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죽음을 거부하는 까마귀(2).
* * *
“유테론에 가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나?”
“…싸가지 없네. 시발새끼가….”
애쉬는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을 흘기며 욕지거릴 중얼거렸다.
초면에 반말이나 찍찍 뱉는 상대가 고깝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거 완전 애쉬 아닌가?’
자아성찰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거나 하진 않았다. 체벌을 자처하진 않았다.
괜히 스스로 체벌당할 구실을 만들어줄 만큼 멍청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대화가 이어지고 있어.’
애쉬가 성검을 안 꺼냈다.
당장 뽑았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말이다.
애쉬는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을 경계하며 노려보기만 할 뿐,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출하거나 하지 않았다.
‘…강한 놈인 건가.’
애쉬도 바보는 아니다.
애쉬라는 캐릭터가 보통 용사와 달리 미친년이기는 하지만, 상대의 수준도 못 알아보고 지랄해댈 정도로 미치진 않았다.
그러고 다니면, 아무리 용사라고 해도 언제 어디서 칼침 맞고 객사하게 될지 모른다.
용사를 도와줄 선인이 많은 만큼 용사를 해칠 만한 악당도 많으니까.
강약약강.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애쉬는 나를 바라본 후 기세를 살짝 죽였다.
아무래도 나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이 짐이라서 사리는 모양새였다.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있어서 여전히 얼굴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랜턴 불빛에 의존해서 눈을 찡그리고 집중해 봐도 턱 끝부분 말고는 볼 수 없었다.
“나는 나보다 약한 자까지 존중해줄 만큼 무른 성격이 아니다. 말로 대화할 수 있을 때, 웬만하면 말로 했으면 좋겠군.”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은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애쉬를 향해 경고했다.
애쉬는 용병대장을 바라보며 얼굴을 와락 구겼다.
놈의 말대로 따라야 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유테론으로 가는 이유가 뭐지?”
“…용사가 대륙을 떠돌아다니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목적지가 어디든 무슨 상관이야.”
“필요 없다. 상관없지. 대륙 곳곳에는 마계 침식의 흔적이 널려 있으니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다니면 된다.”
용사 클래스는 보통 클래스와는 다른 힘을 품고 있다.
캐릭터로 따지면 태생 성능부터가 다르다.
남들 다 흔하디흔한 일반 등급일 때 혼자만 전설 등급인 느낌.
악(?)속성을 지닌 악당, 악인들을 상대할 때 레벨과 스킬에 보정이 들어간다.
마(?)속성을 지닌 마물, 마족, 악마들에게 데미지를 입히고 소멸시킬 수 있다.
최종적으로는 마왕에게 닿을 수 있다, 라는 고유의 특성을 지녔다.
마계 침식에 가장 효과적인 클래스가 용사인 것이다.
때문에 용사들은 웬만한 귀족들보다 더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기사단 하나를 투입하는 것보다 용사 하나가 가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니까.
제발 영지에 머물러 달라고, 제발 왕국을 지켜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귀족이나 왕족들이 많다.
국경을 마주한 옆 왕국 사신과 아카데미에서 방금 막 졸업한 풋내기 용사 중 우선적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에 대한 대답으로 오죽하면 모두가 용사를 선택할 정도일까.
하지만 용사는 어느 한 지역에 정착하지 않는다.
‘룬’을 회수하고 성검을 각성시키기 위해서 모험가들보다 더 바쁘게 모험을 다닌다.
마왕 봉인이라는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용사들이 유유자적 시간이나 축내는 한량 같은 삶을 택할 리 없는 것이다.
‘애쉬는….’
무슨 생각으로 용사로서 여행을 다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 시기상으론 아카데미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대륙 남부까지 내려올 수 있었는지도 이해가 안 된다.
“그런데 내가 묻는 것은 왜 이 시점에 유테론으로 향하는 건가, 그 이유를 묻는 거다.”
“아니, 이유가 없다니까? 그냥 꼴려서 가는 건데 왜 이유를 말하라고 지랄이야.”
“…용사치고는 입이 험하군. 네가 용사가 아니었다면, 나는 네 년의 입을 찢어놨을 거다.”
“뭐래.”
적대적으로 뻗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운 말을 쓰지도 않았다.
애쉬는 평소보다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을 대했다.
“그래도 그 태도를 보아 하니, 아무것도 모른 채 유테론으로 가는 건 확실한 모양이로군. 하긴….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알면 그리 여유부릴 수도 없겠지.”
“…그, 혹시.”
끼어들어도 될까 무진장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힘도 없으면서 괜히 꼽사리 꼈다가 상대의 성질을 긁으면 안 되니까.
