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죽음을 거부하는 까마귀(6).
* * *
달과 무수한 별들이 수놓는 밤하늘 아래에서 모닥불이 은은하게 타오른다.
어두컴컴한 공간을 수놓은 횃불들은 야영지 분위기를 포근하게 밝혔다.
우리는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았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쯤 되니까 진짜 캠핑이라도 온 기분인데 분위기는 영 그렇지 않았다.
혈풍에서 몇 명, 가시 까마귀 용병대 전원, 그리고 블루로즈 관계자 몇몇.
애쉬와 나, 빈센트까지.
다들 살벌한 표정으로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을 바라봤다.
언데드와 실전을 치르고 왔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해명을 원하는 듯했다.
린과 소우타는 불침번 때문에 일찍 자야 해서 제외되었다.
크게 상관없는 애들이기도 했고.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벡이라고 한다. 성 씨는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 용사 때문에 금방 죽을 테니 말이야.”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은 자신을 벡, 이라고 소개했다.
“우리 가시 까마귀 용병대는 라베루스에서 호위 임무를 주로 수행하는 용병대다. 유테론으로 가는 길에 대해선 누구보다 빠삭하지.”
“…아니 자잘한 내용은 빼고 말해.”
애쉬는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쓰며 벡의 말을 재촉했다.
“네 면상 상태랑 왜 네 용병대 흉갑에서 마기가 나왔는지에 대해서만 짧고 굵게.”
“…아침에도 느꼈지만, 용사치고는 버릇없고 예의가 없어 용사답지가 않아.”
“지금 당장 죽여줄까?”
“아니. 내가 죽을 시점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결정해주었으면 하는군.”
벡은 애쉬를 흘긴 후, 루기우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와 내 부하들의 상태가 반쯤 언데드로 변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 자연스럽게 흉갑에 대한 것도 이해가 될 거다. 천천히 들어줬으면 좋겠군.”
“10분 준다. 자러가야 하니까 빨리 끝내.”
애쉬의 손에는 성검이 쥐어져 있었다.
아까 전부터 계속 벡을 겨누고 있었다.
성검에 부딪친 달빛이 서슬 퍼렇게 흩날렸다.
막 나가는 애쉬의 행동에 루기우스가 나섰다.
“용사. 벡의 이야기를 다 들어본 다음에 움직여도 늦지 않아. 조금만 참고 기다려보는 게 어떤가?”
“…게이새끼가 뭐라는 거야. 저 놈이 아직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기다려줬어.”
애쉬는 루기우스를 흘기며 으르렁거렸다.
루기우스는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도 참았다.
대신 베로니카가 발작했다.
“저 년이…! 용사면 다야? 다냐고!”
“베로니카, 그만.”
루기우스가 혈풍 용병대의 마법사 베로니카의 발작을 막았다.
두 여자 사이에서 찌그러지는 그의 인내심에 박수를 보낸다.
게이만 아니었다면 엄청 믿음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행동에서 10점, 게이에서 마이너스 1억.’
그 어떤 장점으로도 메울 수 없는 단점이었다.
루기우스가 저렇게 힘내고 있는데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이미 여러 차례 검증된 만능 스킨십을 사용했다.
애쉬의 손을 꼭 잡자, 애쉬가 나를 힐끔 흘겨본다.
“…….”
믿을 수 없지만 애쉬가 얌전해졌다.
손깍지를 끼고 만족한 듯 한쪽 입 꼬리를 씨익 올렸다.
상대가 사라진 베로니카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벡이 말을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제 내가 말해도 되겠나?”
벡은 조용해진 분위기를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때와 같이 호위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지. 유테론에서 라베루스로 이동하는 상단…. 황금사자를 알고 있나?”
“늙은 상단주를 대신해서 아들이 후계자로서 상단을 이끌고 있었는데, 최근에 습격을 받아 죽었다고 들었다. 늙은 몸으로 후계를 만들 수 있을 리도 없으니까, 망했다고 보는 게 맞겠지.”
블루로즈 상단주의 아들이 대답했다.
벡은 그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황금사자 상단은 망했다. 그 때 우리가 그 황금사자의 호위를 맡고 있었지. 라베루스에서 유테론으로 넘어갈 때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문제는 유테론에서 라베루스로 복귀할 때 일어났다.”
벡의 눈빛이 불꽃 어딘가를 향한다.
아른거리는 모닥불의 열기가 그를 과거의 어느 곳으로 안내하는 듯했다.
“용사의 성검이 레벨2인 것을 봤다. 아카데미에서 졸업한지 얼마 안 되는 풋내기 용사겠지?”
“네가 알아서 뭐하게?”
