접고 흔적들을 치우는데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흑마술사 기습 작전 때문에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일행 중 애쉬만이 유일하게 긴장감 없는 얼굴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최악의 시간대에 불침번을 섰는데도 컨디션이 좋아보였다.
‘…오히려 스트레스 풀어서 좋아진 건가?’
고생은 내 자지가 더 했다.
애쉬가 내 자지의 고생을 알아줄지 모르겠다.
나는 모닥불 앞에서 희희낙락 웃으며 괴롭히던 애쉬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자지의 노고에 고마워할 것 같지 않았다.
“흠, 새벽공기가 좋긴 좋아.”
애쉬는 새벽공기를 들이마시며 짐들을 챙겼다.
마차에 가뿐하게 싣고 올라탔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말들도 긴장할 만큼 어두컴컴한 숲속을 망설이지 않고 달려나갔다.
히이이이이잉!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고 불편한 자리에 몸을 맡겼다.
덜컹거리는 승차감에 눈살이 절로 찡그려졌다.
마차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어찌나 빠른지 짐칸에서도 속도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우웅. 우웅.
애쉬의 성검이 빛을 뿜고 있다.
애쉬는 ‘신속의 룬’이 가진 힘을 이용해서 말과 마차의 속력을 높이고 있었다.
흑마술사의 빈틈을 치기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렸다.
말이 죽든 말든.
마차가 망가지든 말든.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애쉬가 의외로 진심이네.’
패배를 겪고 회귀해서 그런가.
원작에 비해 엄청난 의욕을 보였다.
내 입장에서 나쁘지 않았다.
꼭 주인공 용사 루크가 하지 않아도 된다.
회귀로 인해 강해진 애쉬가 마왕 바알을 봉인해도 충분하다.
누가 됐든 간에 마왕 바알을 봉인해주기만 하면 이 세계에는 평화가 찾아오니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다.
‘흑마술사에게 전달된 정보. 그것을 역으로 이용한다.’
애쉬가 벡을 단호하게 죽여버린 이유였다.
언데드가 되어버린 벡과 그를 언데드로 만든 흑마술사, 둘은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벡이 언데드로서의 육체를 잃게 되면 계약한 흑마술사에 의해 부활한다.
벡은 당연히 용사 애쉬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것이고, 흑마술사는 그에 따라 계획을 수정할 것이다.
그렇게 새로이 만들어진 흑마술사의 계획보다 한 템포 빠르게 치고 빠진다.
‘풋내기 용사가 떠올릴 수 있는 작전이 아니야.’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가설이고 명제였다.
하지만 그것을 성립시키기 위한 조건들은 경험을 통해서 채울 수 있는 부분이었다.
결단을 내리고 망설임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실행력은 수많은 경험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능력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애쉬의 계획을 믿고 움직였다.
바리아까지 대략 사흘 정도가 걸리리라 예상하고 거기서 하루를 줄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흑마술사가 나름대로 세운 촉박한 일정보다 한참 더 이르게 도착할 생각으로.
얼마나 달렸을까.
마차 안의 분위기가 처음보다 더 굳었다.
바리아와 가까워질수록 린과 소우타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애쉬는 그런 둘을 흘겨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흑마술사 잡고 포상 받으면 유테론에서 조금 오래 쉴 거야. 일주일 정도 놀고 먹고 할 거니까 그거 생각하면서 열심히 도망 다녀.”
“예엡.”
린과 소우타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애쉬의 말이 크게 도움되지 않았다.
나중에 받을 보상보다 당장 찾아올 시련이 더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대부분은 용사 애쉬가 처리해줄 텐데도 결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두려웠다.
그 감정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애쉬는 우리의 눈빛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우리 얼굴들을 하나씩 살펴보고는 표정을 구겼다.
거칠게 몰아붙이며 으르렁거렸다.
“아니 애초에 너희한테는 위험한 일 안 시키니까. 시발, 울상 지으면서 분위기 좆같게 만들지 마. 벌써 누구 뒈졌어? 괜히 걸리지 말고 잘 숨어 있으면 아무 일 없이 끝나.”
“…….”
“린. 무릎까지 꿇어가며 용사 동료로 받아달라고 했던 게 누구였지? 고작 흑마술사 하나 잡는 거에 그러고 있을래?”
“…아니요….”
“앞으로 흑마술사 뿐만 아니라 마물도 죽이고 마족도 죽이고, 악마는 당연히 찢어죽이고 마왕도 봉인해야 해. 벌써부터 이러면 같이 못 다녀. 너 팔아 넘기고 돈이나 챙기는 게 나아.”
