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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여)용사가 집착함-23화 (23/109)

〈 23화 〉 죽음을 거부하는 까마귀(9).

* * *

애쉬는 태평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방긋 웃고 있는 애쉬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불안으로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애쉬의 뒤편에 반쯤 언데드였던 가시 까마귀 용병대의 시체가 보였다.

처참한 몰골로 흙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상태였다.

자고 일어났더니 애쉬가 가시 까마귀 용병대를 정리했다.

뒷일을 생각하고 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애쉬의 상쾌한 눈빛을 보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블루로즈 상단주가 참상을 확인하곤 성큼성큼 다가왔다.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용사고 나발이고 소리를 꽤액 질러댔다.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느껴졌다.

“분명히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은 본인들이 악마소환의 제물이라고 했소. 낙인이 찍혀 있어서, 죽게 되면 제물소환이 도로 진행될 수도 있다고! 도대체 어쩔 생각으로 일을 저지른 것이오, 용사!”

“…아, 시발.”

해맑게 웃고 있던 애쉬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눈빛에 얼핏 스쳐지나간 감정은 블루로즈 상단주를 죽여 버리기에 충분한 동기였다.

나는 다급하게 애쉬를 막아 세웠다.

“…강아지, 자꾸 넘어가주니까 이제는 나를 제어하려 하네?”

“…….”

애쉬가 은근히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애쉬는 나를 봐주고 있었다.

내가 손을 잡거나 매달리거나 애쉬에게 부탁할 때, 되도록 참아주는 쪽으로 행동했다.

다른 이들과 트러블을 만들지 않아줬다.

그렇게 해준다고 해서 애쉬가 내 꼭두각시인 것은 아니었다.

날카로운 애쉬의 눈빛에 절로 주눅이 들었다.

이유 모를 다정함이 그리워지는 시선이다.

애쉬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네가 걱정하는 이유를 모르진 않아. 저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도 알고. 바리아 때문이지?”

“……?”

“그쪽도 내가 처리하러 갈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애쉬가 내 엉덩이를 토닥거리고 블루로즈 상단주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흑마술사에 의해 악마소환의 제물이 되는 마을이 애쉬의 입에서 거론됐다.

어째서, 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마구 차올랐다.

애쉬가 어째서 바리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일까.

‘원작과는 달라.’

나를 노예상인에게서 구해주었다.

그 뒤로 당연하다는 듯 납치해서 데리고 다닌다.

이때부터 애쉬는 원작과 다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쉬는 블루로즈 상단주에게 말했다.

“벡은 제물이 아니라 흑마술사와 짜고 치는 버러지일 뿐이야. 제물소환이 왜 악랄한 술식인지, 무슨 의도를 가졌든 사용자를 무조건 처형하는 이유를 몰라? 하긴 너 같은 새끼는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용사! 말 곱게 하시오. 지금 상황을 자각하고 있다면 조심해야 할 거요.”

“…네 손가락을 보니까 부러뜨리고 싶어지네.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 치우듯이 치워줄까?”

애쉬의 경고에도 블루로즈 상단주는 물러서지 않았다.

쭉 뻗은 손가락으로 여전히 애쉬를 가리키면서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에게는 제물소환의 낙인이 찍혀 있었소! 흑마술사의 꿍꿍이가 무엇일 줄 알고 일을 벌인단 말이오! 자칫 잘못하면 이곳에서 악마가 소환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 말했잖아, 병신새끼야. 벡이라는 새끼는 제물소환의 제물이 아니라고. 어깨 위에 달고 있는 게 장식이 아니라면, 그 박살난 대가리로 생각이란 걸 좀 해…. 하.”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다.

애쉬가 고개를 두어 번 젖히곤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잿빛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긴다.

“시발. 안 되겠다.”

참지 못한 애쉬가 블루로즈 상단주의 목에 성검을 겨누었다.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아서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요, 용사?! 뭐하는 짓인가…!”

“그냥 닥치고 돈이나 내놔. 너 같은 새끼들한테 하나하나 설명할 생각 없으니까.”

“용사가 실패하면 애꿎은 사람들이 죽소. 그런데도 무책임하게 일을 저지르고, 이렇게 당당하면…!”

“그래, 너희는 그런 식으로 늘 용사 탓을 했지.”

애쉬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다는 듯.

“죽기 싫으면 돈이나 내고 꺼져. 마차도 하나 내놓고.”

“용사가 죄 없는 상인의 재물을 터는 것인가? 이 일을 유테론 상인 조합이 보고할 것이오!”

“보고 하든가, 병신아.”

“끄, 으으윽…!”