“각 도시를 이어주는 도로의 경우, 포장되어 있지 않아도 웬만해선 마물이 나타나지 않는다. 도시 차원에서 소탕 작전을 자주 펼치기도 하고…. 용사와 모험가들의 왕래가 꾸준하니 개체수가 늘어날 수가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지.”
다 아는 내용이다.
도시와 가까운 도로일수록 더 깔끔하고 안전하다.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이다.
용사가 대륙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해도 마물을 방치해두는 영주는 없다.
나중에 큰일로 번지지 않도록 사병을 모으고 기사를 키워 주기적으로 마물들을 정리하고 다닌다.
자신의 기사단으로 불가능한 마족이나 악마 같은 경우에만 용사의 힘을 빌린다.
그 횟수가 생각보다 빈번해 이 세상은 용사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구조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마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어코 세를 불려 상행을 습격하는 마물이 있기 마련이지. 그 날도 어느 때와 마찬가지였다. 마물들이 황금사자를 습격했고 우리는 놈들을 정리했다. 아주 쉬웠어.”
벡은 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그 날을 회상했다.
“그런데 문제는 전투가 끝난 이후에 터졌다. 흑마술사가 일을 벌인 거지.”
“무슨 일을…?”
루기우스가 심각한 얼굴로 벡에게 물었다.
벡은 끼고 있던 장갑을 살며시 벗으며 답했다.
“제물소환.”
벡이 제 손바닥을 비볐다.
그의 손바닥은 작은 마찰도 버티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것을 땔감이라고 생각한 모닥불이 가루를 먹고 활활 타올랐다.
“제물소환…?”
무지한 블루로즈 관계자들이 되물었다.
혈풍 용병대는 그나마 심각한 얼굴이었지만 무언가를 확실하게 아는 듯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 때, 애쉬가 벌떡 일어났다.
내 손을 놓고 벡의 목에 성검을 갖다 댔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조금 심각한 얘기를 해버리네?”
“그래. 심각한 내용이지.”
벡은 비열하게 웃으면서 성검 앞에 목을 내주었다.
죽일 거면 죽이라는 스탠스를 보였다.
애쉬는 놈의 목을 차마 내려치지 못했다.
제물소환.
흑마술사들이 자주 애용하는 수단으로써 제물을 바쳐 마계의 존재를 소환하는 방법 중 하나다.
벡이 하는 말은 충격적인 사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벡을 비롯한 가시 까마귀 용병대는 이미 제물소환에 제물로 쓰인 상태라는 것.
그 말을 들은 블루로즈 상단주의 아들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멀쩡히 살아…. 아, 실언이군.”
“듣고 보니 그런 의문이 들겠지. 이해한다. 머리가 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다.”
벡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황금사자의 아들이 말도 안 되는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놈이 걱정돼서 그런 것을 쥐어준 것이라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나름 칭찬해주고 싶다. 황금사자 입자에선 썩 이득을 보진 못했어도…. 나는 목숨을 빚졌으니까 놈들에게 고맙다고 해야겠지.”
벡을 비롯한 가시 까마귀 용병대는 제물소환의 제물이 되고도 살아남았다.
이런 케이스를 원작 속에서 한 번 봤었다.
“…성직자가 제물에 포함되면 제물소환이 역으로 뒤집혀….”
“원리는 정답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성직자의 문제가 아니야. 황금사자 아들이 가지고 있던 태양의 십자가…. 교단에서 비싼 돈 주고 산 기념품이 실제로 효과를 보인 거지.”
뛰어난 흑마술사라면 신성력으로 인한 오차를 단숨에 수정할 수 있다.
하지만 애매한 실력의 흑마술사는 즉각적인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다.
간단하게 설명해서, 제물소환의 변수로 흑마술사의 레벨과 성직자의 레벨 각각 두 가지 함숫값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원작에선 이 원리를 이용해서 악마소환을 막아. 제물용 마법진에 갇힌 성자가 제 목숨을 바쳐 신의 화신이 되었었지, 아마…?’
어찌 됐든 가시 까마귀 용병대는 황금사자가 쥐고 있던 변수 덕분에 제물소환에서 벗어났다.
벗어난 줄 알았다.
“…그렇게 살아남았다고 생각했다. 호위 임무를 실패한 상황이라서 용병대의 평가가 떨어지는 것을 피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됐다고 생각했다.”
벡은 제 몸뚱어리를 우리에게 드러내보였다.
벡의 부하들도 그의 움직임에 동참했다.
금이 간 육체를 보여주었다.
“착각이었지. 우린 살아남은 게 아니다. 여전히 제물소환의 제물로 묶여있는 상태다.”
벡의 눈빛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힘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흑마술사 놈은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해오고 있다. 어떻게 알아차리는 것인지…. 제물이 된 사람을 추적할 수 있는 흑마술을 익히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쉬지 않고 언데드들을 보냈다.”
