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죽음을 거부하는 까마귀(8).
* * *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이 쌀쌀한 밤공기를 밀어낸다.
불 앞에 있어야 그나마 따뜻할 수 있으니 불침번 인원들이 모닥불 앞에 모여 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베로니카의 맞은편에 앉았다.
베로니카는 나를 쳐다보며 얄밉게 웃었다.
“볼일은 시원하게 잘 봤어?”
“덕분에요.”
“큭큭.”
끔찍한 경험이었다.
오줌 누고 있는데 위에서 누가 쳐다보고 있는….
내가 조금 더 겁이 많았다면, 귀신이라도 본 줄 알고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베로니카는 그저 신이 난 듯 낄낄 웃었다.
들썩이는 어깨를 따라 XL사이즈의 젖통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 같다.
이런 놀림이라면 매일 받아도 환영이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겁니까? 저 조금 졸린데.”
“용사 때문에 불침번도 안서면서, 뭐가 그렇게 졸린데? 지금까지 실컷 잤잖아.”
억울하고 분하다.
내가 빼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다니.
나는 이런 상황에 최고의 복수를 안다.
상대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을 손에 쥐고 흔들면 된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불침번 면제, 수면권 그 자체가 나의 무기.
“…할 말이 없네요. 자러 가도 될까요?”
“잠깐 기다려보라고. 대화 좀 하자니까?”
베로니카는 계속해서 나를 붙잡았다.
그런 베로니카를 흘기며 물었다.
“언데드 관련해서 얘기 좀 하자고 했죠? 뭣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이 한 말, 약간 꺼림칙한 부분이 있어. 용사에게 직접 말하는 건 조금 그러니까 네가 대신 말을 전해달라고. 그래서 부른 거야.”
“꺼림칙한 부분요?”
키득거리며 웃던 베로니카가 금방 진지해졌다.
사이코 같아서 거부감이 들었지만 지금은 공적인 얘기를 하려고 하니까 조용히 들어주기로 했다.
“제물소환에 관련된 거야. 용사도 뭔가 알고 있는 것 같긴 하더라고.”
“…제물소환 당사자가 살아있는 거요?”
“응. 너도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나보네?”
베로니카는 의외라는 듯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이 말했잖아. 태양신 교단에서 산 기념품…. 그 안에 담긴 신성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그런 뉘앙스로 말하긴 했죠.”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돼.”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원작에서도 신성력을 바쳐 제물소환에서 탈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연급 캐릭터인 성자가 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가벼운 장면이라 보기도 애매했다.
내 표정을 흘긴 베로니카가 설명을 덧붙였다.
“원리는 대충 알아들었어. 제물소환도 결국에는 마술회로를 마법진으로 전환해 발동하는 술식이니까. 완성하는 게 어렵겠지만 좀 더 광범위한 효과를 보자는 뜻에서 흑마술사가 리스크를 지는 거잖아.”
“…….”
“자, 여기서부터 시작이야. 나도 확실하지 않으니 가설부터 세울게. 신성력이 제물소환진을 방해했다고 치자. 신성력 때문에 제물소환이 실패했고 그 제물 당사자인 가시 까마귀 용병대가 반쯤 언데드로서 살아가고 있어. 그런데 조금만 더 나아가면 의문이 생기는 거야.”
나는 여전히 베로니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 주변에 린이나 다른 불침번 사람들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베로니카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한 가지 질문을 내게 던졌다.
“마법진이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그….”
자세히는 모르는데 대강은 기억이 난다.
주인공 용사 루크의 파티에는 당연하게도 마법사가 존재한다.
학대받던 소녀를 구해서 데리고 다니는데 사실은 대마법사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꿈나무였다, 라는 둥의 흔해빠진 전개를 써먹었다.
‘이 애는 사실 루크가 첫 경험이 아니다, 라는 좆같은 시발 NTR 전개에서 작가의 두 번째 부모님이 돌아가셨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학대받던 노예 소녀가 처녀일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고 해도, 그런 개연성까지 챙기기를 원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아무튼 용사의 동료인 마법사도 초기에는 마법진 연성에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때 어떤 현상이 발현했는지….
‘너무 다양한데.’
마법진에 사용된 재료들이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며 사라졌다.
가끔은 타오르고 가끔은 부서지는 둥.
베로니카가 말했다.
“마법진은 일방적인 회로야. 마력이 한 방향으로만 순환해 흐르거든.”
“…마법사나 할 법한 전문적인 내용 말고, 간단하게 말해주면 안 됩니까? 머리가 아픕니다.”
