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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여)용사가 집착함-14화 (14/109)

〈 14화 〉 달리지 못하는 소년(9).

* * *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는 끼니를 때우고 리오스 남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신속의 룬을 얻었다고 보고도 하고, 겸사겸사 용사를 도와줄 수 있는 지원금도 받아가고. 일석이조지.”

방문의도는 신속의 룬 획득 보고 겸 용사 지원금 징수.

그냥 돈 받으러 간다는 말을 그럴 듯하게 당당히 뱉는 모습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역시 애쉬 그레이필드.

염치도 없고 개념도 없는 좆같은 용사다웠다.

‘하지만 존나 든든하지.’

선하지 않다.

자신의 손해를 참지 못한다.

이기주의는 용사 동료들에게 아주 좋은 성격이었다.

가끔 발작하며 폭력적인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돈을 원하시는 겁니까, 용사님?”

“응.”

리오스 남작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애쉬는 리오스 남작의 표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고갤 끄덕였다.

안 내놓으면 깽판이라도 치겠다는 듯 성검까지 쥔 상태.

말 그대로 협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신속의 룬 덕분에 성검 외형이 바뀌었어. 보이지? 그러니까 빨리 돈 내놔. 마물 잡으러 가야 하니까.”

“하하하….”

마물을 잡으러 가야 해서 급하다고 말하는 용사.

그런 용사에게 명분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리오스 남작이 가지고 있는 선택지는 딱 하나, 용사 애쉬 그레이필드에게 돈을 쥐어준다, 라는 선택지 하나뿐이다.

예상대로 리오스 남작은 패배를 선언했다.

뒷골목 깡패와 다를 바 없는 애쉬의 횡포에 순응하기로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지원금을 드리겠습니다. 대신 용사님께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용사는 거부할 수 없다.

보통의 용사라면, 리오스 남작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여야 정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애쉬는 보통의 용사가 아니다.

“말해봐. 듣고 생각해볼게.”

나를 흘겨본 애쉬가 선심 쓰듯 턱을 까딱거렸다.

선 제시.

리오스 남작은 마인드컨트롤을 극한까지 유지하고 있는 듯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옅게 웃는 인상으로 애쉬에게 의뢰 아닌 의뢰를 말했다.

“제 아버지는 신속의 룬을 통해 제 다리를 고치려고 하셨습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속의 룬에 움직임을 보조하는 힘이 있으리라 생각을 하시더군요.”

“…….”

“지금까지 신속의 룬을 찾아낸 사람이 없어 말하지 못했으나, 드디어 용사님께서 신속의 룬을 발견 해내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셨죠.”

“빨리 말해.”

“예, 알겠습니다. 용사님의 시간은 소중하니까…. 제 부탁은 간단합니다. 그 성검에 흡수된 신속의 룬의 힘으로, 제 다리를 치유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가능하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리오스 남작은 처음으로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연기에 서툰 사람은 아니니까, 이 부탁이 그만큼 간절하다는 방증이리라.

“흐음….”

부탁을 들은 애쉬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들어줄까 말까, 고민하는 듯했다.

‘가능한 건가?’

내 예상과 달리, 애쉬는 리오스 남작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불가능한 일이라면 단호하게 말했을 텐데.

잠깐 고민을 한 애쉬가 리오스 남작에게 대답했다.

“대신 돈 더 내놔.”

애쉬는 자비를 베풀어주는 만큼 대가를 확실하게 받아가려고 했다.

삥 뜯는 솜씨가 아주 남다른 수준이었다.

다른 용사였다면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그냥 해주었을 테지만, 우리의 용사 애쉬에겐 간절한 부탁조차 돈벌이 수단에 불과했다.

리오스 남작은 그런 애쉬를 향해 감사를 표현했다.

“감사합니다. 용사님을 위한 지원금을 당장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리오스 남작의 눈동자에 달리고자 하는 열망이 선명하게 일렁였다.

어릴 적부터 가슴 속에만 품고 살아온 그 소망을 어떻게든 이루고자 했다.

“5,000루나입니다. 당장 가문에서 끌어 쓸 수 있는 여유 자금, 그 전부에 조금 얹었습니다. 그럼 이제….”

리오스 남작이 가죽 주머니를 내밀었다.

1루나 짜리로 준비를 한 건지 5,000루나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역시 아직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귀족치고는 보상이 짠데….’

귀족들의 씀씀이나 행실들을 생각하면, 벌이에 비해 한참 모자란다고 봐야했다.

이 5,000루나가 가지는 의미는 용사에게 하는 성의표현, 딱 거기까지였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장애를 보조해줄 수 있는 힘, 그것에 대한 대가가 5,000루나라는 게 말도 안 된다.

내가 하는 생각을 애쉬도 똑같이 하고 있을 것이다.

“귀족이란 새끼가 겨우 5,000루나? 내가 다른 용사들처럼 병신으로 보여?”

“예?”

애쉬는 참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지원금과 신속의 룬 케어에 대한 대가가 고작 5,000루나라는 것에 분노했다.