“…….”
“아마도 제물소환을 완성하기 위해서겠지. 제물로서 낙인찍힌 우리를 죽이게 되면 제물소환이 다시금 진행될 테니까.”
“…가시 까마귀 니들이 전부 죽으면 제물소환이 완성된다고?”
애쉬가 믿지 못하겠다는 눈초리로 벡을 흘겼다.
벡은 그런 애쉬의 시선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목소리는 점점 격정적으로 변해갔다.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야 놈이 우리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니까.”
“제물소환은 그 순간 실패하면 끝일 텐데.”
겨우 2레벨 성검을 가진 풋내기 용사 주제에.
애쉬는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원작에서도 제물소환을 반쯤 실패한 경우는 안 나와.’
소환에 성공해서 악마가 지랄하거나 소환에 실패해서 흑마술사 목이 날아가거나.
용사들은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 마주해왔다.
제물소환이 실행됐는데 제물이 살아있는 경우는 없었다.
벡이 애쉬의 말을 외면했다.
“…도시 안에 있어도 놈에게서 도망칠 수가 없다. 짐승이나 벌레를 언데드로 만들어 침실에까지 침투를 하니, 밤에도 편히 잠을 잘 수가 없다.”
벡은 부들부들 떨었다.
공포나 두려움이 아닌 분노를 표출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끝내고자 했다. 내가 죽기 전에, 내 부하들이 죽기 전에, 흑마술사를 먼저 끝장내면 제물소환도 끝나리라 생각해서…! 그 과정 중에 벌써 넷이 죽었다. 총 열 명이었던 인원이 첫 습격 때 일곱으로. 제물소환에서 낙인찍힌 상태로 넷이 더 죽어, 우리 셋만 남게 됐다.”
벡이 성검을 덥석 붙잡았다.
날카로운 칼날을 잡자마자 벡의 손이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벡은 전혀 아랑곳 않고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었다.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애쉬를 노려봤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했는데 용사인 네가 나타났다. 우리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
“…….”
“더 이상 시간을 끌게 된다면 가시 까마귀는 제물로서 쓰이고 사라지겠지. 마족이든 악마든 소환되어 라베루스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그래서?”
“도와다오, 용사. 네 힘으로 흑마술사를 죽여 버리고 세상을 구해줬으면 한다! 아니, 우리를 살려줬으면 좋겠다. 부탁이다…!”
벡이 애쉬에게 무릎을 꿇었다.
성검을 앞에 두고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사내로서 자존심을 내다버리고 삶을 구걸했다.
낮에 싸우고 으르렁거린 사이인데 말이다.
모든 이의 시선이 애쉬에게 집중됐다.
다들 애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용사라면 벡을 도와 흑마술사를 죽이러 갔을 테지만.
눈앞의 용사는 애쉬 그레이필드.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으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 엉덩이 무거운 여자.
‘무거워 보이기는 해.’
실제로 마주했던 뽀얀 엉덩이를 떠올렸다.
커다란 둔부는 실제로도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애국가를 불렀다.
발기하려는 자지를 애써 억눌렀다.
애쉬는 벡에게 성검을 겨눈 채 요구했다.
“…일단 가진 거 다 내놔.”
“……?”
“이거 의뢰하는 거잖아. 네가 가진 거 다 내놓으라고, 언데드새끼야.”
“아, 알겠다.”
벡은 다급하게 가지고 있던 것을 다 털어냈다.
금화가 짤랑거리는 가죽 주머니부터 시작해서 쓸 만한 장비들을 모조리 빼앗았다.
벡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낸 후, 애쉬는 벡의 부하들에게도 마수를 뻗었다.
“니들은 뭐해? 안 내놔?”
“…알겠습니다.”
벡의 부하들은 벡의 눈치를 살피고 가진 물건을 전부 내놓았다.
도적보다 더 도적 같은 사업수완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성검이 아니었으면 용사라고 생각 못했을 거야….”
블루로즈 상단주의 아들이 질색했다.
나도 어느 정도 그의 의견에 동감한다.
“강아지, 이것들 전부 챙겨서 하나하나 감정해보고 분배하자.”
하지만 나에게 주어지는 몫을 생각해볼 때, 마냥 착해빠진 용사보다는 애쉬가 훨씬 나은 것 같았다.
아이 러브 애쉬 그레이필드.
사랑해요, 좆같은 용사.
“내일 아침에 흑마술사 찾으러 간다. 불침번 잘 서고. 내일 다시 말해.”
덜그럭, 덜그럭.
물건들을 질질 끌면서 애쉬의 뒤를 따랐다.
천막으로 향하는 동안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뭐, 어쩌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