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죽음을 거부하는 까마귀(10).
* * *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났다.
애쉬는 강아진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금방 몸을 회복했다.
마왕에게 치명상을 입은 것치고는 빠르게 회복한 편이었다.
강아진은 반쯤 병신이 된 애쉬를 두고 도망가지 않았다.
원작이 꽤 진행된 상태라서 애쉬의 성격이 변했으리란 믿음이 첫 번째, 눈빛이 꽤 누그러져 애쉬가 자신을 죽이지 않으리란 생각이 두 번째였다.
‘운이 좋군.’
마왕에게 당했을 때 효과적인 수단들을 총동원했다.
원작 내용을 되짚어가며 기억을 뒤적거린 결과였다.
강아진은 멍하니 앉아있는 애쉬를 바라만 봤다.
“…….”
애쉬가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자신의 육체 내부를 관조하며 구석구석 상태를 살폈다.
‘완벽하게 멀쩡하네.’
마왕을 마주하기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교단의 성녀, 성자가 와도 쉽지 않은 일인데.
강아진이 해내고야 말았다.
애쉬는 고개를 들어 강아진을 쳐다봤다.
살해라도 당할까 싶어 흠칫 놀라는 꼴이 우스웠다.
이상한 이름처럼 강아지 같다고 할까.
녀석은 모르는 게 아니었다.
수틀리면 뒤엎고 다니던 자신의 평판을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버텼다.
이유는 모르겠다.
용사인 자신을 도와야 한다는 사명 때문인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가 사람을 잘 못 버리는 성격 때문인 건지.
애쉬는 그런 강아진을 죽이지 않았다.
흥미가 생겼다.
“야, 너.”
애쉬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다가오라 손짓했다.
“…….”
강아진은 3초 정도 고민을 한 후 애쉬에게 다가갔다.
방 안에서 애쉬와의 거리를 유지했다.
강아진의 시선은 애써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애쉬는 강아진을 바라보며 자신의 몸을 흘겼다.
옷을 입고 있지만, 새하얀 맨살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느낌이다.
강아진 앞에서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한 달 가량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간호 받았으니까, 강아진에게 용사로서든 여자로서든 못 보일 꼴을 많이 보여주고 말았다.
“미친 새끼야.”
애쉬가 욕을 뱉자마자, 강아진이 입을 열었다.
쏟아내듯 토해내는 말들은 사죄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그, 일단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요. 그 대신 제가 살려드렸잖아요? 마왕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줬으니까, 서로 쌤쌤으로 퉁치고 넘어가는 게 어떨까…. 싶은데…? 안 되려나…?”
“실컷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놓고, 당당하네.”
“만지지는 않았는데, 요…. 필요한 접촉 외에는 일체 터치를 안 했습니다. 펜스룰 진심으로 지켰잖아요….”
애쉬는 강아진의 변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천천히 일어나며 이불을 걷어냈다.
순간 수치스러운 기억들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 시발, 치매 걸린 부모 모시는 것도 아니고 새파랗게 젊은 년 엉덩이나 닦아주고 있네. 차라리 똥구멍에 박을 수라도 있으면 신명나게 빨아줄 텐데…. 흠, 혹시 들렸어?
─ 와, 이게 처녀막인가 보네. 천사라서 그런가, 존나 선명하다. 츄릅. 아, 못 움직이는 사람 강간하는 취미는 없으니까 걱정마시길.
─ 남자란 동물이 원래 이래. 발기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네가 너무 야한 몸을 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눈 좀 곱게 뜨자, 오케이?
아무리 생각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저지른 일들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었다.
─ 네 아버지 빅터 씨는…. 아마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나도 못 봐서 확신할 수는 없는데, 어머니 따라 아마 천국에 가지 않았을까? 나중에 어머니 만나면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
─ 농담이 아니라 네가 진짜 최강의 용사야. 지금 유명한 루크보다 훨씬 더. 걔는 곧 추락할 예정이니까 걱정 말고…. 네가 걔를 도와야지. 뭐? 아니, 걔 죽게 두면 안 돼. 너 혼자선 안 된다고, 병신아. 내 말 뜻은 그게 아니고, 네가 최강이긴 하지만 확실하게 이기기 위해서….
