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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여)용사가 집착함-12화 (12/109)

〈 12화 〉 달리지 못하는 소년(7).

* * *

어두컴컴한 동굴 안, 애쉬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

무언가가 갑자기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에, 용사라는 존재는 그 무엇보다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다.

연둣빛을 품은 룬, 신속의 룬이 빛을 발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온 용사를 환영이라도 하듯 요란하게 빛을 뿜어댔다.

“이게 신속의 룬….”

애쉬는 자연스럽게 성검을 꺼내 쥐었다.

신속의 룬을 향해 다가갔다.

아카데미에서 성검 각성에 대해 배우고 와서 그런가, 꽤 익숙한 듯 보였다.

성검과 룬이 서로 공명하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하나.”

애쉬가 성검으로 신속의 룬을 내리쳤다.

그 단호한 검격에, 알 수 없는 문자가 음각으로 새겨진 룬, 연둣빛을 품은 신속의 룬이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그리고 애쉬의 성검에 흡수되었다.

성검의 각성.

1레벨의 성검은 2레벨의 성검으로 강화되고, 용사는 신속의 룬이 품고 있던 힘을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룬은 용사의 힘을 시험하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힘을 내어줄지 고민한다.

성검이 격하게 진동하며 시험에 동참하고 있었다.

애쉬는 인상을 찌푸리며 성검의 반항을 억눌렀다.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역부족인 듯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윽…. 강아지, 이리로 와.”

애쉬가 나를 향해 말했다.

각성 도중에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애쉬가 시키는 대로 부름에 따라 그녀의 곁에 섰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애쉬는 여유가 남는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후욱…. 스읍. 하아….”

“읍….”

애쉬가 내 품에 얼굴을 처박고 숨을 들이켰다.

내 냄새를 잔뜩 맡은 후에 실력을 발휘했다.

룬과 힘겨루기를 하던 애쉬는 순식간에 신속의 룬을 잠재웠다.

날뛰던 것을 짓누른 것으로도 모자라, 신속의 룬에서 넘어온 힘을 금방 갈무리했다.

‘재능 있는 용사들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그랬는데.’

동료의 필요성.

룬을 받아들이고 있는 용사는 교미하고 있는 동물만큼이나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런 용사를 보호해줄 동료는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인력이다.

그 어려운 일을, 애쉬는 너무도 손쉽게 해내버렸다.

주인공보다 높은 포텐을 지녔다고 설정되어 있긴 하지만.

이 소설을 완독한 독자로서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조금 힘들어 보이긴 했어.’

밀리는 듯 했는데 끝내 해내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이상한 짓을 하긴 했어도, 굳이 지적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으니까.’

애쉬를 안는 것은 포상에 가까웠다.

정조대 때문에 아프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애쉬는 2레벨 성검을 자랑스레 들어보였다.

검신의 빛깔, 폼멜의 모양이 변형되어 있었다.

은은하게 감도는 연둣빛 오오라, 연두색의 보석은 풍 속성의 룬이 스며있음을 증명해주었다.

“돌아갈까?”

“…….”

아무도 관심 없는 룬을 조용히 가지러 온 느낌이라서, 첫 번째 룬 회수가 싱겁게 끝이 났다.

볼 일을 마친 애쉬는 한 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는 듯했다.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도 없고,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애쉬의 뒤를 따랐다.

“바람도 안 불고…. 이쪽이야.”

신속의 룬이 사라지자마자 지랄 맞던 돌풍이 멎었다.

동굴 입구 쪽에 계단통로 비슷한 길도 뚫렸다.

덕분에 쉽게 절벽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용사!”

““용사님!””

올라가자마자 빈센트와 애들을 만났다.

초롱초롱한 눈빛은 애타게 찾던 물건을 발견이라도 한 듯이 반짝반짝 빛났다.

다들 애쉬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애쉬는 그들을 지나치며 명령했다.

“돌아갈 거니까, 짐들 다시 챙겨. 노숙하기 싫으면 빨리빨리.”

노숙은 아무리 익숙해져도 불편하니까, 해 지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여야했다.

라베루스로 돌아가더라도 좁은 방을 여럿이서 써야하지만, 노숙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런 이유에서 각자 걸음을 재촉했다.