“시발, 이건 그냥 지원금으로 가져간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왜, 왜 그러시는 겁니까, 용사님…!”

“용사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호구라고 부르지? 콱 죽여 버리기 전에 안 꺼져?”

“대화를! 대화를 해봅시다. 소통 과정에 약간 차질이 있었나봅니다…!”

애쉬가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자, 리오스 남작이 허리 굽혀 사죄하기 시작했다.

그 태도가 어찌나 공손한지, 무차별적으로 욕을 내뱉던 애쉬도 잠깐 화를 누그러뜨렸다.

이 세계에서 용사는 철저한 갑.

귀족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용사는 착하니까. 다른 이들이 조금씩 이용해 먹을 뿐이지.’

이용해먹는다고는 해도, 용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가깝다.

마물을 퇴치해 달라, 필요한 것을 구해 달라, 사람을 찾아 달라, 등등.

잘 생각해보면, 리오스 남작이 우리의 뒤통수를 쳤다고 보기엔 약간 애매했다.

리오스 남작은 용사 파티를 지원하되, 금액을 최소한으로 지급하려 했을 뿐.

그 과정에서 웃돈을 조금 얹어 자신에게 주어진 장애를 극복하려 한 것이다.

‘상대를 잘못 만난 거야.’

애쉬가 아니었다면, 그의 사연에 공감한 용사가 힘을 발휘해 벌써 리오스 남작이 뛸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애쉬 그레이필드라서, 그의 저택으로 찾아와 성검으로 꼬장을 부리고 신속의 룬으로 삥을 뜯어대는 거다.

“더, 더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신속의 룬이 품은 힘으로 저를, 제 불편한 몸을 낫게 해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대로 가져오라고. 네 몸뚱어리의 값이 딸랑 5,000루나 밖에 안 돼? 그럼 그냥 뛰지 말고 살아, 이 새끼야.”

“가져오겠습니다! 잠깐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리오스 남작이 손가락을 튕겨 집사를 응접실 밖으로 보냈다.

집사에게는 이 저택을 털어서 돈을 마련해 와야 하는 임무가 생겼다.

“후우…. 제가 실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무례했던 저를 용서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돈이나 가져와.”

“알겠습니다. 집사를 보냈으니, 곧 용사님을 위한 지원금을 가지고 올 겁니다.”

리오스 남작은 초조하게 집사를 기다렸다.

우리는 멀뚱멀뚱 소파에 앉아 다과를 축내기 시작했다.

다과 접시가 빌 때마다 메이드들이 알아서 채워주는 것을 확인한 린은 진공청소기 마냥 다과를 집어 처먹었다.

고상하게 맛봐야 할 홍차를 맥주라도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는 그런 린의 손을 붙잡으며 막아 세웠다.

“누가 보면 굶긴 줄 알겠다. 체할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먹어.”

“네헵…!”

린은 입 안에 머금은 다과를 우물우물 거리며 대답했다.

욕심 많은 다람쥐처럼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있었다.

10분 정도가 지나고, 집사가 다시 돌아왔다.

아까보다 큰 주머니에 금화를 잔뜩 담아서 가지고 왔다.

고급스러운 가죽 주머니를 보니, 확실히 많은 금액이 들어있으리라 생각된다.

“가지고 왔습니다.”

리오스 남작은 애쉬에게 주머니를 넘겼다.

망설이지 않았다.

아마 자신의 몫으로 가지고 있던 비자금일 확률이 높았다.

가문 운영에 필요한 돈이었다면, 저렇게까지 단호할 수가 없을 테니까.

애쉬는 주머니를 살짝 열어보았다.

금빛으로 가득한 주머니 속을 확인한 후,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억지로 붙잡아 끌어내렸다.

두 배는 족히 더 받았을 것이다.

“좋아. 이 정도 성의표시는 해줘야지.”

애쉬가 성검을 꺼냈다.

신속의 룬을 통해 2레벨에 도달한 성검은 신속의 룬과 관련된 기술 몇 가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리오스 남작을 뛸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연둣빛 바람이 성검 주위로 휘몰아친다.

응접실 안에서 작은 돌풍이 불어왔다.

산뜻하고 가벼운 공기의 흐름은 리오스 남작에게로 스며들었다.

“장애가 완전히 낫는 게 아니야. 바람의 힘으로 몸을 가볍게 만들고 움직임을 보조해, 뛸 수 있게 해줄 뿐이지.”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성직자들도 해결하지 못한 불편이니까….”

리오스 남작은 신속의 룬에 희망을 걸었다.

그리고 그 희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리오스 남작이 응접실 안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와…! 아…!”

집사와 메이드들이 감동한 눈빛으로 리오스 남작을 바라봤다.

리오스 남작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처럼 복도로 뛰쳐나가버렸다.

덕분에, 손님 신분으로 들른 우리는 응접실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슬슬 출발하자. 자기들끼리 알아서 놀라고 하고.”