─ 일어날 수 있어.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회복에나 전념해. 나? 이제 와서 손 떼기에는 이미 늦었지. 너 주워온 순간부터 가기 싫어도 가야 하는 숙명이 됐어. 한 배를 탄 셈인 거야.
─ 아, 시발. 왜 울고 지랄이야. 뭐? 어깨에서 손 떼라고? 오케이…. 그래도 그렇게까지 욕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많은 것을 보여주고, 많은 것을 봐버렸다.
너무 외롭고 나약해진 순간에 그에게 기대고 말았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정작 죽음의 문턱 앞에서는 살고자 발버둥 쳤다.
생에 대한 열망이 애쉬의 상상이상으로 강력했다.
“…애쉬…?”
애쉬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이름을 불렀다.
애쉬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강아진을 노려봤다.
오른손을 잃은 이후, 자신의 목숨을 판돈으로 올리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기로 했건만.
애쉬의 살벌한 눈빛 앞에서 강아진은 애쉬와 동행해 그녀를 각성시키겠다는 오만방자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옷 벗어.”
“예…?”
“너도 내 몸 보고 만지면서 가지고 놀았으니까, 나도 그만큼 네 몸뚱어리를 가지고 놀아야겠어. 빨리 옷 벗으라고, 병신아.”
애쉬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성검을 소환했다.
강아진의 목덜미에 성검을 들이밀었다.
강아진은 잽싸게 항복하며 벗었다.
“벗을게요, 벗겠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탈의한 강아진이 손으로 아랫도리를 가렸다.
왼손으로 애처롭게 자지를 숨겼다.
애쉬는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성검을 휘적거리면서 위협했다.
“손 떼, 개새끼야.”
“…….”
강아진의 손이 고간에서 떨어져나갔다.
애쉬는 훤히 드러난 자지를 빤히 쳐다봤다.
“이런 상황에서도 발기하려 하네? 변태야?”
“…자연의 섭….”
“그 놈의 자연의 섭리 타령 좀 그만해, 시발새끼야.”
“…….”
애쉬는 반쯤 발기한 자지를 손으로 툭툭 쳐댔다.
애처롭게 꿈틀거리는 자지가 우습게 보였다.
“윽…!”
애쉬가 강아진의 불알을 손에 쥐고 혈도를 꼬았다.
고통에 신음하는 그를 비웃었다.
“이제부터 발기할 때마다 엄청 아플 거야. 내 허락 없이는 발기하는 건 물론이고 만져서도 안 돼.”
“…….”
“대답.”
“예엡…!”
강아진은 애쉬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오두막을 정리하고 필요한 물건을 챙겼다.
눈물을 찔끔 머금고 애쉬를 각성시키기 위해, 그녀의 여정에 동행했다.
* * *
바리아의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다.
흑마술사가 제물소환에 성공해 악마가 강림하기 직전까지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나 애쉬는 그 사건을 알고 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나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닌데.
‘나처럼 미래를 알고 있다고 봐야 돼. 애쉬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나?’
애쉬의 능력과 관련된 내용은 원작에서 나오지 않는다.
루크보다 뛰어는 재능을 가진 용사라는 설정의 정보가 전부다.
종잡을 수 없는 미친 성격을 제외하면 주인공 루크보다 더 주인공에 가까운 용사가 바로 애쉬였다.
‘미래예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크게 이상하진 않아.’
기상천외한 캐릭터들이 많다.
주인공 용사 루크에게 위기감을 심어주기 위해 작가가 일절, 이절, 삼절, 카카시 뇌절까지 박기 때문이다.
어떤 놈이 튀어나와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나를 납치해서 데리고 다니는 것도 미래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미래에서 활약하는 나를 보고 찾아내어 성장하기 전에 침을 발라놓는 것이다.
툭하면 회귀하는 장르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인재선점….
그렇게 생각하니 한 가지 가설을 떠올랐다.
‘애쉬가 회귀자라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노예상인에게 팔린 나를 금방 구해낸 것도, 소우타를 찾아내 나를 성장시키려고 한 것도, 바리아에서 사건이 터지는 것도.
‘애쉬가 회귀자라고 가정을 하자.’
왜 애쉬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내 자지의 자유를 통제하려는 걸까.