성검이 블루로즈 상단주의 살갗을 파고 들었다.

글러먹은 용사 애쉬는 진심으로 상단주를 베려고 했다.

“죽을래? 죽고 싶으면 말하지 그랬어.”

“주겠소! 줄 테니까, 성검을 거두시오!”

“말만 하지 말고 내 앞으로 가져와.”

제 목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상단주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돈을 가져와, 당장!”

“옙!”

블루로즈 상단 소속 상인들이 부랴부랴 움직였다.

무엇을 얼마나 가져와야 할지 모르고 허둥지둥 거리는 모양새였다.

블루로즈 상단주는 애쉬를 노려보며 물었다.

“얼마면 되겠소. 얼마를 주면,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생각이오?”

“5,000루나.”

“…너무 많소.”

“그럼 죽이고 가져가야겠다.”

“…3…. 3,000루나로 봐주시오. 당장 가져올 수 있는 현금은 그게 다 전부요. 마차도 가져갈 생각이잖소….”

“10분 준다.”

강탈에 가까운 계약이 체결되자마자 애쉬가 성검을 거두었다.

상단주는 목덜미에서 흐르는 피를 급히 닦아내며 부하들에게 다가갔다.

용사에게 바칠 공물을 부산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리 파티는 자연스럽게 애쉬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상황 돌아가는 꼴을 보고 뭉친 것이다.

고립된 느낌이라고 할까.

“어쩌려고 일을 이 지경으로….”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고 애쉬를 흘겨봤다.

빈센트 할아범도, 린과 소우타도, 애쉬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애쉬는 싱글벙글 웃음꽃을 피웠다.

“지금 13,000루나 모았으니까, 웬만한 건 다 살 수 있겠네. 흐흐….”

음흉한 시선이 내게 닿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모르는 체 했다.

꺼림칙해서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블루로즈 상단은 엄청난 속도로 값을 준비했다.

뇌물인지 공물인지 참 애매한 장물들을 거의 던지듯이 한 마차에 몰아 실었다.

그러는 중, 루기우스가 다가왔다.

“도대체 어쩔 생각이지, 용사?”

“뭘?”

“가시 까마귀 용병대가 거짓을 말했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지금 ‘왜’ 거짓말을 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은 상황이지. 뭔가 아는 거라도 있나?”

루기우스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사람의 양심이란 게 의외로 섬세해서 이런 상황을 보고도 외면하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다.

악마와 관련된 경우엔 더더욱 그랬다.

애쉬는 루기우스를 보는 척도 안하고 대답했다.

“알고 있으면, 뭐. 알려달라고 하게?”

“부탁이다. 웬만하면 용사를 돕고 싶군.”

“…….”

루기우스의 대답에, 애쉬가 그의 눈을 쳐다봤다.

눈빛 속에서 무언가를 읽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처음으로 지그시 마주했다.

그리고 피식 조소를 흘렸다.

“병신이네.”

“루기우스한테 뭐라고 그랬어? 병신? 이 변태 같은 년이…!”

“변태는 너희 대장이 변태고. 시발, 게이가 말이야?”

끼어드는 베로니카, 무시하는 애쉬.

내 예상과 달리 애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상단주를 대할 때보다 조금 누그러진 상태였다.

“알려달라니까 말해줄게.”

“고맙다.”

“지금부터 우리는 바리아로 갈 생각이야. 이유는 당연히 제물소환 저지 그리고 흑마술사 사냥. 용사니까.”

애쉬는 완벽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흑마술사에 의해 바리아의 사람들이 제물로 쓰이게 될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원작에선 아무도 몰랐다.

흑마술사는 정말 철두철미하게 비밀리에 일을 진행했다.

운이 안 좋아서 지나가던 용사 파티에게 당하고 말았지만.

과정 자체는 원작 전개 중 가장 은밀했다.

그것을 애쉬가 이미 알고 있다.

원작을 읽은 나조차도 근처에 와서야 떠올릴 수 있었는데.

루기우스는 예상외라는 듯 애쉬를 흘겨봤다.

이제까지 지랄 염병을 떨어놓고 용사 행세라도 하려는 것이냐, 라는 뉘앙스를 풀풀 풍겼다.

이해한다.

실제로 보니까 더 가관이었다.

애쉬는 루기우스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았다.

남들이 내리는 평가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

다른 용사들에 비해 확고한 성격.

애쉬의 마이웨이는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루기우스는 잠깐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뒤쪽에 서있던 베로니카가 놀란 눈으로 루기우스를 쳐다본다.

“…나도 따라가도 되겠나?”

“뭐? 대장? 지금 농담이지?”

루기우스의 태도는 확고했다.