아는 척 하는 베로니카를 향해 눈살을 찡그렸다.
원작을 읽었기 때문에 이미 아는 내용이다.
굳이 듣고 싶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거 기초인데.”
“아, 자러 갑니다.”
“알았어.”
내가 말을 끊어버리자 베로니카는 구시렁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린보다 멍청하니?”
“예?”
“아무것도 아니야.”
내 태도에서 착각을 한 것 같은데 딱히 수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는 시간이 아깝다.
빨리 듣고 자러 가고 싶었다.
“간단하게 설명해줄게. 태양신 십자가, 가시 까마귀들은 그 기념품에 신성력이 있어서 자기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지? 나는 그게 믿기지가 않아.”
“왜요.”
“마법진 연성에 실패하면 사용한 마나가 회로를 역으로 돌기 시작해. 투입한 연료가 역류하니까 회로가 부서지는 거지.”
“간단하게 설명한다면서요.”
“아, 진짜.”
베로니카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제물소환 마법진이 실패했다고 언데드로 살아남아? 그게 말이 안 된다고. 태양신 십자가에 담긴 신성력이 제물소환 마법진을 방해했다면, 자연스럽게 신성력이 마법회로를 역류해. 그건 바꿀 수가 없어.”
“…….”
“가시 까마귀 놈들이 제물소환에서 살아남아 언데드 상태가 되었다, 라는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명제라는 말이야. 신성력에 노출되었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해?”
“오케이, 알아들었습니다.”
베로니카는 나를 멍청하다가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원작에서 나온 설정만으로도 은급 용병 마법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봐도 무방했다.
‘그렇게 된 거로군.’
가시 까마귀 용병대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중요한 것을 숨기고 거짓을 말했다.
적어도 환영받지 못할 일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애쉬가 괜히 적대감을 보인 게 아니었어.’
풋내기 용사치고 애쉬는 날카로운 직감을 가지고 있었다.
베로니카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나를 살펴보는 눈빛에서 미심쩍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알아들은 거 맞아?”
“…마법진을 연성할 때, 실패하면 투입한 재료가 사라져요. 연성하는 중인 마법사의 마력이 어떤 성질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역류반응을 보이죠.”
“…교육을 좀 받았구나? 스승님이 누구야?”
“독학입니다. 질문하지 말고 들으세요.”
“…와, 용사처럼 싸가지가 없네.”
황당해 하는 베로니카의 젖가슴에 시선을 두고 말을 이었다.
“거짓과 진실을 교묘히 섞어서 말해버리면, 진실을 구분 짓는 게 불가능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니까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베로니카가 말해준 정보만으로 생각해보죠.”
“…어디 한 번 말해봐.”
“마법진 연성에 실패하면 마력이 역류한다. 이건 마법사라면 알고 있어야 하는 기초 상식이니까 깊게 짚지 말고요. 다른 현상에 집중하자고요.”
잠깐 착각을 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강 넘긴 게 문제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 라는 마인드가 독이구만.’
위험한 사고였다.
“마기로 실행되는 제물소환의 경우, 실패하는 순간 제물들이 모조리 죽게 됩니다. 아시죠?”
“그런데 살아 있잖아. 이상하다니까?”
“저는 신성력이 마기와 함께 역류해서 가시 까마귀들이 언데드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될 수도 있나? 신성력 때문에 언데드로 살아남게 된 것이 아니라 신성력 덕분에 언데드가 되기 전 정화된다고 보는 게 맞지 않아?”
“제 착각이었던 거죠.”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 벡이 스스로를 제물이라 칭했다.
반쯤 언데드가 된 것은 제물소환의 낙인이 찍혔다는 근거라고 들먹였다.
때문에 흑마술사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계속해서 습격하고 있다며 울분을 토로했다.
벡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놈의 말과 상황을 해석해본다.
‘아니지, 아니야.’
근본적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글로 마주한 소설의 설정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세상에 접목시켜야 했다.
성자는 신성력을 폭발시켜 제물소환을 막았다.
흑마술사가 쏟아 부은 마기보다 더 엄청난 양과 질의 신성력이었다.
그런데 제물로 납치된 이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그 장면에서, 신성력은 희생될 제물들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떠올렸어야 했다.
‘제물소환이 실행되면, 일단 해제가 불가능해.’
뛰어난 검사나 마법사 혹은 용사만이 제물소환을 취소할 수 있다.
마법진을 베거나 지우는 것으로 말이다.