발기조차 못하게 막고 불알을 쪼물딱거리고….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생겼다.
지금도 마찬가지.
애쉬의 손은 자연스럽게 내 바지 아래에 들어가 있었다.
앞에 루기우스가 있고 옆에 린과 소우타가 있어도 애쉬는 개의치 않았다.
“아직 성검 레벨이 낮아서 그런가, 그래도 긴장되긴 하네.”
애쉬가 내 불알을 손으로 조물조물 만지며 중얼거렸다.
마차 안에서도 쉴 틈 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 회귀자가 말이다.
‘……?’
그만 만지라는 말도 안 나온다.
내 말을 듣지 않을 거란 생각이 절반, 긴장해서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게 절반.
생각보다 엄청 떨려서 발기할 것 같지도 않았다.
“바리아 해결하고 유테론으로 가면…. 정조대 풀어줄게, 강아지.”
“진짜?”
“응.”
“아예 풀어주는 건가…?”
“응. 그쪽 창관에 유명한 애가 하나 있거든. 정조대 풀고 걔한테 술식 하나 새겨달라고 할 거야.”
소악마처럼 웃는 애쉬를 보며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술식이 보통 술식이 아닐 것 같았다.
‘도망…. 칠까…?’
도망친다고 갈 곳이 있나?
이 세계의 나는 가진 것이 없다.
용사 동료라는 신분도 없다면 언제 어디서 노예로 팔려가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다.
‘시바….’
나는 얌전히 애쉬의 품에 기대 자지나 내어주었다.
마차는 조용히 결전의 장소 바리아로 향했다.
* * *
스스스슷.
어두컴컴한 동굴, 새까만 로브를 뒤집어 쓴 흑마술사가 마기를 모으고 있다.
흑마술사는 마기를 모으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동굴 입구로 한 남자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 벡이었다.
“실패했나?”
“갑자기 나타난 용사가 꽤 하는 년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쯧. 라베루스에 용사가 나타났으니까 조심하라고 말했잖나.”
“그쪽에서 먼저 눈치 챌 줄은 몰랐다. 성검 레벨도 고작 2레벨, 풋내기 용사였는데….”
벡은 용사 애쉬를 떠올렸다.
잿빛 머리칼의 용사는 벡을 베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풋내기답지 않게 냉정했다. 확신하고 휘두르더군.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떠한 경로로든 밖으로 노출된 거겠지.”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어디서 들킨 건지 모르겠네.”
흑마술사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이쪽으로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네 놈의 도움이 컸다.”
“…약속을 지켜주길 바란다.”
“그래, 그래. 바리아를 제물로 바친 후, 남는 마기로 네 몸을 원래대로 돌려주마. 그것으로 우리의 계약은 끝인 걸로.”
벡의 안공에서 보랏빛 불꽃이 일렁거렸다.
흑마술사의 손등에서도 벡의 것과 비슷한 불꽃이 화륵 피어올랐다.
“자네 부하들을 일으켜줄 테니까, 그 용사를 막아주었으면 하는군. 마기를 조금만 더 모으면 확실하게 일을 저지를 수 있으니 말이야.”
“…알겠다. 시간을 끌어보도록 하지.”
“이틀 정도는 붙잡고 있어줘야 해.”
시간이 부족했다.
흑마술사는 최악의 전개를 떠올렸다.
‘용사가 곧장 이곳으로 온다고 가정하면, 거리상 사흘은 걸릴 터.’
원하는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 흑마술사에겐 지금부터 최소 닷새의 시간이 필요했다.
벡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최대한 앞당긴 거야. 이 이상 촉박해지면…. 그냥 튀는 수밖에 없어.”
“…….”
“제물소환을 치르지 못하게 되면 너와 내 계약도 물거품이 돼. 나는 내가 준비한 것만 포기하면 된다지만…. 너는 네 목숨을 포기할 수 있을까?”
“…포기하지 못한다. 나는 살고 싶으니….”
단호한 벡의 대답에 흑마술사가 웃음을 꾹 참았다.
벡은 검을 뽑아들고 동굴을 나섰다.
그의 뒤로 가시 까마귀 용병대의 부하들이 우르르 몸을 일으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