애쉬와의 대화를 듣고 정보만 주워 삼키려고 했는데.
‘내가 모르는 내용이야.’
유테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그 불안감이 이 살벌한 대화 속에 끼어들라고 나를 떠밀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유테론에서…?”
내 물음에,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이 고개를 들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머리가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번뜩이는 안광, 시퍼런 눈동자가 나를 주시한다.
몇 초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깔았다.
그 때, 애쉬가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 당겼다.
힘이 되어주겠다는 듯 꽉 잡고 품에 안았다.
살기 가득한 시선이 부딪쳤다.
애쉬는 전혀 쫄지 않고 말했다.
“이 좆같은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지금 뭐하는 짓이야?”
“허허….”
으르렁거리는 애쉬 앞에서,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이 조소 가득 담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오래 살아남기 위해선 주제파악을 잘 해야 한다. 용사라고 다르지 않아. 오히려 용사이기에 더욱 신중해야 하지. 자신이 구해야 할 생명들을 생각해볼 때, 절대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될 목숨이 바로 자신의 것이니까.”
“…….”
“그런데 네 년은 그게 안 되나보군. 수준에 맞지 않게 자존심이 강하고 혓바닥이 거칠어. 적을 만들고 다니는 성격이다. 죽지 않는 방법을 교육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은 여유 가득한 태도를 유지했다.
“마차가 멈추면 상대해주마. 그 알량한 자존심을 굽히기가 힘들면 와라. 힘으로 부러뜨려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기사 까마귀 용병대장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는 듯했다.
‘좆같은 새끼.’
애쉬의 표정이 풀릴 생각을 안했다.
속으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애쉬?’
천하의 애쉬도 손발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두려움인가? 굴욕감인가?
하나 확실한 점은 애쉬가 당장에라도 칼침을 놓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눈빛,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그런 애쉬의 손을 잡았다.
애쉬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내 편을 들어줄 줄이야.’
상대에게 굴복하여 눈을 내리 깔았다.
질문 하나 했다고 지랄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상황 자체가 남자에게 있어 치욕적인 경험이었다.
그래서 위협을 무릅쓰고 도와준 애쉬가 고마웠다.
든든하게 나를 감싸주던 애쉬의 품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정말로 포근했다.
엄마 다리에 매달리는 것밖에 못하던 어린 시절, 그 당시에 안겼던 엄마의 품보다 더 아늑했다.
“흫….”
애쉬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언제 짜증냈냐는 듯 방긋 웃었다.
떨리던 손도 안정을 되찾았다.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내 어깨에 기댔다.
적막으로 차오른 마차 안.
얼마나 더 달렸는지 모르겠다.
잠깐 졸았다가 일어나니까 마차가 서있었다.
─ 휴식! 한 시간 휴식하고 간다!
말들이 아무리 튼튼하다고는 해도 쉬지 않고 무한히 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배를 채우고 잠깐 쉬어주는 시간이 필요했다.
말들이 쉬는 시간을 빌려 용병들도 마차에서 내렸다.
딱딱한 자리에서 불편한 자세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잠깐이라도 몸을 풀어주는 편이 좋았다.
가시 까마귀 용병대장은 대원들을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애쉬는 그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따라가려고 했다.
나는 그런 애쉬를 말렸다.
당장 싸우러 갈 것 같던 애쉬가 기세를 억눌렀다.
“위험하잖아. 싸우지 마.”
“…내가 이겨.”
“그래도.”
괜히 일을 크게 벌였다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블루로즈 상단도 사고 치지마라고 했으니까 그냥 넘어가는 게 맞다.
애쉬는 한숨을 푹 내쉬며 가시 까마귀 용병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이길 수 있기는 한 것인지, 애쉬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얼마나 강한 거야?’
원작 내용대로 흘러갈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주인공과 같은 기수로 아카데미를 졸업한 애쉬의 무력 수준, 나라는 존재를 제 손으로 길들이려고 하는 뒤틀린 성격, 이미 원작과 동떨어져버렸다.
원작을 바라는 게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해도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애쉬의 무력은 내 이해범위를 한참이나 벗어났다.
애쉬가 내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히죽 올라가는 입 꼬리는 만족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우리 강아지 기특하네. 나 다칠까봐 걱정도 해주고.”
“…….”
애쉬는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애쉬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내 자지에 정조대를 채운 미친년이지만, 그럼에도 애쉬를 필요로 하고 있다.
다른 용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애쉬의 곁을 졸졸 따라야 했다.
‘용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자.’