“흑마술사 사냥. 혈풍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다. 놓칠 수 없어.”

“그래도 위험하잖아. 이 년은 고작해야 2레벨 용사야. 저 성검을 보고도 따라가겠다는 말이 나와?”

베로니카는 애쉬가 쥐고 있는 성검을 가리켰다.

고 레벨의 성검보다 확실히 투박한 모양새였다.

“따라오든 말든 솔직히 관심 없는데, 되도록 빨리 결정해라. 곧 출발할 거니까.”

애쉬는 블루로즈 상단 측을 흘기며 말했다.

블루로즈 상단이 돈을 바치면 그 즉시 출발하겠다는 의미였다.

잠시 후, 블루로즈 상단주가 다가왔다.

현금이 들어있는 가죽주머니를 내밀며 소리쳤다.

“우, 우리 블루로즈 상단은 그쪽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오. 알겠소!?”

“그래.”

“이 현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 마족이라든가 악마라든가 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처음부터 개입하지 않은 거요.”

“알았다니까?”

가죽주머니 안을 확인하며 애쉬가 대강 대답했다.

블루로즈 상단주는 분을 삼키며 부들부들 떨었지만, 애쉬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무섭다.

원작과 다르게 현시점의 애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래봐야 풋내기 용사다.

하급 마족도 이기기가 힘들 것이다.

바리아에 소환될 존재는 악마.

감당이 안 되는 싸움이었다.

“나만…. 나만 용사를 따라간다. 나머지는 블루로즈 상단을 따라 라베루스로 복귀해.”

이런 불리한 상황에 제 목숨을 걸려고 하는 루기우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루기우스!”

“베로니카, 부대장인 네가 애들을 이끌어. 의뢰는 받지 말고 가진 돈으로 생활하고…. 일주일 동안 휴식해.”

“저 년을 어떻게 믿고 따라가? 그냥 돌아가자니까?”

“아니, 난 돌아가지 않아. 지금 내 직감이 말하고 있어. 이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고.”

루기우스는 애쉬를 또렷하게 쳐다봤다.

그 눈빛에서 풍기는 열기는 분명 성공을 향한 욕망과 맞닿아 있었다.

베로니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죽어도 몰라. 대장 용병대, 내가 꿀꺽 할 거라고.”

“잘못된 선택에 후회는 없다. 결국 내 선택이니까.”

“…진짜….”

루기우스와 얘기하려는 베로니카, 그런 그녀를 불러들이는 상단주의 목소리.

“당장 라베루스로 돌아간다!”

블루로즈 상단주가 방향을 틀었다.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고 위험부담을 회피하는 결정이었다.

‘악마를 만나는 것보다는 낫지. 좋은 판단.’

마차 대열이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마차 한 대만을 놔두고 쏜살같이 도망쳤다.

애쉬의 파티만이 길목에 덩그러니 서있었다.

“우린 바리아로 출발한다.”

“…….”

린과 소우타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동요하는 것이 겉으로 훤히 보였다.

빈센트가 곁에 있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흑마술사, 마족, 악마.

늙은이 하나가 토닥여준다고 해서 위안이 될 단어가 아니었다.

“애미 시발….”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블루로즈 상단이 돌아가는 것을 왜 보고만 있었을까.

용사 애쉬는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 지랄을 하는 걸까.

수많은 의문들이 내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다.

“고운 말 써야지, 강아지?”

애쉬는 내 상념들을 부수며 목줄을 잡아당겼다.

내 눈빛을 빤히 바라보고 히죽 웃었다.

“무서워?”

“…….”

“근데 좀 화가 나네. 나를 못 믿는다는 거잖아. 너도 아까 그 젖만 큰 년이랑 똑같이 생각해? 내가 약해서 흑마술사 못 잡을 거라고?”

“…그건 아닌데….”

애써 대답을 꺼냈다.

진심 속에 말을 숨겨뒀다가는 썩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았다.

애쉬가 내 목줄을 잡아 끌고 마차로 향했다.

“걱정하지 마. 아직 강아지 자지 제대로 따먹지도 못했는데, 죽게 둘 리가 없잖아.”

“……?”

“마왕 죽여 버리기 전에 먼저 죽을 생각도 없고.”

순간 스쳐지나간 살벌한 눈빛에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빈센트! 마차 몰 줄 알지?”

“대충은 몰 수 있네만.”

“바리아로 출발하자. 블루로즈 상단한테서 받아둔 지도 보고 말 몰아.”

빈센트는 마부 자리에.

나머지는 마차 뒤에 올라탔다.

히이이이잉­!

유테론으로 향하던 말들이 바리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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