무작정 신성력을 때려 박는 것으로는 제물소환을 취소할 수 없다.
성자가 한 짓은 불씨가 화재로 번지기 전에 짓밟아 끈 것에 가까웠다.
제물이 된 사람들의 죽음은 아랑곳 않고 자신의 신성력을 제물소환 마법진에 흘려 넣어 터트려버리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처음으로 돌아와서.
가시 까마귀 용병대는 제물소환의 제물이 되었다.
그렇다면 결말은 바꿀 수 없다.
‘가시 까마귀 용병대는 죽었어야 했다, 라는 것을 전제로 끌고 간다면….’
그 이전으로 돌아간다.
벡은 거짓과 진실을 교묘히 섞어서 말했다.
차라리 전부 믿지 않겠다.
‘제물소환의 제물로서 쓰였다는 말은 진실인가?’
합리적인 의심이지만 확신할 순 없다.
논리적 추론에 빈 공간이 너무도 많았다.
편의적으로 끼워 맞췄다는 의미였다.
그 틈을 메워줄 수 있는 정보가….
원작에서 일어났던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지도를 살펴가며 읽는 성격은 아니라서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마을 이름을 확인하면 떠올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라베루스에서 유테론으로 가는 길. 지금 이 시점에 무슨 사건이 없었나?”
“뭐라고?”
“혹시, 지도를 좀 볼 수 있을까요?”
“지도는 왜?”
“여기가 어디인지 좀 확인하고 싶어서요.”
베로니카는 무어라 투덜거리면서 지도를 가지고 왔다.
“지금 온갖 폼 다 잡고 있는데, 되도 않은 결론 나오면 죽는다?”
나는 베로니카에게서 지도를 건네받았다.
애쉬가 가지고 있던 대륙지도가 아니라 남부지방 지도였다.
‘……!’
라베루스와 유테론 부근의 마을과 도시들을 확인했다.
꽤 많은 소도시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이름이 낯익었다.
“바리아.”
“…바리아? 바리아는 바로 위쪽에 있는 마을이잖아. 바리아가 왜?”
바리아에서 대규모의 소환의식이 진행된다.
루크와 애쉬가 아카데미에서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이다.
“딱 이맘때 쯤….”
72위계의 악마들 중 하나가 소환되고 근방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지나가던 용사 파티가 투입되어 금방 제압해버리지만, 제물로 희생된 사람이 약 삼백에 달하는 참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루크는 이 소식을 신문으로 접했다.
용사들의 활약을 기록하고 전파하는 ‘용사소식’으로.
베로니카가 답답하다는 듯 묻는다.
“뭔데? 혼자서 뭐라 중얼거리고 있냐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 말해. 말하라고!”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대답할 수 없다는 태도를 유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뜻 보기에 심각한 내 표정 때문에 아무도 나를 잡지 못했다.
단호하게 등을 돌려 용사의 천막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휴우, 탈출 성공.’
베로니카 애미 뒈진 년 때문에 잠도 못자고 이게 뭐야.
나는 천막으로 돌아와 애쉬의 곁에 누웠다.
어느새 굴러온 애쉬가 나를 껴안고 새액새액 귀여운 숨을 내쉬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천막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미친 용사가 가시 까마귀 용병대를 죽였다!”
소름끼치는 소식전파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애쉬가 벡을 향해 성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런 애쉬를 다른 용병들이 막으려고 했지만 이길 순 없었다.
다들 어디 구석에 내팽겨 쳐져서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시발,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문제야.”
“…나를 죽이면 제물소환이 진행될 거다. 네가 내 부하들을 죽이는 바람에, 이제 나 하나 남았다. 네가 나를 죽이면, 제물소환에 의해 나타난 악마를 막아야 해…!”
다급하게 외치는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 벡.
얼굴 살점이 후둑 떨어졌다.
애쉬는 그 모습에 질색하며 성검을 높게 치켜들고 휘둘렀다.
“응, 안 믿어. 병신아. 너 이렇게 만들어준 흑마술사한테 가서 딱 말해. 용사가 너 죽이러 가니까 목 깨끗하게 씻고 기다리라고.”
“아…! 이 미친년이…!”
서걱!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의 대가리가 데구르르 굴러간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거 봐, 시발 개구라라니까?”
애쉬가 성검에 묻은 마기를 털어냈다.
무덤덤하게 등을 돌렸다.
“강아지! 일어났어?”
아까 전에 자신이 벌인 일을 까맣게 잊기라도 한 듯 애쉬는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