“…죄송합니다, 용사님. 짐이 되지 않게 노력할게요….”
짜증을 참지 못하고 애쉬가 머릴 벅벅 긁어댔다.
더 해줄 말 없다며 고개를 홱 돌리고 관심을 꺼버렸다.
“…윽….”
내 자지에도 관심을 꺼줬으면 좋겠는데.
애쉬는 여전히 내 바지 아래에 손을 집어넣었고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며 가지고 놀았다.
손을 빼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애쉬의 손이 빠져나갔다.
하루 종일도 가지고 놀 것 같던 애쉬가 내 불알을 놓아주었다.
왜인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며 애쉬를 바라봤다.
“마차 안에 얌전히 있어. 게이는 애들 지켜주고.”
애쉬는 자지 만지던 손으로 성검을 잡았다.
그리고 거의 날 듯이 마차 밖으로 빠져나갔다.
─ 용사, 벡이 나타났다. 작정하고 말부터 베어서 더는 마차를 끌고 가지 못할 것 같네만….
앞칸에서 빈센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용사 애쉬의 일행이 생각보다 빠르게 이동했다.
진격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움직임이었다.
덕분에 벡의 가시 까마귀 용병대도 바빠졌다.
함정을 설치하고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흑마술사가 요구한 이틀의 시간을 위해 당장 나서서 용사를 막아야 했다.
벡은 장검을 뽑아들고 말을 향해 검기를 쏘았다.
말의 목을 베어내는 것으로 마차를 멈춰 세웠다.
‘마차가 안 넘어지는군.’
연둣빛 바람이 마차를 감싸고 있다.
용사 애쉬가 힘을 발휘해 마차를 안전하게 세운 것이었다.
벡은 그 이상 마차에 집착하지 않았다.
‘한 번으로 부족하면 두 번, 세 번, 열 번이라도 되살아나서 막는다.’
벡의 용병대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언데드다.
종족이나 직위가 정해지지 않은 언데드지만 죽음과 체력의 문제에서 해방되었다.
풋내기 용사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 번 죽은 이유는 방심했기 때문이다.’
설마 하는 순간 죽고 말았다.
용사라는 년이 진심으로 자신을 벨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방심하지 않는다.
전력을 다해 용사를 막아세울 생각이었다.
벡의 가시 까마귀 용병대가 우르르 쏟아졌다.
길목을 가로 막고 마차를 둘러쌌다.
뒤칸에서 천을 들추고 모습을 드러내는 용사 애쉬 그레이필드.
애쉬는 마차 지붕 위로 뛰어오르며 중얼거렸다.
“뭐, 이 정도는 예상했어.”
표정 변화가 전무했다.
습격을 당한 상황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쓰레기 같은 악마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작이었으니까.
애쉬의 감정에 변화가 생길 리 없었다.
‘여유 있는 척 하는군.’
흑마술사는 인류멸망과 마계강림을 원하는 악인들이다.
내버려 두면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른다.
용사 애쉬는 그런 흑마술사를 막으러 가고 있다.
시간이 촉박할 수밖에 없다.
여유를 꾸며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벡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용사에게 가시 까마귀 용병대의 의지를 보여줘라!”
“우오오오오!”
죽음에서 되돌아온 가시 까마귀 용병대가 애쉬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부 자리에 앉아있던 빈센트가 곧장 일어나 검을 휘둘렀다.
흐릿하게 맺힌 검기는 언데드의 대가리를 박살냈다.
빈센트는 한 놈 더 베어내며 애쉬를 향해 소리쳤다.
“급하지 않나, 용사?”
이런 놈들에게 붙잡혀 있어도 되냐는 물음이었다.
애쉬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시간에 가시 까마귀 용병대를 정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애쉬의 성검에 마나가 맺혔다.
용사의 마력광은 개개인의 근원에 따라 각기 다른 빛깔을 띤다.
“…용사….”
빈센트는 눈앞에 있는 언데드들을 잠깐 잊었다.
자신을 죽일 기세로 덤벼들고 있다는 것도 잊고 애쉬를 빤히 바라봤다.
성검에서 피어나고 있는 은빛의 마력광에 시선을 빼앗겼다.
얽히고 설킨 마력광이 선명하게 강기를 이루었다.
실버 오러 블레이드가 순식간에 모양을 갖추었다.
‘천계….’
천사의 마력광이 은색이다.
애쉬의 마력광도 은색이다.
젊은 시절 잃어버린 딸을 찾았다.
어디에서 지냈는지 모를 딸내미는 누구보다 곱고 아름답게 성장했다.
수련도 꾸준히 해왔다.
자신과 달리 게으르게 살지 않았다.