당장 ‘소매치기’와 ‘해제’를 꾸준히 연마해야 한다.
F랭크 수준으론 용사 동료가 될 수 없으니까.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탈주 계획을 애쉬가 알게 되면 그 뒤로 어떻게 행동할지 아무도 모른다.
최대한 애쉬에게 순응하다가 탈주 각이 섰을 때, 그 때 행동으로 옮기면 된다.
애쉬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끼니를 해결했다.
블루로즈 상단에서 식사까지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어서, 용병대끼리 각자 허기를 채워야 했다.
육포와 고열량의 곡물블록.
그나마 먹을 만한 수준이라 꾹 참고 입 안에 우겨넣었다.
한 시간의 휴식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숲속에서 즐길 수 있는 상쾌한 공기를 폐부 깊숙한 곳까지 빨아들이고,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어딜 갔다 왔는지 모를 가시 까마귀 용병대도 복귀했다.
묘하게 썩은 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 출발!
히이이이잉!
마차가 출발했다.
이제 해가 질 때까지 마차 안에서 꼼짝도 못한다.
다음 휴식은 휴식이 아니라 노숙이니까.
블루로즈 상단은 정해둔 야영지에 도착한 뒤에야 마차를 세울 것이다.
꾸벅꾸벅.
불편한 자세로 졸았다.
눈이라도 감지 않으면 시간이 가질 않아 견딜 수가 없었다.
잠기운이 내 눈꺼풀을 적당히 짓누르기 시작한 시점.
“…음…?”
내 바지 허리춤을 들추고 누군가의 손이 훅 비집고 들어왔다.
눈 깜빡할 찰나에 졸음이 달아났다.
내 가랑이로 내려온 손, 손목을 붙잡고 주인을 찾았다.
너무도 당연하게 애쉬였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애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왜, 왜…?”
“심심해서.”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해 변명할 생각도 없어보였다.
내 자지를 장난감이라 생각하는 듯 당당하게 주물럭거렸다.
“하아…. 좋다아….”
애쉬는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달짝지근한 숨을 뱉었다.
발기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내 자지를 애쉬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불편해?”
“불편해…. 아프기도 하고….”
“유테론에 가서 풀어줄게.”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었다.
애원하면 풀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말이다.
하지만 애쉬는 단호했다.
나는 고개를 슬쩍 들어 앞자리 눈치를 살폈다.
가시 까마귀 용병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쥐 죽은 듯이 앉아 있다.
“앞에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상관없어. 괜찮아.”
주변에 누가 있든 애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게는 애쉬를 거부할 힘이 없으니까.
애쉬의 손길이 끝나기를 바라며 농락당했다.
안타깝게도, 마차가 먼저 멈추었다.
─ 용병들! 고블린 떼가 나타났다!
바깥에서 소란이 발생했다.
가시 까마귀 용병대가 고개를 들고 마차 밖으로 나갔다.
우리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고블린 무리가 블루로즈 상단을 덮쳤다.
루기우스의 혈풍 용병대는 이미 고블린들을 썰고 있었다.
“으, 으으…!”
“이쪽으로 모이게. 용사는 알아서 하라고 두고, 우리끼리 뭉쳐야 하네.”
빈센트가 나를 불렀다.
어차피 애쉬를 따라다닐 순 없으니, 나는 린과 소우타가 있는 빈센트 쪽에 붙었다.
“명색이 용사 동료인데…. 진짜 존나 쓸모없네요, 저희.”
“…….”
“할아범. 애쉬가 그날 밤에 무슨 짓을 했는지 얘기 해줘야 하는 거, 잊지 않았죠?”
“…잊지 않았네.”
리오스 남작이 붉은 늑대의 빈센트를 기억하고 있는가.
그것으로 내기를 했었다.
케륵, 케륵!
고블린의 습격은 금방 정리가 되었다.
“용병대장들! 이리로!”
블루로즈 상단주로 보이는 남자가 애쉬를 비롯한 용병대장들을 호출했다.
고블린들의 시체 앞에서 무어라 떠들기 시작했다.
멀어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심각한 분위기인 것 같았다.
빈센트가 고블린 시체를 확인했다.
의구심 가득한 눈빛이 확신으로 바뀐다.
“…언데드. 이 고블린들, 언데드다.”
“언데드요?”
“정확히 말하자면 언데드가 될 뻔했던 고블린이지. 흑마술사의 마력이 끊겨 그대로 죽어버렸을 뿐….”
“흑마술사!”
그 새끼들이 왜 벌써 거론되는 건데?
‘아니 애초에, 이 할아범은 흑마술사의 소행인 걸 어떻게 알아차린 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