저 멀리 라베루스의 외곽 성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해가 저물기 전, 밖이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들 빠르네. 이제까지는 일부러 게으름 피운 건가?”

애쉬가 빈정거리는 말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텐션을 높여서 움직인 탓에, 다들 잔뜩 지친 상태였다.

검문소는 자동으로 프리패스.

일 줄 알았는데.

“설마! 룬을 습득하신 겁니까?!”

선임 병사가 달라진 성검을 알아차렸다.

대단한 눈썰미를 가진 병사였다.

애쉬는 그런 선임 병사를 살벌한 눈으로 흘겼다.

선임 병사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피곤하니까 말 걸지 마.”

“…예, 옙…! 통과!”

우리가 거의 마지막이었다.

라베루스의 거리에는 가로등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발광석을 가공해 만든 마공학의 산물.

때문에 도시는 햇빛이 없어도 나름의 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애쉬는 일행을 제 앞에 불러 모았다.

4열 횡대로 서서 애쉬의 말을 기다렸다.

“개운하게 씻을 사람 씻고, 늦었지만 저녁 먹을 사람 먹고.”

각자 돈을 쥐어주었다.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애쉬는 씀씀이가 헤픈 편에 속했다.

‘애들한테 이렇게까지 쥐어준다고?’

충성을 절로 부르는 금액이었다.

저거 봐라.

애들 눈알이 격하게 흔들리고 있다.

입 꼬리가 노골적으로 씰룩거렸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움직일 거니까. 컨디션 관리는 알아서 해. 못 따라오면 버리고 간다.”

““넵! 용사님!””

“그럼 꺼져.”

꼬맹이들은 힘차게 대답하며 도망쳤다.

호다닥 뛰어가는 뒷모습이 우스웠다.

빈센트는 늙은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지치지도 않는 꼬맹이들을 더 돌보는 건, 아무래도 역부족인 모양이다.

나와 애쉬만 덩그러니 남았다.

애쉬는 목줄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씻고 오자.”

‘도둑의 쉼터’에는 욕실이 없고 좁은 화장실만 있다.

더 비싼 여관이라면 방마다 욕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판타지 시골 생활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다.

그런 세계관에서 씻고 오자는 말은 즉, 목욕탕을 다녀오자는 의미였다.

나는 애쉬를 졸졸 따라갔다.

개운하게 씻자고 하는데,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커다란 대중목욕탕에 도착했다.

어째서 목욕탕이 있는 것인가, 따위의 의문은 나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든다.

소설 속 세계관에 무엇이 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작가가 있다고 설정했으니까, 부족한 문명 속에 피어있는 한 줄기 꽃을 즐기면 된다.

“나중에 봐.”

애쉬가 개목걸이를 풀어주었다.

노예상인의 마차에서 강제로 채워진 이후, 처음으로 맛보는 자유였다.

나는 애쉬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헤어졌다.

최대한 빨리 남탕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가지는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옷을 벗고 완전 나체가 되었다.

아랫도리를 감싸고 있는 묵직한 쇠의 감촉이 느껴졌다.

‘애쉬, 이 개 같은 년….’

개목걸이는 풀어줬으면서 정조대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정조대를 찬 상태로 몸을 씻으라니.

수치 플레이도 이런 수치 플레이가 따로 없다.

나는 가지고 있던 열쇠를 가지고 정조대를 해제했다.

하반신이 풀려났다.

상쾌한 바깥 공기에, 발기할 것만 같았다.

남성 목욕탕이 아니었다면 발기해버렸을지도.

“후우….”

몸을 간단하게 씻고, 마법으로 데워지고 있는 온탕에 몸을 담근다.

쌓인 피로가 확 풀리는 기분.

몸이 나른하게 녹아내린다.

그 때, 한 남자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탕이 제법 넓은데도, 남자의 덩치 때문에 부담스러운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근육질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 몸에 새겨진 흉터를 훈장처럼 여길 것 같았다.

적발을 늘어뜨린 겉모습에서 패기가 느껴졌다.

“…처음 보는데, 라베루스로 넘어온 지 얼마 안 됐나?”

“예? 예. 얼마 안 됐습니다.”

그는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대답을 강요한다.