애쉬는 시큰둥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래를 끝마치고 필요한 것을 얻게 되었으니, 더 이상 이 저택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히잉….”

린과 소우타가 아쉬운 표정으로 우리를 뒤따랐다.

입가에는 쿠키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저택 밖으로 나왔다.

리오스 남작은 제 체면이 구겨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정원을 달렸다.

그 움직임에 부자연스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개의치 않은 듯했다.

차차 적응하면 될 일이니까.

“용사님! 용사님! 감사합니다!”

리오스 남작이 허리 숙여 감사인사를 전했다.

애쉬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벌써 잊어버린 듯했다.

“돈 필요하면 다시 찾아올게.”

“…예, 예…. 언제든 꼭, 다시 들러주십시오!”

리오스 남작은 잠깐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숨기고 나중을 기약했다.

우리는 그대로 저택에서 나와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가는 길에 처리할 수 있는 의뢰가 있으면 좋고.”

모험가 길드에 용사 신분을 등록하고 의뢰 게시판을 둘러봤다.

딱히 매력적인 의뢰는 발견하지 못한 듯 성과 없이 길드를 벗어났다.

용병 길드에도 들르기로 했다.

“호위 같은 임무는 모험가보다 용병을 고용하는 편이라, 상단 행렬의 마차를 얻어 탈 수 있거든. 책임은 덜 지고 편하게 움직이려면 이런 방법이 최고야.”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는 했었나?”

애쉬는 제 나름대로 팁이랍시고 정보를 알려준 것인데.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이제까지 해온 짓거리들을 생각해볼 때, 내 말은 분명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애쉬에게는 비수처럼 날아와 꽂혀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 말이 꽤 불쾌한 듯 애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내 예상대로 관통당한 것이다.

나는 잽싸게 애쉬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애쉬이잌….”

내가 사과를 끝마치기도 전에, 애쉬의 손이 내 바지 앞섶에 위치해있었다.

정조대가 있음에도 데미지가 있을까 싶었지만….

애쉬는 내 자지가 아닌 불알을 쥐고 힘을 주었다.

“마사지야, 마사지.”

“앜…!”

그렇게 아픈 것은 아니었다.

마사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거리 한복판이고, 옆에는 린과 소우타 같은 꼬맹이들이 있다.

애들에게 못 볼꼴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발기하려는 자지가 정조대에 닿으면서, 참을 만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았다.

“우리 강아지, 말 예쁘게 하자?”

“아, 알았어! 다시는 안 그럴게…!”

거듭된 반성과 사죄 끝에, 내 자손들은 자유를 되찾았다.

애쉬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용병길드로 들어갔다.

‘돈도 넘치는데 굳이 왜….’

마차를 빌려서 움직여도 된다.

리오스 남작이 우리에게 건넨 금화는 무려 1만 루나.

100루나 짜리 금화 백 닢이었다.

아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애쉬는 금화를 아끼려고 했다.

어딘가 따로 쓸 곳이 있다는 듯이.

“예상보다 빨리 돈이 모였어. 신속의 룬으로 이렇게까지 이득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용병 길드에 들어갔다.

용병 길드는 의뢰를 수주하러 온 용병들로 북적거렸다.

애쉬는 눈살을 찡그리며 접수대로 다가갔다.

용사 신분을 무기 삼아 용병대 등록을 날로 먹듯 끝마쳤다.

“여기, 동 급용병패에요.”

길드 직원이 구릿빛 패를 하나 우리에게 건넸다.

동(?)급 용병대 패가 발급되었다.

증명하지 못한 용병대는 그저 동네 양아치에 불과하고, 신뢰도 뭣도 없는 용병대는 한낱 도적떼와 다를 게 없다.

가장 아랫단계인 동 급 용병대란 그런 위치에 있는 집단이다.

‘물론 우리에겐 용사가 있으니까, 보통 동급 용병대와는 급이 다르지.’

실적을 쌓으면 누구보다 빠르게 승급하게 될 것이다.

굳이 승급에 집착할 이유는 없지만, 급을 높여둬서 나쁠 건 없었다.

“블루로즈 상단 호위. 유테론으로 향하는 임무, 이거 가지고 가고 싶은데.”

“블루로즈 상단 호위 의뢰네요. 확인을 좀 해볼게요.”

길드직원은 몇 장의 서류를 들추고 확인한 후, 말을 이었다.

“이게아직 인원이 모자란 의뢰라서요. 용사님께서 원하시면 바로 등록해드릴 수 있어요.”

“그럼 그렇게 해줘.”

애쉬는 의뢰 하나를 받았다.

다음 목적지인 유테론까지 향하는 상단 호위 임무였다.

애쉬가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었다.

“이 광장에 열두 시까지.”

집합장소에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용병 길드에 의뢰를 맡긴 블루로즈 상단과 호위 임무를 받은 다른 용병들이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너는….”

용병들 중 하나가 이쪽을 알아봤다.

목욕탕, 동성애자, 적발의 사내.

“…루기우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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