그 결과 애쉬는 젊은 나이에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렀다.
웬만한 용사들도 도달하지 못하고 꺾이는데.
하지만 빈센트의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쩌엉!
애쉬의 오러 블레이드에 금이 갔다.
아주 작게 새겨진 균열은 점점 영역을 넓혀 갔고 오러 블레이드 자체를 깨버렸다.
빈센트는 할 말을 잃었다.
“아, 성검이 감당을 못하네. 짜증나게….”
애쉬가 인상을 찡그리며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
벡을 비롯한 가시 까마귀 용병대는 전의를 상실했다.
용사와 싸워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백 퍼센트 패배할 상황에 투지를 잃어버렸다.
‘빌어먹을….’
오러 블레이드는 선택받은 자들의 전유물이다.
마스터라는 경지에 도달해야만 만들어낼 수 있다.
‘풋내기 용사인 줄 알았는데.’
하필이면 만난 용사가 대륙에서 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레벨이라니.
벡은 어이를 상실한 듯 실소를 흘렸다.
‘그러면 그 날, 마차에서 왜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이지?’
벡 앞에서 약자의 모습을 보였다.
도발을 듣고도 한 수 접거나 부들부들 떨며 화를 식히는 둥 마스터 레벨의 용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극적인 대응을 보여주었다.
평소처럼 싸가지 없기는 했으나 분명 분위기가 달랐다.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건가.’
벡의 정체를 처음부터 간파했다.
그렇지만 힘을 숨겼다.
그런 이유를 길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눈앞에 있었다.
‘용병에게 있어 실력은 여성과도 같다. 완전히 드러내는 것보단 적당히 가리고 있는 게 야하고 박음직해.’
벡은 애쉬에게 당했다.
미끼를 문 물고기였다.
실제로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강아진이 겁을 먹고 어색해 할 것 같아 힘을 숨기고 다니는 것이지만.
벡이 그런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잘 가라, 병신아.”
애쉬는 가시 까마귀 용병대를 향해 성검을 휘둘렀다.
은빛의 오러가 활활 타올랐다.
천사의 검에 가시 까마귀 용병대가 정화되었다.
벡은 은색 불꽃에 휩싸여 비틀거렸다.
‘아….’
언데드로 지내며 저질렀던 악행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흑마술사들을 도왔다.
그 기억들 속에서 언젠가부터 잊고 있었던 이름이 떠올랐다.
“이벨린….”
어린 딸아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한 번만 기회를…!’
부서지는 몸을 붙잡았다.
용사를 붙잡고 이틀을 버텨야 새롭게 부활할 수 있다.
딸아이에게 돌아갈 수 있다.
“어우, 질겨.”
콰직!
애쉬는 죽음을 거부하고 일어서려는 벡의 머리를 박살내버렸다.
벡은 흑마술사의 동굴에서 깨어났다.
흑마술사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용사…. 용사가 오고 있다…!”
“알아.”
흑마술사는 안절부절 못하는 벡의 반응과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느긋하게 대답했다.
“잿빛 머리의 용사, 애쉬 그레이필드. ‘헬 체인’에선 그녀를 용사 아카데미에서부터 주목하고 있었어. 그 년이 왔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이런 저런 환영 준비를 해뒀어. 지원도 왔고….”
“어…?”
“네가 미리 알려준 덕분이야.”
흑마술사의 입 꼬리가 기괴하게 말려 올라갔다.
조소를 가득 꾸며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계약을 이행해야겠네. 우리 벡과 내가 했던 계약. 너한테 인간의 몸을 주고 부활시켜주기.”
“지금 해주겠다는 말인가?”
“응. 그런데 원래 네 몸은 이미 부패하고 사라져서 불가능해. 그래서 새로운 몸을 찾아왔거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흑마술사가 다소곳하게 누워있는 여성의 몸을 가지고 왔다.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여자였다.
“너도 마음에 들 거야.”
흑마술사는 악마처럼 웃으며 수인을 맺었다.
벡과 맺은 계약에 의한 보상을 지불했다.
벡의 정신이 전송됐다.
언데드의 몸에서 인간의 몸으로.
그리고 몸이 가지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끄흐흐흐흐흑, 흐하흐히흐흐흐흐!”
“이벨린! 이벨린! 아아아아아아!”
벡은 자신의 얼굴을 더듬으며 울부짖었다.
흑마술사들이 자신의 딸에게 저지른 짓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눈에서 피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흑마술사의 뒤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감정이지 않습니까? 단순히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도, 아주 환상적인 농도의 마기를 뽑아낼 수 있답니다.”
“그레이프 님 덕분에 한 수 배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