“그럴 줄 알았네. 라베루스의 목욕탕을 이용하는 건, 대부분 모험가나 용병들이거든. 특히 라베루스는 더 그런 편이지.”

“…….”

나는 그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이 시간대를 선호하는 멤버들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데…. 자네 얼굴은 오늘 처음 봐서 말이야. 궁금해서 물어봤네.”

잠깐 정적이 찾아왔다.

대화가 끊기면서 생긴 정적이라 더 어색했다.

그리고 그는 어색한 분위기를 아예 씹창 내놓았다.

“자네는 박는 것을 좋아하나, 박히는 것을 좋아하나?”

“…예?”

“공격을 즐겨하는 편인가, 수비를 즐겨하는 편인가. 관계를 맺을 때, 어떤 포지션을 좋아하는가 묻고 있네.”

“아니, 그걸 왜…?”

관계경험은 없어도, 공격을 하지 않을까?

남자인데 박힐 수는 없잖아.

‘박히는 것을 좋아하냐고? 그런 걸 좋아하는 새끼가 있어?’

존나 섬뜩했다.

남자끼리 물어볼 이유가 없는, 들어서는 안 될 질문을 받은 것 같다.

외면하고 있던 남자의 시선을 확인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내 아랫도리를 흘겨보고 있었다.

“자네도 우리와 같은 취향일 줄은 몰랐네. 흔하지 않은데, 남탕에서 대놓고 발기하는 남자가 있을 줄이야….”

“이건….”

정조대에서 탈출했다는 해방감을 나도 모르게 즐겨버렸다.

적발의 사내는 감탄했다는 듯 엄지를 척 세워보였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내 이름은 루기우스다. 세간에는 배척받는 동성애자…. 자네와 같은 성벽을 지닌 남자지.”

“…….”

애미, 시발.

말이 안 나온다.

‘당장 도망쳐야 한다.’

루기우스를 무시하고 온탕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질어질한 몸뚱어리를 이끌고 탈의실로 향했다.

“어디 가는 건가!”

뒤에서 루기우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예상인의 목소리보다 더 살벌한 느낌이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옷을 챙겨 입었다.

물기를 대강 닦은 탓에 옷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잠깐. 루기우스 씨가 널 부르잖나.”

“예?”

옷을 급하게 입던 중,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우악스런 힘에 소름이 끼쳤다.

“애미, 시발.”

게이다.

이 시발, 게이라고.

도대체 왜 남탕에서 세우고 있는 건데?

루시우스가 탈의실로 나왔다.

덜렁거리는 아랫도리를 보니, 구토감이 훅 올라왔다.

“도대체 왜 도망가는 거지?”

“맛있어 보이는 남자잖아.”

“루시우스 씨, 이 애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저질러버려도 될까?”

게이들이 나를 둘러싼다.

어매 뒈진 새끼들을 상대로 탈출 할 수 있을까?

불가능.

내 클래스가 근접 전투계열이면 몰라도, 도둑이라서 불가능!

나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지금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용사밖에 없으니까.

“애, 애쉬! 애쉬 그레이필드!”

“뭐, 같이 온 일행이 있나? 우리 말고는 딱히 안 보….”

콰앙­!

탈의실 벽면이 무너져 내렸다.

그곳에는 당당하게 나신을 드러낸 애쉬가 살벌한 눈빛을 하고서 서있었다.

방금 탕에서 뛰쳐나온 듯 물기가 뚝뚝 떨어뜨리면서 이쪽을 노려봤다.

“애쉬…!”

눈에 뵈는 게 없다.

게이들을 피해서, 애쉬의 곁으로 쏜살같이 다가갔다.

여자탈의실이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게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다 일렀다.

“저, 저 새끼들 게이야. 동성애자라고. 나, 나를 강간하려고 둘러싸는데…!”

“강아진.”

“…에…?”

강아지가 아니라 강아진…?

양팔 저울에서 내 죄가 더 무겁다고 심판을 내린 것 같은데.

대체 뭣 때문에…?

애쉬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게이들이 아닌 나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완전자유를 가득 만끽하고 있는 하반신을 겨누고 있었다.

“정조대.”

“게, 게이들이 나를….”

“정조대, 벗었네?”

그게 내 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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